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손병희선생님의 수감생활과 주옥경사모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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❼ 수감 생활
태화관에서 독립선어서 낭독을 하고 만세삼창을 부른 후 남산에 있는 성대로 압송되어 3년 언도를 받고 형무소에 수감생활이 시작되었다.
손병희 선생의 옥바라지를 맡은 분은 당시 26세의 꽃 같은 새댁 주옥경 이다. 주옥경은 손병희 선생의 3번째 부인으로서 혹자들은 선생을 여색을 밝히는 색한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주옥경은 당시 잘나가는 명월관의 기생으로서 장안의 인기가 높던 명기였으나 어느 술좌석에서 선생을 모신 후 나라를 생각하는 그분의 투철한 애국심과 호방한 기개에 흠모의 마음이 솟아 자진 선생께 생을 의탁하기로 하고 선생댁으로 찾아와 윗 사모님들을 정성으로 모시며 당시 광복운동을 하는 가 의심받는 남자들을 대신하여 선생과
교회간부들 및 사회유지들과의 사이에 연락의 책임을 맡아 심부름을 하는 비서의 역할을 하였으니 선생과의 사이는 사랑하는 임이자 존경하는 스승이요 나라를 구하는 일에 뜻을 함께 하는 동지였다.
이러한 주옥경이 사랑하는 임이자 스승이요 동지인 선생께서 60이 넘은 노구로 영어의 몸이 되셨으니 그 안타까운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는가? 가희동 자택과 형무소가 너무 멀어 형무소 근처에 음식을 장만할 집을 구하자니 마땅한 집이 없고 집이라고는 형무소에서 죽은 시신을 잠시 안치하는 폐가 같은 집밖에 없었다. 할 수없이 그 집을 얻어 수리하고 꽃 같은 새댁 주옥경은 이곳에서 하루에 세끼씩 사식을 지어 드려 보내며 정성의 옥바라지를 시작한다. 입옥한지 10개월이 되는 그해 11월 30일 주옥경 에게 선생이 위독하니 병보석을 신청하라는 전갈이 온다. 알고 보니 11월 28일 선생께서 뇌일혈로 쓰러지신 것을 2일이나 경과한 후에 알려 준 것이다.
가족과 교회간부들과 함께 가 보석신청을 하니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월요일로 미루고 월요일에 다시 신청하니 병세가 호전되었다며 보석이 불허되어 주치의 박종환과 기족과 교인들이 들어가 보니 의식불명인체 반신불수가 되어있었음에도 일제는 병세가 호전되었다며 보석을 불허한 것이다.
그런대로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어 가던 선생께서 다시 1920년 6월 12일에
뇌일혈이 재발되어 전신불수가 되신 데다 늑막염까지 겹쳐지자 다시 병보석허가를 신청 하라는 연락이 온다. 보석신청을 끝내고 6월 13일 가족과 교인들이 장맛비를 맞으며 감옥 앞에서 종일 기다려도 선생께서 나오시지 못하시자 14일 보석 신청을 정식으로 하여도 형무소 측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여론이 급등함에도 불고하고 보석심청 9일 만인 6월 22일에야 보석을 불허 한다 는 통지가 온다. 이에 주옥경에 대한 동정으로 사회의 비판 여론이 급등해도 보석을 하지 않던 일제는 선생의 병환이극도로 악화되어 말씀도 못할 지경에 언도공판을 약 1주일 앞둔 10월 22 일수감 되신지 20개월 19일만에야 병보석을 허가하여 출감하시니 선생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신 후였다.
❽ 병상생활과 환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출감하신 선생은 상춘원에서 <동대문밖 천도교 별원> 투병생활에 들어가시니 한의와 양의 두 분 주치의의 치료와 주옥경의 지극정성의 간병생활이 시작된다. 해가 바뀌고 1921년 봄 1년 반에 걸친 지극정성의 간병에 힘입어 호전되어가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4월 8일 생신축하식이 있고난 얼마 후 부터였다. 5월 15일부터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여 5월 16일에는 완전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악화된 병세로 고생하시던 선생께서는 드디어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은도시대 박해받던 동학을 천도교라는 우리나라 최대의 근대종교로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 조국 광복 제단에 한 몸 을 바친 웅혼한 일생을 마감하셨다.
일제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 죄수라는 핑계로 영결식조차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 각 신문에는 이러한 당국의 처사에 대한 비판이 물 끓듯 해도 일제가 영결식의 허가를 내주지 않은 까닭은 죄수라는 핑계일 뿐 혹시라도 영결식에 사람이 많은 군중이 모여 또다시 만세시위와 같은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장례허가신청이 기각되어 고심 하 던 중 어떤 사람의 조언으로 최린이 한국인 에게 부탁하여 간신히 장례 허가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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