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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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2).
P. 271. 敦化씨는 「----- 宇宙格의 중심은 自然界에도 있지 아니하며 --- 超自然的 신비계에도 있지아니하며 오직 人間格에 의하여 表顯되는 것이다. 즉 우주大生命의 중심은 인간으로부터 自然界로 降下하여 超自然的 어떤 地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超自然的인 地境으로부터 自然界를 통하여 人間界위에서 그 飛躍을 볼수 있다. 그러므로 人間格 은 곧 宇宙格이다. --- 卽 人乃天은 宇宙格이 人間에 의하여 表現된것을 이름이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이 단락은 李敦化의 『新人哲學』 PP.51-53.과 白世明의 『東學思想과 天道敎』 PP.54-55.를 바탕으로 새로이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崔濟愚는 「天人如一」의 표현을 侍天主라고 말하였는데 「侍」 라는 것은 모신다는 뜻이나 하느님과 동등한 位置에서 모셨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하느님을 모시고 같이 存在한다는 뜻으로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인간의 생각과 經驗이 大宇宙의 本體生命이신 하느님의 생각이나 經驗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本體생명인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또 모든 만물을 人間을 통하여 지배하고 있으므로 人間界는 우주의 주인이며 우주의 중심이며 또 하느님과 인간은 하나라는 것이다.
天人如一의 사상은 事人如天을 말한다. 事人如天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人權의 평등이며 民生의 균등이며 생활의 眞善美化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崔濟愚는 女종 二人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子婦로 삼고 다른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아 그당시 봉건제도하에서 事人如天을을 실청하여 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至氣一元觀 崔濟愚는 인간을 위시하여 日月 星辰 動物 植物등 모든 宇宙속의 萬有가 混然一體(物心一體/논학문에서 渾元之一氣라고 했다. -오암)이며 또 하나로 통일되어 生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까닭은 至氣라는 하나의 本體에서 우주만물이 分化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至」라는 것은 極이란 말로서 宇宙의 本體와 만물의 本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物心兩界의 두 現象을 더듬어 올라가 만물의 근원에 도달하면 여기에는 物質界도 아니고 精神界/P. 271.
P. 272 도 아닌 一元的 實在인 「極」이 있는데 이 極은 至氣라는 것이다. 이 氣라는 것은 物質이라는 개념을 갖지만 이 至氣는 物質도 정신도 아닌 우주의 實體라는 것이다. 이 根源的 實體인 至氣가 스스로 움직이고 작용하는 힘으로써 만유가 分化하였는데 이 至氣의 활동은 자기 表顯이며 自律的 창조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물체를 두고 보면 至氣本體라고 볼수 없지만 萬物 全體를 본다면 한個體는 至氣의 한 部分이며 만물은 다만 至氣本體속에 넘나드는 現象이라는 것이다.
崔濟愚는 至氣의 本質에 대하여 「至氣라는 것은 빈 靈氣가 蒼蒼하며 干涉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나 형용은 있지만 形像하기 어렵고 들을 수 있지만 볼수는 없으니 이것이 또한 混元의 一氣라 할 것이니」 라고 하였다./水雲은 論學文에서 ‘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라고 하였다. -오암 여기에서 빈 靈氣(虛靈)가 蒼蒼하다는 말은 萬有가 分化되기 이전의 至氣本體를 말하는 것이며 干涉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것은 宇宙안의 萬有가 至氣本體에서 分化되지 않는 것이 없고 本體의 생명과 관계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고 형용은 있으되 形像하기 어렵고 들을 수는 있으되 볼 수는 없다라는 말은 宇宙안의 萬有가가 모두 形態가 있으므로 그 모양을 볼 수 있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그 하나 하나를 보아서는 宇宙의 근본원리를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渾元의 一氣」라고 하여 宇宙의 萬象萬有가 全體的 混元인 한덩어리 氣元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事物은 個體로 떼어서 본다든지 萬有를 精神現象이나 物質現象으로만 보아서는 참된 宇宙觀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個體生命이 떨어저 있지만 실제로는 至氣라는 本體生命의 一元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는 唯心 唯物을 相對的존재로 보지 않고 至氣라는 實在體의 표현이 心的작용과 物的작용으로 나타/P.272
P.272. 나는 것이며 至氣라는것은 唯心 唯物을 모두 包括한 大宇宙 大生命의 一元的存在라고 했다.
이 至氣一元論도 그 根底를 찾아보면 主氣說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출생한 慶尙道지방은 李滉의 學說을 이은 세칭 嶺南學派가 뿌리박고 있던곳으로 主理說이 유행 하였는데 崔濟愚도 그周圍의 主理사상에 물들었을 것인데 反動的인 그의 사상에는 오히려 主氣說에 기울은바가 적지 않다.
註 00 ;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性理學)은 관념적인 이기론(理氣論)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이(理: 정신적 요소)와 기(氣: 물질적 요소)로써 구성되었으며, 理와 氣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유형적 존재는 모두 무형의 원리 또는 원인에 의하여 생성, 변화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理와 氣에 의한 존재론적 규정과 생성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理와 氣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 위에 있고, 또 동시에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의 생성원리로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이(理)인가 아니면 기(氣)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하는데, 주리론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성종 22∼명종 8) 호는 회재(晦齋))을 선구자로 하였고,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 하였다. 주리론을 대표하는 학자는 이황(李滉 滉 1501∼1570(연산군 7∼선조 3) 퇴계(退溪))이었다.
기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기론(主氣論)이라고 하는데, 주기론은 서경덕 (화담(花潭) 徐敬德 1489∼1546(성종 20∼명종 1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우주 본질로서의 이(理)와 기(氣)를 논하고, 이와 기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陰陽)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 기철학(氣哲學)의 학맥을 형성케 하였다.)을 선구자로 하였고,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 하였다. 주기론을 대표하는 학자는,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는 이이(李珥/栗谷 1536∼1584/중종 31∼선조 17)였다.
