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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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2)
甲辰革新運動의 顚末(나의 半生續) 夜雷. 천도교회월보 통권 253호/1932.1월호 에서는 甲午運動의 失敗로 인한 고통과 戊戌六月에海月神師의 慘刑으로 東學黨은 북으로 올라가 큰 勢力을 펼치고 있을 지음 第 3世 敎祖인 義菴聖師의 日本 滯留라는 時代的 狀況과 교단내의 情況을 설명하고 있다. 急變하는 周邊國家의 潮流에 對處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李仁淑으로 하여금 당시 議政大臣 尹容.善에게 보낸 상소문 전문을 게재하고 있다. /PP.48-52.
라고 기록하고 있는 야뢰의 글을 보면서 甲午東學革命이후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시대적 상황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런 極限的인 狀況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義菴聖師를 중심으로 교단 지휘부는 急變하는 世界列强들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政勢를 綿密히 파악하고 段階的인 活路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야뢰의 진술로 알 수 있었다.
야뢰가 황해도와 평안도를 두루 다니면서 만났던 道人들의 놀라운 信心과 禮儀凡節을 오늘에 비춰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된다. 진정한 포덕은 ‘그들은 別로 敎理를 說明하는 배 업고’ ‘그러나 그들의 말업는 가운데는 엇든 和氣融融한 道氣가 天地에 가득한 듯 보인다.’ ‘그들은 누구를 만나든지 依例히 鞠躬拜禮하고 서로 서로 부르기를 接長님이라 稱하고 貧富貴賤 老少의 區別이 업시 平等으로 敬語를 쓰고 모든 것에 絶對 信用이 잇고 말에 絶對 秘密을 직히고’ 이런 것들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입교에 머뭇거림이 없게 했다. 지금처럼 사람을 봐도 아는 척 하지도 않고 반기지도 않고 인사도 없으며, 오거나 말거나 가거나 말거니 吾不關焉하는 傲慢한 태도와 맘가짐으로는 포덕이 되지 않는다. 타 종단의 교인들의 信心과 언행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사람중심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중요한 동학, 천도교에서 사람을 반기지도 않고 모시지도 않는 다면, 그것은 人乃賤(蚕)인 것이며 事蚓如天이거나 事我如天(너희들은 벌레이고 나만 한울님이다.)인 것이다./ 천(蚕)과 인(蚓)은 모두 지렁이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벌레처럼 취급을 한다는 뜻이다.
註 00 ; 필자의 先親인 成菴 金成寶님께서도 시기적으로는 10여 년이 뒤이지마는 야뢰 선생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성실한 신앙을 통하여 道家를 이루었기 때문에, 필자가 繼代敎人 또는 母胎敎人이 될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靑壯年時節에 生計를 위하여 충청도 이북과 만주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잡역부 노동과 장사를 하면서 천도교 교구(또는 전교실)나 교인들을 만나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친의 입도도 야뢰와 같은 理由와 動機인 것이다. 그들의 삶과 언행이 야뢰 선생이 경험한 내용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는 선천의 젊은 시절의 경험담을 필자는 감동적으로 듣고 그 전부를 믿고 있었으며,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 청소년시절에 경험했던 그 분들의 영향으로 지금의 필자가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필자는 어머니인 誠宣堂 金連洙님의 道家의 主人으로서 흐트러짐 없는, 삶을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에 많은 영향을 받아, 특히 독서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姿態에 영향을 받은 필자는, 서책을 읽는 습관을 어려서부터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책들을 지금도 읽을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註 00 ; 李敦化의 ‘나의 半生 -自敍傳-’ 의 글을 자세히 읽고 싶으신 분은 다음 자료들을 활용하시기 바람./ 입교 후 한 달 정도 포덕 사업에 전념한 시기까지 기술되어 전체의 초반부 정도이다. 속편에선 甲午東學革命이후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에 대한 시대적 상황들을 기술하고 있다. 속편이후 이에 연속하여 관련된 이돈화의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개벽』이 폐간되는 1937년 6월 通卷 第296號까지 단 한 편의 글도 『개벽』에는 게재되어 있지 않다.
천도교회월보 통권 249호/1931. 9월호 /PP.19-27. 고향마을의 산수와 정경을 주로 설명.
천도교회월보 통권 250호/1931.10월호 /PP.23-30. 출가하여 방랑하는 중에 여러 지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천도교회월보 통권 251호/1931.11월호 /PP.31-36 귀가 얼마 전 동학의 지도자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수행 그리고 예의범절에 탄복하여 동학에 입도할 것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어 입도 후 포덕에 전념하여 한 달 안에 接主가 됨.
甲辰革新運動의 顚末(나의 半生續) 夜雷. 천도교회월보 통권 253호/1932.1월호 /PP.48-52. 속편에선 甲午동학혁명이후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시대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議政大臣 尹容.善에게 보낸 全文이 漢文體인 上疏文 全文을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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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敦化, 『人乃天 要義』, 천도교중앙총부, 1924. 1968.
李敦化, 『水雲心法講義』. 천도교중앙총부, 1924. 1968.
李敦化, 『天道敎創建史』, 천도교중앙총부 발행, 1933.(경인문화사, 영인본 발행, 1973).
金秉濟, 『天道敎 政治理念』 1946.
李敦化, 『東學之人生觀』. 천도교중앙총부, 1946/프린트本. 重刊 1968.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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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敦化, 『敎政雙全』 1947.
李敦化, 『天道敎 靑友黨論』 1945-1948.
李敦化, 『天道敎 靑友黨의 基本理念』(1945-1948.)
■ 筆者가 直接 確認 拔萃한 李敦化 硏究에 필요한 『天道敎會月報』 『開闢』『新人間』에 게재된 글들.
人乃天. 『天道敎會月報』通卷 第12號. 1911.
死後問題.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9호. 1912.
我觀人生.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0호. 1912.
靈通力이 사실됨을 해명.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7, 28호. 1912.
黙念中三我.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32호. 1913.
靈性的生活.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33호. 1913.
個性中心說. 『천도교회월보』통권 제42호. 1914.
定州로 붓터 高原에. 『천도교회월보』통권 제49호. 1914.
天人의 欲能者一本. 『천도교회월보』통권 제58호. 1915.
吾敎의 大宗. 『천도교회월보』통권 제89호. 1917.
宗敎의 兩側面.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1호. 1918.
宗敎的修養과 處世方法.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5, 96호. 1918.
大神師性靈出世說 1-5.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5-99호. 1918.
信仰性과 社會性1-4.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5-102호. 1918-1919.
將來의 宗敎 1-3.『천도교회월보』통권 제102-104호. 1919.
事人如天主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08호. 1919.
今日以後宗敎.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0호. 1919.
新信仰.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1호. 1919.
現代思潮와 事人如天主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5호. 1920.
哲人主義의 將來와 新宗敎의 價値.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7호. 1920.
自己解放과 人乃天主義 1-2.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8-119호. 1920.
自我를 開闢하라. 『開闢』통권 1호. 1920.6.
人乃天硏究1-9. 『開闢』통권 1-9호. 1920.6.
拘束의 宗敎로부터 自由의 宗敎.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23호. 1920.
實在論으로 觀한 人乃天主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23호. 1920.
사람性 無窮을 論하노라 1-2.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28. 130호. 1921.
사람性의 解放과 사람性의 自然主義. 『開闢』통권 10호. 1921.
混沌으로부터 統一에. 『開闢』통권 13호. 1921.
生活의 條件을 本位로한 朝鮮의 改造事業. 『開闢』통권 15호. 1921.
時代精神에 合一된 사람性主義. 『開闢』통권 17호. 1921.
天道敎의 新道德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34호. 1921.
新朝鮮建設과 兒童問題. 『開闢』통권 18호. 1921.
進化의 側面으로 본 人乃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38호. 1922.
吾人의 新死生觀. 『開闢』통권 20호. 1922.
