자유게시판 자원봉사 교육을받고
페이지 정보
본문
2010년 4월 강북구 자원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교육을 받고 내가 선택한 부분은 관내 학생들의 선열묘역 청소 자원봉사 때, 학생들에게 선열님들의 광복활동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준열사,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합동 묘, 김병 로 대법관 님 등, 강북구에 잠들어 계시는 애국지사님들께서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하여 재산도 목숨도 다 바치신 덕분으로 오늘 우리는 번영된 자주국가의 시민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해줌으로서 장차 이 나라의 일군이 될 학생들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은 큰 보람이었다.
그날은 이시영 초대 부통령 묘소에서 학생들에게 그분들이 신라, 고려, 조선 3한에 걸쳐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6형제가 가산을 다 처분하여 당시 소 600마리 값을 가지고 만주로 탈출하여 농지를 구입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조선으로부터 탈출해오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킴으로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여 만주벌곳곳에서 일제에 맛서 무장투쟁을 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외를 넘나들며 일본의 고위층과 그에 협조하는 매국노들을 척살하였다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서 조국의 소중함과 국가 위난시 백성 된 도리를 말해주고 내려오던 중, 산소 아래 국립공원 부지 내, 어느 집 지붕을 우연히 바라보니 기와는 다 헐어 사그라지고 한쪽엔 천막이 덮여 있고 대문기둥 한쪽은 3/1이나 허물어지고 대문도 칠이 다 벗겨진 근래에 보기 드문 허술한 집이다.
담장에는 사랑의집 13호라는 표지가 붙어있고 이 집에는 누가 사는데 이렇게 허술 한가? 하는 나의 혼자 말에 함께 있던 봉사자가 이시영부통령님의 며느님이 살고계신다고 한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처음엔 잘못들은 것으로 알았다. 세상이 다 아는 전 재산 다 바치고 6형제 가족의 목숨까지 거의 다 희생하고 광복된 조국의 부통령까지 하신 분의 가족이 이런데서 사신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당장 들어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늦었고 불숙 찾아들어가기도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날은 그냥 집으로 왔다. 며칠 후 방문해본 집안, 천장이 내려앉고 냉골인 마루에는 쥐 잡는 찍찍 이가 있고 방에는 거동을 못하시는 101세의 며느님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61세의 소녀 같은 손녀딸, 건너 방에는 병색이 짙은 남자 노인,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애자이기에 도우미가 온다는 것이다.
어른이시니 우선 큰절로서 예의를 표하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찾아뵙게 되었다며 이것저것 몇 마디 여쭤 본 후 준비해간 금일봉을 드려야 될 텐데 민망해서 드릴 수가 없다. 슬그머니 요 밑에 밀어 넣고 할머니 이제 갈게요. 하고 인사를 드리니 약간의 치매가 계시다는 할머니 “얘” “과자도 하나 안사가지고 그냥 왔니?” 그 말씀에 얼른 봉투를 다시 꺼내어 “할머니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맛있는 것 사 잡수세요.”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뿐 나는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라를 위하여 전 재산 다 바치고 가족의 목숨까지 거의 다 희생당하신 1등 애국 공신의 후손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시다니 이분들이 일제강점기 광복운동에 재산을 바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살 것인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학생들에게 애국하라고 가르친 나의 말들이 무책임한 헛소리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댁의 지붕만이라도 비가 안 새게 기와를 얹어드리리라. 다음날부터 해당동사무소로, 구청으로, 주민생활지원과로, 행복 나눔 공동체로, 청장님께 내가 알고 있는 관계부처는 다 쫓아 다녔다. 해당부처 담당님의 적극적 협조로 드디어 지붕개량 예산이 결정되고 모자라는 부분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봉사와 업체사장님의 성금과 나의 성금으로 지붕에 기와가 올라가고 도배장판에 쥐구멍이 메워지던 날 담당과 직원님들까지 나와 간식을 준비해 오고 공사 후 청소를 하고 말끔해진 실내와 보기에도 산뜻한 기와지붕, 모두가 가슴 뿌듯한 보람이었다.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다.