이황은 주자(朱子-중국 南宋시대의 사상가)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는 이는 기가 활동하는 바탕이 되고, 기를 통제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理의 문제(도덕과 사회 윤리 등)를 해결하면 氣의 문제(경제적인 문제 등)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주리철학은 향촌에서 중소지주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사림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이황의 학통은 김성일(金誠一 1538∼1593(중종 33∼선조 26)), 유성룡(柳成龍/西厓 1542∼1607(중종 37∼선조 40) 등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다.
이이는 주자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이것은 이기이원론을 부분적으로 받아드리면서도 理보다 氣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는 기의 문제를 해결해야 이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도덕적인 가르침보다 먼저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이의 학통은 조헌(趙憲 1544∼1592(중종 39∼선조 25) 중봉(重峰)), 김장생(金長生 1548∼1631(명종 3∼인조 9) 사계(沙溪)) 등으로 이어져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이르러 사림은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심오한 이기철학을 성립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통해 정치를 활성화 하였으나, 너무 도덕주의에 치우쳐서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을 소홀히 하는 약점을 드러냈다
주리론(主理論)
우주의 본체(理)와 작용(氣)을 이(理)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이론. 주희(朱熹)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받아들여 집대성한 이황(李滉)과 그를 계승한 영남학파에 의하여 전개된 이론이다. 이황은, 이와 기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동시에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고 하여 이선기후(理先氣後)를 강조하면서, 이 자체도 능동적인 운동능력을 가진다고 보아 이기상호호발(理氣相互互發)을 주장하였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이라는 이황(李滉)의 학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을 뜻하며, 칠정은 회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으로 7가지 인간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에서도 도심(道心)은 사단(四端-맹자(孟子)의 용어. 측은(惻隱;가엾음)·수오(羞惡;염치)·사양(辭讓;겸손)·시비(是非;善惡의 판단))으로서 본연의 성(性)인 이가 발한 것이며, 인심(人心)은 칠정(七情-회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으로서 기질의 성인 기가 발한 것이라고 설명하여, 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이존기비(理尊氣卑)를 주장하였다.
한편 영남학파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더 나아가 이발설(理發說)을 내세우면서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이어받아, 기발(氣發)만을 주장하였던 기호학파와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남에 따라 서로를 각기 주기파(主氣派)·주리파(主理派)라 부르게 되었다. 영남학파 이외에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도 주리론을 계승·발전시킨 대표적 학자들이다
주기론(主氣論)
조선 후기에 이이(李珥)에 의하여 주창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된 성리학설. 조선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심성론(心性論)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연구한 대표적 학자인 이황(李滉)은 일찍이 사단은 이발(理發)로, 칠정은 기발(氣發)로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대승(奇大升 1527∼1572(중종 22∼선조 5) 고봉(高峰))은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기대승의 학설은 이이에 의하여 계승되어 체계화되었고, 이이의 사상은 후대에 오면서 주기론으로 구체화되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는 것은 주리론과 다를 바 없으나, 이와 기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주리론과는 달리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즉 氣는 發하고 理는 發하지 않지만, 理는 氣가 발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理와 氣는 하나의 혼륜체(混淪體)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주기론은 주리론과 똑같이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지만 본연지성(本然之性-선한 본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각각의 존재로 규정하는 주리론과는 반대로, 하나의 기질지성 안에 있는 이의 측면에 본연지성이 들어가 있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외부의 사물을 접하여 마음 내부의 기가 움직여야 의식과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기의 움직임을 통하여 이가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을 접하는 마음 내부의 기질이 먼저 선하게 되어야 본연지성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도덕적 실천이 가능하여 진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기론을 계승·체계화시킨 학파는 기호학파이며, 주기론은 후대에 호락논쟁(湖洛論爭 :낙론(洛論)-인성과 물성이 서로 같다. 호론(湖論)-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르다)으로 분파되었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은 유교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유교는 천지만물은 기(氣)로 가득 차 있고, 그러한 氣는 음(陰)과 양(陽)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陰과 陽의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서 천지만물을 생성시키는 끊임없는 생명실현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理)라는 것은 이러한 (氣)의 흐름의 법칙을 말한다. 氣흐름의 원리가 바로 理이다. 근데, 理에 따른 氣의 작용은 천지만물을 만들고 끊임없이 생명을 실현해내고 있기에 순수한 善이다. 理는 순수한 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실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운행원리인 理가 인간의 본성과 같아서 인간 속에 내재된 理를 性이라 하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우주원리이자 고로 생명을 실현시키는 善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孟子)이 성립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 성리학이다. 이기론은 성리학의 관점이다. 사람은 혼(魂)과 백(帛)으로 이뤄져 있다. 혼은 하늘의 양기를 받은 것이고, 백은 땅의 음기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혼이 性을 지닌 즉 理이기에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귀신을 보았다는 것은 실재로 혼을 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혼과 백이 분리되는데 그 과정에서 혼이 놀라기 때문에 혼을 달래주는 제례가 필요하다. 백은 땅의 음기가 발한 것이므로 다시 땅에 묻는 것이다. 혼을 잘 달래서 다시 하늘의 양기로 환원시키지 못하면 그 혼은 세상을 헤매게 되어 혼이 약한 백에 침투하여 빙의(憑依)를 일으킨다.
이기론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된 것은 사단칠정논쟁이 있었을 때이다. 사단칠정논쟁은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고, 그러한 관념적인 논쟁이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의미있게 다뤄진 이유는 그들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은 전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나타난다고 보았고,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사단칠정논쟁은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우선 퇴계 이황은 사단(四端)을 理의 발현으로, 칠정(七情)을 氣의 발현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순수한 善인 理가 발한 사단은 순수한 선이고, 칠정에는 악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고봉의 반박에 부딪힌다. 理는 하나의 원리이지 스스로 發하는 것이 아니며, 발하는 것은 氣라는 것이 고봉(高峰)의 반박의 주된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황은 이러한 고봉의 반박을 수용하여 약간의 수정을 하지만 理가 발한다는 내용에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황의 독특한 사상이 담긴 것인데, 이황은 理라는 것이 순수한 도덕본성으로서 자발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理가 발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주장했다.