宗敎의 六大要素.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41호. 1922.
空論의 人으로 超越하여 理想의 人, 主義의 人이 되라. 『開闢』통권 23호. 1922.
人類相對主義와 朝鮮人. 『開闢』통권 25호. 1922.
朝鮮人의 政治的生活. 『開闢』통권 29호. 1922.
世界三大宗敎의 差異點과 天道敎의 人乃天主義에 對한 一瞥. 『開闢』통권 45호. 1924.
仁愛天命勤勉에對한疑問 통권 48호. 1924.
天國行. 『開闢』통권 49호. 1924./통권 50호에 게재됬던 ‘天國行’은 削除됨.
사람性과 意識態의 關係. 『開闢』통권 59호. 1925.
生의 個的價値와 全的價値. 『開闢』통권 63호. 1925.
甲午東學과 階級意識. 『開闢』통권 68호. 1926.
生命의 意識化와 意識의 人本化. 『開闢』통권 69호. 1926.
‘朝鮮三大宗敎功過論’ 중 天道敎의 功過論. 『開闢』속간/新刊號 1호. 1934.
新人間을 憧憬하면서. 『新人間』통권 1호/창간호. 1926. 4.
三種의 人. 『新人間』통권 9호. 1927.
天道敎와 宗敎. 『新人間』통권 15호. 1927.
내가 天道敎를 ALT는 까닭/ 保國安民하기 爲하야. 『新人間』통권 18호. 1927.
三戰論. 『新人間』통권 36호. 1929.
財戰과 道戰. 『新人間』통권 37호. 1929.
主我와 沒我. 『新人間』통권 39호. 1929.
生死問題에 對하야. 『新人間』통권 40호. 1929.
意識上으로 본 生死問題. 『新人間』통권 41호. 1929.
生命上으로 본 生死問題. 『新人間』통권 42호. 1929.
社會進化思想과 사람性. 『新人間』통권 43호. 1930.
사람性 自然의 社會觀. 『新人間』통권 45호. 1930.
水雲主義의 新人生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41호. 1931.
나의 半生 自敍傳.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49호. 1931.
나의 半生 自敍傳.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50호. 1931.
나의 半生 自敍傳.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51호. 1931.
甲辰革新運動의 顚末(나의 半生續) 夜雷. 『天道敎會月報』 통권 253호/1932.1월호.
宗敎와 生活革新. 『新人間』통권 47호. 1930.
우리道의 無爲而化論. 『新人間』통권 49호. 1930.
新人間의 象徵. 『新人間』통권 55호. 1932.
新人論. 『新人間』통권 56호. 1932.
누구를 爲하야 사느냐? 『新人間』통권 60호. 1932.
人乃天與人本思想關係1-4. 『新人間』통권 64-66, 68호. 1933.
神機人行과 人乃天의 意義. 『新人間』통권 88호. 1935.
神機人行과 人乃天의 契機. 『新人間』통권 89호. 1935.
人生七大福1-7. 『新人間』통권 92-98호/ 1935-1936.
한울님을 모시는 법. 『新人間』통권 103호. 1936.
靈的 神識과 福念. 『新人間』통권 104호. 1936.
福田. 『新人間』통권 105호. 1936.
天命에 對하야. 『新人間』통권 107호. 1936.
永遠의 生命. 『新人間』통권 118호. 1937.
한울님의 試驗. 『新人間』통권 121호. 1938.
三大長生. 『新人間』통권 124호. 1938.
自立的信仰. 『新人間』통권 125호. 1938.
無窮我. 『新人間』통권 137호. 1939.
鬼神者吾也. 『新人間』통권 140호. 1939.
守心正氣. 『新人間』통권 140호. 1939.
來世의 槪念. 『新人間』통권 147호. 1940.
靈肉雙全 『新人間』통권 148호. 1940.
道學一致. 『新人間』통권 149호. 1940.
死와 宗敎. 『新人間』통권 150호. 1940.
死와 向我設位의 精神. 『新人間』통권 157호. 1941.
靈妙不可思議. 『新人間』통권 183, 185-187, 189,호. 1945.
※ 『新人間』통권 190, 191, 192는 缺本.
註 00 ; 李敦化의 최초의 글은 『天道敎會月報』통권 제 6호(1911)에 게재된 ‘勸牖天下失樂者/漢主國從體/PP.25-27’이고 1946년 越北까지 최후의 글은, 남아 있는 자료로서 創氏名인 히로야마 가즈구사 (白山一熊)로 발표된 『新人間』통권 189호. 1945./ 게재된 ‘靈妙不可思議 5/續’/PP. 5-8.이다. ‘靈妙不可思議’은 『新人間』통권 183, 185, 186, 187, 189호에 연재됨. ‘靈妙不可思議’1. 2는 필자가 히로야마(白山)로 되어 있다.
註 00 ; 李敦化는 신구파의 갈등의 시작으로 『천도교회월보』의 운영 체재가 구파 쪽에 가깝게 되자『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41호. 1922.이후, 발표된 글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41호. 1931.에 水雲主義의 新人生觀‘과 통권 제 244, 245, 247, 249, 251, 253호를 끝으로 더 이상의 글이 없고 『新人間』이 통권 1호/창간호. 1926. 4. 창간되자 여기에 상당량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新人間』은 신파 쪽의 교화용 간행물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李敦化는 ‘東經講義’와 ‘天道敎史’를 『新人間』통권 70호. 1933.부터 시작하여 통권 81호. 1934.까지 12회를 게재하였다
註 00 ; 『開闢』통권 20호. 1922.에 게재된 ‘人乃天主義의 唱導者 崔濟愚先生/十代偉人紹介의 其七.’의 필자가 未詳으로 되어 있지만 이돈화의 기술인 것으로 추정된다. 『開闢』의 필자 미상인 글들이 유독이 많다. 아마도 검열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떤 경우는 한 號의 필진 절반 이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開闢』통권 47, 51, 70호. 같은 경우이다.
註 00 ; 創氏名이『新人間』통권 146호(1940.6.15.)부터 등장하였는데 宋本天雄(마쓰모도텐유우)의 ‘婦人道師金德嬅氏訪問記’로부터 시작되었다. 야뢰의 창씨명인 白山一雄의 사용은 『新人間』통권 150호./1940.부터 시작되었다. 야뢰는『新人間』통권 167호./1942.부터는 白山이라 줄여서 쓰기도 했다.
黃文秀는 천도교의 종지로서 인내천을 내세우게 된 배경으로써 이돈화의 서양철학사상의 수용을 지적했고 시대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략- 지상천국은 인류 구원의 이상이라고 함으로써 民族宗敎인 天道敎의 世界性을 밝히면서 李敦化는
지상천국은 어떤 특정한 형식과 조건으로 답변할 것이 아니요 인간격의 무궁한 이상을 표준한 것이므로 지상천국은 인간격이 발달됨에 따라 또한 그 내용이 무궁히 진전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신인철학 P. 163.
라고 人乃天主義세(‘세’ 는 ‘는’ 의 오류) 인류 최고의 이상임을 천명한다. 李敦化는 분명히 지상 천국의 실현의 단계와 과정으로서의 개벽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李敦化의 실천적 관심은 당면의 과제로서 영원한 지상 천국의 실현을 위한, 한 단계로서 한국 사회를 개벽하고 한국 민족을 개벽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관심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국민의 계몽 혹은 민중의 개화」라는 교회의 지도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夜雷에 있어서의 人乃天 思想의 展開」『韓國思想』12. P.421.
註 00 ; 위의 인용된 글의 『新人哲學』 P. 163.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要컨대 地上天國은 어떤 特定한 形式과 條件으로 答辯할 것이 아니요 人間格의 無窮한 理想을 標準한 것이므로 地上天國은 人間格이 發達되면 發達됨에 따라 또한 그 內容이 無窮히 進展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抽象的이나마 튼튼한 對答 하나는 地上天國이라 함은 그 時代, 時代에서 各各 보다 좋은 新社會를 意味한 것으로 알아둘 것이다./ 고딕체로 된 부분이 漏落되었다.