눈이나 비만 오면 어김없이 오는 문자 메시지, 선생님 덕분에 안심하고 살아요. 고마움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는 그녀의 고운 마음씨, 한 번도 일어서 보지 못하고 앉아서 온 집안을 다니며 102세의 치매 들린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공경하는 28K 소녀 같은 그녀는 초등학교문전에도 못가 본 사람이지만, 역사 예술 시사교양 모르는 것이 없다. 영어로 외국인과 거침없이 대화하고 거기에 에스페란토에(국제어) 그림까지 잘 그리는 그녀는 침술에 음식솜씨 또한 일가견이 있다. 그러한 그녀 “선생님” 전, “이 옷 모두 다 얻어 입은 거애요.” 헌옷도 예쁘게 고쳐 입고 산속의 추위를 견디시라고 솜을 넣고 손수 어머니의 옷을 지어드리는 효녀 그녀는 내마음속 아픈 새끼손가락 같은 애처로운 동생이 되었다.
좋은 경치를 보면 재원 씨는 이런데도 한번 못 와 봤겠구나. 그녀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에 소풍도 시켜주고 싶고 고미술에 조예가 깊은 그녀를 박물관에도 데리고 가고 싶다. 그러나 102살의 애기를 키우는 62살의 소녀 엄마는 애기 옆에서 잠시도 못 떠난다. 잠시 마루에 나가도 칭얼대며 엉덩이를 밀며 따라 나오는 102살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인 것 같다.
구청의 배려로 당장 급한 지붕과 도배장판 쥐구멍은 해결됐지만 30년이 넘는 담장은 바스라질대로 바스라지고 대문기둥은 한쪽이 반이나 무너지고 초인종도 없어 노상 열어놓고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대문, 헛간의 판자도 다 사그라지고 겨우 지붕과 실내만 그런대로 살만하게 고쳐졌지만, 지난 임기에 비해 예산이 많이 줄어든 것을 번연히 알면서 더 이상 구청에 건의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하늘도 움직여주시는지 역사공부과정에서 알게 된 후배를 우연히 그 댁에 데리고 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남편이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헛간을 고쳐주는 것을 보며 저 바람벽도 무너지게 생겼네. 저 담장도 좀 새로 쌓으면 좋겠는데 하고 혼자 말을 했었다. 며칠 후 재원 씨가 전화를 한다. “선생님 이‘슬’ 씨가 지금 담장도 고치고 바람벽도 고치고 있어요.” 그날은 일요일이다. 도우미미도 안 오는 날 거동이 불편한 그녀, 점심이라도 챙겨주려고 부랴사랴 달려갔다. 사그라졌던 담장 금이 좍 가서 금방 자빠질 것 같던 건너 방의 바람벽 샌드위치 판넬의 새 담장으로 모두 날씬해졌다.
처음엔 부자인줄 알았던 그 청년, 그러나 그는 건축 노동자인 것 같다. 재료비가 얼마냐고 캐어물으니 3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따뜻한 마음으로 살자고 모인 조그만 모임의 기금에서 20만원을 주고 10만원은 재원 씨가 내었다. 염치 좋은 나는 저 대문도 고치고 벨도 달았으면, 며칠 후 대문도 벨도 페인트도 다 해결되었다. 34살의 총각 이슬 씨는 도깨비 방망이다. 내가 말만하면 뚝딱 고쳐준다. 두 번의 공사로 산더미처럼 쌓인 폐기물은 구청 청소행정과에 가서 말하니 80포대 정도를 다 치워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하소연하는 청소예산 부족, 이제 더는 일 저지르지 마세요. 그래도 다 치워주었으니 너무 고마운 일이다. 우렁이 각시처럼 슬그머니 와서 힘든 일을 척해놓고 어느 땐 김치다. 간식거리다. 슬그머니 놓고 가는 사람 이슬 씨, 治者들 마음도 이슬 씨 같으면 좋겠다. 지난 추석 때는 북한산관리공단 수유분소에서 너무 높이가 낮아 설거지가 힘들던 싱크대와 찬장과 가스레인지 까지 선물해주셨다.
재원 씨는 자기 집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1년 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바람 숭숭 들어오는 30년이 넘는 세멘불록크 집은 겨울이면 연탄난로에 의지해 냉골인 거실에 앉아서 끼니를 준비하는 62세 소녀, 나는 이 착한 소녀에게 따뜻한 온돌의 거실을 마련해주고 싶다. 그러나 너무 공사비가 많이 들어서 엄두를 낼 수 가 없다. 내가 때때로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의 처사에 분개하면, “우리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셨지, 우리가 했나요.” 하며 이만큼의 배려도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나 3한 갑족의 양반으로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댁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애국의 결과가 이렇게 빈한해진다면 누가 애국을 할 것이며 어떻게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애국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조그만 선행을 내 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애국에는 그에 상응한 보답이 있어야 되고 누구든지 애국자의 후손을 돌보는 것은 백성 된 도리이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은 건국이념인 서로 돕는 홍익인간정신의 실천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고치고 싶어서 모금을 해 볼 요량으로 강북구내의 유명인사들에게 말해보니 모두가 먼데 있는 친척만을 탓할뿐 아무도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않았다.