율곡 이이는 이에 대해 자신의 새로운 의견을 내세우고 이이의 의견으로 사단칠정론은 일단락된다. 이이의 주장은 이승기발(理乘氣發)로서 사단이든 칠정이든 발하는 것은 氣이고 理는 발하는 氣 위에 탄다는 입장이다. 이로써 사단칠정론은 정리된다./http://saso8888.egloos.com/8579983에서 발췌. 일부는 정리.
崔濟愚가 우주의 本體를 氣라고 본것은 張橫渠가 우주의 本體를 太虛로 보고 太虛는 곧 氣의 體라는것과 다름이 없고 徐敬德이가 氣로써 우주를 一元的으로 본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의 至氣一元說은 李朝 중엽 主氣派의 巨頭任聖周가 말한 「天地는 다만 一氣니라.」라고 갈파하여 우주를 氣의一元으로 觀察하고 사람도 氣의 한 部分이라고 보는것과 大同小異하다. 더우기 崔濟愚의 東經大全의 至氣論은 任聖周의 주장하는바와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의 사상을 통하여 보면 人性에 있었어도 氣質의 性의 槪念이 本然의 性의 槪念을 포괄하여 있으므로 우리는 氣質의 性을 純化함으써 天心인 人心을 만들수가 있으며 이같은 至氣를 이해하는 生活을 하는 가운데 人間사회의 不平等과 간격이 없어지고 均等하고 平和로운 人類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三敎圓融論 崔濟愚가 창도한 天道敎는 그 자신이 「오늘에도 옛날에도 듣지못하고 오늘에도 옛날에도 비할 것이 없다./曰毁道者何也 曰猶或可也 曰何以可也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修者如虛而有實 聞者如實而有虛也 ⑯論學文-오암.」 라고 말하였지만 天道敎의 思想的기초는 儒 佛 仙 三敎를 圓融하여 一敎를 창설한 것이며 그의 사상에는 三敎를 融攝하려는 노력이 많이 보인다.
그가 東學을 창도하고 敎勢가 날로 창성하여 갈때에 崔時亨에게 道統을 전하면서 「이道는 원래 儒도아니고 佛도아니고 仙도아니고 儒 佛 仙을 合一한 것이다. 즉 天道는 儒 佛 仙에 유래한것이 아니고 /P.273.
P.274. 儒 佛 仙이 天道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儒의 倫理가 佛의 覺性과 仙의 養氣는 모두 人性에 저절로 부과된 天道의 고유한 部分에 지나지 않지만 이道는 그 無極大源을 다 얻은 것이다./이 부분은 이돈화의 『天道敎創建史』 第一編 水雲大神師. P.47.의 내용 바탕으로 기술하였다.-오암. 그러므로 今後 이道를 믿는 사람을 이點에 留意하여 指導하지않으면 아니된다.」 라고 말하여 솔직히 天道敎가 儒 佛 仙 三敎를 採長補短하여 融欇한것을 吐露하였다. 그는 儒 佛 仙 三敎를 融欇하면서도 오히려 自身이 唱道한 東學이 본래부터의 根本的宗敎이고 儒 佛 仙 三敎가 東學의 一部分이라고 說明하였으나 그는 다시 말하여 東學은 결국 三敎를 融欇한것이라고 말하였다. 卽 「유교라는것은 명분을 너무 중히 여기여 玄妙의 域에 달하지 못하며 불교는 寂滅에 들어가 倫常을 끊으며 仙교는 自然에 悠遊하여 治平의 術을 缺한다」라고 하여 儒 佛 仙 三敎의 短點을 열거한뒤 자신이 東學創設에 있어서 三敎의 長點을 취한것을 말하여
一. 五倫 五常을 세워 仁에 거하여 義를 행하며 마음을 바로하고 몸을 닦는 것은 儒敎에서 취하고
二. 慈悲와 평등을 마음으로하여 몸을 버러 세상을 救하며 道場을 깨끗이 하고 입에 神呪를 외우고 손에 念珠를 쥐는 것은 불교에서 취하고
三. 玄을 極하여 무극에 이르고 영리와 명예를 버리고 無欲淸淨히 몸을가지고 精神을 닦아 마지막에 昇天을 희망하는 것은 도교에서 취하였다 라고 말한다.
그는 自己가 창설한 東學을 主體로 생각하여 다른 宗敎는 이왕 사람들의 偏見에 의하여 창설된것이므로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하고 자기가 天意대로 化出한 東學이 곧 진정한 天道이며 현재 여러가지 宗敎가 있지만 이후는 百姓들이 天道의 唯一한 진리를 깨달아 「山河大運이 모두 이 道에 歸할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표면에 내세운것은 三敎의 절충이며 天主敎라는 西學에 대항하여 東學을 일으/P.274.
P.275. 킨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思想에는 天主敎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이 보인다. 그가 官憲에 체포되어 慘害를 당한 원인도 基督敎徒와 비슷한 점에 있었거니와 그가 창설한 東學의 교지에는 神에 관한 定義라든가 신앙에 있어서 天主敎의 장점도 融欇한 것이 분명하다. 思索과 綜合에 천품의 재질을 가지고 있는 그는 神의 존재를 是認하고 기독교의 神의 관념과 儒 佛 仙三敎의 사상을 融合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밖에도 東學에는 조선古來의 전통적신앙인 巫覡신앙(Shamanism)까지도 融欇한듯하다.
요컨대 李朝말엽에 頹廢의 極點에 달하려던 儒 佛 仙삼교와 새로 들어온 천주교와 先祖 전래의 巫覡신앙 등 자기가 아는 範圍內의 모든 종교에다가 自身이 抱持한 감정을 배합하고자 하였다.
