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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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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2,288회 작성일 17-02-2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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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3)

註 00; 참수형(斬首刑/beheading)과 교수형(絞首刑/hanging) -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참수를 가장 영예로운 처형이라고 생각했다. 집행 전에는 죄인을 기둥에 묶은 후 회초리로 매질을 했다. 로마에서는 초기에는 도끼, 후기에는 칼이 사용되었는데, 칼이 더 명예로운 처형도구로 여겨졌다. 참수는 11세기에 정복왕 월리엄에 의해 노르망디 지방으로부터 영국에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민인 죄인에도 참수가 행해졌다는 초기의 기록이 몇몇 보이지만, 참수는 일반적으로 상류계급의 죄인에게 적용되었다. -중략- 1814년 영국의 국왕은 영장으로 교수형을 범죄자의 처형 방식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1820년까지도 반역자가 교수형에 처해진 후 복면을 한 사람이 시체의 머리를 절단했다. 오늘날 유럽 국가에는 참수형이 거의 없어졌으며, 대부분 사형을 폐지하거나 제한해왔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전히 참수가 시행되고 있다. 참수는 중국의 독군(督軍 war lord), 특히 상하이[上海]의 쑨취안팡[孫傳芳] 장군에 의해 널리 행해졌다.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형제도가 사실상 폐지되기 전까지 형법전에 참수형이 규정되어 있었고, 나치 정권하에서 사형은 광범위한 종류의 사건에 확대 적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참형(斬形) 또는 참수형이라고 하는 전근대시대의 오형(五刑) 가운데 사형(死刑)에 속하는 형벌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형에는 교형(絞刑)과 참형이 있었는데, 참형은 교형보다 더 중한 극형이었다. 교형은 목을 매다는 형벌로 지체(肢體)을 온전히 해둔 반면, 참형은 목을 베는 형벌로 몸과 머리를 둘로 나누어 더 가혹했다. 〈대명률직해〉에 의하면, 속전(贖錢)은 동전 42관(貫)이며, 오승포는 210필로 환산했다. 1894년(고종 31) 칙령으로 참형을 폐지하고, 교형만 시행하도록 했으며 군율(軍律)의 사형은 포살(砲殺)하도록 했다. 1896년(건양 1) 〈형률각례 刑律各例〉에서 사형을 참수라고만 밝혔다가 1900년(광무 4)에 다시 참형을 폐지했다.
교수형(絞首刑)이란, 교수대나 가로보에 매달린 올가미로 사형수의 목을 부러뜨리거나 질식시켜 죽이는 형벌로. 유럽 대륙과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전통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또한 사형수를 낙하문 위에 세우고 그 문을 열어 밧줄이 멈출 때까지 몇 m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법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때 희생자는 갑작스런 충격에 의해 척추경부가 부러지고 순식간에 의식을 잃게 된다. / 브리태니커에서 요약정리.
註 00; 육군감옥서(陸軍監獄署) - 1900년 9월에 설립된 대한제국 때 죄수감금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던 원수부(元帥府) 소속 관서다. 오늘날의 육군교도소로 죄수감금에 관한 업무를 맡았고,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 예속되어 육군법원장이 관할하였다. 1900년 9월에 설치되었으며, 미결감과 기결감의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미결감은 육군법원과 헌병대에서 심문중인 자를 구류하는 기관이었고, 기결감은 형역(形役)에 처한 자를 구금하는 곳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피감자의 등급에 장관·영관·위관·하사관∼판임관·제졸(諸卒)·부녀자 등으로 감방을 구분하였다. 직제는 감옥장(주임) 1인, 감옥간수장(판임) 2인, 감옥주사(판임) 2인, 간수 및 사역(使役) 약간인(등외) 등으로 되어 있었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요약
註 00; 육군법원(陸軍法院) - 1900년 9월 14일에 설치되어 1907년 8월 26일에 폐쇠되었던 육군에 관한 사법 관서이다. 1900년 9월 14일에 ‘육군법원을 설치하는 건’에 관한 조칙을 발표해, 군대의 규율을 바로잡아 군인의 허물을 없애기 위해 원수부(元帥府)로 하여금 육군법원을 설치해 군인심판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 해 9월 18일 육군법원관제·육군감옥관관제, 1901년 2월 12일 육군법원처무규칙·육군감옥규칙·육군치죄규정, 1901년 3월 9일 육군치죄세칙·육군법원 송무 규정 등을 제정, 공포하여 육군법원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육군법원은 원수부 검사국 총장 관할 하에 육군군인의 민사·형사를 심판하고 감옥을 관장하며 원장 1인, 이사 3인, 주사 5인을 두었으며, 특지(特旨)로 하부(下附)된 죄인을 심판하며 법원 안에 군법회의를 설치해 군인의 유형·역형(役刑) 이상의 죄를 심판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육군법원은 지방군대의 심판안건, 군인으로서 외국인으로부터 피소된 형사사건, 투항포로의 범죄, 한성부내 군대의 군인간의 소송을 관장하며, 육군법원장은 군인의 민사사건과 유형·역형 15년 이하의 죄를 직접 관할하였다.