그러나 역사공부 과정에서 알게된 윤인희씨 그와 알게된 것은 윤영용 작가가 준비한 3.1운동준비 100주년 기념회 발대식이 있었던 2월28일의 봉황각에서다 국학원홈페이지를 보고 발대식에 참석한 그녀가 역사대학에 등록을 하고 내 딸과 동갑나기지만 우린 서로 친해졌다.
걷기운동을 하는 그녀와 둘레길을 걷다가 고기 구어먹으면 좋겠다는 소리에
그댁 앞 마당에서 구워 먹자고 내 꿍꿍이 속은 젊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그 댁에 울타리 역활을 해주고 싶어서 였다. 이 사람들 일해주러올때는 먹을것 까지 다 싸가지고 온다.
마당 한 곁에 따로 방이 한칸 더있는데 20여년전 오갈데 없는 젊은 목수 부부를 살게해 줬더니 이 사람들이 장차 이집을 차지할 흑심을 먹고 오히려 주인을 겁박하고 행패를 부렸다고한다.
이제 목수는 저 지난해에 죽고 아이들은 출가했는데 마누라 혼자 기거하지도않으며 집을 비워 주지도 않고 있다. 법원에 알아보아 강제퇴거 신청을 했더니 이 여자 법원의 등기 물을 받지않다가 일전 최후 통첩을 받고 오히려 맛고소 하겠다고 앙탈을부린다.
장애인 노약자만 산다고 주변의 막된 사람들이 저희끼리 한통속이되어 얏보기에 주위에 힘쓰는 사람들있음을 보여주려고 나는 많은 사람들을 소개한다.
이제는 광복회지회장도 방문하고 이슬씨는 자주가서 힘든일을 해결해주고 나도 한달에 두ㅡ세번을 꼭 방문하여 문제가 발생하면 도움을 준다.
우리 천도교도 이제는 그동안 쌓아온 수련의 힘으로 주변을 향하여 인과덕을 펼칠때도 되었다고생각한다.
지난번 새 교무관장님이 주축이되어 수원교구 최명림동덕의 콩나물 기부 모시는 사람들의 책기부로 벌린 잠실벌의 나눔행사 참여처럼 우리도 사회에 무언가 공덕을 베풀어야 동학의생명력이 힘을얻을것이다.
그날은 이시영 초대 부통령 묘소에서 학생들에게 그분들이 신라, 고려, 조선 3한에 걸쳐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6형제가 가산을 다 처분하여 당시 소 600마리 값을 가지고 만주로 탈출하여 농지를 구입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조선으로부터 탈출해오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킴으로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여 만주벌곳곳에서 일제에 맛서 무장투쟁을 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외를 넘나들며 일본의 고위층과 그에 협조하는 매국노들을 척살하였다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서 조국의 소중함과 국가 위난시 백성 된 도리를 말해주고 내려오던 중, 산소 아래 국립공원 부지 내, 어느 집 지붕을 우연히 바라보니 기와는 다 헐어 사그라지고 한쪽엔 천막이 덮여 있고 대문기둥 한쪽은 3/1이나 허물어지고 대문도 칠이 다 벗겨진 근래에 보기 드문 허술한 집이다.
담장에는 사랑의집 13호라는 표지가 붙어있고 이 집에는 누가 사는데 이렇게 허술 한가? 하는 나의 혼자 말에 함께 있던 봉사자가 이시영부통령님의 며느님이 살고계신다고 한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처음엔 잘못들은 것으로 알았다. 세상이 다 아는 전 재산 다 바치고 6형제 가족의 목숨까지 거의 다 희생하고 광복된 조국의 부통령까지 하신 분의 가족이 이런데서 사신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당장 들어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늦었고 불숙 찾아들어가기도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날은 그냥 집으로 왔다. 며칠 후 방문해본 집안, 천장이 내려앉고 냉골인 마루에는 쥐 잡는 찍찍 이가 있고 방에는 거동을 못하시는 101세의 며느님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61세의 소녀 같은 손녀딸, 건너 방에는 병색이 짙은 남자 노인,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애자이기에 도우미가 온다는 것이다.
