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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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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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0(2019)년 2월 1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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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1년여에 걸친 와병(臥病)중에 집필한 10여 편의 글 중에 하나로, 이 글 중에 필자의 글이 아닌 자료문헌과 인용문장 그리고 주(註)의 해설 문장 중에 오류(誤謬)가 있을 수 있사오니, 인용(引用)이 필요하신 분은 원문(原文)을 반드시 확인하여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완벽하게 재확인하지 못하고 게재한 점에 대하여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0여 편의 글 중에서 완성된 글은, 금년 천일기념전에 게재가 가능하면 게재하도록 하고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하여는 따로 정식으로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암 심고.
崔濟愚와 그의 思想. / 資料 比較硏究.
金得榥 『韓國思想史』 第三編 儒敎思想時代(第三期)
「第十七章 崔濟愚와 그의 思想」 初版 PP. 227-236./ 4版 PP. 269-276.
/띄어쓰기와 표기는 원문을 그대로 따랐다. - 오암.
「崔濟愚와 그의 思想」 1958年度 初版의 全文.
略傳 韓國精神史上에 偉大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敎祖 崔濟愚는 純祖 二十四年 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出生하였고 號를 水雲齊라 불렀다.
仔細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困難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靑春期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靑春期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儒敎 佛敎 道敎 天主敎等에 관한 書籍을 涉獵하며 內省生活도 하여서 二十臺의 靑年으로는 드물게 精神生活이 向上되어 있었다. 三十歲頃에는 世道人心이 腐敗墮落함을 慨嘆하여 各地를 周遊하며 人情과 世情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念願하여 그의 內的生活은 더욱 宗敎的 方向으로 發展하고 있었다.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一卷의 冊을 얻어 三日間 熟讀 硏究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把握하고 其後 精神的苦業을 繼續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四月 어떤날 精神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心身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確實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P. 227
P.228. 蒼生의 主義(주의가 아니고 신앙의 목표 또는 목적임의 잘못-오암) 를 宣佈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簡單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定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着手하여 비로소 朝鮮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著述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自身은 一心으로 傳道事業에 힘쓰다가 그翌年 西學徒로 指目받아 左道惑民의 罪名을 쓰고 大邱營에서 苛酷한 고문을 받은뒤 死刑을 받았다.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方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呪文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全部를 包括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二十一字의 呪文中에도 侍天主라는 三字는 그의 思想의 眞諦를 代表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自己가 부른 노래中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信徒를 對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侍天主라는 것은 天人如一을 말하는 것으로 從來 사람들이 생각하는 天의 通念에 새로운 立論을 한것이다. 그當時 朝鮮사람들은 天主라하는것이 人間社會와는 別個로 絶對最高의 主宰神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즉 神이라고하면 人間은 勿論하고 地上萬物을 超越하여 別個의 靈的絶對神이 存在하는줄로 알았다. 그리하여 地上에 存在한 어떤物體와 物體와의 사이에 어떤 關係가있음을 認定치 암ㅎ으며 雨露風霜은 모두 天主의 施與하는 바이며 宇宙의 모든 自然法則의 現狀도 天主의 施行하는 것으로 認識하였다. 따라서 天主와 人間과도 靈的脈絡이 없는 別個物로 생각하여 世上사람들은 제멋대로 天命을 不顧하며 서로 헐고 뜯고 빼앗아 非自然한 階級과 不道德한 行爲가 形成되어 혼탁한 人間社會를 만들고 있다고 알았다. /P. 228
P.229. 그러나 그는 天과人, 天과物의 區分關係를 打破하고 人間至上主義를 高調하여 人生과 萬有는 大宇宙 大生命의 표현으로 神의 現實을 顯現한것이라하여 우으로 日月星辰으로부터 아래로 鳥獸나 微生物에 이르기까지 어느것이든지 天主의 顯現아님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그는 「吾心卽汝心」 「天心卽人心」으로 說明하였는데 이것을 孫秉熙는 人乃天이라 하여 이 神人關係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神은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生한다. 山에 사는 사람은 山神을 섬기고 물에 사는 사람은 水神을 섬기는데 山과 물에 神이따로 있는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山에 가면 山에 應하고
물에가면 물에 應하여 或은 기뻐하고 或은 무서워하는데서 神을 自己 마음대로 만들어 스스로 모시고 있다. 卽 사람의 그求하는 바를 쫓아 應하게되는 것이 神이라고.
註 00 ; 天人如一觀 - 윗 글에서 ‘그는 「吾心卽汝心」 「天心卽人心」으로 說明하였는데 이것을 孫秉熙는 人乃天이라 하여’ 라 하여 천도교 시대의 인내천을 天人如一이라 필자가 임의로 명명하고 그러한 주장과 시각에서 출발한 가치관을 天人如一觀이라 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과 표현은 필자인 김득황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천도교 중앙 총부에서 1960년대 이후에 간행된 영역본의 천도교 입문서나 팜플렛에서 인내천(人乃天)을 innaechon(in-nai –chon) 또는 man and GOD are one. Human beings are GOD. 이라고 했고, 한 때는 man is GOD이라고 표기한 적도 있다. man is GOD을 I is GOD이나 I am a GOD이라 하지 않는 것은 동학과 천도교에서의 나는 독립적인 나이면서 우리 속의 나이기 때문에 나는 각자가 어우러져 모인 집단인 우리 즉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한울이 아니고 사람이 한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나가 우리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禮記에 事親如事天은 어버이가 개벽적인 의미를 갖지만 해월이 말한 事人如天의 인은 개별적인 나의 집단인 인간의 무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해월이 개별적인 나를 우리로 확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man is GOD이란 이 영문을 직역한다면 天人如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돈화는 그의 인내천요의와 여러 저서에서 인내천주의 인내천사상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돈화는 『新人哲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내천의 신은 노력과 진화(進化)와 자기관조(自己觀照)로부터 생긴 신이기 때문에 인내천의 신은 만유평등의 내재적 신이 되는 동시에 인간성에서 신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신의 원천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신이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역동적인 신개념과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하고 있다./관련 자료들에서 부분 발췌하여 재정리함. 인내천을 의암의 사상과 교의대로 한다면, 天人如一觀이 아니라 인내천 사상 또는 인내천관이라야 한다.
■ 「人乃天/사람이 곧 한울」이란 용어의 등장시기 - 1905년을 전후하여 간행된 손병희의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사용되어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상적 근원은 최제우의 동경대전에 담겨짐 수운의 侍天主思想에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대신사께서 논학문에서 주문의 뜻을 직접 풀어 말씀하시기를, 모심이란 안으로 신령함을 지니고 있으며 밖으로 기화(氣化)함을 지니고 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옮길 수 없는 것으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니, 이는 영(靈)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정의를 말씀한 것이다.(大神師 嘗呪文之意 解釋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是指稱以靈之有機的表顯道破人乃天之定義也) 라 하였다.