군법회의는 판사장·판사·육군법원장·이사·주사로 구성하며, 판사장과 판사는 영관급과 장관급으로 임명하였다. 지방의 각 군대의 심판사건은 육군법원에 상소할 수 있고, 육군법원장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원수부 검사국 총장에게 상소할 수 있으나, 군법회의를 거쳐 판결된 것은 상소할 수 없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요약정리.
註 00; 감옥서(監獄署/1894년에 설립- 1907년 12월에 폐지) -1894년부터 1907년까지 감옥을 관장하던 관서로. 1894년 갑오경장 때 좌우포청을 합쳐 경무청(警務廳)을 설립하여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소속시키고 경무사(警務使)로 하여금 감옥 사무를 관장하게 하는 동시에 종래의 전옥서(典獄署)를 감옥서로 개칭하고 <감옥규칙>을 새로이 제정하였다.
1898년 1월<감옥세칙>을 제정하고, 1900년에는 경무청을 경부(警部)로 독립시키고, 감옥서장으로 하여금 내무대신의 명을 직접 받아 한성감옥을 관장하게 하고 간수장과 주사를 두었다. 1901년 경무청 제도로 복귀시키고 감옥서 의사 2인을 더 두었다. 대원군시대에 천주교도를 탄압한 결과 죄수가 급증하여 새로 생긴 서소문옥(西小門獄) 등이 중앙의 감옥이었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요약
註 00; 한성감옥(漢城監獄) - 한성감옥은 1898년 초에 세워져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서울에 있던 감옥으로, 한일합방 이전 1908년에 한성감옥(漢城監獄)은, 서대문 감옥이 경성감옥(京城監獄)이 되어 없어지고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감옥으로 운영되었다. 경성감옥은 1908년부터 1912년 사이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감옥인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1912년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으며,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부터 1987년 옥사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그 후 1992년 공원으로 개장했다. 그러나 1912년부터 1923년 사이에는 서울 마포구에 있던 감옥인 마포형무소를 경성감옥이라 하였다./ 브리태니커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종합정리함.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요약
註 00; 한성감옥(漢城監獄)과 경성감옥(京城監獄) -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일제 식민지배의 행정 중심지로서 경성부로 불리게 되었고,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해월신사께서 환원하신 것은 한일합방이전이므로 경성감옥이 아니고 한성감옥(漢城監獄)이라고 기술해야 하며, 해월은 서소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참형 당일 유군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종로 3가 사거리에서 돈화문 방향으로 오른 편에 있었던 영화관인 단성사(團成社)에서 돈화문 쪽으로 바로 옆에 있는 소방서 자리가 육군법원(1897년 9월에 설립)으로 이곳에서 해월은 좌도난정률에 의해 1898년 6월 2일(양력 7월 21일)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고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에 되어 있지만,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육군감옥서(陸軍監獄署), 감옥서(監獄署), 한성감옥(漢城監獄) 등의 기술에 의하면, 서소문 감옥은 서소문옥으로, 육군법원은 육군감옥서로, 참수형은 교형으로 수정하여야 한다.
註 00; 서대문 독립공원 - 서대문 독립공원(西大門獨立公園) 또는 독립공원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공원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지내던 감옥과 그들의 여러 모습을 새긴 조각 등을 갖추고 있으며,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애국인사와 항일투사들이 체포, 투옥되어 가장 많은 곤욕을 치른 곳이다.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에는 서대문 형무소로, 1967년 7월에는 서울 구치소로 여러 번 개칭되었다가 1987년 11월 15일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함에 따라 서울시가 1988년 옥사·담장·망루 등을 대거 철거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하였으며, 1992년 광복절 제47주년에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장소라는 배경 이외에도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이웃하여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다. 현재 서대문 독립공원입구의 노후불량주택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축으로 한 독립광장 조성 등 독립운동을 비롯한 근대사를 상징하는 민족의 성지로 재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며 2009년 8월에 준공 할 예정이다.
