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동학의 봄은 오려는가? 기2
페이지 정보
본문
-동학경전인 동경대전,용담유사
수운의 저서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이 두 책자는 수운의 사후에 편집된 것으로 동경대전은 동학의 모든 경전을 아우르는 책이라는 뜻이며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체로 되어 있어 한문을 모르는 일반인, 특히 아녀자와 하층민들이 읽고 이해하도록 씌어진 경전이다.
그 대체적인 근본되는 요지는 외세가 몰려오는 것에 대한 풍전등화의 조선의 앞날에 대해 염려하는 것으로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我國運數 가련하다.’ 용담유사 ’안심가‘에서 암울한 조선을 걱정하고 있다. 또 후천개벽과 시천주, 반제사상도 나타나 있다.
-41세,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 관덕당에서 참형 당하다
1863년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12월 관에 체포된다. 당시 수운 선생의 사상을 불온시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유학만을 절대시하고 다른 사상을 이단시하던 상황에서 민중적인 인기를 얻자 불온시 하던 차에 관군이 용담정으로 몰려가 1864년 음력 3월10일 조정의 명에 의해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수운과 제자 23명을 체포한다. 이때 죽음을 예감한 수운선생은 해월선생에게 멀리 떠나라는 쪽지를 비밀리에 전하고 동학의 못다 이룬 유업을 당부하고 대구 관덕당에서 참형을 당한다.
아아 꽃 한송이/이슬처럼 지네/매운 눈보라속/철이른 꽃 한송이/이슬처럼 지네/ 비바람 눈보라 거듭 지나면/영원한 봄 오리라 말씀하신 분/오만년 후천개벽 때가 찼으니 /이땅이 먼저리라 말씀하신 분/사람이 한울이니 사람 섬기되/한울같이 섬기라 말씀하신 분/수운수운/우주의 꽃 한송이 /지네지네/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음 없는 고향/온 세상 꽃 피어날/ 영원한 봄의 시작/죽음이여/수운의 죽음/아아/ 이슬처럼/철이른 꽃 한송이/눈속에 지네
-김지하의 ‘이 가문 날에 비구름’ 중에서-
● 수운의 위대한 계승자 해월선생의 생애
‘사람이 바로 하늘이요 하늘이 바로 사람이니 / 사람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밖에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민족의 스승 해월 최시형의 말씀이다.
-경주 황오리에서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나시다.
해월선생은 1827년 3월21일 나라가 기울어가던 순조27년 경주 황오리에서 아버지 최종수와 어머니월성 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 두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머슴살이를 했으며 포항 신광에서는 종이공장제지공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자는 경오, 호는 해월이라 했다. 19세때 밀양 손씨와 결혼해 흥해에서 살다가 1861년 동학에 입도하고 수운을 만난 지 2년 만에 동학의 2대교주가 된다. 이때 선생이 35세 되던 해였다. 1863년 해월이라는 도호를 받고 북접주인이 되고 8월14일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는다.
1867년 양천주養天主에 대한 설법을 한다. 이는 우리속에 한울님을 모실뿐 아니라 길러가야 한다는 의미이다.1880년 5월 인제군 갑둔리에서 동경대전을 처음으로 간행하고 1881년 6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해 교의를 체계화한다.
-“저 아이의 나막신 소리가 내 가슴을 때린다”
1889년 금릉군(지금의 김천시) 복호동에서 여성신앙의 생활화를 위해 ‘내수도문’과 ‘내칙’을 반포한다. 내칙과 내수도문은 아녀자들을 위해 쓴 글로써 이는 당시 천대하던 여성들을 개벽과 생명운동의 주역으로 끌어 올려 생명에 대한 깊은 공경이 담겨져 있다. 나아가 “흙 한줌도 물 한 방울도 모두 우리 형제이며 나이며 하늘이다.” 또 “새 소리도 시천주”라 하여 만물존중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아래의 법설은 선생의 만물존중사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생이 어느 날 지나가는 아이의 나막신 끄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저 아이의 나막신 소리가 내 가슴을 때린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흙을 살아있는 한울님을 모신 생명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딱딱한 나막신이 흙을 상하게 하는 것을 가슴 아파 한 것이다.
한편,1892년 공주 장사에 이어 전라도 삼례역에서 대신사 신원운동을 전개하며 1893년 광화문에서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 장내에서 민중대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갑오년 동학혁명을 예비한다.
ⓒ (주)경주신문사
↑↑ 사진 위에서부터 해월선생의 사진:1898년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 처형직전의 사진, 황성공원 내에 있는 해월선생의 동상.