至氣一元觀 崔濟愚는 天과 人間을 또 天과 物을 混然一體(物心一體/논학문에서 渾元之一氣라고 했다. -오암)로보며 宇宙全體에 對하여서도 物心兩元的存在를 否定하고 至氣의 一元的存在라 規定하였다. 그는 東經大全에서 至氣의 뜻을 말하여 「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明(命의 잘못-오암)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分明히 唯心 唯物의 兩元을 至氣로 包括하여 大宇宙의 生命體를 至氣로 表現한 것이다. 그는 至氣로써 唯心 唯物을 總合한 大宇宙의 實在體로 보고 이 至氣의 實在體가 個體로 表顯될때에 心的現象과 物的現象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說明코자 하였다.
그는 心的作用을 全然 相對的存在로 보지 않고 至氣라는 實在體의 表顯이 心的作用과 物的作用으로 나타/P.229.
P.230. 나는것이며 至氣라는것은 唯心 唯物을 總包括한 大宇宙 大生命의 一元的存在라고 했다.
이 至氣一元論도 其根底를 찾아보면 主氣說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가 出生한 慶尙道地方은 主로 李滉의 學說을 이은 世稱 嶺南學派가 뿌리박고 있던곳으로 主理說을 主張하고 있었는데 崔濟愚도 그周邊의 主理思想에 浸潤되었을 것인데 反動的인 그의 思想에는 反動的으로 오히려 主氣思想에 기울은바가 적지않다.
崔濟愚가 宇宙의 本體를 氣라고 본것은 張橫渠가 宇宙의本體를 太虛로보고 太虛는 곧 氣의 體라는것과 다름이 없고 徐敬德이가 氣로써 宇宙를 一元的으로 본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의 至氣一元說은 李朝中葉主氣派의 巨頭任聖周가 말한 「天地는다만 一氣니라.」라고 喝破하여 宇宙를 氣의一元으로 觀察하고 사람도 氣에 依하여 人生을 보는것과 大同小異하다. 더욱이 崔濟愚의 東經大全의 至氣論은 任聖周의 主張하는바와 相通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의 思想을 通하여보면 人性에 있었어도 氣質의 性의 槪念이 本然의 性의 槪念을 包括하여 있으므로 우리는 氣質의 性을 純化함으써 天心인 人心을 만들수가 있으며 이같은 至氣의 生活을 하는 가운데 人間社會의 不平等과 間隙이 없어지고 均等하고 平和로운 人類社會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三敎圓融論 崔濟愚가 創道한 天道敎는 오늘에도 옛날에도 듣지못하고 오늘에도 옛날에도 比하지 못한다고는 하였지만 天道敎의 思想的基礎는 儒 佛 仙 三敎를 圓融하여 一敎를 創設한 것이며 그의 思想에는 三敎를 融攝하려는 努力이 많이 보인다.
그가 東學을 唱道하고 敎勢가 날로 昌盛하여 갈때에 崔時亨에게 道統을 傳하면서「이道는 原來 儒도아니고 佛도아니고 仙도아니고 儒 佛 仙을 合一한 것이다. 즉 天道는 儒 佛 仙에 由來한것이 아니고 儒 佛 仙이 天/P.230.
註 00 ; 海月神師 法說. 十三. 天道와 儒 佛 仙 /PP.319-320
13-1. 吾道 源於無極而顯於太極 根着於天上地下 理潛於渾元一氣 玄妙之造化與天地日月 同體無窮矣 吾道之眞理 似淺而深 似卑而高 似近而遠 似暗而明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우리의 도는 무극을 본바탕으로 하여 시작되어 태극에 나타났으니 그 근원의 뿌리는 하늘과 땅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치는 혼원한 한 기운(陰陽未分의 一氣=至氣)에 내재해 있었고, 현묘한 조화는 천지일월과 더불어 한 몸으로 무궁하다. 우리 도의 진리는 그 깊이가 얕은 것 같으나 깊고, 속된 것 같으나 고상하고, 가까운 것 같으나 멀고, 어두운 것 같으나 밝은 데 있는 것이다.
13-2. 吾道 似儒似佛似仙 實則 非儒非佛非仙也故曰「萬古無之 無極大道也」先聖只言枝葉 不說根本 我水雲大先生主 始創天地陰陽日月鬼神氣運造化之根本也 苟非聰明達德者 孰能知之 知者鮮矣 可歎也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우리의 도는 「유」와도 비슷하고 「불」과도 비슷하고 「선」과도 비슷한 것 같으나, 사실에서는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그러므로 「만고없는 무극대도」라 스승께서 말씀하셨으니, 옛 성인은 다만 가지와 잎사귀만 말하고 본래 도의 근본을 말하지 못했으나, 우리 수운대선생님께서는 천지․ 음양․ 일월․ 귀신․ 기운․ 조화의 근본을 처음으로 밝히셨다. 참으로 聰明하고 達德하신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알았겠는가. 아는 사람이 적으니 매우 탄식할 일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오늘에도 옛날에도 듣지 못하고 오늘에도 옛날에도 比하지 못한다고는 하였지만은’의 原文은 論學文 중의 曰毁道者何也 曰猶或可也 曰何以可也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修者如虛而有實 聞者如實而有虛也 ⑯을 해석한 것이다.
註 00 ; ‘이道는 原來 儒도아니고 佛도아니고 仙도아니고 儒 佛 仙을 合一한 것이다. -----’의 인용문은 원문과 많이 다르다. 그 원문은 ‘吾道는 元來 ㅣ 儒도아니며 佛도아니며 仙도아니니라 그러나 吾道는 儒佛仙合一. 이니라. 즉天道는 儒佛仙이아니로되 儒佛仙은 天道의 한部分이니라. 儒의倫理와 佛의覺性과 仙의 養氣는 사람性의 自然한 品賦이며 天道의 固有한 部分이니 吾道는 그 無極大源을 잡은 者이라 後에 道를 用하는者ㅣ 이를 誤解하지말도록 指導하라하시고」 이다. / 李敦化 編述, ?天道敎創建史?, 第一編, 第九章, 道統傳授, P.47./李敦化 編述, ?天道敎創建史? 1933,/景仁文化社, 影印本 1982,
P.231. 道의 一部分이 되는 것이다. 儒의倫理가 佛의覺性과 仙의 養0(養氣의 ‘氣’字 가 漏落됨 -오암)모두 人性에 저절로 賦課된 天道의 固有한 部分에 지나지 않지만 이道는 그 無極大源을 다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今後 이道를 믿는 사람을 이點에 留意하여 指導하지않으면 아니된다.」 라고 말하여 率直히 儒 佛 仙 三敎를 採長補短하여 融欇한것을 吐露하였다. 그는 儒 佛 仙 三敎를 融欇하면서도 오히려 自身이 唱道한 東學이 본래부터의 根本的宗敎이고 儒 佛 仙 三敎가 東學의 一部分이라고 說明하였으나 그는 다시말하여 東學은 결국 三敎를 融欇한것이라고 말하였다. 卽「儒敎라는것은 名分을 너무 중히 여기여 玄妙의 域에 達하지 못하며 佛敎는 寂滅에 들어가 倫常을 絶하며 道敎는 自然에 悠遊하여 治平의 術을 缺한다」라고 하여儒 佛 仙 三敎의 短點을 列擧한뒤 自身이 東學創設에 있어서 三敎의 長點을 取한것을 말하여
註 00 ; 道敎와 仙敎 - 중국에서 전국(戰國) 중 · 후기 무렵 발해만(渤海灣) 연안과 사천(四川) 지역을 중심으로 애니미즘(Animism), 토테미즘(Totemism) 등의 원시 신앙에 근거한 민간종교와 무술(巫術),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신선설(神仙說) 등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으로,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노장사상(老莊思想)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국 고대 사회에서 도교는 유(儒) · 불(佛)과 함께 지식인들의 필수적인 교양이었고, 불로장생과 신선설을 통해 기층민에게도 역할을 하였다.