서대문 독립공원은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한 뒤 1992년 공원으로 개장했으나, 현재 조성한 지 15년이 지나, 전체적으로 시설물이 노후(老朽) 되어 이용객에게 불편을 주어왔으며, 연못이나 수목배치가 일본식으로 되어 있고 외래수종이 식재되어 있어 공원 본래의 역사적 의미가 퇴색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서대문 독립공원이 2008년 현상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품을 바탕으로 독립문 주변 3천 827㎡의 노후건물 밀집지역을 포함하는 1만㎡ 크기의 광장(독립마당)과 노후공원시설이 새롭게 조성된다. 또한, 일본식 연못은 우리전통조경양식인 방지(네모난 형태의 연못)로 조성되고 외래수종은 소나무 등 한국 전통수종으로 바뀌게 된다. 광장으로 둘러싸인 독립문은 누구나 쉽게 접근해서 바라볼 수 있으며, 곳곳에 산재한 계단을 없애서 누구나 편리하게 공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 위키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재정리.
註 00; 도산검수(刀山劍水) - 칼을 심어 놓은 것 같은 위험한 산수(山水)라는 뜻으로, 몹시 험악하고 위험한 지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가혹한 형벌 또는 관병(官兵)에 쫓기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이 살아가는 고단한 삶을 비유함. / 국어사전과 관련자료 종합정리.
오늘 여기에 「하날님 말씀」을 크게 떳떳이 밝힐 수 있으니 하날님께서 뜻을 둔 바이오 循環之理의 回復함이 아니라고 어찌 말 할 수 있으리오.
책의 크기는 길이 27cm 넓이 18cm와 용담유사는 길이 31cm 넓이 20cm이다. 影印本은 製本의 便宜上 약간 縮刷하였으나 眞本의 참모습을 그대로 보고 이 나라의 지난 날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元來 東經大全은 江原道 束草市에 사는 天道敎人 文龍翼氏가 東學道人인 先親께서 물려 주시어서 所藏하고 있다가 1972年 天道敎中央總部에 寄贈하였으며 용담유사는 全北 扶安에 사는 天道敎人 金英黙氏가 海月 崔時亨 道主의 側近에서 隨行하던 東學道人인 柳 成氏로부터 물러 받아서 所藏하고 있다가 1977年 天道敎中央總部에 寄贈하였다.
水雲 崔濟愚 先生님(1824-1863)이 東學을 創見한 庚申年(1860) 四月 五日부터 110餘年이 지나서 우리나라의 東쪽과 西쪽에서 發掘되어 두 回甲을 맞이하는 121年만인 庚申年 오늘에 이르러 거룩한 빛을 드러내었다. 이 東學의 眞本은 현재 天道敎中央總部에서 所藏하고 있다. 하루 속히 國寶로 指定되어 永世無窮토록 우리의 후세에 傳하여야 할 것이다.
東經大全 寫本은 行數와 字數를 眞本과 똑같이 現代活字로 옮기고 음을 달아서 읽을 수 있는 便宜를 圖謀하였을 뿐 띄어 씀과 吐는 一切 달지 아니하여 새로운 正解가 要求되는 國民的 要請에 副應하여야 한다는 큰 使命感을 意識하여 그 기틀을 마련하였다. 용담유사도 眞本의 行數와 句節은 眞本의 表記를 그대로 옮겼으며 現代語文法에 맞추어서 表記하였으며 淺學의 탓으로 할 수 없는 句節은 眞本의 表記를 그대로 옮겼으며 別段에 漢文熟語를 넣어서 原文을 尊重하였으며 漢文熟語의 뜻이 原文의 뜻과 맞는 것을 찾아서 記入한다고 많은 애를 쓰기는 하였으나 미치지 못한 句節이 있지 아니할가 하여 惠諒하여 주기 바라며 學究하시는 분의 도움이 더하여지기를 바란다.
도수사 말씀에「모몰염치 장난하니 이는 역시 난도자요 사장못한 차제도법 제혼자 알았으니 이는 역시 난법자라 난법난도 하는 사람 날볼낯이 무엇인고 이같이 아니말면 제신수 가련하고 이내도 더럽히니 주소간하는 걱정 이밖에 다시없다 작심으로 불변하면 내성군자 아닐런가 귀귀자자 살펴내어 정심수도 하여 두면 춘삼월 호시절에 또 다시 만나볼까」라고 하신 말씀에 두려움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하날님 말씀이 漢文體 東經大全과 한글歌辭體 용담유사로 이루어 놓으신 뜻도 깊이 새기어야 할 줄 믿는다.
跋文에 밝혀져 있는 바, 그 넓고 높은 하날님의 큰 뜻이 木活字本으로 알알이 이루어졌으면서도 우리의 눈 앞에는 더 없이 귀한 보배로 한帙만 전하여졌으니 이 東學의 眞本은 近世百年史를 살아온 우리 겨레의 눈물과 先烈이 흘린 피가 웅어리졌다가 사그라지면서 남겨지지 아니할 수 없는 앙금이라고 하면 그 누가 나무랄 수 있으며 탓할 수 있으리오 春三月 好時節에 하날님을 다시 만남이니 하날님 고맙습니다.