地上天國建設 崔濟愚가 말하는 「保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사상은 그가 地上天國건설의 理想을 말한것인데 이것은 主觀的으로는 個人의 인격을 完成하여 精神개혁을 하고자하는 것이며 客觀的으로는 不平等없는 사회를 建設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信仰을 통일하여 지상천국인 世界一家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는 地上天國건설을 위하여 保國安民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살림을 標準으로하여 모든 사람의 사회적 生活을 평화롭고 平等하게 누리는 것을 주장한 것이며 布德天下는 無極大道 大德의 새宗敎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性 즉 道에 속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표준으로 하여 人間個性의 완전해방과 向上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이 사회의 一切 不平等한 계급제도라든가 貧富의 차라든가 弱肉强食하는 것은 天理에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不條理가 많은 社會的 모순을 완전히 除去하여야 하며 個個人은 天道 天理에 순응하여 모든 惡性 惡習을 버림으로써 정신적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個個人의 간악한 생각이라든가 편견 我慾을 버리고 固陋한 습성을 淸算하고 天心 즉 人心/P.275.
P.276. 인 人間性 本然으로 돌아가는 倫理社會를 建設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人間들이 心身兩面으로 總攝修行하여 天理 天命대로 生活할 때에 人乃天 新人間生活을 享受할수 있는 地上天國을 建設할수 있다는 것이다./P.276.
參考文獻
金得榥 韓國思想史/初版 南山堂 서울 1958.
金得榥 韓國思想史/增補4版 韓國思想硏究所 서울 1973.
李敦化 天道敎創建史/天道敎中央宗理院 京城 1933.
李敦化 新人哲學/開闢社出版部 京城 1924.
李敦化 人乃天要義/開闢社出版部 京城 1924.
白世明 東學思想과 天道敎/東學社 서울 1956.
기타 여러 관련 자료들을 살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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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榥 韓國思想史 중의 「崔濟愚와 그의 思想」 初版과 增補4版의 比較硏究.
金得榥 韓國思想史 第三編 儒敎思想時代
第十七章 崔濟愚와 그의 思想
■ 초판은 고문투의 漢主國從體로 되어 있으나, 增補4版은 언뜻 보기에는 國主漢從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增補4版이 어느 정도의 근현대표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고 실제는 漢主國從體로 되어 있다. 그리고 增補4版은 상당수의 단어들이 한문에서 국어로 표기되었고, 띄어쓰기 표기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며, 일부 내용은 添削이 되었고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보아지는 단어들은 修正補完이 되었다. /오암
初版
略傳 韓國精神史上에 偉大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敎祖 崔濟愚는 純祖 二十四年 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出生하였고 號를 水雲齊라 불렀다.
增補4版
略傳 한국精神史上에 위대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교조 崔濟愚는 一八二四年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출생하였고 號는 水雲齊라 불렀다.
初版
仔細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困難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靑春期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靑春期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儒敎 佛敎 道敎 天主敎等에 관한 書籍을 涉獵하며 內省生活도 하여서 二十臺의 靑年으로는 드물게 精神生活이 向上되어 있었다. 三十歲頃에는 世道人心이 腐敗墮落함을 慨嘆하여 各地를 周遊하며 人情과 世情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念願하여 그의 內的生活은 더욱 宗敎的 方向으로 發展하고 있었다.
增補4版
자세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곤란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청춘기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청춘기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유교 불교 道敎 天主敎등에 관한 서적을 涉獵하며 內省생활도 하여서 二十臺의 청년으로는 드물게 精神생활이 향상되어 있었다. 三十歲경에는 世道人心이 부패타락함을 개탄하여 各地를 주유하며 人情과 世態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염원하여 그의 內的생활은 더욱 宗敎的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初版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一卷의 冊을 얻어 三日間 熟讀 硏究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把握하고 其後 精神的苦業을 繼續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四月 어떤날 精神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心身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確實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P. 227
P.228. 蒼生의 主義(주의가 아니고 신앙의 목표 또는 목적임의 잘못-오암) 를 宣佈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簡單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定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着手하여 비로소 朝鮮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著述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自身은 一心으로 傳道事業에 힘쓰다가 그翌年 西學徒로 指目받아 左道惑民의 罪名을 쓰고 大邱營에서 苛酷한 고문을 받은뒤 死刑을 받았다.
增補4版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한卷의 책을 얻어 三日間 熟讀 연구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파악하고 그후 精神的苦業을 계속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 四月 어떤날 정신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심신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확실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강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간단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정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착수하여 비로소 조선 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저술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자신은 一心으로 전도 사업에 힘쓰다가 그다음 /P.269
P.270. 에 西學徒로 지목받아 左道惑民의 죄명을 쓰고 大邱監營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받았다.
初版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方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呪文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全部를 包括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二十一字의 呪文中에도 侍天主라는 三字는 그의 思想의 眞諦를 代表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自己가 부른 노래中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信徒를 對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增補4版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방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주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전부를 포괄하였다고 볼수 있다. 二十一字의 주문중에서도 (侍天主라는 三字를, 下半節 十三字로 바꾸었다.-오암) 下半節 十三字는 그의 사상의 眞諦를 대표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자기가 부른 노래중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 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신도를 대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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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71. 敦化씨는 「----- 宇宙格의 중심은 自然界에도 있지 아니하며 --- 超自然的 신비계에도 있지아니하며 오직 人間格에 의하여 表顯되는 것이다. 즉 우주大生命의 중심은 인간으로부터 自然界로 降下하여 超自然的 어떤 地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超自然的인 地境으로부터 自然界를 통하여 人間界위에서 그 飛躍을 볼수 있다. 그러므로 人間格 은 곧 宇宙格이다. --- 卽 人乃天은 宇宙格이 人間에 의하여 表現된것을 이름이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이 단락은 李敦化의 『新人哲學』 PP.51-53.과 白世明의 『東學思想과 天道敎』 PP.54-55.를 바탕으로 새로이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崔濟愚는 「天人如一」의 표현을 侍天主라고 말하였는데 「侍」 라는 것은 모신다는 뜻이나 하느님과 동등한 位置에서 모셨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하느님을 모시고 같이 存在한다는 뜻으로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인간의 생각과 經驗이 大宇宙의 本體生命이신 하느님의 생각이나 經驗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本體생명인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또 모든 만물을 人間을 통하여 지배하고 있으므로 人間界는 우주의 주인이며 우주의 중심이며 또 하느님과 인간은 하나라는 것이다.