도교가 종교의 형태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 莊子≫·≪열자 列子≫ 등에 드러나 있는 도가사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에 도교와 도가사상을 혼동하는 예가 많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도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도가사상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도교는 본래 피안(彼岸)의 관념이 의외로 희박하고, 오히려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고,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도가의 사상이나 그 논리를 받아 들이게 되었으므로 도교와 도가사상은 그 관계가 밀접해졌다.
도교는 마치 큰 바다가 작고 큰 물줄기들을 두루 받아 들이는 것같이, 온갖 종교·사상·풍속 등을 자체에 편리하게 흡수, 조절하는 특이한 성질을 지니고 변천해 왔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 조절한 주요한 사상의 하나이지, 본래부터 도교가 곧 도가사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그 사상과 논리를 흡수한 이후에도 사상·문학·예술 등 각 방면에 작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도교는 4세기 이후 비로소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고 불법(佛法)의 전개방식 등을 받아 들여, 교리의 체계화와 종교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도교는 본래 자연발생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질 경우, 교조(敎祖)라든가 개산조(開山祖)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노자를 교조로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 역시 종교의 체제를 갖추게 하려는 의식이 생겨난 뒤의 일이다. 도교라는 종교의 성립과정과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요약해 보면,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역리·음양·오행·참위·의술·점성 등의 법술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고, 그것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뭉뚱그린 종교로,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다른 신앙까지 큰 마찰없이 받아 들여서 포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가사상은 도교라는 종교와는 엄연히 구별되어서 역대 지식인들에 의하여 연구, 수용되어 한국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 도교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크게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설과 본토 자생설 두 가지로 나뉜다. 중국 전래설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624년(고구려 영류왕 7) 당 고조 이연(李淵)이 고구려에 도사(道士)를 파견하고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과 도법(道法)을 전했다는 기록이다.
한국에서 자생했다고 하는 仙道는 중국의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 그러므로 선도는 신선의 도를 의미한다. 『화랑세기』 7세 설화랑 조를 보면 미실이 설원랑(薛原郎)이 문노(文奴)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仙道)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한 기록이 나온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一. 五倫五常을 세워 仁에 居하여 義를 行하며 마음을 바로하고 몸을 닦는것은 儒敎에서 取하고
二. 慈悲와 平等을 마음으로하여 몸을 버러 世上을 救하며 道場을 깨끗이 하고 입에 神呪을 誦하고 손에 念珠를 쥐는것은 佛敎에서 取하고
三. 玄을極하여 無極에 이르고 榮利와 名譽를 버리고 無欲淸淨히 몸을가지고 精神을 鍊하여 마지막에 昇天을 希望하는 것은 道敎에서 取한다.
라고 말하였다.
註 00 ; 윗글의 원문 - 十五日曉頭에 大神師 l 謂神師曰吾道ᄂᆞᆫ兼儒佛仙三道也니라.神師 l 曰願聞其旨ᄒᆞ노이다. 大神師 l 曰立綱明倫에居仁行義ᄒᆞ고意誠心正에自身及世ᄂᆞᆫ蓋取諸儒ᄒᆞ고,慈悲爲心에捨身救世ᄒᆞ고 淸潔道場에口呪手珠ᄂᆞᆫ蓋取諸佛ᄒᆞ고,究玄核無에蠲除榮辱ᄒᆞ고淸淨居身에煉髓脫胎ᄂᆞᆫ蓋取諸仙ᄒᆞ니此三道 ㅣ 究其源溯其眞ᄒᆞ면不出於天道範圍之內ᄒᆞ니라./吳尙俊의 本敎歷史 續 P. 15.에서 『天道敎會月報』 제9호(明治 44년 4월/서기 1911년 4월 발행)
註 00 ; 日帝時代에 발간한 {天道敎會月報} 제9호(明治 44년 4월, 서기 1911년 4월)를 보면 비로소 위의 인용문과 거의 똑 같은 원문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十五日曉頭에 大神師謂神師曰 吾道는 兼儒佛仙三道也니라. 神師曰 願聞其旨하나이다. 大神師曰 立綱明倫에 居仁行義하고 意誠心正에 自身及世하니 蓋取諸儒하고, 慈悲爲心에 捨身救世하고 淸潔道場에 口呪手珠하니 蓋取諸佛하고, 究玄核無에 除榮辱하고 淸淨居身에 煉髓脫胎하니 蓋取諸仙하랴, 此三道는 究其源溯其眞하면 不出於天道範圍之內하니라./원문과 다름. 윗 주 윗글의 원문을 대조하여 참조바람.
위의 원문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15일 이른 새벽, 大神師께서 神師에게 이르기를 吾道는 儒·佛·仙 三道를 겸했느니라고 하였다. 이에 신사께서 그 뜻을 듣고자 원하니, 대신사께서 이르기를
1) 기강을 세우고 인륜을 밝혀 仁에 살고 義를 행하여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바르면, 저절로 몸이 세상에 미치니, 어찌 그러한 것을 儒道에서 취하며,
2) 자비를 마음으로 하고 몸을 버려 세상을 구제하며 도장을 청결히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염주를 손에 쥐니, 어찌 그러한 것을 佛道에서 취하며,
3) 玄道를 궁구하여 無爲而化를 기본으로 하고, 영욕을 견제하여 몸을 청정히 하고 골수를 단련하면 육신의 허울을 벗어나니, 어찌 그러한 것을 仙道에서 취하겠는가. 이 三道는 근원을 소급하여 그 진수를 궁구하면 천도의 범위 내를 벗어나지 못하니라. / 安昶範의 「東經大全의 歷史的 理解」에서 인용
註 00 ; 거의가 李瑄根의 저술인 『花郞道硏究』와 日本人 學者 吉川文太郞의 저술인 『朝鮮諸宗敎』/한글판)에서 재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 日本人 學者 吉川文太郞의 저술인 『朝鮮諸宗敎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古語로 된 문장을 현대어로 바꾸었다).