-전략- 그러나 李敦化가 서양사상을 수용하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東學 사상에 있었다. 동학 사상이라는 용광로 속에 서양 사상을 받아들여 人乃天이라는 천도교 이념을 구체화시키도록 용해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雜多하다고 할 수 있고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서양 철학상의 체계와 理論的 整合性을 무시한 李敦化의 受用態度는 이와 같이 이해할 도리밖에 없는 그가 이용한 서양 철학 사상은 주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등 唯理論者 와 베르그송 등 生哲學者의 사상으로 보이며 이러한 사상을 이용하여 人乃天 사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실존철학적 사상을 자각한 면도 엿보인다.
李敦化의 神觀은 민족종교로서의 天道敎의 神을 西洋宗敎의 人格神이나 汎神觀을 넘어서서 새로운 神觀으로 定立하였다. 이러한 李敦化의 노력은 첫째, 天道敎의「神學」을 처음 시도했다는 점-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둘째,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왜래문화의 주체적 수용에 대해서도 한 갈래의 패턴- 이 패턴이 거칠고 조잡하든가 옳은 패턴이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접어 두고-을 보여주었다. 새째/세째의 오자. 民族宗敎의 敎理인 人乃天 을 새로운 입장에서 체계화하여, 비단 한 종교로서의 천도교의 교리에 그치지 않고 韓國思想의 深部에 심어 놓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夜雷에 있어서의 人乃天 思想의 展開」『韓國思想』12. P.422.라고 평가하고 이다.
李延馥은 개벽사의 신문화운동의 방향을 평가한, 아래와 같은 글을 통하여 天道敎의 人乃天 運動과 後天開闢 運動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전략- 天道敎의 人乃天 운동은 後天開闢 운동인 동시에 人文開闢 운동, 즉 인류의 新文化를 창조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天道敎 운동 중에서도 이 신문화 운동이 가장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韓國思想』12.「天道敎 靑年黨과 新文化運動」-出版活動을 中心으로- P.431.
라고 天道敎의 宗旨인 人乃天을, 天道敎의 人乃天 운동으로, 더 나아가 人文開闢 운동, 즉 인류의 新文化를 창조하는 운동이라고 확대 해석하고 있고 後天開闢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천도교 저치이념에 실려 있는 後天開闢의 3대 개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전략- 天道敎側의 기록을 빌어 보면 精神開闢이란 인간으로서 재래에 가지고 오던 일체 정신 상태를 변혁시킨다는 뜻으로 예를 들면 《原始的 雜信 封建的 勢力 及 名分念, 오늘의 金錢 及 强權萬能念, 그리하야 世上은 밤낮 이러 하거니 하는 段落없는 觀念등을 除去하고 人乃天主義에 依한 保國安民, 布德天下, 開闢정신 等 의 새 意識을 換大》하는 것이며/
天道敎靑年黨小史 P. , 民族開闢이라 함은 天道敎의《日本帝國主義에게 빼앗긴 主權과 자유를 찾고 우리 민족이 解放을 얻자는 것이 제一의 목적이었고, 社會開闢이라 함은 天道敎의 事人如天을 體行함으로써 同歸一體의 사회를 이룩하여 地上天國을 이루자는 것이었다.》/三一再顯運動誌 附錄 天道敎政治理念 P. 228. /「天道敎 靑年黨과 新文化運動」-出版活動을 中心으로-P.
430.
註 00 ; 趙基栞의 『天道敎靑年黨小史』 PP.28-29. 原文은 ‘例하면原始的雜信, 封建的勢力及名分 念, 오늘의 金錢及强權萬能 念, 그리하야 世上은밤낮이러하거니하는 段落없는觀念等을除去하고 人乃天主義에依한 保國安民, 布德天下, 開闢換板等의새意識을換大하지아니치못할지니 精神開闢의 要가여기에 있다.(略).' / 고딕체는 원문과 다른 점.
註 00 ; 『南北分裂沮止鬪爭 三一再顯運動誌』 附錄 天道敎政治理念. P. 228.의 原文은 ‘民族開闢이라 함은 여러 가지의 意義가 있지마는, 日本帝國主義에게 빼앗긴 主權과 자유를 찾고 우리 민족이 解放을 얻자는 것이 제一의 목적이었고, 社會開闢이라 함은 우리 天道敎의 事人如天을 體行함으로써 同歸一體의 사회를 이룩하여 地上天國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고딕체는 원문과 다른 점.
1947년 4월 5일에 天道敎總本部 普成社出版部에서 간행한 『天道敎政治理念』. P. 37.의 原文에서는
‘民族開闢이라 함은 여러 가지의 意義가 있지마는, 日本帝國主義의 羈絆에서 우리 민족이 解放을 얻자는것이 第一義的 목적이었고, 社會開闢이라 함은 資本社會의 制度를 改革하여 無産階級을 解放하자는 것이다. / 고딕체는 원문과 인용문이 다른 점.
筆者가 이미 『天道敎政治理念』原文과 여러 重刊本을 比較分析한 硏究결과를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교단 내외에서 刊行되고 있는 重刊本 또는 復刊本들의 問題點들을 提示한 바가 있다. 윗글에 인용된 글이 원문과 얼마나 차이가 있고 重刊을 하는 기관이나 개인에 의해 얼마나 많이 加筆되어 歪曲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事例 中 하나의 본보기를 보게 되었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 2013년 2월 28일 천도교 자유게시판과 관련기관의 게시판 그리고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김용천 자료실에 게재.
李延馥은 後天開闢의 3大 開闢의 내용을 30-40년대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開闢의 내용을 인용함으로서 어떤 측면에서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인용된 내용이 많이 왜곡된 것이라면, 천도교의 본래의 3大 開闢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3大 開闢은, 李敦化가 理論的인 바탕을 마련하여 定立한 後天開闢의 核心 內容은 『新人哲學』第四編 開闢思想. 第二章 開闢方式과 三大開闢에 다음과 같다.
이돈화의인내청 사상 또는 주의가 신앙생활과 사회참여에 있어 어떤 철학사상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後天開闢의 核心 內容인 3대 개벽, 精神開闢, 民族開闢, 社會開闢,과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의 최종 단계인 地上天國建設 等 4개 항목을 발췌하여 보고 그 이후에 어떤 이유로 변화되고 있는 지를 확인해보려고 한다.
1924년을 전후하여 교단내의 사정은 회오리바람처럼 혼란에 처해 있었다. 3.1운동으로 인한 교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加重하여 의암성사의 환원으로 인하여 교단의 중심이 무너져 1925년을 전후하여 신,구파의 갈등이 표면에 들어나기 시작하여 중앙교단은 물론, 일부지역에서 춘암 박인호의 추종세력 즉 구파측의 교역자와 교인들의 결속과 저항이 일어나 교단의 운영의 마비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으로 『천도교회월보』는 구파 중심의 교화 월간지로 남고, 신파는 그들의 신앙과 사회운동 방향에 맞게 1926년에 『신인간』월간 교화지로 창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아 분열이 가속화 되었고 청년들마저 분열되어, 신파는「天道敎 靑年黨」구파는「天道敎 靑年同盟」으로 활동을 달리 하였다.