天人如一의 사상은 事人如天을 말한다. 事人如天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人權의 평등이며 民生의 균등이며 생활의 眞善美化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崔濟愚는 女종 二人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子婦로 삼고 다른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아 그당시 봉건제도하에서 事人如天을을 실청하여 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至氣一元觀 崔濟愚는 인간을 위시하여 日月 星辰 動物 植物등 모든 宇宙속의 萬有가 混然一體(物心一體/논학문에서 渾元之一氣라고 했다. -오암)이며 또 하나로 통일되어 生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까닭은 至氣라는 하나의 本體에서 우주만물이 分化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至」라는 것은 極이란 말로서 宇宙의 本體와 만물의 本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物心兩界의 두 現象을 더듬어 올라가 만물의 근원에 도달하면 여기에는 物質界도 아니고 精神界/P. 271.
P. 272 도 아닌 一元的 實在인 「極」이 있는데 이 極은 至氣라는 것이다. 이 氣라는 것은 物質이라는 개념을 갖지만 이 至氣는 物質도 정신도 아닌 우주의 實體라는 것이다. 이 根源的 實體인 至氣가 스스로 움직이고 작용하는 힘으로써 만유가 分化하였는데 이 至氣의 활동은 자기 表顯이며 自律的 창조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물체를 두고 보면 至氣本體라고 볼수 없지만 萬物 全體를 본다면 한個體는 至氣의 한 部分이며 만물은 다만 至氣本體속에 넘나드는 現象이라는 것이다.
崔濟愚는 至氣의 本質에 대하여 「至氣라는 것은 빈 靈氣가 蒼蒼하며 干涉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나 형용은 있지만 形像하기 어렵고 들을 수 있지만 볼수는 없으니 이것이 또한 混元의 一氣라 할 것이니」 라고 하였다./水雲은 論學文에서 ‘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라고 하였다. -오암 여기에서 빈 靈氣(虛靈)가 蒼蒼하다는 말은 萬有가 分化되기 이전의 至氣本體를 말하는 것이며 干涉하지 않는 것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것은 宇宙안의 萬有가 至氣本體에서 分化되지 않는 것이 없고 本體의 생명과 관계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고 형용은 있으되 形像하기 어렵고 들을 수는 있으되 볼 수는 없다라는 말은 宇宙안의 萬有가가 모두 形態가 있으므로 그 모양을 볼 수 있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그 하나 하나를 보아서는 宇宙의 근본원리를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渾元의 一氣」라고 하여 宇宙의 萬象萬有가 全體的 混元인 한덩어리 氣元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事物은 個體로 떼어서 본다든지 萬有를 精神現象이나 物質現象으로만 보아서는 참된 宇宙觀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個體生命이 떨어저 있지만 실제로는 至氣라는 本體生命의 一元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는 唯心 唯物을 相對的존재로 보지 않고 至氣라는 實在體의 표현이 心的작용과 物的작용으로 나타/P.272
P.272. 나는 것이며 至氣라는것은 唯心 唯物을 모두 包括한 大宇宙 大生命의 一元的存在라고 했다.
이 至氣一元論도 그 根底를 찾아보면 主氣說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출생한 慶尙道지방은 李滉의 學說을 이은 세칭 嶺南學派가 뿌리박고 있던곳으로 主理說이 유행 하였는데 崔濟愚도 그周圍의 主理사상에 물들었을 것인데 反動的인 그의 사상에는 오히려 主氣說에 기울은바가 적지 않다.
註 00 ;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性理學)은 관념적인 이기론(理氣論)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이(理: 정신적 요소)와 기(氣: 물질적 요소)로써 구성되었으며, 理와 氣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유형적 존재는 모두 무형의 원리 또는 원인에 의하여 생성, 변화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理와 氣에 의한 존재론적 규정과 생성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理와 氣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 위에 있고, 또 동시에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의 생성원리로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이(理)인가 아니면 기(氣)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하는데, 주리론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성종 22∼명종 8) 호는 회재(晦齋))을 선구자로 하였고,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 하였다. 주리론을 대표하는 학자는 이황(李滉 滉 1501∼1570(연산군 7∼선조 3) 퇴계(退溪))이었다.
기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기론(主氣論)이라고 하는데, 주기론은 서경덕 (화담(花潭) 徐敬德 1489∼1546(성종 20∼명종 1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우주 본질로서의 이(理)와 기(氣)를 논하고, 이와 기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陰陽)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 기철학(氣哲學)의 학맥을 형성케 하였다.)을 선구자로 하였고,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 하였다. 주기론을 대표하는 학자는,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는 이이(李珥/栗谷 1536∼1584/중종 31∼선조 17)였다.
이황은 주자(朱子-중국 南宋시대의 사상가)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는 이는 기가 활동하는 바탕이 되고, 기를 통제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理의 문제(도덕과 사회 윤리 등)를 해결하면 氣의 문제(경제적인 문제 등)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주리철학은 향촌에서 중소지주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사림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이황의 학통은 김성일(金誠一 1538∼1593(중종 33∼선조 26)), 유성룡(柳成龍/西厓 1542∼1607(중종 37∼선조 40) 등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다.