"동학은 새로이 誕生된 宗敎라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造作한 것이라 말하는 편이 적당할 듯하다. 崔氏는 儒·佛·仙 三敎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었다는 것이다. 즉 유교는 名節에 구애되어 아직 玄妙의 域에 이르지 못하였고, 불교는 寂滅로 들어가 倫常을 絶하였으며, 도교는 자연에만 悠適하여 治平의 술을 缺하였다 하면서 다시 천도교의 교지로,
(一) 五倫五常을 세워 仁에 살고 義를 행하며 마음을 바로 하고 뜻을 정성되이 함으로써 몸을 닦아 세상에 미치게 함은 유교에서 取하고,
(二) 자비와 평등을 주지로 삼고, 몸을 버리어 세상을 구제하며 도장을 정결히 하고 입으로 神呪를 외우며 손에 염주를 쥐는 것은 불교에서 취하고,
(三) 玄을 極하여 無極에 이르러 영리와 명예를 버리고 無慾淸淨한 몸을 가지고 神髓를 練하여 종말에 승천을 희망함은 도교에서 취하라의 三綱을 擧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李瑄根의 『花郞道硏究』를 보면, "우리 것을 뼈로 하고, 남의 것을 살로 한 人乃天主義의 天道가 아니었더냐"라고 주장하면서 위에 든 일본인 학자 吉川文太郞이 주장하는 예문을 그대로 들고 있다. / 安昶範의 「東經大全의 歷史的 理解」에서 인용.
그는 自己가 創設한 東學을 主體로 생각하여 他宗敎는 이왕 사람들의 偏見에 依하여 創設된것이므로 不變妥當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하고 自己가 天意대로 化出한 東學이 곧 眞正한 天道이며 현재 多樣多種한 宗敎가 /P.231.
P.232. 있지만 今後는 百姓들이 天道의 唯一한 眞理를 깨달아 「山河大運이 모두 이道에 歸할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表面에 내세운것은 三敎의 折衷이며 天主敎라는 西學에 對抗하여 東學을 일르킨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思想에는 天主敎의 影響을 적지않게 받은것이 보인다. 그가 官憲에 逮捕되어 慘害를 當한 原因도 基督敎徒와 恰似한 點에 있었거니와 그의 創設한 東學의 敎旨에는 神에 關한 定義라든가 信仰에 있어서 天主敎의 長點도 融欇한것이 分明하다. 思索과 綜合에 天稟의 才質을 가지고 있는 그는 神의 存在를 是認하고 基督敎의 神의觀念과 儒 佛 仙三敎의 思想을 融合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밖에도 東學에는 朝鮮古來의 傳統的信仰인 巫覡信仰(Shamanism)까지도 融欇한듯하다.
要컨대 李朝末葉에 頹廢의 極點에 達하려던 儒 佛 仙三敎와 새로 드러온 天主敎와 先祖傳來의 巫覡信仰등 自己가 아는 範圍內의 모든 信仰을 自身이 抱持한 感情과 理想으로써 融欇하고자 하였다.
地上天國建設 崔濟愚가 말하는 「保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思想은 그가 地上天國建設의 理想을 말한것인데 이것을 換言하면 主觀的으로는 個人의 人格을 完成하여 精神開闢을 말하는 것이며 客觀的으로는 不平等없는 民族社會를 建設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世界의 信仰을 統一하여 地上天國인 世界一家를 建設하자는것이다. 그는 地上天國建設을 爲하여 保國安民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살림을 標準으로하여 모든 사람의 社會的生活을 完全하고 平等하게 解決하는것을 主張한것이며 布德天下는 無極大道大德의 新宗敎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性 즉 道에屬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標準으로하여 人間個性의 完全解放과 向上을 要求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依하면 이 社會의 一切不平等한 階級制度라든가 貧富의 差라든가 弱肉强食하 /P.232.
P.233. 는 것은 天理에 順한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束縛되어 있던 社會的生活을 完全히 解放하여야 하며 個性的으로는 天道 天理에 順하여 모든 惡性惡習을 버림으로써 個個人의 精神的革命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個個人의 奸惡한 생각이라든가 偏見 我慾을 버리고 固陋한 習性等을 淸算하고 天心 즉 人心인 人間性 本然으로 돌아가는 倫理社會를 建設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人間들이 心身兩面으로 總攝修行하여 天理 天命대로 生活할때에 人乃天 新人間生活을 享受할수 있는 地上天國을 建設할수 있다는 것이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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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와 그의 思想」 1973年度 增補4版의 全文.
略傳 한국精神史上에 위대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교조 崔濟愚는 一八二四年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출생하였고 號는 水雲齊라 불렀다.
자세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곤란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청춘기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청춘기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유교 불교 道敎 天主敎등에 관한 서적을 涉獵하며 內省생활도 하여서 二十臺의 청년으로는 드물게 精神생활이 향상되어 있었다. 三十歲경에는 世道人心이 부패타락함을 개탄하여 各地를 주유하며 人情과 世態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염원하여 그의 內的생활은 더욱 宗敎的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한卷의 책을 얻어 三日間 熟讀 연구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파악하고 그후 精神的苦業을 계속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 四月 어떤날 정신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심신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확실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강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간단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정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착수하여 비로소 조선 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저술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자신은 一心으로 전도 사업에 힘쓰다가 그다음 /P.269
P.270. 에 西學徒로 지목받아 左道惑民의 죄명을 쓰고 大邱監營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받았다.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방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주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전부를 포괄하였다고 볼수 있다. 二十一字의 주문중에서도 下半節 十三字는 그의 사상의 眞諦를 대표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자기가 부른 노래중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 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신도를 대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侍天主라는 것은 「天人如一」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종래 朝鮮人이 생각하던 하눌 또는 하느님과 人間과의 관계에 새로운 立論을 한 것이다. 종래 조선사람들은 인간을 위시하여 地上萬物을 다스리는 絶對最高의 주재신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 주재신은 萬有의 위에 서서 宇宙의 모든 法則을 施行하는 것이라고 알았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靈的脈絡이 없고 兩者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崔濟愚에 의하면 우주간에 모든 萬物이 다 생명이 있는 것이며 이 모든 個體生命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本體생명과는 완전히 하나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모든 만물이 分化되기 이전에 「至氣」라는 本體가 있었고 이것이 점점 分化하여 인간을 위시한 여러 形態의 물체로 分化하였으므로 따지고 보면 사람도 本體생명의 한 部分이며 지체라는 것이다. 人間이 宇宙本體의 한 지체일 뿐만 아니라 宇宙 만물중에는 人間이 가장 우수하고 높은 位置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 人間을 통해 示現되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아닐수 없다는 것이다. 이말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李/P. 270.