신파의「天道敎 靑年黨」은 전국 규모로 각 지역 지부를 두어 7개 부문운동을 바탕으로 신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구파의「天道敎 靑年同盟」은 구파 교인들이 많은 경기도 일원에서 반일운동을 통하여 1926년에 창립과 동시 6.10만세를 추진하다가 동년 6.6일에 탄로가 나 곤혹을 치렀다. 이후 잠깐 동안 동합 운영을 했지만 운동노선에 대한 의견충돌로 인해 일 년여 만에 다시 분열되는 상황을 초래하여 교단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天道敎靑友黨은 1920년에 창립된 천도교의 청년단체로서 조직된 천도교청년당의 後身이다. 黨名이 天道敎靑年黨→天道敎靑友黨이었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당이 아니었으므로 천도교 信仰提高을 위한 前衛團體運動의 一環이었음으로 요즈음과 같은 政治集團으로서의 政治活動을 하지 않고, 일제가 民族宗敎를 强壓的으로 抹殺하려는 그 嚴酷한 植民地 治下에서 民族의 精氣와 民族의 삶의 精神이 깊이 담기는 新文化運動에 先驅者 役割을 했다.
註 00 ; 天道敎 靑年黨, 天道敎 靑友黨 그리고 天道敎 靑年同盟의 始終.
1919. 9. 2. 天道敎 靑年 敎理 講演部 創立./7개 부문을 바탕으로 신문화운동 시작.
1920. 4. 5. 天道敎 靑年會로 改稱.
1923. 9. 8. 天道敎 靑年黨으로 創立.
1926. 4. 3. 舊派 天道敎 靑年同盟 創立./6.10만세를 추진 중, 동년 6월 6일에 탄로.
1931. 2.16. 天道敎靑年黨과 天道敎靑年同盟이 합동회의를 거쳐 天道敎靑友黨으로 統合.
1931. 4. 1. 天道敎靑友黨 機關誌 『黨聲』創刊.
1931. 6. 1. 舊派 自體 機關誌로 『黨友』 創刊.
1932.12.23. 天道敎靑友黨에서 天道敎靑年黨으로 復歸./ 臨時 全黨大會를 통하여 黨憲을 改正하고, 舊派는 天道敎靑年同盟으로 復歸.
1939. 4. 3-4. 日帝의 强壓으로 創立 16年 만에 天道敎靑年黨 解體.
1945. 9. 14. 天道敎靑友黨 復活.
1946. 7. 7. 舊派 天道敎 保國黨 創黨.
1949.12.26. 天道敎靑友黨이 單政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李承晩 政權이 强制로 解散.
1950. 7. 6.25 事變으로 부산에서 天道敎 救國團 組織. 收復後 天道敎 保國聯盟으로 改稱.
1952.12.24. 天道敎 靑年會 復活大會에서 天道敎 靑年會 復活./『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천도교 청년회중앙본부. 2000./ PP.759-777.年表에서 筆者가 拔萃하여 綜合 整理함.
註 00 ; 천도교 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 -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던 1926년 4월 3일 천도교 구파는 이를 이끌어갈 전위단체로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을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 천도교청년동맹의 대표위원은 박래홍(朴來泓), 상무위원은 이기정(李起貞)· 이재곤(李在坤), 李晃, 집행위원은 박한규(朴漢珪)· 공순용(公淳鏞)· 강세희(姜世熙0· 이기열(李基說)· 김덕연(金德淵)· 조정호(曺定昊)· 김재계(金在桂)· 최병현(崔炳鉉)· 오일철(吳一澈)· 손재기(孫在基)· 신태순(申泰舜), 고문은 이종린 ·김승주· 오상준이었다. /조규태 「천도교의 구파와 신간회」P.200./한국근현대사 연구 7. 1997.
註 00 ; 천도교 청우당(天道敎靑友黨 ) - 朝鮮 勞動黨의 우당(友堂)으로서 기능하는 북한의 정당으로. 1950년 1월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을 흡수, 합당한 것으로서 ‘조선노동당’의 정강·정책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우당(友黨)이다. 천도교 청우당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당초 천도교의 청년단체로서 1919년 9월 2일에 조직된 일이 있으나 이때는 정당으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서울에서 김병제(金秉濟)를 당수로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조직되자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달현(金達鉉)을 당수로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조직되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창당배경은 북조선민주당(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당제를 앞세운 소련군정의 북한주민 포섭정책의 결과이다. 즉, 정당으로 발족되기 이전인 1946년 2월 1일 천도교 북조선종무원이 공식 인가된 뒤 그 교세가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장되자, 이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군정은 오히려 이를 포섭, 이용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천도교청우당의 창당은 당시 기독교세력이 중심이 된 북조선민주당의 발족에 자극된 천도교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의 설립을 요구함에 따라, 이를 소련군정이 수락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이 때 소련군정은 북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도시상공인과 기독교도들을 포섭하려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농민들과 천도교도들을 포섭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의도 하에 소련군정은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달현을 포섭, 정당을 창설하게 하였다. 발족 당시 김달현 위원장을 위시하여 부위원장 박윤길(朴允吉)· 김정주(金廷柱), 7명의 정치위원, 13명의 상무위원으로 중앙당의 진용을 갖추었다. 창당 1년 후인 1947년 4월 1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대체로 김일성(金日成)이 제시한 바 있는 ‘20개 정강’에 기초한 주장들이었다. 1948년의 2차 당대회시는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건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에 어울리는 새 윤리 수립, 동귀일체(同歸 一體)의 신생활이념에 기초한 경제제도의 실현 등, 비교적 천도교적 색채가 농후한 강령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된 뒤 일부 간부진의 교체와 함께 당 강령도 북한정권의 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다시 수정되었다. 즉, 1949년의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수정된 행동강령 가운데 인내천(人乃天)의 신문화를 발양, 인간창조 및 민족문화의 발전에 노력한다는 조항 이외에는 천도교의 당적 성격에 상응하는 것은 전혀 없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과 중앙정부 정강을 준수, 실천하며……” 등 노동당의 방침에 철저히 순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우당인 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념과는 관계없이 사회주의 사회를 신봉하는 종교정당에 불과하였다. 당의 변천과정을 개괄하여 보면, 1950년 월북한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을 흡수하여 오늘날의 천도교 청우당으로 단일화되었다. 6·25전쟁 중 주로 지방의 일부 하급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에서 반공투쟁을 전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천도교 청우당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행되어 당세가 급격히 몰락하였고, 1958년 당수 김달현(당시 내각의 무임소장관)이 축출되고 박신덕(朴信德)이 새 위원장으로 피선된 뒤 1960년까지 모든 지구당이 해체됨으로써 중앙조직만 남게 되었다.
천도교 청우당이 전개한 정당활동도 조선사회민주당의 경우와 같이 대남성명의 발표나 통일문제와 관련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개최 주장 시에 존재를 나타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 통일전선전술에 비교적 자주 동원되고 있다. 즉,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남북적십자회담과 국회예비회담에 천도교 청우당 이름으로 자문위원 또는 대표로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82년 8월 23·24일 6차 당 대회에서 정신혁(鄭信爀) 위원장이 보고를 통하여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김정일(金正日)을 ‘위대한 계승자’로 받들며 ‘고려 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천도교 청우당은 앞으로도 노동당의 통일전선전술과 김정일의 후계자 옹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79년 10·26사태 후 미국으로 망명한 최덕신(崔德新, 남한의 전 천도교 교령)이 수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통일방안 실현을 위해 앞장서게 되자 북한은 천도교에 대한 재정비와 함께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1982년 8월 23∼24일 평양에서 제6차대회를 개최하며 중앙위원장에 정신혁(鄭信赫)을 재선하고 중앙 지도기관과 당 강령 및 규약을 개정하였다. 제6차대회 보고에서 ‘북과 남, 해외의 각 당과 각 파 및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민족 대통일전선(民族大統一戰線)을 형성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 대회에서 채택된 ‘남조선과 해외 천도교인 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는 연방제통일의 실현을 기해 연공합작, 민족대통일전선 형성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김달현· 박신덕· 전신혁· 최덕신에 이어 1997년 12월 현재 유미영(柳美英, 최덕신의 부인)이며, 5명의 부위원장과 중앙상무위원, 중앙위 부장 등으로 지도부가 구성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잘못된 부분은 수정 보완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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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치론』(북한연구소, 1979)
『북한총람』(북한연구소, 1983)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0-2)
甲辰革新運動의 顚末(나의 半生續) 夜雷. 천도교회월보 통권 253호/1932.1월호 에서는 甲午運動의 失敗로 인한 고통과 戊戌六月에海月神師의 慘刑으로 東學黨은 북으로 올라가 큰 勢力을 펼치고 있을 지음 第 3世 敎祖인 義菴聖師의 日本 滯留라는 時代的 狀況과 교단내의 情況을 설명하고 있다. 急變하는 周邊國家의 潮流에 對處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李仁淑으로 하여금 당시 議政大臣 尹容.善에게 보낸 상소문 전문을 게재하고 있다. /PP.48-52.
