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기사] 청년, 어둠의 땅에서 빛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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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청년, 어둠의 땅에서 빛을 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05139.html#csidx432880f6dd933029b977e63146e6145)
천도교인들 만주 항일운동 탐방
여행은 쉬고 즐기기 위해 떠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떠나기도 한다. ‘순례’란 자신을 연단시키기 위한 여정이다.
유대인 청년들에겐 사막의 마사다 순례가 필수 코스다. 마사다는 서기 72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맞선 최후의 항전지다. 434미터 사막 요새에서 로마군과 싸우다 ‘노예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자’며 960명 전원이 자결한 곳이다. 그 비극 뒤 유대인들은 2천년간 나라 잃고 세상을 부유했다. 전세계의 유대인 청년들은 그 비극의 땅을 찾아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바로 세운다.
한국인에게 ‘마사다’는 가곡 ‘선구자’와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 ‘광야에서’에 등장하는 만주벌판과 연해주 일대다. 일제강점기 옛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을 찾은 선조들이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친 곳이자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다.
민족종교 천도교인들이 지난달 24~28일 4박5일 동안 만주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탐방단 24명 가운데 단장과 인솔 교사 등을 제외한 16명이 고교생·대학생이었다.
들꽃 꺾어 바치고 독립군가 부르고
탐방단이 처음 찾은 곳은 지린(길림)성의 오지였던 화뎬(화전)시 어느 아파트 앞이었다. 1925년 설립된 독립군 장교 양성 학교 화성의숙이 있던 터다. 화성의숙 초대 숙장은 상하이임시정부의 법무부장을 지낸 천도교인 최동오였다. 최동오는 3·1운동의 지도자인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49일 수도를 시킨 뒤 각기 고향으로 내려보내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한 483인 제자 중 한 명이다. 최동오는 고향 의주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는 곡식 한 톨이 귀하던 화성의숙의 사정을 고려해 10살 된 아들(훗날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은 베이징에 있는 고아원에 맡기고, 독립군 후보생들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탐방단은 이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지로 향했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나중소·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1600명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700명이 일제 5개 사단 2만5천명과 싸워 1200여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둔 전투다. 김좌진, 홍범도를 비롯한 이들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씨가 말라버리다시피 한 민족종교 대종교인들이었다. 중과부적의 열세로 며칠간 잠도 자지 못하고 곡기도 때우지 못한 채 싸워야 했던 100년 전 선조들이 피 흘리던 곳에 온 청년들은 들꽃을 꺾어 작은 마음을 전했다.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지에 가서도 나라를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내던진 옛 청년들의 마음으로 독립군가를 불렀다.
백두산 천지 올라 광활한 벌판 보며
버스로 이동할 때마다 임형진 경희대 교수는 독립군 같은 열정으로 항일운동을 소개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버스에만 오르면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청산리와 봉오동을 지나자 버스에서도 하나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구승모(20·부산 영산대1)씨는 “어린 나이에 어떻게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했고, 박주형(24·경북대2)씨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훈(21·대구대1)씨는 “만약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맴돌았다”고 했다.
이들은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가 공부한 용정중학교와 생가를 찾았다. 불과 20대에 후쿠시마감옥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었던 비슷한 또래의 ‘동주와 몽규’가 청년들의 가슴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시 용정중, 동흥중, 명동학교 등의 졸업생들은 나라를 찾겠다는 큰 꿈을 꾸며 자신을 던졌다.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걷던 청년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란 시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교과서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은 고교생들의 눈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성치호(17·부산 동천고1)군은 “대입과 취업에 대한 중압감에 짓눌리면서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것 같다”고 고개를 떨궜다. 김창훈(17·동천고2)군은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에서 도피해 편하게 살려고만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돌아봤다”고 했고, 도한이(17·고양 서정고2)양은 “독립군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편리하게 사는데도 사소한 것에 짜증을 냈던 내가 창피해졌다”고 했다.
그들은 또 안중근과 신채호와 이회영이 갇힌 다롄 뤼순감옥의 좁고 찬 창살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시실엔 일제가 독립군들을 잡아 산 채로 살껍질을 벗기고 작두로 목을 자른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독립군의 승리는 늘 더 큰 화를 불러왔다. 청산리 전투 참패 이후 독립군을 지원한 한인촌 파괴에 나선 일제가 아이, 여자를 가리지 않고 수만명의 동포를 살육한 경신대참변 이야기를 들으며, 청년들은 진짜 ‘헬조선’에 몸부림치며 전에 없는 성찰을 시작했다. 취업준비생 정경재(19)씨는 “우리가 처한 삶에만 너무 매몰되다 보니 객관화해서 보는 눈을 잃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명진(23·아주대3)씨는 “지금도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청년들이 좌절하고 있지만 그런 좌절 속에서도 불만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헤쳐나가려 일어섰던 항일지사들의 모습이 나를 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우리(21·가톨릭대2)씨는 “투정보다는 행동에 나서고 싶다”고 했고, 도아라(20·인하대2)씨는 “나라를 위해 몸까지는 못 바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조금이나마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 독립군들이 말 달리던 광활한 만주벌판을 내려다보았다. 누렇던 청년들의 얼굴이 천지의 물빛을 담은 듯 푸르러졌다. 허성우(17·서울 중앙고2)군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제일 두려운 것이 실패인데, 독립지사들은 끊임없이 실패하면서도 다시 일어서 싸운 것을 보고 끝까지 해보는 근성을 길러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화뎬·용정·명동촌·다롄(중국)/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05139.html#csidx432880f6dd933029b977e63146e6145)
천도교인들 만주 항일운동 탐방
여행은 쉬고 즐기기 위해 떠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떠나기도 한다. ‘순례’란 자신을 연단시키기 위한 여정이다.