「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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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0(2019)년 2월 1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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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1년여에 걸친 와병(臥病)중에 집필한 10여 편의 글 중에 하나로, 이 글 중에 필자의 글이 아닌 자료문헌과 인용문장 그리고 주(註)의 해설 문장 중에 오류(誤謬)가 있을 수 있사오니, 인용(引用)이 필요하신 분은 원문(原文)을 반드시 확인하여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완벽하게 재확인하지 못하고 게재한 점에 대하여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0여 편의 글 중에서 완성된 글은, 금년 천일기념전에 게재가 가능하면 게재하도록 하고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하여는 따로 정식으로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암 심고.
崔濟愚와 그의 思想. / 資料 比較硏究.
金得榥 『韓國思想史』 第三編 儒敎思想時代(第三期)
「第十七章 崔濟愚와 그의 思想」 初版 PP. 227-236./ 4版 PP. 269-276.
/띄어쓰기와 표기는 원문을 그대로 따랐다. - 오암.
「崔濟愚와 그의 思想」 1958年度 初版의 全文.
略傳 韓國精神史上에 偉大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敎祖 崔濟愚는 純祖 二十四年 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出生하였고 號를 水雲齊라 불렀다.
仔細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困難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靑春期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靑春期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儒敎 佛敎 道敎 天主敎等에 관한 書籍을 涉獵하며 內省生活도 하여서 二十臺의 靑年으로는 드물게 精神生活이 向上되어 있었다. 三十歲頃에는 世道人心이 腐敗墮落함을 慨嘆하여 各地를 周遊하며 人情과 世情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念願하여 그의 內的生活은 더욱 宗敎的 方向으로 發展하고 있었다.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一卷의 冊을 얻어 三日間 熟讀 硏究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把握하고 其後 精神的苦業을 繼續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四月 어떤날 精神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心身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確實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P. 227
P.228. 蒼生의 主義(주의가 아니고 신앙의 목표 또는 목적임의 잘못-오암) 를 宣佈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簡單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定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着手하여 비로소 朝鮮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著述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自身은 一心으로 傳道事業에 힘쓰다가 그翌年 西學徒로 指目받아 左道惑民의 罪名을 쓰고 大邱營에서 苛酷한 고문을 받은뒤 死刑을 받았다.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方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呪文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全部를 包括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二十一字의 呪文中에도 侍天主라는 三字는 그의 思想의 眞諦를 代表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自己가 부른 노래中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信徒를 對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侍天主라는 것은 天人如一을 말하는 것으로 從來 사람들이 생각하는 天의 通念에 새로운 立論을 한것이다. 그當時 朝鮮사람들은 天主라하는것이 人間社會와는 別個로 絶對最高의 主宰神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즉 神이라고하면 人間은 勿論하고 地上萬物을 超越하여 別個의 靈的絶對神이 存在하는줄로 알았다. 그리하여 地上에 存在한 어떤物體와 物體와의 사이에 어떤 關係가있음을 認定치 암ㅎ으며 雨露風霜은 모두 天主의 施與하는 바이며 宇宙의 모든 自然法則의 現狀도 天主의 施行하는 것으로 認識하였다. 따라서 天主와 人間과도 靈的脈絡이 없는 別個物로 생각하여 世上사람들은 제멋대로 天命을 不顧하며 서로 헐고 뜯고 빼앗아 非自然한 階級과 不道德한 行爲가 形成되어 혼탁한 人間社會를 만들고 있다고 알았다. /P. 228
P.229. 그러나 그는 天과人, 天과物의 區分關係를 打破하고 人間至上主義를 高調하여 人生과 萬有는 大宇宙 大生命의 표현으로 神의 現實을 顯現한것이라하여 우으로 日月星辰으로부터 아래로 鳥獸나 微生物에 이르기까지 어느것이든지 天主의 顯現아님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그는 「吾心卽汝心」 「天心卽人心」으로 說明하였는데 이것을 孫秉熙는 人乃天이라 하여 이 神人關係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神은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生한다. 山에 사는 사람은 山神을 섬기고 물에 사는 사람은 水神을 섬기는데 山과 물에 神이따로 있는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山에 가면 山에 應하고
물에가면 물에 應하여 或은 기뻐하고 或은 무서워하는데서 神을 自己 마음대로 만들어 스스로 모시고 있다. 卽 사람의 그求하는 바를 쫓아 應하게되는 것이 神이라고.
註 00 ; 天人如一觀 - 윗 글에서 ‘그는 「吾心卽汝心」 「天心卽人心」으로 說明하였는데 이것을 孫秉熙는 人乃天이라 하여’ 라 하여 천도교 시대의 인내천을 天人如一이라 필자가 임의로 명명하고 그러한 주장과 시각에서 출발한 가치관을 天人如一觀이라 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과 표현은 필자인 김득황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천도교 중앙 총부에서 1960년대 이후에 간행된 영역본의 천도교 입문서나 팜플렛에서 인내천(人乃天)을 innaechon(in-nai –chon) 또는 man and GOD are one. Human beings are GOD. 이라고 했고, 한 때는 man is GOD이라고 표기한 적도 있다. man is GOD을 I is GOD이나 I am a GOD이라 하지 않는 것은 동학과 천도교에서의 나는 독립적인 나이면서 우리 속의 나이기 때문에 나는 각자가 어우러져 모인 집단인 우리 즉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한울이 아니고 사람이 한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나가 우리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禮記에 事親如事天은 어버이가 개벽적인 의미를 갖지만 해월이 말한 事人如天의 인은 개별적인 나의 집단인 인간의 무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해월이 개별적인 나를 우리로 확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man is GOD이란 이 영문을 직역한다면 天人如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돈화는 그의 인내천요의와 여러 저서에서 인내천주의 인내천사상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돈화는 『新人哲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내천의 신은 노력과 진화(進化)와 자기관조(自己觀照)로부터 생긴 신이기 때문에 인내천의 신은 만유평등의 내재적 신이 되는 동시에 인간성에서 신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신의 원천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신이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역동적인 신개념과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하고 있다./관련 자료들에서 부분 발췌하여 재정리함. 인내천을 의암의 사상과 교의대로 한다면, 天人如一觀이 아니라 인내천 사상 또는 인내천관이라야 한다.
■ 「人乃天/사람이 곧 한울」이란 용어의 등장시기 - 1905년을 전후하여 간행된 손병희의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사용되어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상적 근원은 최제우의 동경대전에 담겨짐 수운의 侍天主思想에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대신사께서 논학문에서 주문의 뜻을 직접 풀어 말씀하시기를, 모심이란 안으로 신령함을 지니고 있으며 밖으로 기화(氣化)함을 지니고 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옮길 수 없는 것으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니, 이는 영(靈)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정의를 말씀한 것이다.(大神師 嘗呪文之意 解釋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是指稱以靈之有機的表顯道破人乃天之定義也) 라 하였다.