라고 기록하고 있는 야뢰의 글을 보면서 甲午東學革命이후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시대적 상황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런 極限的인 狀況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義菴聖師를 중심으로 교단 지휘부는 急變하는 世界列强들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政勢를 綿密히 파악하고 段階的인 活路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야뢰의 진술로 알 수 있었다.
야뢰가 황해도와 평안도를 두루 다니면서 만났던 道人들의 놀라운 信心과 禮儀凡節을 오늘에 비춰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된다. 진정한 포덕은 ‘그들은 別로 敎理를 說明하는 배 업고’ ‘그러나 그들의 말업는 가운데는 엇든 和氣融融한 道氣가 天地에 가득한 듯 보인다.’ ‘그들은 누구를 만나든지 依例히 鞠躬拜禮하고 서로 서로 부르기를 接長님이라 稱하고 貧富貴賤 老少의 區別이 업시 平等으로 敬語를 쓰고 모든 것에 絶對 信用이 잇고 말에 絶對 秘密을 직히고’ 이런 것들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입교에 머뭇거림이 없게 했다. 지금처럼 사람을 봐도 아는 척 하지도 않고 반기지도 않고 인사도 없으며, 오거나 말거나 가거나 말거니 吾不關焉하는 傲慢한 태도와 맘가짐으로는 포덕이 되지 않는다. 타 종단의 교인들의 信心과 언행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사람중심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중요한 동학, 천도교에서 사람을 반기지도 않고 모시지도 않는 다면, 그것은 人乃賤(蚕)인 것이며 事蚓如天이거나 事我如天(너희들은 벌레이고 나만 한울님이다.)인 것이다./ 천(蚕)과 인(蚓)은 모두 지렁이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벌레처럼 취급을 한다는 뜻이다.
註 00 ; 필자의 先親인 成菴 金成寶님께서도 시기적으로는 10여 년이 뒤이지마는 야뢰 선생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성실한 신앙을 통하여 道家를 이루었기 때문에, 필자가 繼代敎人 또는 母胎敎人이 될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靑壯年時節에 生計를 위하여 충청도 이북과 만주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잡역부 노동과 장사를 하면서 천도교 교구(또는 전교실)나 교인들을 만나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친의 입도도 야뢰와 같은 理由와 動機인 것이다. 그들의 삶과 언행이 야뢰 선생이 경험한 내용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는 선천의 젊은 시절의 경험담을 필자는 감동적으로 듣고 그 전부를 믿고 있었으며,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 청소년시절에 경험했던 그 분들의 영향으로 지금의 필자가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필자는 어머니인 誠宣堂 金連洙님의 道家의 主人으로서 흐트러짐 없는, 삶을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에 많은 영향을 받아, 특히 독서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姿態에 영향을 받은 필자는, 서책을 읽는 습관을 어려서부터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책들을 지금도 읽을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註 00 ; 李敦化의 ‘나의 半生 -自敍傳-’ 의 글을 자세히 읽고 싶으신 분은 다음 자료들을 활용하시기 바람./ 입교 후 한 달 정도 포덕 사업에 전념한 시기까지 기술되어 전체의 초반부 정도이다. 속편에선 甲午東學革命이후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에 대한 시대적 상황들을 기술하고 있다. 속편이후 이에 연속하여 관련된 이돈화의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개벽』이 폐간되는 1937년 6월 通卷 第296號까지 단 한 편의 글도 『개벽』에는 게재되어 있지 않다.
천도교회월보 통권 249호/1931. 9월호 /PP.19-27. 고향마을의 산수와 정경을 주로 설명.
천도교회월보 통권 250호/1931.10월호 /PP.23-30. 출가하여 방랑하는 중에 여러 지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천도교회월보 통권 251호/1931.11월호 /PP.31-36 귀가 얼마 전 동학의 지도자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수행 그리고 예의범절에 탄복하여 동학에 입도할 것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어 입도 후 포덕에 전념하여 한 달 안에 接主가 됨.
甲辰革新運動의 顚末(나의 半生續) 夜雷. 천도교회월보 통권 253호/1932.1월호 /PP.48-52. 속편에선 甲午동학혁명이후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시대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議政大臣 尹容.善에게 보낸 全文이 漢文體인 上疏文 全文을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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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敦化 『新人哲學』 천도교중앙총부, 1924. 1963. 1968.
李敦化, 『人乃天 要義』, 천도교중앙총부, 1924.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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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敦化, 『敎政雙全』 1947.
李敦化, 『天道敎 靑友黨論』 1945-1948.
李敦化, 『天道敎 靑友黨의 基本理念』(1945-1948.)
■ 筆者가 直接 確認 拔萃한 李敦化 硏究에 필요한 『天道敎會月報』 『開闢』『新人間』에 게재된 글들.
人乃天. 『天道敎會月報』通卷 第12號. 1911.
死後問題.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9호. 1912.
我觀人生.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0호. 1912.
靈通力이 사실됨을 해명.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7, 28호. 1912.
黙念中三我.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32호. 1913.
靈性的生活. 『천도교회월보』통권 제233호. 1913.
個性中心說. 『천도교회월보』통권 제42호. 1914.
定州로 붓터 高原에. 『천도교회월보』통권 제49호. 1914.
天人의 欲能者一本. 『천도교회월보』통권 제58호. 1915.
吾敎의 大宗. 『천도교회월보』통권 제89호. 1917.
宗敎의 兩側面.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1호. 1918.
宗敎的修養과 處世方法.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5, 96호. 1918.
大神師性靈出世說 1-5.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5-99호. 1918.
信仰性과 社會性1-4. 『천도교회월보』통권 제95-102호. 1918-1919.
將來의 宗敎 1-3.『천도교회월보』통권 제102-104호. 1919.
事人如天主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08호. 1919.
今日以後宗敎.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0호. 1919.
新信仰.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1호. 1919.
現代思潮와 事人如天主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5호. 1920.
哲人主義의 將來와 新宗敎의 價値.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7호. 1920.
自己解放과 人乃天主義 1-2.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18-119호. 1920.
自我를 開闢하라. 『開闢』통권 1호. 1920.6.
人乃天硏究1-9. 『開闢』통권 1-9호. 1920.6.
拘束의 宗敎로부터 自由의 宗敎.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23호. 1920.
實在論으로 觀한 人乃天主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23호. 1920.
사람性 無窮을 論하노라 1-2. 『천도교회월보』통권 제128. 130호. 1921.
사람性의 解放과 사람性의 自然主義. 『開闢』통권 10호. 1921.
混沌으로부터 統一에. 『開闢』통권 13호. 1921.
生活의 條件을 本位로한 朝鮮의 改造事業. 『開闢』통권 15호. 1921.
時代精神에 合一된 사람性主義. 『開闢』통권 17호. 1921.
天道敎의 新道德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34호. 1921.
新朝鮮建設과 兒童問題. 『開闢』통권 18호. 1921.
進化의 側面으로 본 人乃天.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38호. 1922.
吾人의 新死生觀. 『開闢』통권 20호. 1922.
宗敎의 六大要素.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41호. 1922.
空論의 人으로 超越하여 理想의 人, 主義의 人이 되라. 『開闢』통권 23호. 1922.