唯一한 東學의 眞本인 癸未版 慶州本 東經大全과 癸巳刊 용담유사를 선듯 내어 주시어서 影印하여 준 天道敎中央總部 吳益濟 宗務院長과 書誌學的 鑑定을 하여준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典硏究室長 鄭亨愚 敎授와 出版技術上의 諸難事를 積極的으로 解決하여 준 印刷界雜誌社의 李裕集 編輯局長과 原稿를 整理하고 細密하게 校正을 보아 준 李世權 同德의 아낌없는 도움을 받아서 하날님 말씀이 올바르게 傳하여지고 잘 베풀어지게 하기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여 주어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組版 印刷를 하여 준 新興印刷株式會社와 寫眞製版을 하여 준 文善社 여러분이 勞苦를 致賀합니다.
布德121年(1980年) 庚申 仲夏 서울 三成洞 공부방에서
橿菴 金 京 昌
機菴 韓 佶 鎬 같이 삼가 엮어 씀.
金京昌은 布德124(1983)年 四月 二日에 「註釋 典籍東學文化財」/
東經大全 文化財登錄나-1-20098號
용담유사 文化財登錄나-1-20099號라는 교서를 正民社에서 출간하였다 이 교서는 총 228페이지의 4X6판의 동경대정과 용담유사의 해설서이다. 이 책의 원문은 布德121年(1980年) 庚申 仲夏에 간행한 「하날님 말씀」의 實寫本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단어 해석과 전문을 편별로 나누어 직역에 가까운 해석을 하고 있다. 이 책은 布德143(2002/初版이 1986년에 간행되었으나 2002년 당시 品切이 되어 복간됨)年 四月七日에 간행한 李世權의 총 458페이지의 「東經大全/ 菊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註釋 典籍東學文化財」보다 단어와 숙어의 해석이 만하졌을 뿐이다. 李世權의 「東經大全」의 체제는 김경창이 布德121年(1980年) 庚申 仲夏에 간행한 「하날님 말씀」의 복사본이라 할 수 있다. 영인본과 실사본이 바뀌어 있을 뿐이다. 총 255페이지(PP.302-458)의 영인본이 뒤로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서문과 발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序文
우리 祖國의 精神文化는 뿌리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아서 무한한 持久力과 무궁한 持續性을 지니고 있다는 事實을 오늘날 東學의 中興으로써 立證할 것이다.
祖國의 옛 祖上들은 文字 以前의 言語生活時代부터 「」님을 地上最高의 存在로서 組織하고 敬拜하기 시작하여 漢文의 專用時代까지 계속 경배하면서 口碑로 지켜왔다.
이와 같이 귀중한 神學的「」님의 固有名詞가 漢文圈에서없어지지 않고 口碑音 그대로 文獻的으로 보전된 것은 世宗大王께서 訓民正音을 창제하고 서기 1447年에 龍飛御天歌가를 지어 간행한 功績때문이었다.
註 00 ; 「하날님」과 「」님 - 김경창은 布德121年(1980年) 庚申 仲夏에 간행한 「하날님 말씀」에서는 천도교의 신앙대상인 한울님을「하날님」라 하고, 이글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님이라 표기하고 있다. 일부는 하날님으로 쓰기도 했다.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天은 하 이다.
例- 하/하늘/석보상절, 월인석보, 두시언해. 하/하늘은/석보상절, 하/하늘을/석보상절,월인석보. 하래/하늘에/석보상절. 하리/하늘이/석보상절. 하로/하늘로/두시언해. 하와/하늘과/박통사. 등등. 은 없는 말이다. 굳이 설명한다면 는 하나이고 날을 日이므로 하루라고 해석한다면 가능할 수 있으나 非文法的이다. 그러므로 「」님을 논학문의 주석을 直解해서 꾸민 말로 추측되지만 잘못된 표기이다. 존칭사인 님을 「」밖으로 표기한 것은 天主의 직해일 뿐 존재할 수 없는 단어로 잘못된 표기이다. /南廣祐의 古語辭典과 관련자료 종합.
註 00 ; 필자의 미발표 원고인 「한울님과 하느님의 어원적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용담유사의 영인본에서 시천주(侍天主)의 ‘天’에 대한 표기가 대부분 ‘님’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을, 1893년에 출판된 목판본인 계사판을 참고 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용담유사의 최초의 판본은 동경대전 초간본이 간행된 다음 해인 1881년에 출간된 신사판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계사판 용담유사를 살펴보면, ‘天’에 대한 한글표기가 30 번이 기술되었는데 ‘’이 29회 기술되었고 ‘하’이 한 번 기술되었다. ‘天’에 대한 한글표기는 ‘하’이 올바른 표기이지만, ‘’로 잘못 판각하고 필사한 것은,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문법에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바른 표기로 판각된 것은 교훈가에서 ‘하님이녹업시아니네’ 이란 구절이다.