至氣一元觀 崔濟愚는 天과 人間을 또 天과 物을 混然一體(物心一體/논학문에서 渾元之一氣라고 했다. -오암)로보며 宇宙全體에 對하여서도 物心兩元的存在를 否定하고 至氣의 一元的存在라 規定하였다. 그는 東經大全에서 至氣의 뜻을 말하여 「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明(命의 잘못-오암)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分明히 唯心 唯物의 兩元을 至氣로 包括하여 大宇宙의 生命體를 至氣로 表現한 것이다. 그는 至氣로써 唯心 唯物을 總合한 大宇宙의 實在體로 보고 이 至氣의 實在體가 個體로 表顯될때에 心的現象과 物的現象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說明코자 하였다.
그는 心的作用을 全然 相對的存在로 보지 않고 至氣라는 實在體의 表顯이 心的作用과 物的作用으로 나타/P.229.
P.230. 나는것이며 至氣라는것은 唯心 唯物을 總包括한 大宇宙 大生命의 一元的存在라고 했다.
이 至氣一元論도 其根底를 찾아보면 主氣說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그가 出生한 慶尙道地方은 主로 李滉의 學說을 이은 世稱 嶺南學派가 뿌리박고 있던곳으로 主理說을 主張하고 있었는데 崔濟愚도 그周邊의 主理思想에 浸潤되었을 것인데 反動的인 그의 思想에는 反動的으로 오히려 主氣思想에 기울은바가 적지않다.
崔濟愚가 宇宙의 本體를 氣라고 본것은 張橫渠가 宇宙의本體를 太虛로보고 太虛는 곧 氣의 體라는것과 다름이 없고 徐敬德이가 氣로써 宇宙를 一元的으로 본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의 至氣一元說은 李朝中葉主氣派의 巨頭任聖周가 말한 「天地는다만 一氣니라.」라고 喝破하여 宇宙를 氣의一元으로 觀察하고 사람도 氣에 依하여 人生을 보는것과 大同小異하다. 더욱이 崔濟愚의 東經大全의 至氣論은 任聖周의 主張하는바와 相通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의 思想을 通하여보면 人性에 있었어도 氣質의 性의 槪念이 本然의 性의 槪念을 包括하여 있으므로 우리는 氣質의 性을 純化함으써 天心인 人心을 만들수가 있으며 이같은 至氣의 生活을 하는 가운데 人間社會의 不平等과 間隙이 없어지고 均等하고 平和로운 人類社會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三敎圓融論 崔濟愚가 創道한 天道敎는 오늘에도 옛날에도 듣지못하고 오늘에도 옛날에도 比하지 못한다고는 하였지만 天道敎의 思想的基礎는 儒 佛 仙 三敎를 圓融하여 一敎를 創設한 것이며 그의 思想에는 三敎를 融攝하려는 努力이 많이 보인다.
그가 東學을 唱道하고 敎勢가 날로 昌盛하여 갈때에 崔時亨에게 道統을 傳하면서「이道는 原來 儒도아니고 佛도아니고 仙도아니고 儒 佛 仙을 合一한 것이다. 즉 天道는 儒 佛 仙에 由來한것이 아니고 儒 佛 仙이 天/P.230.
註 00 ; 海月神師 法說. 十三. 天道와 儒 佛 仙 /PP.319-320
13-1. 吾道 源於無極而顯於太極 根着於天上地下 理潛於渾元一氣 玄妙之造化與天地日月 同體無窮矣 吾道之眞理 似淺而深 似卑而高 似近而遠 似暗而明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우리의 도는 무극을 본바탕으로 하여 시작되어 태극에 나타났으니 그 근원의 뿌리는 하늘과 땅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치는 혼원한 한 기운(陰陽未分의 一氣=至氣)에 내재해 있었고, 현묘한 조화는 천지일월과 더불어 한 몸으로 무궁하다. 우리 도의 진리는 그 깊이가 얕은 것 같으나 깊고, 속된 것 같으나 고상하고, 가까운 것 같으나 멀고, 어두운 것 같으나 밝은 데 있는 것이다.
13-2. 吾道 似儒似佛似仙 實則 非儒非佛非仙也故曰「萬古無之 無極大道也」先聖只言枝葉 不說根本 我水雲大先生主 始創天地陰陽日月鬼神氣運造化之根本也 苟非聰明達德者 孰能知之 知者鮮矣 可歎也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우리의 도는 「유」와도 비슷하고 「불」과도 비슷하고 「선」과도 비슷한 것 같으나, 사실에서는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그러므로 「만고없는 무극대도」라 스승께서 말씀하셨으니, 옛 성인은 다만 가지와 잎사귀만 말하고 본래 도의 근본을 말하지 못했으나, 우리 수운대선생님께서는 천지․ 음양․ 일월․ 귀신․ 기운․ 조화의 근본을 처음으로 밝히셨다. 참으로 聰明하고 達德하신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알았겠는가. 아는 사람이 적으니 매우 탄식할 일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오늘에도 옛날에도 듣지 못하고 오늘에도 옛날에도 比하지 못한다고는 하였지만은’의 原文은 論學文 중의 曰毁道者何也 曰猶或可也 曰何以可也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修者如虛而有實 聞者如實而有虛也 ⑯을 해석한 것이다.
註 00 ; ‘이道는 原來 儒도아니고 佛도아니고 仙도아니고 儒 佛 仙을 合一한 것이다. -----’의 인용문은 원문과 많이 다르다. 그 원문은 ‘吾道는 元來 ㅣ 儒도아니며 佛도아니며 仙도아니니라 그러나 吾道는 儒佛仙合一. 이니라. 즉天道는 儒佛仙이아니로되 儒佛仙은 天道의 한部分이니라. 儒의倫理와 佛의覺性과 仙의 養氣는 사람性의 自然한 品賦이며 天道의 固有한 部分이니 吾道는 그 無極大源을 잡은 者이라 後에 道를 用하는者ㅣ 이를 誤解하지말도록 指導하라하시고」 이다. / 李敦化 編述, ?天道敎創建史?, 第一編, 第九章, 道統傳授, P.47./李敦化 編述, ?天道敎創建史? 1933,/景仁文化社, 影印本 1982,
P.231. 道의 一部分이 되는 것이다. 儒의倫理가 佛의覺性과 仙의 養0(養氣의 ‘氣’字 가 漏落됨 -오암)모두 人性에 저절로 賦課된 天道의 固有한 部分에 지나지 않지만 이道는 그 無極大源을 다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今後 이道를 믿는 사람을 이點에 留意하여 指導하지않으면 아니된다.」 라고 말하여 率直히 儒 佛 仙 三敎를 採長補短하여 融欇한것을 吐露하였다. 그는 儒 佛 仙 三敎를 融欇하면서도 오히려 自身이 唱道한 東學이 본래부터의 根本的宗敎이고 儒 佛 仙 三敎가 東學의 一部分이라고 說明하였으나 그는 다시말하여 東學은 결국 三敎를 融欇한것이라고 말하였다. 卽「儒敎라는것은 名分을 너무 중히 여기여 玄妙의 域에 達하지 못하며 佛敎는 寂滅에 들어가 倫常을 絶하며 道敎는 自然에 悠遊하여 治平의 術을 缺한다」라고 하여儒 佛 仙 三敎의 短點을 列擧한뒤 自身이 東學創設에 있어서 三敎의 長點을 取한것을 말하여
註 00 ; 道敎와 仙敎 - 중국에서 전국(戰國) 중 · 후기 무렵 발해만(渤海灣) 연안과 사천(四川) 지역을 중심으로 애니미즘(Animism), 토테미즘(Totemism) 등의 원시 신앙에 근거한 민간종교와 무술(巫術),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신선설(神仙說) 등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으로,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노장사상(老莊思想)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국 고대 사회에서 도교는 유(儒) · 불(佛)과 함께 지식인들의 필수적인 교양이었고, 불로장생과 신선설을 통해 기층민에게도 역할을 하였다.