어른이시니 우선 큰절로서 예의를 표하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찾아뵙게 되었다며 이것저것 몇 마디 여쭤 본 후 준비해간 금일봉을 드려야 될 텐데 민망해서 드릴 수가 없다. 슬그머니 요 밑에 밀어 넣고 할머니 이제 갈게요. 하고 인사를 드리니 약간의 치매가 계시다는 할머니 “얘” “과자도 하나 안사가지고 그냥 왔니?” 그 말씀에 얼른 봉투를 다시 꺼내어 “할머니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맛있는 것 사 잡수세요.”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뿐 나는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라를 위하여 전 재산 다 바치고 가족의 목숨까지 거의 다 희생당하신 1등 애국 공신의 후손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시다니 이분들이 일제강점기 광복운동에 재산을 바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살 것인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학생들에게 애국하라고 가르친 나의 말들이 무책임한 헛소리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댁의 지붕만이라도 비가 안 새게 기와를 얹어드리리라. 다음날부터 해당동사무소로, 구청으로, 주민생활지원과로, 행복 나눔 공동체로, 청장님께 내가 알고 있는 관계부처는 다 쫓아 다녔다. 해당부처 담당님의 적극적 협조로 드디어 지붕개량 예산이 결정되고 모자라는 부분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봉사와 업체사장님의 성금과 나의 성금으로 지붕에 기와가 올라가고 도배장판에 쥐구멍이 메워지던 날 담당과 직원님들까지 나와 간식을 준비해 오고 공사 후 청소를 하고 말끔해진 실내와 보기에도 산뜻한 기와지붕, 모두가 가슴 뿌듯한 보람이었다.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다.
눈이나 비만 오면 어김없이 오는 문자 메시지, 선생님 덕분에 안심하고 살아요. 고마움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는 그녀의 고운 마음씨, 한 번도 일어서 보지 못하고 앉아서 온 집안을 다니며 102세의 치매 들린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공경하는 28K 소녀 같은 그녀는 초등학교문전에도 못가 본 사람이지만, 역사 예술 시사교양 모르는 것이 없다. 영어로 외국인과 거침없이 대화하고 거기에 에스페란토에(국제어) 그림까지 잘 그리는 그녀는 침술에 음식솜씨 또한 일가견이 있다. 그러한 그녀 “선생님” 전, “이 옷 모두 다 얻어 입은 거애요.” 헌옷도 예쁘게 고쳐 입고 산속의 추위를 견디시라고 솜을 넣고 손수 어머니의 옷을 지어드리는 효녀 그녀는 내마음속 아픈 새끼손가락 같은 애처로운 동생이 되었다.
좋은 경치를 보면 재원 씨는 이런데도 한번 못 와 봤겠구나. 그녀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에 소풍도 시켜주고 싶고 고미술에 조예가 깊은 그녀를 박물관에도 데리고 가고 싶다. 그러나 102살의 애기를 키우는 62살의 소녀 엄마는 애기 옆에서 잠시도 못 떠난다. 잠시 마루에 나가도 칭얼대며 엉덩이를 밀며 따라 나오는 102살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인 것 같다.
구청의 배려로 당장 급한 지붕과 도배장판 쥐구멍은 해결됐지만 30년이 넘는 담장은 바스라질대로 바스라지고 대문기둥은 한쪽이 반이나 무너지고 초인종도 없어 노상 열어놓고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대문, 헛간의 판자도 다 사그라지고 겨우 지붕과 실내만 그런대로 살만하게 고쳐졌지만, 지난 임기에 비해 예산이 많이 줄어든 것을 번연히 알면서 더 이상 구청에 건의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하늘도 움직여주시는지 역사공부과정에서 알게 된 후배를 우연히 그 댁에 데리고 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남편이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헛간을 고쳐주는 것을 보며 저 바람벽도 무너지게 생겼네. 저 담장도 좀 새로 쌓으면 좋겠는데 하고 혼자 말을 했었다. 며칠 후 재원 씨가 전화를 한다. “선생님 이‘슬’ 씨가 지금 담장도 고치고 바람벽도 고치고 있어요.” 그날은 일요일이다. 도우미미도 안 오는 날 거동이 불편한 그녀, 점심이라도 챙겨주려고 부랴사랴 달려갔다. 사그라졌던 담장 금이 좍 가서 금방 자빠질 것 같던 건너 방의 바람벽 샌드위치 판넬의 새 담장으로 모두 날씬해졌다.