人類相對主義와 朝鮮人. 『開闢』통권 25호. 1922.
朝鮮人의 政治的生活. 『開闢』통권 29호. 1922.
世界三大宗敎의 差異點과 天道敎의 人乃天主義에 對한 一瞥. 『開闢』통권 45호. 1924.
仁愛天命勤勉에對한疑問 통권 48호. 1924.
天國行. 『開闢』통권 49호. 1924./통권 50호에 게재됬던 ‘天國行’은 削除됨.
사람性과 意識態의 關係. 『開闢』통권 59호. 1925.
生의 個的價値와 全的價値. 『開闢』통권 63호. 1925.
甲午東學과 階級意識. 『開闢』통권 68호. 1926.
生命의 意識化와 意識의 人本化. 『開闢』통권 69호. 1926.
‘朝鮮三大宗敎功過論’ 중 天道敎의 功過論. 『開闢』속간/新刊號 1호. 1934.
新人間을 憧憬하면서. 『新人間』통권 1호/창간호. 1926. 4.
三種의 人. 『新人間』통권 9호. 1927.
天道敎와 宗敎. 『新人間』통권 15호. 1927.
내가 天道敎를 ALT는 까닭/ 保國安民하기 爲하야. 『新人間』통권 18호. 1927.
三戰論. 『新人間』통권 36호. 1929.
財戰과 道戰. 『新人間』통권 37호. 1929.
主我와 沒我. 『新人間』통권 39호. 1929.
生死問題에 對하야. 『新人間』통권 40호. 1929.
意識上으로 본 生死問題. 『新人間』통권 41호. 1929.
生命上으로 본 生死問題. 『新人間』통권 42호. 1929.
社會進化思想과 사람性. 『新人間』통권 43호. 1930.
사람性 自然의 社會觀. 『新人間』통권 45호. 1930.
水雲主義의 新人生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41호. 1931.
나의 半生 自敍傳.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49호. 1931.
나의 半生 自敍傳.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50호. 1931.
나의 半生 自敍傳.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51호. 1931.
甲辰革新運動의 顚末(나의 半生續) 夜雷. 『天道敎會月報』 통권 253호/1932.1월호.
宗敎와 生活革新. 『新人間』통권 47호. 1930.
우리道의 無爲而化論. 『新人間』통권 49호. 1930.
新人間의 象徵. 『新人間』통권 55호. 1932.
新人論. 『新人間』통권 56호. 1932.
누구를 爲하야 사느냐? 『新人間』통권 60호. 1932.
人乃天與人本思想關係1-4. 『新人間』통권 64-66, 68호. 1933.
神機人行과 人乃天의 意義. 『新人間』통권 88호. 1935.
神機人行과 人乃天의 契機. 『新人間』통권 89호. 1935.
人生七大福1-7. 『新人間』통권 92-98호/ 1935-1936.
한울님을 모시는 법. 『新人間』통권 103호. 1936.
靈的 神識과 福念. 『新人間』통권 104호. 1936.
福田. 『新人間』통권 105호. 1936.
天命에 對하야. 『新人間』통권 107호. 1936.
永遠의 生命. 『新人間』통권 118호. 1937.
한울님의 試驗. 『新人間』통권 121호. 1938.
三大長生. 『新人間』통권 124호. 1938.
自立的信仰. 『新人間』통권 125호. 1938.
無窮我. 『新人間』통권 137호. 1939.
鬼神者吾也. 『新人間』통권 140호. 1939.
守心正氣. 『新人間』통권 140호. 1939.
來世의 槪念. 『新人間』통권 147호. 1940.
靈肉雙全 『新人間』통권 148호. 1940.
道學一致. 『新人間』통권 149호. 1940.
死와 宗敎. 『新人間』통권 150호. 1940.
死와 向我設位의 精神. 『新人間』통권 157호. 1941.
靈妙不可思議. 『新人間』통권 183, 185-187, 189,호. 1945.
※ 『新人間』통권 190, 191, 192는 缺本.
註 00 ; 李敦化의 최초의 글은 『天道敎會月報』통권 제 6호(1911)에 게재된 ‘勸牖天下失樂者/漢主國從體/PP.25-27’이고 1946년 越北까지 최후의 글은, 남아 있는 자료로서 創氏名인 히로야마 가즈구사 (白山一熊)로 발표된 『新人間』통권 189호. 1945./ 게재된 ‘靈妙不可思議 5/續’/PP. 5-8.이다. ‘靈妙不可思議’은 『新人間』통권 183, 185, 186, 187, 189호에 연재됨. ‘靈妙不可思議’1. 2는 필자가 히로야마(白山)로 되어 있다.
註 00 ; 李敦化는 신구파의 갈등의 시작으로 『천도교회월보』의 운영 체재가 구파 쪽에 가깝게 되자『천도교회월보』통권 제 141호. 1922.이후, 발표된 글은 『천도교회월보』통권 제 241호. 1931.에 水雲主義의 新人生觀‘과 통권 제 244, 245, 247, 249, 251, 253호를 끝으로 더 이상의 글이 없고 『新人間』이 통권 1호/창간호. 1926. 4. 창간되자 여기에 상당량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新人間』은 신파 쪽의 교화용 간행물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李敦化는 ‘東經講義’와 ‘天道敎史’를 『新人間』통권 70호. 1933.부터 시작하여 통권 81호. 1934.까지 12회를 게재하였다
註 00 ; 『開闢』통권 20호. 1922.에 게재된 ‘人乃天主義의 唱導者 崔濟愚先生/十代偉人紹介의 其七.’의 필자가 未詳으로 되어 있지만 이돈화의 기술인 것으로 추정된다. 『開闢』의 필자 미상인 글들이 유독이 많다. 아마도 검열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떤 경우는 한 號의 필진 절반 이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開闢』통권 47, 51, 70호. 같은 경우이다.
註 00 ; 創氏名이『新人間』통권 146호(1940.6.15.)부터 등장하였는데 宋本天雄(마쓰모도텐유우)의 ‘婦人道師金德嬅氏訪問記’로부터 시작되었다. 야뢰의 창씨명인 白山一雄의 사용은 『新人間』통권 150호./1940.부터 시작되었다. 야뢰는『新人間』통권 167호./1942.부터는 白山이라 줄여서 쓰기도 했다.
黃文秀는 천도교의 종지로서 인내천을 내세우게 된 배경으로써 이돈화의 서양철학사상의 수용을 지적했고 시대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략- 지상천국은 인류 구원의 이상이라고 함으로써 民族宗敎인 天道敎의 世界性을 밝히면서 李敦化는
지상천국은 어떤 특정한 형식과 조건으로 답변할 것이 아니요 인간격의 무궁한 이상을 표준한 것이므로 지상천국은 인간격이 발달됨에 따라 또한 그 내용이 무궁히 진전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신인철학 P. 163.
라고 人乃天主義세(‘세’ 는 ‘는’ 의 오류) 인류 최고의 이상임을 천명한다. 李敦化는 분명히 지상 천국의 실현의 단계와 과정으로서의 개벽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李敦化의 실천적 관심은 당면의 과제로서 영원한 지상 천국의 실현을 위한, 한 단계로서 한국 사회를 개벽하고 한국 민족을 개벽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관심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국민의 계몽 혹은 민중의 개화」라는 교회의 지도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夜雷에 있어서의 人乃天 思想의 展開」『韓國思想』12. P.421.
註 00 ; 위의 인용된 글의 『新人哲學』 P. 163.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要컨대 地上天國은 어떤 特定한 形式과 條件으로 答辯할 것이 아니요 人間格의 無窮한 理想을 標準한 것이므로 地上天國은 人間格이 發達되면 發達됨에 따라 또한 그 內容이 無窮히 進展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抽象的이나마 튼튼한 對答 하나는 地上天國이라 함은 그 時代, 時代에서 各各 보다 좋은 新社會를 意味한 것으로 알아둘 것이다./ 고딕체로 된 부분이 漏落되었다.