도교가 종교의 형태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 莊子≫·≪열자 列子≫ 등에 드러나 있는 도가사상은 존재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에 도교와 도가사상을 혼동하는 예가 많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도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도가사상과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도교는 본래 피안(彼岸)의 관념이 의외로 희박하고, 오히려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론을 보강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고,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도가의 사상이나 그 논리를 받아 들이게 되었으므로 도교와 도가사상은 그 관계가 밀접해졌다.
도교는 마치 큰 바다가 작고 큰 물줄기들을 두루 받아 들이는 것같이, 온갖 종교·사상·풍속 등을 자체에 편리하게 흡수, 조절하는 특이한 성질을 지니고 변천해 왔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흡수, 조절한 주요한 사상의 하나이지, 본래부터 도교가 곧 도가사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그 사상과 논리를 흡수한 이후에도 사상·문학·예술 등 각 방면에 작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도교는 4세기 이후 비로소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모방하고 불법(佛法)의 전개방식 등을 받아 들여, 교리의 체계화와 종교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다. 도교는 본래 자연발생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질 경우, 교조(敎祖)라든가 개산조(開山祖)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낼 수는 없다. 노자를 교조로 내세우기도 하나 그것 역시 종교의 체제를 갖추게 하려는 의식이 생겨난 뒤의 일이다. 도교라는 종교의 성립과정과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요약해 보면,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다 도가·역리·음양·오행·참위·의술·점성 등의 법술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고, 그것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받아 뭉뚱그린 종교로,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도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다른 신앙까지 큰 마찰없이 받아 들여서 포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가사상은 도교라는 종교와는 엄연히 구별되어서 역대 지식인들에 의하여 연구, 수용되어 한국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 도교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크게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설과 본토 자생설 두 가지로 나뉜다. 중국 전래설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624년(고구려 영류왕 7) 당 고조 이연(李淵)이 고구려에 도사(道士)를 파견하고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과 도법(道法)을 전했다는 기록이다.
한국에서 자생했다고 하는 仙道는 중국의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 그러므로 선도는 신선의 도를 의미한다. 『화랑세기』 7세 설화랑 조를 보면 미실이 설원랑(薛原郎)이 문노(文奴)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仙道)의 스승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한 기록이 나온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一. 五倫五常을 세워 仁에 居하여 義를 行하며 마음을 바로하고 몸을 닦는것은 儒敎에서 取하고
二. 慈悲와 平等을 마음으로하여 몸을 버러 世上을 救하며 道場을 깨끗이 하고 입에 神呪을 誦하고 손에 念珠를 쥐는것은 佛敎에서 取하고
三. 玄을極하여 無極에 이르고 榮利와 名譽를 버리고 無欲淸淨히 몸을가지고 精神을 鍊하여 마지막에 昇天을 希望하는 것은 道敎에서 取한다.
라고 말하였다.
註 00 ; 윗글의 원문 - 十五日曉頭에 大神師 l 謂神師曰吾道ᄂᆞᆫ兼儒佛仙三道也니라.神師 l 曰願聞其旨ᄒᆞ노이다. 大神師 l 曰立綱明倫에居仁行義ᄒᆞ고意誠心正에自身及世ᄂᆞᆫ蓋取諸儒ᄒᆞ고,慈悲爲心에捨身救世ᄒᆞ고 淸潔道場에口呪手珠ᄂᆞᆫ蓋取諸佛ᄒᆞ고,究玄核無에蠲除榮辱ᄒᆞ고淸淨居身에煉髓脫胎ᄂᆞᆫ蓋取諸仙ᄒᆞ니此三道 ㅣ 究其源溯其眞ᄒᆞ면不出於天道範圍之內ᄒᆞ니라./吳尙俊의 本敎歷史 續 P. 15.에서 『天道敎會月報』 제9호(明治 44년 4월/서기 1911년 4월 발행)
註 00 ; 日帝時代에 발간한 {天道敎會月報} 제9호(明治 44년 4월, 서기 1911년 4월)를 보면 비로소 위의 인용문과 거의 똑 같은 원문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十五日曉頭에 大神師謂神師曰 吾道는 兼儒佛仙三道也니라. 神師曰 願聞其旨하나이다. 大神師曰 立綱明倫에 居仁行義하고 意誠心正에 自身及世하니 蓋取諸儒하고, 慈悲爲心에 捨身救世하고 淸潔道場에 口呪手珠하니 蓋取諸佛하고, 究玄核無에 除榮辱하고 淸淨居身에 煉髓脫胎하니 蓋取諸仙하랴, 此三道는 究其源溯其眞하면 不出於天道範圍之內하니라./원문과 다름. 윗 주 윗글의 원문을 대조하여 참조바람.
위의 원문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15일 이른 새벽, 大神師께서 神師에게 이르기를 吾道는 儒·佛·仙 三道를 겸했느니라고 하였다. 이에 신사께서 그 뜻을 듣고자 원하니, 대신사께서 이르기를
1) 기강을 세우고 인륜을 밝혀 仁에 살고 義를 행하여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바르면, 저절로 몸이 세상에 미치니, 어찌 그러한 것을 儒道에서 취하며,
2) 자비를 마음으로 하고 몸을 버려 세상을 구제하며 도장을 청결히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염주를 손에 쥐니, 어찌 그러한 것을 佛道에서 취하며,
3) 玄道를 궁구하여 無爲而化를 기본으로 하고, 영욕을 견제하여 몸을 청정히 하고 골수를 단련하면 육신의 허울을 벗어나니, 어찌 그러한 것을 仙道에서 취하겠는가. 이 三道는 근원을 소급하여 그 진수를 궁구하면 천도의 범위 내를 벗어나지 못하니라. / 安昶範의 「東經大全의 歷史的 理解」에서 인용
註 00 ; 거의가 李瑄根의 저술인 『花郞道硏究』와 日本人 學者 吉川文太郞의 저술인 『朝鮮諸宗敎』/한글판)에서 재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 日本人 學者 吉川文太郞의 저술인 『朝鮮諸宗敎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古語로 된 문장을 현대어로 바꾸었다).