ⓒ (주)경주신문사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 피신처마다 도를 전하다.
1895년 도통을 의암 손병희 에게 전수한다. 1898년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6월2일 한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받는다. 숨가쁘게 살아온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스승의 뜻을 받들어 한평생 포덕에 힘쓰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개벽의 씨앗을 뿌렸다.
해월이라는, 스승 못지 않은 위대한 계승자에 의해 동학은 전국으로 퍼졌고 경북, 강원, 충북일대로 비밀리에 포교를 했으며 체포령을 피해 포교하느라 하루도 쉼 없이 도망 다녀 ‘최보따리’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선생은 피신처마다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며 도를 전했다. 동학의 사상과 운동 그리고 포접 조직은 해월의 38년간의 삶의 역정속에서 구체화 된 것이다.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다.
해월선생은 우리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수배자로 있으면서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널리 실천했으며 근대 최고,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조직적 기반을 닦았다. 이는 3.1운동과 독립운동에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우리민족의 자주정신의 표석이 되었고 억눌린 백성들에게는 평등과 인간존엄의 새 원리를 일깨웠다. 선생은 바로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왜 동학에 열광했나.
-‘아래로부터’의 사상인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동학사상
수운선생이 깨달음을 얻던 1860년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했던 시기며 조선에서는 서학, 즉 천주교가 민중의 의식 세계에 넓게 퍼지던 시기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포위되어 민족은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있었고 자주적인 근대민족국가의 길로 나아가느냐 식민지로 전락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동아시아가 격동에 휩싸이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위기에 직면해 새로운 활로를 타개하려 한 것이 ‘아래로부터’의 사상인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동학사상이었고 이것이 갑오년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다. 동학은 자생적인 민중의 조직이자 변혁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들 호응
동학에서 강조하는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이다)은 사람마다 마음속에 하느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오심즉여심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동학은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즉, 양반도 천민도 없으며 모두 시천주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당시 힘든 삶을 살며 새 세상을 꿈꾸던 민중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는 어린이 운동, 여성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여명을 열었고 동학을 빼고는 한국근대사를 말하기 어렵다.
● 오늘 우리는 왜 다시 동학인가.
박남성(용담정 수도원장)자문위원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다시 동학을 되돌아보면 ‘동학의 봄’은 커녕 오히려 물질을 우리안에 모신 시대 라고 하는 실상이다.
그래서 이런 물질은 이렇게도 ‘개벽’이 되었는데 갈수록 우리의 정신이나 영혼은 개벽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는 시대이다. 생명경시풍조나 물질만능주의, 심각한 빈부의 격차에 비추어보더라도 시천주 사상은 더욱 더 절실하다. 수운선생의 말씀대로 ‘각자위심’各自爲心 즉,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바로 말세다 라고 하셨다. ” 고 했다.
-‘삼경론’三敬論, 인간과 자연도 또한 협조적 통일관계
이의 해답으로써 해월선생의 경우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그의 ‘삼경론’三敬論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경론은 천지인天地人을 잘 모시고 공경하자는 것으로 ‘경천-경인-경물’론이다.
삼경의 내용은 매우 간명하지만 그 의미는 깊다. 공경을 하자는 이유는 모든 존재들이 천주의 표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으로 해월은 하늘을 공경하면서 사람도 공경하고 그리고 또 자연을 공경하라고 한다. 신과 인간은 상호 대립하고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이고 조화적인 관계로 설명되고, 인간과 자연도 또한 협조적 통일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전 생태계가 공생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생명운동의 윤리적 표현인 셈이다.
경천은 생명유리의 가장 큰 덕목으로 오늘날의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생명의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경인敬人은 모든 사람들을 타고난 모습그대로 공경하고 모시며 이 사람이 능동적,자립적, 자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며 그 바탕에 바로 경인이라는 생명윤리가 있는 것이다.
경물敬物은 어떤 물건이라도 정성껏 대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병폐인 ‘쓰고 버리는 시대’가 가져온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이다.
앞에서 언급 한 것처럼 각자위심없이 경물하는 것이 진정한 경물이고 각자위심으로 경물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병폐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학이 낡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인에게 공개, 설명 했을때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뒤쳐지지 않는 사상이다. 그 사상의 성지가 경주이며 중심이 경주이다.
●‘개벽’으로 가는 동학의 관광화
우리는 석굴암 불국사를 왜 가는가? 고대유물로서 미적인 감수성을 만족시키러 가기도 하지만 그것과 연결된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매료되어 가는 것이다.