-전략- 그러나 李敦化가 서양사상을 수용하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東學 사상에 있었다. 동학 사상이라는 용광로 속에 서양 사상을 받아들여 人乃天이라는 천도교 이념을 구체화시키도록 용해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雜多하다고 할 수 있고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서양 철학상의 체계와 理論的 整合性을 무시한 李敦化의 受用態度는 이와 같이 이해할 도리밖에 없는 그가 이용한 서양 철학 사상은 주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등 唯理論者 와 베르그송 등 生哲學者의 사상으로 보이며 이러한 사상을 이용하여 人乃天 사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실존철학적 사상을 자각한 면도 엿보인다.
李敦化의 神觀은 민족종교로서의 天道敎의 神을 西洋宗敎의 人格神이나 汎神觀을 넘어서서 새로운 神觀으로 定立하였다. 이러한 李敦化의 노력은 첫째, 天道敎의「神學」을 처음 시도했다는 점-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둘째,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왜래문화의 주체적 수용에 대해서도 한 갈래의 패턴- 이 패턴이 거칠고 조잡하든가 옳은 패턴이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접어 두고-을 보여주었다. 새째/세째의 오자. 民族宗敎의 敎理인 人乃天 을 새로운 입장에서 체계화하여, 비단 한 종교로서의 천도교의 교리에 그치지 않고 韓國思想의 深部에 심어 놓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夜雷에 있어서의 人乃天 思想의 展開」『韓國思想』12. P.422.라고 평가하고 이다.
李延馥은 개벽사의 신문화운동의 방향을 평가한, 아래와 같은 글을 통하여 天道敎의 人乃天 運動과 後天開闢 運動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전략- 天道敎의 人乃天 운동은 後天開闢 운동인 동시에 人文開闢 운동, 즉 인류의 新文化를 창조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天道敎 운동 중에서도 이 신문화 운동이 가장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韓國思想』12.「天道敎 靑年黨과 新文化運動」-出版活動을 中心으로- P.431.
라고 天道敎의 宗旨인 人乃天을, 天道敎의 人乃天 운동으로, 더 나아가 人文開闢 운동, 즉 인류의 新文化를 창조하는 운동이라고 확대 해석하고 있고 後天開闢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천도교 저치이념에 실려 있는 後天開闢의 3대 개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전략- 天道敎側의 기록을 빌어 보면 精神開闢이란 인간으로서 재래에 가지고 오던 일체 정신 상태를 변혁시킨다는 뜻으로 예를 들면 《原始的 雜信 封建的 勢力 及 名分念, 오늘의 金錢 及 强權萬能念, 그리하야 世上은 밤낮 이러 하거니 하는 段落없는 觀念등을 除去하고 人乃天主義에 依한 保國安民, 布德天下, 開闢정신 等 의 새 意識을 換大》하는 것이며/
天道敎靑年黨小史 P. , 民族開闢이라 함은 天道敎의《日本帝國主義에게 빼앗긴 主權과 자유를 찾고 우리 민족이 解放을 얻자는 것이 제一의 목적이었고, 社會開闢이라 함은 天道敎의 事人如天을 體行함으로써 同歸一體의 사회를 이룩하여 地上天國을 이루자는 것이었다.》/三一再顯運動誌 附錄 天道敎政治理念 P. 228. /「天道敎 靑年黨과 新文化運動」-出版活動을 中心으로-P.
430.
註 00 ; 趙基栞의 『天道敎靑年黨小史』 PP.28-29. 原文은 ‘例하면原始的雜信, 封建的勢力及名分 念, 오늘의 金錢及强權萬能 念, 그리하야 世上은밤낮이러하거니하는 段落없는觀念等을除去하고 人乃天主義에依한 保國安民, 布德天下, 開闢換板等의새意識을換大하지아니치못할지니 精神開闢의 要가여기에 있다.(略).' / 고딕체는 원문과 다른 점.
註 00 ; 『南北分裂沮止鬪爭 三一再顯運動誌』 附錄 天道敎政治理念. P. 228.의 原文은 ‘民族開闢이라 함은 여러 가지의 意義가 있지마는, 日本帝國主義에게 빼앗긴 主權과 자유를 찾고 우리 민족이 解放을 얻자는 것이 제一의 목적이었고, 社會開闢이라 함은 우리 天道敎의 事人如天을 體行함으로써 同歸一體의 사회를 이룩하여 地上天國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고딕체는 원문과 다른 점.
1947년 4월 5일에 天道敎總本部 普成社出版部에서 간행한 『天道敎政治理念』. P. 37.의 原文에서는
‘民族開闢이라 함은 여러 가지의 意義가 있지마는, 日本帝國主義의 羈絆에서 우리 민족이 解放을 얻자는것이 第一義的 목적이었고, 社會開闢이라 함은 資本社會의 制度를 改革하여 無産階級을 解放하자는 것이다. / 고딕체는 원문과 인용문이 다른 점.
筆者가 이미 『天道敎政治理念』原文과 여러 重刊本을 比較分析한 硏究결과를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교단 내외에서 刊行되고 있는 重刊本 또는 復刊本들의 問題點들을 提示한 바가 있다. 윗글에 인용된 글이 원문과 얼마나 차이가 있고 重刊을 하는 기관이나 개인에 의해 얼마나 많이 加筆되어 歪曲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事例 中 하나의 본보기를 보게 되었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 2013년 2월 28일 천도교 자유게시판과 관련기관의 게시판 그리고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김용천 자료실에 게재.
李延馥은 後天開闢의 3大 開闢의 내용을 30-40년대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開闢의 내용을 인용함으로서 어떤 측면에서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인용된 내용이 많이 왜곡된 것이라면, 천도교의 본래의 3大 開闢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3大 開闢은, 李敦化가 理論的인 바탕을 마련하여 定立한 後天開闢의 核心 內容은 『新人哲學』第四編 開闢思想. 第二章 開闢方式과 三大開闢에 다음과 같다.
이돈화의인내청 사상 또는 주의가 신앙생활과 사회참여에 있어 어떤 철학사상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後天開闢의 核心 內容인 3대 개벽, 精神開闢, 民族開闢, 社會開闢,과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의 최종 단계인 地上天國建設 等 4개 항목을 발췌하여 보고 그 이후에 어떤 이유로 변화되고 있는 지를 확인해보려고 한다.
1924년을 전후하여 교단내의 사정은 회오리바람처럼 혼란에 처해 있었다. 3.1운동으로 인한 교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加重하여 의암성사의 환원으로 인하여 교단의 중심이 무너져 1925년을 전후하여 신,구파의 갈등이 표면에 들어나기 시작하여 중앙교단은 물론, 일부지역에서 춘암 박인호의 추종세력 즉 구파측의 교역자와 교인들의 결속과 저항이 일어나 교단의 운영의 마비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으로 『천도교회월보』는 구파 중심의 교화 월간지로 남고, 신파는 그들의 신앙과 사회운동 방향에 맞게 1926년에 『신인간』월간 교화지로 창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아 분열이 가속화 되었고 청년들마저 분열되어, 신파는「天道敎 靑年黨」구파는「天道敎 靑年同盟」으로 활동을 달리 하였다.
신파의「天道敎 靑年黨」은 전국 규모로 각 지역 지부를 두어 7개 부문운동을 바탕으로 신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구파의「天道敎 靑年同盟」은 구파 교인들이 많은 경기도 일원에서 반일운동을 통하여 1926년에 창립과 동시 6.10만세를 추진하다가 동년 6.6일에 탄로가 나 곤혹을 치렀다. 이후 잠깐 동안 동합 운영을 했지만 운동노선에 대한 의견충돌로 인해 일 년여 만에 다시 분열되는 상황을 초래하여 교단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天道敎靑友黨은 1920년에 창립된 천도교의 청년단체로서 조직된 천도교청년당의 後身이다. 黨名이 天道敎靑年黨→天道敎靑友黨이었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당이 아니었으므로 천도교 信仰提高을 위한 前衛團體運動의 一環이었음으로 요즈음과 같은 政治集團으로서의 政治活動을 하지 않고, 일제가 民族宗敎를 强壓的으로 抹殺하려는 그 嚴酷한 植民地 治下에서 民族의 精氣와 民族의 삶의 精神이 깊이 담기는 新文化運動에 先驅者 役割을 했다.