용담유사의 저작연대로 살펴보면, 교훈가에서의 ‘하님’의 표기가, 이미 용담가와 안심가에서 13회나 ‘님’으로 표기한 후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표준문법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한 번인 교훈가에서의 ‘하님’의 표기이후 교훈가에서 8회 중 7회와 몽듕노소문답가, 권학가, 도덕가, 흥비가 등에서 16회를 ‘님’으로 표기하고 있다.
註 00; 용담유사에 수록된 8 편 가사의 저작연도 순으로 본 ‘하님과 ‘님’의 기술회수.
용담가( 1); 경신 1860. 4-10.
안심가(12); 경신 1860. 10.
교훈가( 8); 신유 1861. 10.
도수사(없음); 신유 1861. 10-12.
몽듕노소문답가( 1); 임술 1862. 3. 4.
권학가( 5); 임술 1862 초.
도덕가( 1); 계해 1863.
흥비가( 2); 계해 1863.
이런 잘못된 표기로 인하여 김지하는 『생명』중 「일하는 한울님. /PP.132-149.」에서 한울님은 일하는 한울님이고, 일하는 한울님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하는 한울님. 한울님은 일하는 분입니다. 일하는 분이 한울님입니다.
한울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은 천지가 개벽됐다는 말이며, 천지가 개벽됐다는 말은-유식한 문자로 하면- 무극(無極)속에서 태극(太極)이 움직였다는 말이올시다. 즉 고요한 천지가 드디어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울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인 한울님이 음,양(陰陽), 즉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올시다. 음,양이 갈라졌다는 것은 곧 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음,양이 갈라지고 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의 주체는 하나인 한울님입니다. 음,양이 갈라지고 시작된 운동, 운동이 시작됐을 때의 그 운동과 갈라지는 음,양의 주체는 하나인 한울님입니다. 하나이고 태극인 한울이 둘이고 음,양인 천지를 창조 했다는 말입니다.
‘일하는 한울님’ ‘움직이는 한울님’ ‘운동하는 한울님’ ‘노동하는 한울님’ ‘창조하는 한울님’ 그리고 ‘창조적으로 순환하는 한울님’ -바로 그 한울님이 천지와 세상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한울님은 일을 하시는 분이며, 일하는 한울님이 이 처지의 주체입니다. 잠시라도 쉬지않고 간단없이 변화하여 쉴 새 없이 천변만화하는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하고 일하는 그 주체가 한울님인 것입니다. 한울님은 간단없이 변화하는,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천변만화하는 운동 속에서 일하고 특히 창조적으로 일하는 분을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이 세상에서 한울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한울님은 ‘일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합니다. 이 세상의 근원적인 생명은 쉴 새 없이 변화, 운동하며 중생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확대하고 지속하면서 움직이며 일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과 한울님이 곧 일하는 존재라는 그 사실을 통해서 그리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PP.132-133.
이 글은 1974년, 윤노빈의 『新生哲學』초간이 된 이후 10년이 지난 1984년에 탈고된 글이다. 이 해 겨울에 윤노빈은 자진 월북한 해이기도 하다. 김지하가 윤노빈을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라 하고 있다.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리해 볼 수 있다.
註 00 ; 2003년도 간행된 증보판 『新生哲學』의 PP.4-11.의 ‘나의 친구, 나의 스승 윤노빈’ 을 읽기를 권함. 그리고 김지하의 ‘일하는 한울님’에 대한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김지하의 저술인 『생명』중 「일하는 한울님. /PP.132-149.를 필독하시기 바람.
註 00 ; 김지하는 위의 책에서 인내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동학의 기본 진리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 되는 것은, ‘일하는 한울님의 그 일을 사람이 한다.’는 바로 그 점을 통해서 그리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은 한울님이 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은 바로 한울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스스로 한울님이면서 한울님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한울님이면서 동시에 한울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거역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배반과 거역을 우리는 ‘마귀짓’ 이라고 부릅니다. 한울님을 일합니다. 놀고 먹는 사람, 그리고 꾀를 내서 또는 힘을 이용해서 또는 덫을 놓아서 남의 것을 가로채 먹는 사람을 한울님이면서 한울님이 아닌 사람, 한울님을 배반하는 사람, 한울님을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마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일하는 사람만이 가장 아름다운 한울님이며, 일하는 사람만이 가장 생명의 본성에 알맞은 생명활동을 하는 생명주체입니다. 일이야말로 가장 한울님다운 존재규정이며 가장 생명다운 생명 활동규정입니다. 한울님을 우리가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은 일하는 한울님을, 우리 스스로 일함으로써 한울님의 일을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일 속에서 일을 일답게 살아 있는 형태로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본성대로 쉴 새 없이 일하고 쉴 새 없이 천변만화함으로써 상라 움직이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의 글 PP.133-134.