이이는 주자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이것은 이기이원론을 부분적으로 받아드리면서도 理보다 氣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는 기의 문제를 해결해야 이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도덕적인 가르침보다 먼저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이의 학통은 조헌(趙憲 1544∼1592(중종 39∼선조 25) 중봉(重峰)), 김장생(金長生 1548∼1631(명종 3∼인조 9) 사계(沙溪)) 등으로 이어져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이르러 사림은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심오한 이기철학을 성립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통해 정치를 활성화 하였으나, 너무 도덕주의에 치우쳐서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을 소홀히 하는 약점을 드러냈다
주리론(主理論)
우주의 본체(理)와 작용(氣)을 이(理)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이론. 주희(朱熹)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받아들여 집대성한 이황(李滉)과 그를 계승한 영남학파에 의하여 전개된 이론이다. 이황은, 이와 기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동시에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고 하여 이선기후(理先氣後)를 강조하면서, 이 자체도 능동적인 운동능력을 가진다고 보아 이기상호호발(理氣相互互發)을 주장하였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이라는 이황(李滉)의 학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을 뜻하며, 칠정은 회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으로 7가지 인간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에서도 도심(道心)은 사단(四端-맹자(孟子)의 용어. 측은(惻隱;가엾음)·수오(羞惡;염치)·사양(辭讓;겸손)·시비(是非;善惡의 판단))으로서 본연의 성(性)인 이가 발한 것이며, 인심(人心)은 칠정(七情-회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으로서 기질의 성인 기가 발한 것이라고 설명하여, 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이존기비(理尊氣卑)를 주장하였다.
한편 영남학파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더 나아가 이발설(理發說)을 내세우면서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이어받아, 기발(氣發)만을 주장하였던 기호학파와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남에 따라 서로를 각기 주기파(主氣派)·주리파(主理派)라 부르게 되었다. 영남학파 이외에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도 주리론을 계승·발전시킨 대표적 학자들이다
주기론(主氣論)
조선 후기에 이이(李珥)에 의하여 주창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된 성리학설. 조선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심성론(心性論)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연구한 대표적 학자인 이황(李滉)은 일찍이 사단은 이발(理發)로, 칠정은 기발(氣發)로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대승(奇大升 1527∼1572(중종 22∼선조 5) 고봉(高峰))은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기대승의 학설은 이이에 의하여 계승되어 체계화되었고, 이이의 사상은 후대에 오면서 주기론으로 구체화되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는 것은 주리론과 다를 바 없으나, 이와 기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주리론과는 달리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즉 氣는 發하고 理는 發하지 않지만, 理는 氣가 발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理와 氣는 하나의 혼륜체(混淪體)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주기론은 주리론과 똑같이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지만 본연지성(本然之性-선한 본성)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각각의 존재로 규정하는 주리론과는 반대로, 하나의 기질지성 안에 있는 이의 측면에 본연지성이 들어가 있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외부의 사물을 접하여 마음 내부의 기가 움직여야 의식과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기의 움직임을 통하여 이가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을 접하는 마음 내부의 기질이 먼저 선하게 되어야 본연지성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도덕적 실천이 가능하여 진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기론을 계승·체계화시킨 학파는 기호학파이며, 주기론은 후대에 호락논쟁(湖洛論爭 :낙론(洛論)-인성과 물성이 서로 같다. 호론(湖論)-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르다)으로 분파되었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은 유교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유교는 천지만물은 기(氣)로 가득 차 있고, 그러한 氣는 음(陰)과 양(陽)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陰과 陽의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서 천지만물을 생성시키는 끊임없는 생명실현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理)라는 것은 이러한 (氣)의 흐름의 법칙을 말한다. 氣흐름의 원리가 바로 理이다. 근데, 理에 따른 氣의 작용은 천지만물을 만들고 끊임없이 생명을 실현해내고 있기에 순수한 善이다. 理는 순수한 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실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운행원리인 理가 인간의 본성과 같아서 인간 속에 내재된 理를 性이라 하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우주원리이자 고로 생명을 실현시키는 善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孟子)이 성립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 성리학이다. 이기론은 성리학의 관점이다. 사람은 혼(魂)과 백(帛)으로 이뤄져 있다. 혼은 하늘의 양기를 받은 것이고, 백은 땅의 음기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혼이 性을 지닌 즉 理이기에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귀신을 보았다는 것은 실재로 혼을 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혼과 백이 분리되는데 그 과정에서 혼이 놀라기 때문에 혼을 달래주는 제례가 필요하다. 백은 땅의 음기가 발한 것이므로 다시 땅에 묻는 것이다. 혼을 잘 달래서 다시 하늘의 양기로 환원시키지 못하면 그 혼은 세상을 헤매게 되어 혼이 약한 백에 침투하여 빙의(憑依)를 일으킨다.
이기론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된 것은 사단칠정논쟁이 있었을 때이다. 사단칠정논쟁은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고, 그러한 관념적인 논쟁이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의미있게 다뤄진 이유는 그들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은 전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나타난다고 보았고,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감정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사단칠정논쟁은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우선 퇴계 이황은 사단(四端)을 理의 발현으로, 칠정(七情)을 氣의 발현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순수한 善인 理가 발한 사단은 순수한 선이고, 칠정에는 악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고봉의 반박에 부딪힌다. 理는 하나의 원리이지 스스로 發하는 것이 아니며, 발하는 것은 氣라는 것이 고봉(高峰)의 반박의 주된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황은 이러한 고봉의 반박을 수용하여 약간의 수정을 하지만 理가 발한다는 내용에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황의 독특한 사상이 담긴 것인데, 이황은 理라는 것이 순수한 도덕본성으로서 자발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理가 발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주장했다.
율곡 이이는 이에 대해 자신의 새로운 의견을 내세우고 이이의 의견으로 사단칠정론은 일단락된다. 이이의 주장은 이승기발(理乘氣發)로서 사단이든 칠정이든 발하는 것은 氣이고 理는 발하는 氣 위에 탄다는 입장이다. 이로써 사단칠정론은 정리된다./http://saso8888.egloos.com/8579983에서 발췌. 일부는 정리.