결국은 깨달음과 연결되듯이 동학도 그러한 맥락에서 훌륭한 사상이다. 불교계나 기독교는 높은 비용을 들여서 그들의 종교 성지는 어디든 다녀온다. 생생한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심을 충족시킨다. 우리는 천도교 신자가 되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동학 본래의 이념자체가 숭고하며 그 본산지가 경주임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경주시도 동학 관련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2007년 경주시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서에 구체적인 사업으로 최제우 생가 및 용담서사를 복원 및 ,동학관련 학술행사 정례화 등을 2009년~2015년까지 총 시.도.국비74억을 예산 신청해 추진하고는 있다.
● 그날, 그 시절만 훌륭했던 사상이 아닌 오늘날에도 조금도 낡지 않은 사상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상 자체가 훌륭하므로 성지사업을 서두르고 활성화하려는 것이다. 어줍잖은 사상을 내걸고 관광활성화를 서투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개벽’으로 가는 관광을 하자는 것이다. 이를 천도교도들만의 문제로 인식하면 안된다.
위대한 사상은 시대와 국경과 인종을 뛰어 넘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동학인 것이다. 이런 정신적 자산이 오늘날에 와서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 정신으로 우리가 사는 경주에 유형의 자산(최제우묘소,용담정성지 등)으로도 남아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동학은 그날, 그 시절만 훌륭했던 사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조금도 낡지 않은 사상으로 건재하며 세계적인 사상이 경주의 것이라고 하면 오히려 경주문화관광에 새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 진정한 ‘동학의 봄’은...
이 기획연재를 계획한 본래의 뜻도 진정한 ‘동학의 봄’을 맞이하는데 작은 발걸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정읍 사람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사모해 어떻게 하든 ‘녹두’라는 단어를 연계시키려고 하는 그것처럼 경주 어느 술집에라도 동학관련 간판이 걸리게 되는 날, 벽에 사진하나라도 걸려있는 그날이 빨리 와야 한다. 즉 생활속에서 자긍심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념적 갈등을 넘어 대안적 사상으로 동학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야 한다.
수운의 저서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이 두 책자는 수운의 사후에 편집된 것으로 동경대전은 동학의 모든 경전을 아우르는 책이라는 뜻이며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체로 되어 있어 한문을 모르는 일반인, 특히 아녀자와 하층민들이 읽고 이해하도록 씌어진 경전이다.
그 대체적인 근본되는 요지는 외세가 몰려오는 것에 대한 풍전등화의 조선의 앞날에 대해 염려하는 것으로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 我國運數 가련하다.’ 용담유사 ’안심가‘에서 암울한 조선을 걱정하고 있다. 또 후천개벽과 시천주, 반제사상도 나타나 있다.
-41세,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 관덕당에서 참형 당하다
1863년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12월 관에 체포된다. 당시 수운 선생의 사상을 불온시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유학만을 절대시하고 다른 사상을 이단시하던 상황에서 민중적인 인기를 얻자 불온시 하던 차에 관군이 용담정으로 몰려가 1864년 음력 3월10일 조정의 명에 의해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수운과 제자 23명을 체포한다. 이때 죽음을 예감한 수운선생은 해월선생에게 멀리 떠나라는 쪽지를 비밀리에 전하고 동학의 못다 이룬 유업을 당부하고 대구 관덕당에서 참형을 당한다.
아아 꽃 한송이/이슬처럼 지네/매운 눈보라속/철이른 꽃 한송이/이슬처럼 지네/ 비바람 눈보라 거듭 지나면/영원한 봄 오리라 말씀하신 분/오만년 후천개벽 때가 찼으니 /이땅이 먼저리라 말씀하신 분/사람이 한울이니 사람 섬기되/한울같이 섬기라 말씀하신 분/수운수운/우주의 꽃 한송이 /지네지네/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음 없는 고향/온 세상 꽃 피어날/ 영원한 봄의 시작/죽음이여/수운의 죽음/아아/ 이슬처럼/철이른 꽃 한송이/눈속에 지네
-김지하의 ‘이 가문 날에 비구름’ 중에서-
● 수운의 위대한 계승자 해월선생의 생애
‘사람이 바로 하늘이요 하늘이 바로 사람이니 / 사람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밖에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민족의 스승 해월 최시형의 말씀이다.
-경주 황오리에서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나시다.