尹老彬은 김지하의 논리와 같은 주장을 더욱 확대한 것같이 느끼게 하는, 그의 저서『新生哲學』에서 ‘님’으로부터 발전하여 ‘하는 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윤노빈은 수운이 말한 ‘天主’와 ‘하님’을 行爲의 主體로 보고, 어떤 행위를 하는 자로 규정한 것이다. 그는 ‘하는 님’을 광범위하게 해석하여 ‘남북통일을 하는 님’으로 암사했을 뿐만 아니라 ‘초월은 통일이다’라는 자기논리에 빠져 『新生哲學』이 출간된 지 10년이 되는 1983년 겨울에 가족들과 함께 자진 월북하여 북한에서의 잠시 활동이 알려졌으나 2003년 봄에 평양을 방문한 어느 한 분이 윤노빈의 소재를 확인하려 하였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지금 현재 생사를 알 수 없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논리로 발전하게 되면 언제인가는, ‘새로운 세상인 후천개벽의 세상을 여는 사람’, 또는 ‘지상천국을 앞장서서 건설하는 사람’으로 해석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2003,2010년 판『新生哲學』제 8장 초월과 한울님 /PP.299-331./1974년도 초판은 ‘아. 한울님’ /PP.225-252. 을 숙독하기 바람.
註 00 ; 고어에선 ‘하다’는 많다(多), 크다(大), 높다(高貴). 바르다(正)의 의미를 담은 형용사이고 ‘다’는 행위를 말하는 동사이다.  은 밝음(光). 넓음(廣). 둥금(圓象/둥글다의 명사형)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논학문에서 수운이 말하는 ‘天主’는 古語 表記로는 ‘님’이 아닌 ‘하님’이다. 왜냐하면 ‘하’ 은 하다의 관형형인 ‘한’과 명사인 (---울--알)이 합쳐진 복합어로 표준표기이다. 합쳐서 ‘한(天)’인데 連音이 되어 ‘하’이 되는 것이다. ‘하(天)’ 에다 존칭사 ‘님(主)’을 붙여 ‘하님(天主)’ 이 된 것이다. ‘’은 다(행위를 나타내는 말.)란 동사의 관형형인  과 합쳐진 말이므로 틀린 표기이다. ‘ㆍ’는 18C부터 消失되기 시작하여 1910년경을 전후하여 음가를 ㅏ로 하고 표기를 ㅏ로 하여 ‘ㆍ’ 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교단 내외에서 한때, ‘天主’를 ‘하님’으로 표기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저술연대순으로 배열하면, ‘하님’을 ‘天主’로 한자 표기한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용담가( 1)과 안심가(12)에서 님을 13회를 기술한 다음, 呪文(天主 3)에서 처음으로 侍天主 2회와 爲天主 1회를 사용하였다.
註 00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 시대, 1445(세종 27)년에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권제(權踶) 등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악장. 10권 5책 125장(章)으로, 조선 창업을 주로 중국 고사에 비유하여 찬송하였다. 대체로 각 사적의 기술에 앞서 우리말 노래를 먼저 싣고 그에 대한 한역시(漢譯詩)를 뒤에 붙였다.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작품으로 시가 및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국어사전
이 문헌의 「」님은 口碑音으로 믿어야 한다. 그 이유는 正音이란 바로 口碑音대로 바로 표기하는 表音文字를 뜻하기 때문이다.
祖國의 固有信仰인 하날님 신앙을 源流로 한 東學의 救國精神은 「개같은 왜적놈을 하날님께 조화받아 일야에 멸하고저」하는 信仰心에 있었으니 祖國이 위기에 처한 甲午倭亂때의 東學義兵 투쟁을 反逆行爲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民族反逆으로 규탄해야 할 것이다.
註 00 ; 訓民正音解例 中 制字解에 中聲인 母音에 대한 설명이 있다.
中聲凡十一字 ·● 舌縮而聲深 天開於子也 形之圓象乎天也/ 중성은 모두 11자로 ·● 는 혀가 오그라 들고 소리가 깊어서 하늘이 자(子)에서 열리는 것이라 그 형상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金敏洙의 注解 訓民正音에서
日帝는 1910年에 우리 祖國을 강제로 병합한 다음 1911年에는 植民地 敎育政策을 발동하여 祖國의 하날님 신앙을 탄압할 구실로써 高級宗敎的인 하날님 신앙을「造化迷信」이라고 트집잡고 하날님 신앙을 迷信으로 몰아 탄압한 사실을 隱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日帝의 御用學者들은 「」님을 語音法則으로 亂刀질 하여 훼손하였고 宗敎人들은 하날님을 歪曲 造作하여 신앙힘으로써 民族固有의 神學的 하날님의 人格的 神觀은 非人格的 神觀에 가리워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였다.