崔濟愚가 우주의 本體를 氣라고 본것은 張橫渠가 우주의 本體를 太虛로 보고 太虛는 곧 氣의 體라는것과 다름이 없고 徐敬德이가 氣로써 우주를 一元的으로 본것과 다름이 없으며 그의 至氣一元說은 李朝 중엽 主氣派의 巨頭任聖周가 말한 「天地는 다만 一氣니라.」라고 갈파하여 우주를 氣의一元으로 觀察하고 사람도 氣의 한 部分이라고 보는것과 大同小異하다. 더우기 崔濟愚의 東經大全의 至氣論은 任聖周의 주장하는바와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의 사상을 통하여 보면 人性에 있었어도 氣質의 性의 槪念이 本然의 性의 槪念을 포괄하여 있으므로 우리는 氣質의 性을 純化함으써 天心인 人心을 만들수가 있으며 이같은 至氣를 이해하는 生活을 하는 가운데 人間사회의 不平等과 간격이 없어지고 均等하고 平和로운 人類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三敎圓融論 崔濟愚가 창도한 天道敎는 그 자신이 「오늘에도 옛날에도 듣지못하고 오늘에도 옛날에도 비할 것이 없다./曰毁道者何也 曰猶或可也 曰何以可也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修者如虛而有實 聞者如實而有虛也 ⑯論學文-오암.」 라고 말하였지만 天道敎의 思想的기초는 儒 佛 仙 三敎를 圓融하여 一敎를 창설한 것이며 그의 사상에는 三敎를 融攝하려는 노력이 많이 보인다.
그가 東學을 창도하고 敎勢가 날로 창성하여 갈때에 崔時亨에게 道統을 전하면서 「이道는 원래 儒도아니고 佛도아니고 仙도아니고 儒 佛 仙을 合一한 것이다. 즉 天道는 儒 佛 仙에 유래한것이 아니고 /P.273.
P.274. 儒 佛 仙이 天道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儒의 倫理가 佛의 覺性과 仙의 養氣는 모두 人性에 저절로 부과된 天道의 고유한 部分에 지나지 않지만 이道는 그 無極大源을 다 얻은 것이다./이 부분은 이돈화의 『天道敎創建史』 第一編 水雲大神師. P.47.의 내용 바탕으로 기술하였다.-오암. 그러므로 今後 이道를 믿는 사람을 이點에 留意하여 指導하지않으면 아니된다.」 라고 말하여 솔직히 天道敎가 儒 佛 仙 三敎를 採長補短하여 融欇한것을 吐露하였다. 그는 儒 佛 仙 三敎를 融欇하면서도 오히려 自身이 唱道한 東學이 본래부터의 根本的宗敎이고 儒 佛 仙 三敎가 東學의 一部分이라고 說明하였으나 그는 다시 말하여 東學은 결국 三敎를 融欇한것이라고 말하였다. 卽 「유교라는것은 명분을 너무 중히 여기여 玄妙의 域에 달하지 못하며 불교는 寂滅에 들어가 倫常을 끊으며 仙교는 自然에 悠遊하여 治平의 術을 缺한다」라고 하여 儒 佛 仙 三敎의 短點을 열거한뒤 자신이 東學創設에 있어서 三敎의 長點을 취한것을 말하여
一. 五倫 五常을 세워 仁에 거하여 義를 행하며 마음을 바로하고 몸을 닦는 것은 儒敎에서 취하고
二. 慈悲와 평등을 마음으로하여 몸을 버러 세상을 救하며 道場을 깨끗이 하고 입에 神呪를 외우고 손에 念珠를 쥐는 것은 불교에서 취하고
三. 玄을 極하여 무극에 이르고 영리와 명예를 버리고 無欲淸淨히 몸을가지고 精神을 닦아 마지막에 昇天을 희망하는 것은 도교에서 취하였다 라고 말한다.
그는 自己가 창설한 東學을 主體로 생각하여 다른 宗敎는 이왕 사람들의 偏見에 의하여 창설된것이므로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하고 자기가 天意대로 化出한 東學이 곧 진정한 天道이며 현재 여러가지 宗敎가 있지만 이후는 百姓들이 天道의 唯一한 진리를 깨달아 「山河大運이 모두 이 道에 歸할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표면에 내세운것은 三敎의 절충이며 天主敎라는 西學에 대항하여 東學을 일으/P.274.
P.275. 킨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思想에는 天主敎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이 보인다. 그가 官憲에 체포되어 慘害를 당한 원인도 基督敎徒와 비슷한 점에 있었거니와 그가 창설한 東學의 교지에는 神에 관한 定義라든가 신앙에 있어서 天主敎의 장점도 融欇한 것이 분명하다. 思索과 綜合에 천품의 재질을 가지고 있는 그는 神의 존재를 是認하고 기독교의 神의 관념과 儒 佛 仙三敎의 사상을 融合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밖에도 東學에는 조선古來의 전통적신앙인 巫覡신앙(Shamanism)까지도 融欇한듯하다.
요컨대 李朝말엽에 頹廢의 極點에 달하려던 儒 佛 仙삼교와 새로 들어온 천주교와 先祖 전래의 巫覡신앙 등 자기가 아는 範圍內의 모든 종교에다가 自身이 抱持한 감정을 배합하고자 하였다.
地上天國建設 崔濟愚가 말하는 「保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사상은 그가 地上天國건설의 理想을 말한것인데 이것은 主觀的으로는 個人의 인격을 完成하여 精神개혁을 하고자하는 것이며 客觀的으로는 不平等없는 사회를 建設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信仰을 통일하여 지상천국인 世界一家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는 地上天國건설을 위하여 保國安民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살림을 標準으로하여 모든 사람의 사회적 生活을 평화롭고 平等하게 누리는 것을 주장한 것이며 布德天下는 無極大道 大德의 새宗敎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性 즉 道에 속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표준으로 하여 人間個性의 완전해방과 向上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이 사회의 一切 不平等한 계급제도라든가 貧富의 차라든가 弱肉强食하는 것은 天理에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不條理가 많은 社會的 모순을 완전히 除去하여야 하며 個個人은 天道 天理에 순응하여 모든 惡性 惡習을 버림으로써 정신적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個個人의 간악한 생각이라든가 편견 我慾을 버리고 固陋한 습성을 淸算하고 天心 즉 人心/P.275.