해월선생은 1827년 3월21일 나라가 기울어가던 순조27년 경주 황오리에서 아버지 최종수와 어머니월성 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 두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머슴살이를 했으며 포항 신광에서는 종이공장제지공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자는 경오, 호는 해월이라 했다. 19세때 밀양 손씨와 결혼해 흥해에서 살다가 1861년 동학에 입도하고 수운을 만난 지 2년 만에 동학의 2대교주가 된다. 이때 선생이 35세 되던 해였다. 1863년 해월이라는 도호를 받고 북접주인이 되고 8월14일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는다.
1867년 양천주養天主에 대한 설법을 한다. 이는 우리속에 한울님을 모실뿐 아니라 길러가야 한다는 의미이다.1880년 5월 인제군 갑둔리에서 동경대전을 처음으로 간행하고 1881년 6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해 교의를 체계화한다.
-“저 아이의 나막신 소리가 내 가슴을 때린다”
1889년 금릉군(지금의 김천시) 복호동에서 여성신앙의 생활화를 위해 ‘내수도문’과 ‘내칙’을 반포한다. 내칙과 내수도문은 아녀자들을 위해 쓴 글로써 이는 당시 천대하던 여성들을 개벽과 생명운동의 주역으로 끌어 올려 생명에 대한 깊은 공경이 담겨져 있다. 나아가 “흙 한줌도 물 한 방울도 모두 우리 형제이며 나이며 하늘이다.” 또 “새 소리도 시천주”라 하여 만물존중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아래의 법설은 선생의 만물존중사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생이 어느 날 지나가는 아이의 나막신 끄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저 아이의 나막신 소리가 내 가슴을 때린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흙을 살아있는 한울님을 모신 생명있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딱딱한 나막신이 흙을 상하게 하는 것을 가슴 아파 한 것이다.
한편,1892년 공주 장사에 이어 전라도 삼례역에서 대신사 신원운동을 전개하며 1893년 광화문에서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 장내에서 민중대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갑오년 동학혁명을 예비한다.
ⓒ (주)경주신문사
↑↑ 사진 위에서부터 해월선생의 사진:1898년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 처형직전의 사진, 황성공원 내에 있는 해월선생의 동상.
ⓒ (주)경주신문사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 피신처마다 도를 전하다.
1895년 도통을 의암 손병희 에게 전수한다. 1898년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6월2일 한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받는다. 숨가쁘게 살아온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스승의 뜻을 받들어 한평생 포덕에 힘쓰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개벽의 씨앗을 뿌렸다.
해월이라는, 스승 못지 않은 위대한 계승자에 의해 동학은 전국으로 퍼졌고 경북, 강원, 충북일대로 비밀리에 포교를 했으며 체포령을 피해 포교하느라 하루도 쉼 없이 도망 다녀 ‘최보따리’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선생은 피신처마다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며 도를 전했다. 동학의 사상과 운동 그리고 포접 조직은 해월의 38년간의 삶의 역정속에서 구체화 된 것이다.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다.
해월선생은 우리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수배자로 있으면서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널리 실천했으며 근대 최고,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조직적 기반을 닦았다. 이는 3.1운동과 독립운동에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우리민족의 자주정신의 표석이 되었고 억눌린 백성들에게는 평등과 인간존엄의 새 원리를 일깨웠다. 선생은 바로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왜 동학에 열광했나.
-‘아래로부터’의 사상인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동학사상
수운선생이 깨달음을 얻던 1860년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했던 시기며 조선에서는 서학, 즉 천주교가 민중의 의식 세계에 넓게 퍼지던 시기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포위되어 민족은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있었고 자주적인 근대민족국가의 길로 나아가느냐 식민지로 전락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을 넘보고 있었다. 동아시아가 격동에 휩싸이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런 위기에 직면해 새로운 활로를 타개하려 한 것이 ‘아래로부터’의 사상인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동학사상이었고 이것이 갑오년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진다. 동학은 자생적인 민중의 조직이자 변혁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들 호응
동학에서 강조하는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이다)은 사람마다 마음속에 하느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오심즉여심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동학은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즉, 양반도 천민도 없으며 모두 시천주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당시 힘든 삶을 살며 새 세상을 꿈꾸던 민중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는 어린이 운동, 여성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의 여명을 열었고 동학을 빼고는 한국근대사를 말하기 어렵다.
● 오늘 우리는 왜 다시 동학인가.
박남성(용담정 수도원장)자문위원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다시 동학을 되돌아보면 ‘동학의 봄’은 커녕 오히려 물질을 우리안에 모신 시대 라고 하는 실상이다.