유대인 청년들에겐 사막의 마사다 순례가 필수 코스다. 마사다는 서기 72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맞선 최후의 항전지다. 434미터 사막 요새에서 로마군과 싸우다 ‘노예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자’며 960명 전원이 자결한 곳이다. 그 비극 뒤 유대인들은 2천년간 나라 잃고 세상을 부유했다. 전세계의 유대인 청년들은 그 비극의 땅을 찾아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바로 세운다.
한국인에게 ‘마사다’는 가곡 ‘선구자’와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 ‘광야에서’에 등장하는 만주벌판과 연해주 일대다. 일제강점기 옛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을 찾은 선조들이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친 곳이자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다.
민족종교 천도교인들이 지난달 24~28일 4박5일 동안 만주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탐방단 24명 가운데 단장과 인솔 교사 등을 제외한 16명이 고교생·대학생이었다.
들꽃 꺾어 바치고 독립군가 부르고
탐방단이 처음 찾은 곳은 지린(길림)성의 오지였던 화뎬(화전)시 어느 아파트 앞이었다. 1925년 설립된 독립군 장교 양성 학교 화성의숙이 있던 터다. 화성의숙 초대 숙장은 상하이임시정부의 법무부장을 지낸 천도교인 최동오였다. 최동오는 3·1운동의 지도자인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49일 수도를 시킨 뒤 각기 고향으로 내려보내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한 483인 제자 중 한 명이다. 최동오는 고향 의주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는 곡식 한 톨이 귀하던 화성의숙의 사정을 고려해 10살 된 아들(훗날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은 베이징에 있는 고아원에 맡기고, 독립군 후보생들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탐방단은 이어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지로 향했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나중소·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1600명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700명이 일제 5개 사단 2만5천명과 싸워 1200여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둔 전투다. 김좌진, 홍범도를 비롯한 이들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씨가 말라버리다시피 한 민족종교 대종교인들이었다. 중과부적의 열세로 며칠간 잠도 자지 못하고 곡기도 때우지 못한 채 싸워야 했던 100년 전 선조들이 피 흘리던 곳에 온 청년들은 들꽃을 꺾어 작은 마음을 전했다.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지에 가서도 나라를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내던진 옛 청년들의 마음으로 독립군가를 불렀다.
백두산 천지 올라 광활한 벌판 보며
버스로 이동할 때마다 임형진 경희대 교수는 독립군 같은 열정으로 항일운동을 소개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버스에만 오르면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청산리와 봉오동을 지나자 버스에서도 하나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구승모(20·부산 영산대1)씨는 “어린 나이에 어떻게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설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했고, 박주형(24·경북대2)씨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훈(21·대구대1)씨는 “만약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맴돌았다”고 했다.
이들은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가 공부한 용정중학교와 생가를 찾았다. 불과 20대에 후쿠시마감옥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었던 비슷한 또래의 ‘동주와 몽규’가 청년들의 가슴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시 용정중, 동흥중, 명동학교 등의 졸업생들은 나라를 찾겠다는 큰 꿈을 꾸며 자신을 던졌다.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걷던 청년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란 시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교과서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은 고교생들의 눈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성치호(17·부산 동천고1)군은 “대입과 취업에 대한 중압감에 짓눌리면서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것 같다”고 고개를 떨궜다. 김창훈(17·동천고2)군은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에서 도피해 편하게 살려고만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돌아봤다”고 했고, 도한이(17·고양 서정고2)양은 “독립군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편리하게 사는데도 사소한 것에 짜증을 냈던 내가 창피해졌다”고 했다.
그들은 또 안중근과 신채호와 이회영이 갇힌 다롄 뤼순감옥의 좁고 찬 창살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시실엔 일제가 독립군들을 잡아 산 채로 살껍질을 벗기고 작두로 목을 자른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독립군의 승리는 늘 더 큰 화를 불러왔다. 청산리 전투 참패 이후 독립군을 지원한 한인촌 파괴에 나선 일제가 아이, 여자를 가리지 않고 수만명의 동포를 살육한 경신대참변 이야기를 들으며, 청년들은 진짜 ‘헬조선’에 몸부림치며 전에 없는 성찰을 시작했다. 취업준비생 정경재(19)씨는 “우리가 처한 삶에만 너무 매몰되다 보니 객관화해서 보는 눈을 잃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명진(23·아주대3)씨는 “지금도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청년들이 좌절하고 있지만 그런 좌절 속에서도 불만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헤쳐나가려 일어섰던 항일지사들의 모습이 나를 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우리(21·가톨릭대2)씨는 “투정보다는 행동에 나서고 싶다”고 했고, 도아라(20·인하대2)씨는 “나라를 위해 몸까지는 못 바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조금이나마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 독립군들이 말 달리던 광활한 만주벌판을 내려다보았다. 누렇던 청년들의 얼굴이 천지의 물빛을 담은 듯 푸르러졌다. 허성우(17·서울 중앙고2)군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제일 두려운 것이 실패인데, 독립지사들은 끊임없이 실패하면서도 다시 일어서 싸운 것을 보고 끝까지 해보는 근성을 길러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화뎬·용정·명동촌·다롄(중국)/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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