P.276. 인 人間性 本然으로 돌아가는 倫理社會를 建設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人間들이 心身兩面으로 總攝修行하여 天理 天命대로 生活할 때에 人乃天 新人間生活을 享受할수 있는 地上天國을 建設할수 있다는 것이다./P.276.
參考文獻
金得榥 韓國思想史/初版 南山堂 서울 1958.
金得榥 韓國思想史/增補4版 韓國思想硏究所 서울 1973.
李敦化 天道敎創建史/天道敎中央宗理院 京城 1933.
李敦化 新人哲學/開闢社出版部 京城 1924.
李敦化 人乃天要義/開闢社出版部 京城 1924.
白世明 東學思想과 天道敎/東學社 서울 1956.
기타 여러 관련 자료들을 살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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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榥 韓國思想史 중의 「崔濟愚와 그의 思想」 初版과 增補4版의 比較硏究.
金得榥 韓國思想史 第三編 儒敎思想時代
第十七章 崔濟愚와 그의 思想
■ 초판은 고문투의 漢主國從體로 되어 있으나, 增補4版은 언뜻 보기에는 國主漢從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增補4版이 어느 정도의 근현대표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고 실제는 漢主國從體로 되어 있다. 그리고 增補4版은 상당수의 단어들이 한문에서 국어로 표기되었고, 띄어쓰기 표기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며, 일부 내용은 添削이 되었고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보아지는 단어들은 修正補完이 되었다. /오암
初版
略傳 韓國精神史上에 偉大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敎祖 崔濟愚는 純祖 二十四年 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出生하였고 號를 水雲齊라 불렀다.
增補4版
略傳 한국精神史上에 위대한 足跡을 남긴 天道敎의 교조 崔濟愚는 一八二四年十月 慶尙道 慶州郡에서 출생하였고 號는 水雲齊라 불렀다.
初版
仔細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困難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靑春期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靑春期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儒敎 佛敎 道敎 天主敎等에 관한 書籍을 涉獵하며 內省生活도 하여서 二十臺의 靑年으로는 드물게 精神生活이 向上되어 있었다. 三十歲頃에는 世道人心이 腐敗墮落함을 慨嘆하여 各地를 周遊하며 人情과 世情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念願하여 그의 內的生活은 더욱 宗敎的 方向으로 發展하고 있었다.
增補4版
자세한 系譜는 알수 없으나 그는 家庭的으로는 不幸하여 六歲때에 어머니와 十六歲때에 아버지가 死別하였음으로 家計가 곤란하여 書堂에 나가지를 못하고 糊口때문에 청춘기를 바쁘게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는 多忙한 청춘기를 하는일 없이 보내지 않고 유교 불교 道敎 天主敎등에 관한 서적을 涉獵하며 內省생활도 하여서 二十臺의 청년으로는 드물게 精神생활이 향상되어 있었다. 三十歲경에는 世道人心이 부패타락함을 개탄하여 各地를 주유하며 人情과 世態을 살피고 濟世救民을 염원하여 그의 內的생활은 더욱 宗敎的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初版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一卷의 冊을 얻어 三日間 熟讀 硏究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把握하고 其後 精神的苦業을 繼續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四月 어떤날 精神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心身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確實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P. 227
P.228. 蒼生의 主義(주의가 아니고 신앙의 목표 또는 목적임의 잘못-오암) 를 宣佈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簡單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定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着手하여 비로소 朝鮮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著述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自身은 一心으로 傳道事業에 힘쓰다가 그翌年 西學徒로 指目받아 左道惑民의 罪名을 쓰고 大邱營에서 苛酷한 고문을 받은뒤 死刑을 받았다.
增補4版
三十二歲되는 해에 어떤 중으로부터 한卷의 책을 얻어 三日間 熟讀 연구하는 가운데 「人乃天/侍天主의 잘못-오암)」의 世界觀을 파악하고 그후 精神的苦業을 계속하여 神과의 靈交가 점점 깊어 갔었는데 三十七歲되는 庚申年 四月 어떤날 정신에 一大異狀이 생기어 심신이 떨리는 가운데 天道의 大眞理를 확실히 깨닫게 되어 保國安民 /(輔國安民의 잘못-오암)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강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간단한 法門(道門의 入門者의 修行과 信仰의 방법의 잘못-오암)을 정하고 徒弟의 敎養 修鍊에 착수하여 비로소 조선 東學이 發祥되었으며 三十八歲되는 해에는 東經四篇과 龍潭遺詞를 저술하였고 四十歲되는 해에는 모든 道事를 海月崔時亨에게 맡기고 자신은 一心으로 전도 사업에 힘쓰다가 그다음 /P.269
P.270. 에 西學徒로 지목받아 左道惑民의 죄명을 쓰고 大邱監營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받았다.
初版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方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呪文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全部를 包括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二十一字의 呪文中에도 侍天主라는 三字는 그의 思想의 眞諦를 代表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自己가 부른 노래中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信徒를 對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增補4版
天人如一觀 崔濟愚는 修鍊悟道의 방법으로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주문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思想전부를 포괄하였다고 볼수 있다. 二十一字의 주문중에서도 (侍天主라는 三字를, 下半節 十三字로 바꾸었다.-오암) 下半節 十三字는 그의 사상의 眞諦를 대표하였다고 볼수있다. 그는 자기가 부른 노래중에서도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十三字至極하면 萬卷詩書무엇하랴」하였으며 그의 高弟 崔時亨도 東學의 신도를 대할때 마다 侍天主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崔濟愚와 그의 思想」 資料 比較硏究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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