"동학은 새로이 誕生된 宗敎라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造作한 것이라 말하는 편이 적당할 듯하다. 崔氏는 儒·佛·仙 三敎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었다는 것이다. 즉 유교는 名節에 구애되어 아직 玄妙의 域에 이르지 못하였고, 불교는 寂滅로 들어가 倫常을 絶하였으며, 도교는 자연에만 悠適하여 治平의 술을 缺하였다 하면서 다시 천도교의 교지로,
(一) 五倫五常을 세워 仁에 살고 義를 행하며 마음을 바로 하고 뜻을 정성되이 함으로써 몸을 닦아 세상에 미치게 함은 유교에서 取하고,
(二) 자비와 평등을 주지로 삼고, 몸을 버리어 세상을 구제하며 도장을 정결히 하고 입으로 神呪를 외우며 손에 염주를 쥐는 것은 불교에서 취하고,
(三) 玄을 極하여 無極에 이르러 영리와 명예를 버리고 無慾淸淨한 몸을 가지고 神髓를 練하여 종말에 승천을 희망함은 도교에서 취하라의 三綱을 擧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李瑄根의 『花郞道硏究』를 보면, "우리 것을 뼈로 하고, 남의 것을 살로 한 人乃天主義의 天道가 아니었더냐"라고 주장하면서 위에 든 일본인 학자 吉川文太郞이 주장하는 예문을 그대로 들고 있다. / 安昶範의 「東經大全의 歷史的 理解」에서 인용.
그는 自己가 創設한 東學을 主體로 생각하여 他宗敎는 이왕 사람들의 偏見에 依하여 創設된것이므로 不變妥當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하고 自己가 天意대로 化出한 東學이 곧 眞正한 天道이며 현재 多樣多種한 宗敎가 /P.231.
P.232. 있지만 今後는 百姓들이 天道의 唯一한 眞理를 깨달아 「山河大運이 모두 이道에 歸할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表面에 내세운것은 三敎의 折衷이며 天主敎라는 西學에 對抗하여 東學을 일르킨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思想에는 天主敎의 影響을 적지않게 받은것이 보인다. 그가 官憲에 逮捕되어 慘害를 當한 原因도 基督敎徒와 恰似한 點에 있었거니와 그의 創設한 東學의 敎旨에는 神에 關한 定義라든가 信仰에 있어서 天主敎의 長點도 融欇한것이 分明하다. 思索과 綜合에 天稟의 才質을 가지고 있는 그는 神의 存在를 是認하고 基督敎의 神의觀念과 儒 佛 仙三敎의 思想을 融合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밖에도 東學에는 朝鮮古來의 傳統的信仰인 巫覡信仰(Shamanism)까지도 融欇한듯하다.
要컨대 李朝末葉에 頹廢의 極點에 達하려던 儒 佛 仙三敎와 새로 드러온 天主敎와 先祖傳來의 巫覡信仰등 自己가 아는 範圍內의 모든 信仰을 自身이 抱持한 感情과 理想으로써 融欇하고자 하였다.
地上天國建設 崔濟愚가 말하는 「保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思想은 그가 地上天國建設의 理想을 말한것인데 이것을 換言하면 主觀的으로는 個人의 人格을 完成하여 精神開闢을 말하는 것이며 客觀的으로는 不平等없는 民族社會를 建設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世界의 信仰을 統一하여 地上天國인 世界一家를 建設하자는것이다. 그는 地上天國建設을 爲하여 保國安民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살림을 標準으로하여 모든 사람의 社會的生活을 完全하고 平等하게 解決하는것을 主張한것이며 布德天下는 無極大道大德의 新宗敎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性 즉 道에屬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標準으로하여 人間個性의 完全解放과 向上을 要求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依하면 이 社會의 一切不平等한 階級制度라든가 貧富의 差라든가 弱肉强食하 /P.232.
P.233. 는 것은 天理에 順한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束縛되어 있던 社會的生活을 完全히 解放하여야 하며 個性的으로는 天道 天理에 順하여 모든 惡性惡習을 버림으로써 個個人의 精神的革命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個個人의 奸惡한 생각이라든가 偏見 我慾을 버리고 固陋한 習性等을 淸算하고 天心 즉 人心인 人間性 本然으로 돌아가는 倫理社會를 建設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人間들이 心身兩面으로 總攝修行하여 天理 天命대로 生活할때에 人乃天 新人間生活을 享受할수 있는 地上天國을 建設할수 있다는 것이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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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와 그의 思想」 1973年度 增補4版의 全文.
略傳 한국精神史上에 위대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교조 崔濟愚는 一八二四年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출생하였고 號는 水雲齊라 불렀다.
자세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곤란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청춘기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청춘기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유교 불교 道敎 天主敎등에 관한 서적을 涉獵하며 內省생활도 하여서 二十臺의 청년으로는 드물게 精神생활이 향상되어 있었다. 三十歲경에는 世道人心이 부패타락함을 개탄하여 各地를 주유하며 人情과 世態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염원하여 그의 內的생활은 더욱 宗敎的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한卷의 책을 얻어 三日間 熟讀 연구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파악하고 그후 精神的苦業을 계속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 四月 어떤날 정신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심신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확실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강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간단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정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착수하여 비로소 조선 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저술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자신은 一心으로 전도 사업에 힘쓰다가 그다음 /P.269
P.270. 에 西學徒로 지목받아 左道惑民의 죄명을 쓰고 大邱監營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받았다.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방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주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전부를 포괄하였다고 볼수 있다. 二十一字의 주문중에서도 下半節 十三字는 그의 사상의 眞諦를 대표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자기가 부른 노래중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 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신도를 대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侍天主라는 것은 「天人如一」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종래 朝鮮人이 생각하던 하눌 또는 하느님과 人間과의 관계에 새로운 立論을 한 것이다. 종래 조선사람들은 인간을 위시하여 地上萬物을 다스리는 絶對最高의 주재신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 주재신은 萬有의 위에 서서 宇宙의 모든 法則을 施行하는 것이라고 알았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靈的脈絡이 없고 兩者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崔濟愚에 의하면 우주간에 모든 萬物이 다 생명이 있는 것이며 이 모든 個體生命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本體생명과는 완전히 하나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모든 만물이 分化되기 이전에 「至氣」라는 本體가 있었고 이것이 점점 分化하여 인간을 위시한 여러 形態의 물체로 分化하였으므로 따지고 보면 사람도 本體생명의 한 部分이며 지체라는 것이다. 人間이 宇宙本體의 한 지체일 뿐만 아니라 宇宙 만물중에는 人間이 가장 우수하고 높은 位置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 人間을 통해 示現되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아닐수 없다는 것이다. 이말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李/P. 270.
「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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