그래서 이런 물질은 이렇게도 ‘개벽’이 되었는데 갈수록 우리의 정신이나 영혼은 개벽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는 시대이다. 생명경시풍조나 물질만능주의, 심각한 빈부의 격차에 비추어보더라도 시천주 사상은 더욱 더 절실하다. 수운선생의 말씀대로 ‘각자위심’各自爲心 즉,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바로 말세다 라고 하셨다. ” 고 했다.
-‘삼경론’三敬論, 인간과 자연도 또한 협조적 통일관계
이의 해답으로써 해월선생의 경우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그의 ‘삼경론’三敬論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경론은 천지인天地人을 잘 모시고 공경하자는 것으로 ‘경천-경인-경물’론이다.
삼경의 내용은 매우 간명하지만 그 의미는 깊다. 공경을 하자는 이유는 모든 존재들이 천주의 표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으로 해월은 하늘을 공경하면서 사람도 공경하고 그리고 또 자연을 공경하라고 한다. 신과 인간은 상호 대립하고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이고 조화적인 관계로 설명되고, 인간과 자연도 또한 협조적 통일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전 생태계가 공생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생명운동의 윤리적 표현인 셈이다.
경천은 생명유리의 가장 큰 덕목으로 오늘날의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생명의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경인敬人은 모든 사람들을 타고난 모습그대로 공경하고 모시며 이 사람이 능동적,자립적, 자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며 그 바탕에 바로 경인이라는 생명윤리가 있는 것이다.
경물敬物은 어떤 물건이라도 정성껏 대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병폐인 ‘쓰고 버리는 시대’가 가져온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이다.
앞에서 언급 한 것처럼 각자위심없이 경물하는 것이 진정한 경물이고 각자위심으로 경물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병폐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학이 낡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인에게 공개, 설명 했을때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뒤쳐지지 않는 사상이다. 그 사상의 성지가 경주이며 중심이 경주이다.
●‘개벽’으로 가는 동학의 관광화
우리는 석굴암 불국사를 왜 가는가? 고대유물로서 미적인 감수성을 만족시키러 가기도 하지만 그것과 연결된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매료되어 가는 것이다.
결국은 깨달음과 연결되듯이 동학도 그러한 맥락에서 훌륭한 사상이다. 불교계나 기독교는 높은 비용을 들여서 그들의 종교 성지는 어디든 다녀온다. 생생한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심을 충족시킨다. 우리는 천도교 신자가 되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동학 본래의 이념자체가 숭고하며 그 본산지가 경주임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경주시도 동학 관련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2007년 경주시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서에 구체적인 사업으로 최제우 생가 및 용담서사를 복원 및 ,동학관련 학술행사 정례화 등을 2009년~2015년까지 총 시.도.국비74억을 예산 신청해 추진하고는 있다.
● 그날, 그 시절만 훌륭했던 사상이 아닌 오늘날에도 조금도 낡지 않은 사상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상 자체가 훌륭하므로 성지사업을 서두르고 활성화하려는 것이다. 어줍잖은 사상을 내걸고 관광활성화를 서투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개벽’으로 가는 관광을 하자는 것이다. 이를 천도교도들만의 문제로 인식하면 안된다.
위대한 사상은 시대와 국경과 인종을 뛰어 넘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동학인 것이다. 이런 정신적 자산이 오늘날에 와서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 정신으로 우리가 사는 경주에 유형의 자산(최제우묘소,용담정성지 등)으로도 남아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동학은 그날, 그 시절만 훌륭했던 사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조금도 낡지 않은 사상으로 건재하며 세계적인 사상이 경주의 것이라고 하면 오히려 경주문화관광에 새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 진정한 ‘동학의 봄’은...
이 기획연재를 계획한 본래의 뜻도 진정한 ‘동학의 봄’을 맞이하는데 작은 발걸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정읍 사람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사모해 어떻게 하든 ‘녹두’라는 단어를 연계시키려고 하는 그것처럼 경주 어느 술집에라도 동학관련 간판이 걸리게 되는 날, 벽에 사진하나라도 걸려있는 그날이 빨리 와야 한다. 즉 생활속에서 자긍심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념적 갈등을 넘어 대안적 사상으로 동학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야 한다.
관련링크
- 이전글수운심법회귀→동학정신계승→천도교단재건 ⑪ 11.11.01
- 다음글정읍은 밟고 있는 땅자체, 길자체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11.11.0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