註 00 ;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 교육 - 일제는 1911년 8월에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말살과 식민지 교육을 위한 첫 조처를 자행하였다. 〈조선 교육령〉의 기본 내용은
1.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忠良한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하며
2. 일본어를 보급하고,
3.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실업교육만 시킨다는 것이었다./한극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권 P 667.에서 종합.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글사전에 보면 하느-님 명(←하늘님) 종교적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로서 우주를 창조하고 主宰하며 不可思議인 능력으로써 선악을 판단하고 禍福을 내린다고 하는 汎神論的인 神,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천도교에서는 한울님, 대종교에서는 한얼님, 등으로 각각 일컬음(국어 대사전 編者 李熙昇 發行處 民衆書林) 이 예문 중의 하나님은 님의 異名으로서의 호칭이었는데 후에 기독교에서 借用한데 불과하다. 우리 고전에 보면 「인산 녹용 약을쓴들 약덕이냐 있을손냐--- 비나이나. 비나이다. 하나님전 비나이다.; 西山大師의 回心曲 1520-1604」 그리고 하느님, 한울님, 한얼님 등은 亡國 以前의 通說로 대두된 호칭이니 만큼 祖國의 文化上으로 볼 때 國籍上 問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獨立된 文化民族으로서 無分別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가급적이면 國籍있는 祖國의 하날님을 光復시키는 것이 文化民族의 矜持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御天의 天은 物理的인 天이 아니라 神學的인 天이다. 東學의 侍天主의 天 역시 御天의 天과 同一한 神學的인 天이기 때문에 龍飛御天歌의 「」님과 東學의 용담유사의 「님」과 同一한 固有名詞인 것이다.
註 00 ; 한국에 渡來한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하나님이라고 했다. 하나라는 유일의 의미와 하늘의 주인(天主)이라는 님을 붙인 合成語로 唯一神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正文法으로 보면 數詞인 하나와 名詞인 님이 합쳐진 합성어로서 수사에는 尊稱詞를 붙일 수 없다는 문법규칙에 따르면 非文法 用語이다. 그러나 종교와 예술분야의 용어는 정문법에서 어느 정도의 예외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한울님을 사용함에 있어 문법적인 문제로 부정하거나 사용을 금할 수 없다.
訓民正音을 創制하신 世宗大王의 精神은 우리 겨레의 옛 祖上 때부터 口碑化되어 온 固有의 말을 訓民正音으로 文字化하여 알기 어려운 漢文字에 代用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精神에 부응한 文學이 바로 우리의 한글文學이다. 그런데 不幸하게도 日帝의 御用學者들이 祖國의 古典에 담긴「」님을 훼손하고 비뚤어지게한 탓으로 日帝 以前에 탄생한 젊은세대들로 하여금 祖國의 固有信仰을 찾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비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은 하날님 신앙은 시들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아 靜中動으로 存在하던 하날님 신앙이 담긴 東經大全과 용담유사가 大韓民國의 典籍文化財가 된 것이다.
筆者는 이 文化財를 번역하여 祖國의 固有信仰을 中興시켜 民族의 思想統一과 人類의 精神文化 啓發에 이바지코자 정성을 다했다.
江湖諸位의 比正(批正의 誤字인듯)을 冀望한다.
癸亥 初春
編者 金 京 昌 謹識
김경창은「하날님 말씀」의 後記에서「하날님 말씀」에 수록된 영인본의 가치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과 평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날님 말씀」은 하날님께서 水雲 崔濟愚先生임에게 내리신 「하날님 말씀」이 東經大全과 용단유사이며 天理요, 東學이다. 하날님은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이며 「造化者」이며 「造物主」이며 天主이시다. -중략-
「하날님 말씀」이 곧 心學이다. 이제 우리의 信仰은 하날님이니 「하날님 말씀」인 東學에서 宗敎의 定義를 찾아야 하고 東學에 歸結하여 定立되어져야 할 것이다. -중략-
「하날님 말씀」은 前世와 現世와 來世의 가르침이며 人間觀이오 世界觀이오 史觀이오 輔國安民하는 國家觀이며 民族의 統一理念이며 世界기 平和를 이룩하여야 하는 眞理이다.「하날님 말씀」이 우리에게 있음은 오늘에 이른 우리 文化民族의 矜持이다. 여기에 民族의 正氣가 살아있으며 사람마다 하날님을 直接 모시는 最高地上의 民主主義의 학이 「하날님 말씀」이다.