처음엔 부자인줄 알았던 그 청년, 그러나 그는 건축 노동자인 것 같다. 재료비가 얼마냐고 캐어물으니 3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따뜻한 마음으로 살자고 모인 조그만 모임의 기금에서 20만원을 주고 10만원은 재원 씨가 내었다. 염치 좋은 나는 저 대문도 고치고 벨도 달았으면, 며칠 후 대문도 벨도 페인트도 다 해결되었다. 34살의 총각 이슬 씨는 도깨비 방망이다. 내가 말만하면 뚝딱 고쳐준다. 두 번의 공사로 산더미처럼 쌓인 폐기물은 구청 청소행정과에 가서 말하니 80포대 정도를 다 치워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하소연하는 청소예산 부족, 이제 더는 일 저지르지 마세요. 그래도 다 치워주었으니 너무 고마운 일이다. 우렁이 각시처럼 슬그머니 와서 힘든 일을 척해놓고 어느 땐 김치다. 간식거리다. 슬그머니 놓고 가는 사람 이슬 씨, 治者들 마음도 이슬 씨 같으면 좋겠다. 지난 추석 때는 북한산관리공단 수유분소에서 너무 높이가 낮아 설거지가 힘들던 싱크대와 찬장과 가스레인지 까지 선물해주셨다.
재원 씨는 자기 집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1년 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바람 숭숭 들어오는 30년이 넘는 세멘불록크 집은 겨울이면 연탄난로에 의지해 냉골인 거실에 앉아서 끼니를 준비하는 62세 소녀, 나는 이 착한 소녀에게 따뜻한 온돌의 거실을 마련해주고 싶다. 그러나 너무 공사비가 많이 들어서 엄두를 낼 수 가 없다. 내가 때때로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의 처사에 분개하면, “우리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셨지, 우리가 했나요.” 하며 이만큼의 배려도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나 3한 갑족의 양반으로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댁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애국의 결과가 이렇게 빈한해진다면 누가 애국을 할 것이며 어떻게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애국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조그만 선행을 내 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애국에는 그에 상응한 보답이 있어야 되고 누구든지 애국자의 후손을 돌보는 것은 백성 된 도리이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은 건국이념인 서로 돕는 홍익인간정신의 실천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고치고 싶어서 모금을 해 볼 요량으로 강북구내의 유명인사들에게 말해보니 모두가 먼데 있는 친척만을 탓할뿐 아무도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않았다.
그러나 역사공부 과정에서 알게된 윤인희씨 그와 알게된 것은 윤영용 작가가 준비한 3.1운동준비 100주년 기념회 발대식이 있었던 2월28일의 봉황각에서다 국학원홈페이지를 보고 발대식에 참석한 그녀가 역사대학에 등록을 하고 내 딸과 동갑나기지만 우린 서로 친해졌다.
걷기운동을 하는 그녀와 둘레길을 걷다가 고기 구어먹으면 좋겠다는 소리에
그댁 앞 마당에서 구워 먹자고 내 꿍꿍이 속은 젊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그 댁에 울타리 역활을 해주고 싶어서 였다. 이 사람들 일해주러올때는 먹을것 까지 다 싸가지고 온다.
마당 한 곁에 따로 방이 한칸 더있는데 20여년전 오갈데 없는 젊은 목수 부부를 살게해 줬더니 이 사람들이 장차 이집을 차지할 흑심을 먹고 오히려 주인을 겁박하고 행패를 부렸다고한다.
이제 목수는 저 지난해에 죽고 아이들은 출가했는데 마누라 혼자 기거하지도않으며 집을 비워 주지도 않고 있다. 법원에 알아보아 강제퇴거 신청을 했더니 이 여자 법원의 등기 물을 받지않다가 일전 최후 통첩을 받고 오히려 맛고소 하겠다고 앙탈을부린다.
장애인 노약자만 산다고 주변의 막된 사람들이 저희끼리 한통속이되어 얏보기에 주위에 힘쓰는 사람들있음을 보여주려고 나는 많은 사람들을 소개한다.
이제는 광복회지회장도 방문하고 이슬씨는 자주가서 힘든일을 해결해주고 나도 한달에 두ㅡ세번을 꼭 방문하여 문제가 발생하면 도움을 준다.
우리 천도교도 이제는 그동안 쌓아온 수련의 힘으로 주변을 향하여 인과덕을 펼칠때도 되었다고생각한다.
지난번 새 교무관장님이 주축이되어 수원교구 최명림동덕의 콩나물 기부 모시는 사람들의 책기부로 벌린 잠실벌의 나눔행사 참여처럼 우리도 사회에 무언가 공덕을 베풀어야 동학의생명력이 힘을얻을것이다.
관련링크
- 이전글궁을상조는 천도교 상례를 도와 드립니다. 11.11.18
- 다음글‘떠나는 정읍에서 돌아오는 정읍으로’의 정책에 일조 11.11.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