註 00 ; 天道敎 靑年黨, 天道敎 靑友黨 그리고 天道敎 靑年同盟의 始終.
1919. 9. 2. 天道敎 靑年 敎理 講演部 創立./7개 부문을 바탕으로 신문화운동 시작.
1920. 4. 5. 天道敎 靑年會로 改稱.
1923. 9. 8. 天道敎 靑年黨으로 創立.
1926. 4. 3. 舊派 天道敎 靑年同盟 創立./6.10만세를 추진 중, 동년 6월 6일에 탄로.
1931. 2.16. 天道敎靑年黨과 天道敎靑年同盟이 합동회의를 거쳐 天道敎靑友黨으로 統合.
1931. 4. 1. 天道敎靑友黨 機關誌 『黨聲』創刊.
1931. 6. 1. 舊派 自體 機關誌로 『黨友』 創刊.
1932.12.23. 天道敎靑友黨에서 天道敎靑年黨으로 復歸./ 臨時 全黨大會를 통하여 黨憲을 改正하고, 舊派는 天道敎靑年同盟으로 復歸.
1939. 4. 3-4. 日帝의 强壓으로 創立 16年 만에 天道敎靑年黨 解體.
1945. 9. 14. 天道敎靑友黨 復活.
1946. 7. 7. 舊派 天道敎 保國黨 創黨.
1949.12.26. 天道敎靑友黨이 單政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李承晩 政權이 强制로 解散.
1950. 7. 6.25 事變으로 부산에서 天道敎 救國團 組織. 收復後 天道敎 保國聯盟으로 改稱.
1952.12.24. 天道敎 靑年會 復活大會에서 天道敎 靑年會 復活./『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천도교 청년회중앙본부. 2000./ PP.759-777.年表에서 筆者가 拔萃하여 綜合 整理함.
註 00 ; 천도교 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 -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던 1926년 4월 3일 천도교 구파는 이를 이끌어갈 전위단체로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을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 천도교청년동맹의 대표위원은 박래홍(朴來泓), 상무위원은 이기정(李起貞)· 이재곤(李在坤), 李晃, 집행위원은 박한규(朴漢珪)· 공순용(公淳鏞)· 강세희(姜世熙0· 이기열(李基說)· 김덕연(金德淵)· 조정호(曺定昊)· 김재계(金在桂)· 최병현(崔炳鉉)· 오일철(吳一澈)· 손재기(孫在基)· 신태순(申泰舜), 고문은 이종린 ·김승주· 오상준이었다. /조규태 「천도교의 구파와 신간회」P.200./한국근현대사 연구 7. 1997.
註 00 ; 천도교 청우당(天道敎靑友黨 ) - 朝鮮 勞動黨의 우당(友堂)으로서 기능하는 북한의 정당으로. 1950년 1월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을 흡수, 합당한 것으로서 ‘조선노동당’의 정강·정책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우당(友黨)이다. 천도교 청우당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당초 천도교의 청년단체로서 1919년 9월 2일에 조직된 일이 있으나 이때는 정당으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서울에서 김병제(金秉濟)를 당수로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조직되자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달현(金達鉉)을 당수로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조직되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창당배경은 북조선민주당(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당제를 앞세운 소련군정의 북한주민 포섭정책의 결과이다. 즉, 정당으로 발족되기 이전인 1946년 2월 1일 천도교 북조선종무원이 공식 인가된 뒤 그 교세가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장되자, 이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군정은 오히려 이를 포섭, 이용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천도교청우당의 창당은 당시 기독교세력이 중심이 된 북조선민주당의 발족에 자극된 천도교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의 설립을 요구함에 따라, 이를 소련군정이 수락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이 때 소련군정은 북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도시상공인과 기독교도들을 포섭하려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농민들과 천도교도들을 포섭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의도 하에 소련군정은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달현을 포섭, 정당을 창설하게 하였다. 발족 당시 김달현 위원장을 위시하여 부위원장 박윤길(朴允吉)· 김정주(金廷柱), 7명의 정치위원, 13명의 상무위원으로 중앙당의 진용을 갖추었다. 창당 1년 후인 1947년 4월 1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대체로 김일성(金日成)이 제시한 바 있는 ‘20개 정강’에 기초한 주장들이었다. 1948년의 2차 당대회시는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건설,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정신에 어울리는 새 윤리 수립, 동귀일체(同歸 一體)의 신생활이념에 기초한 경제제도의 실현 등, 비교적 천도교적 색채가 농후한 강령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된 뒤 일부 간부진의 교체와 함께 당 강령도 북한정권의 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다시 수정되었다. 즉, 1949년의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수정된 행동강령 가운데 인내천(人乃天)의 신문화를 발양, 인간창조 및 민족문화의 발전에 노력한다는 조항 이외에는 천도교의 당적 성격에 상응하는 것은 전혀 없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과 중앙정부 정강을 준수, 실천하며……” 등 노동당의 방침에 철저히 순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우당인 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념과는 관계없이 사회주의 사회를 신봉하는 종교정당에 불과하였다. 당의 변천과정을 개괄하여 보면, 1950년 월북한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을 흡수하여 오늘날의 천도교 청우당으로 단일화되었다. 6·25전쟁 중 주로 지방의 일부 하급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에서 반공투쟁을 전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천도교 청우당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행되어 당세가 급격히 몰락하였고, 1958년 당수 김달현(당시 내각의 무임소장관)이 축출되고 박신덕(朴信德)이 새 위원장으로 피선된 뒤 1960년까지 모든 지구당이 해체됨으로써 중앙조직만 남게 되었다.
천도교 청우당이 전개한 정당활동도 조선사회민주당의 경우와 같이 대남성명의 발표나 통일문제와 관련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개최 주장 시에 존재를 나타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 통일전선전술에 비교적 자주 동원되고 있다. 즉,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남북적십자회담과 국회예비회담에 천도교 청우당 이름으로 자문위원 또는 대표로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82년 8월 23·24일 6차 당 대회에서 정신혁(鄭信爀) 위원장이 보고를 통하여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김정일(金正日)을 ‘위대한 계승자’로 받들며 ‘고려 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천도교 청우당은 앞으로도 노동당의 통일전선전술과 김정일의 후계자 옹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79년 10·26사태 후 미국으로 망명한 최덕신(崔德新, 남한의 전 천도교 교령)이 수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통일방안 실현을 위해 앞장서게 되자 북한은 천도교에 대한 재정비와 함께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1982년 8월 23∼24일 평양에서 제6차대회를 개최하며 중앙위원장에 정신혁(鄭信赫)을 재선하고 중앙 지도기관과 당 강령 및 규약을 개정하였다. 제6차대회 보고에서 ‘북과 남, 해외의 각 당과 각 파 및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민족 대통일전선(民族大統一戰線)을 형성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 대회에서 채택된 ‘남조선과 해외 천도교인 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는 연방제통일의 실현을 기해 연공합작, 민족대통일전선 형성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김달현· 박신덕· 전신혁· 최덕신에 이어 1997년 12월 현재 유미영(柳美英, 최덕신의 부인)이며, 5명의 부위원장과 중앙상무위원, 중앙위 부장 등으로 지도부가 구성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잘못된 부분은 수정 보완함.
참고문헌
『북한총감』(공산권문제연구소, 1968)
『북한정치론』(북한연구소, 1979)
『북한총람』(북한연구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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