金京昌은 布德124(1983)年 四月 二日에 「註釋 典籍東學文化財」/
東經大全 文化財登錄나-1-20098號
용담유사 文化財登錄나-1-20099號라는 교서를 正民社에서 출간하였다
서문에서
우리 祖國의 精神文化는 뿌리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아서 무한한 持久力과 무궁한 持續性을 지니고 있다는 事實을 오늘날 東學의 中興으로써 立證할 것이다.
祖國의 옛 祖上들은 文字 以前의 言語生活時代부터 「」님을 地上最高의 存在로서 組織하고 敬拜하기 시작하여 漢文의 專用時代까지 계속 경배하면서 口碑로 지켜왔다.
-중략-
그런데 不幸하게도 日帝의 御用學者들이 祖國의 古典에 담긴「」님을 훼손하고 비뚤어지게한 탓으로 日帝 以前에 탄생한 젊은세대들로 하여금 祖國의 固有信仰을 찾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비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와 같고 샘 깊은 물과 같은 하날님 신앙은 시들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아 靜中動으로 存在하던 하날님 신앙이 담긴 東經大全과 용담유사가 大韓民國의 典籍文化財가 된 것이다.
註 00 ; 典籍文化財에 대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는 기증받은 『東經大全』과 『용담유사』를, 교령 이영복(李永福) 명의로 1981년 8월에 전적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하여 1981년 8월 12일부터 감정을 시작하였다. 東經大全와 용담유사를 文化財 鑑定委員 黃天午가 감정하기 시작하여 동년 9월 2일에, 우리나라 전적문화재(典籍文化財)로 동경대전(東經大全)은 나-1-20098호 「용담유사」는 나-1-20099호로 등록되었다. 등록기록자는 文化財硏究官 金容運이었다. 기록내용은 간행자의 이름, 간행년도, 총 매수, 책의 크기, 판형, 보관상태. 책의 내용으로 소제목 등을 하나하나 기재되었다. 그리고 『용담유사』 계미판(1883년) 의 일반 문화재로 최후 등록일자는 1982년 2월 27일이고 등록번호는 나 1 제20345호로 등록되었으며 원본보관은 천도교 중앙총부가 하는 것으로 되었다. 『용담유사』에는「劍歌」가 없으므로 歌詞 8篇만 등록되어 있다. 그래서 용담유사를 別稱 歌詞 8篇이라 한다.
後記
우리나라 近代史에서 東學이 단순한 民間信仰을 떠나 反封建 近代化와 反帝國主義 民族運動의 先鋒으로써의 역할, 특히 近代思想의 展開過程에서 끼친 영향은 누구나 認定하고도 남음이 있는 바이다.
당시의 농민대중은 東學으로 뭉쳐 倭賊의 침략에 屈從하는 무리들을 反逆視하면서 倭賊과 싸우다 많은 희생을 당한 자랑스러운 史實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뒤집혀진 史觀이 후진의 敎育內容에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日帝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자주정신을 말살키 위하여 저질은 만행 중에, 東學徒들을 分列시키고 탄압하는 가운데 東學의 敎理까지도 歪曲하려고 한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註 00 ; 분열(分列)과 분열(分裂) - 分列은 사람이나 자동차 따위가 나뉘어 늘어선 모양과 군사용어로는 군부대가 사열단 앞을 행진하면서 예를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分裂은 하나로 존재하던 사물이나 집단, 사상 따위가 갈라져 나뉨을 말하고, 물리학에서는 원자핵이 다량의 열과 방사능을 방출하면서 쪼개짐을 의미하고, 생물학에서는 생물의 몸, 세포, 조직, 개체가 둘 이상의 몸, 세포, 조직, 개체로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東學人들이 東經大全과 용담유사를 계속 지키고 연구하여 오늘날 典籍文化財로써의 지정을 받게 된 것은 크나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몇 차례의 경전에 대한 풀이 冊子가 나왔으나 잘못된 부분이 그대로 나와 있고 일부는 잘못 풀이되어 인식되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주위의 권고를 받아 이 책을 펴내어 그릇된 점을 바로 잡고자 하는 바이다. 아울러 이 책은 原典과 대조하여 주석과 풀이를 함으로써 原典도 접하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東學信徒는 물론 東學을 硏究하는 이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 바이다.
펴내고 보니 당초의 욕심과는 달리 미진한 점이 눈에 띄어 아쉬운 감이 있으나 앞으로 계속 연구할 것이라 자위하며, 東學思想과 東學史는 東學史觀에 의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앞으로 東學史도 펴낼 計劃임을 밝히는 바이다.
1983年 初春
金 京 昌 識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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