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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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중심이 주관한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가 지난 2016년 10월 30일(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는 대학원생 및 역사 유적에 관심 있는
청년들 20여 명이 참석,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하에 진행되었습니다.
답사는 오후 2시 한국문화중심 사무실에서 답사지에 대한 사전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답사 장소인 보성사 터(현 조계사), 태화관(현 태화빌딩),
승동교회, 탑골공원, 천도교중앙대교당, 인촌 김성숙 숙소 터와 인촌 고택,
만해 한용운의 유심사,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과
관련 동영상 상영 등의 프로그램으로 약 1시간가량 계속되었습니다.
오후 3시부터는 본격적인 3.1운동 유적지 답사가 시작되었는데요,
첫 답사지는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보성사 터(현 조계사)였습니다.
현재의 조계사 극락전 앞마당(혹은 대웅전 자리)은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가 있던 터입니다. 보성사는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고, 3월 1일 <조선독립신문> 1호 15,000부를 비밀리에 인쇄한
곳으로 3.1운동의 시작과 확산, 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지요.
당시 보성사는 30평의 2층짜리 근대식 벽돌 건물로서 골조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6월 28일, 일제의 방화로 불에 타버렸지요.
다행히 보성사 건물 옆에 있던 회화나무는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안에는 보성사 표지석, 보성사 사장 이종일 동상,
독립선언서 기념조형물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태화관 터(현 태화빌딩)입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3창을 한 곳이지요.
현재는 태화빌딩(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 들어서 있고, 건물 앞에는
3.1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1층 로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기록화가 걸려 있습니다.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에 자리 잡은 승동교회는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인데요,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3.1운동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학생단은 이곳에서
3.1운동 학생조직 체계 정비, 3월 1일 학생동원 최종 점검,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했지요. 승동교회는 1912년 벽돌 양옥으로 1차 준공된 이후
1558년 수리 및 증축된 상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답니다.
승동교회에 이어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단이 찾아간 곳은 탑골공원입니다.
1919년 3월 1일, 이곳을 독립선언식 집결지로 알고 속속 모여든 학생들과 시민들이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던 역사적 현장이지요.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들과 시민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펼쳤습니다. 이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가에 나와 있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지요.
탑골공원에는 현재 3.1운동 부조물, 3.1독립선언기념탑, 한용운 기념비, 의암 손병희
동상 등이 서 있습니다. 원래 의암 손병희 동상 자리에는 이승만 동상이 있었지요.
하지만 4.19 혁명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철거한 후 빈 좌대만 남아 있다가
1966년에 이르러 손병희 동상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3.1운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입니다.
천도교의 총본산으로, 1945년 12월 24일,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열린
천도교 인일기념식에 참석하여 “이 대교당이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없었다. 천도교 정신으로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3.1운동을 앞두고 진행된 각종 비밀회합과 자금은
사실 모두 천도교중앙대교당 건축 성금의 일부로 충당된 것이었지요.
일제강점기 서울시내 3대 건물 중 하나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중앙종리원,
수운기념관 등 웅장한 양옥들과 함께 천도교타운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안국역을 지나 본격적으로 북촌한옥마을로 접어듭니다.
현대 본사 옆길로 주욱 올라갑니다. 아기자기 예쁜 샵들과 커피향이 흘러나오는
카페들을 지나면 인촌 김성수 숙소 터(김사용의 집)가 나옵니다.
인촌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교장,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전신) 교장 등을 역임하고 3.1운동에도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인촌 김성수 숙소 터는 전북 고창 출신인 김성수가 3.1운동 당시 중앙학교를 경영하며
숙식을 해결하던 장소로 계동 김사용의 집입니다. 현재 김사용의 집은 멸실되고 그 터에는
2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집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이 만나 독립운동을 일원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장소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화합으로 3.1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사용의 집이 있는 길 끝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김성수의 옛집인 인촌고택이 있습니다.
2.8독립선언 준비, 3.1운동 초기 단계에서 항일 독립투사들이 모여 거사를 논의했던 곳이지요.
만해 한용운이 머물던 유심사는 인촌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낡은 한옥 건물에 붙어 있는 유심사 터 표지석은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잘못 설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 측의 최린은 계동 유심사로 찾아가서 불교계의 참여를 성사시킵니다.
이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로 구성된 민족연합전선이 구축된 것이지요.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로,
3.1운동 거사의 도화선이 된 장소이지요. 북촌의 끝자락 중앙고등학교 구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19년 1월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보고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를 방문하여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과 준비 상황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장소입니다.
또한 이 숙직실은 최린,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등이 2월 초에 최린의 집에서
회합을 가진 뒤 다시 모여 독립운동 거사를 숙의했던 장소이지요.
현재 숙직실은 멸실되고 기념비만 세워져 있는데, 교정 동북쪽 담장 주변에
당시 숙직실 건물을 복원해서 ‘삼일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근대적 건축물이 늘어서 있는 중앙고등학교 교정에도
긴 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는
여기서 마무리되었지만 참가자들은 쉽게 교정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전 프레젠테이션까지 합해 무려 3시간을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래도 더 보고 싶은 유적들,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볼 수밖에요.
자세히 듣고 보니, 자세히 살피고 공부하다 보니 북촌 일대가 새롭게 보입니다.
탑골공원에서부터 북촌한옥마을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남아 있는 3.1운동의 흔적!
앞으로는 더 자세히 들여다보리라, 더 깊이 공부해보리라 다짐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3.1운동에 대한 탐구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가 지난 2016년 10월 30일(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는 대학원생 및 역사 유적에 관심 있는
청년들 20여 명이 참석,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하에 진행되었습니다.
답사는 오후 2시 한국문화중심 사무실에서 답사지에 대한 사전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답사 장소인 보성사 터(현 조계사), 태화관(현 태화빌딩),
승동교회, 탑골공원, 천도교중앙대교당, 인촌 김성숙 숙소 터와 인촌 고택,
만해 한용운의 유심사,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과
관련 동영상 상영 등의 프로그램으로 약 1시간가량 계속되었습니다.
오후 3시부터는 본격적인 3.1운동 유적지 답사가 시작되었는데요,
첫 답사지는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보성사 터(현 조계사)였습니다.
현재의 조계사 극락전 앞마당(혹은 대웅전 자리)은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가 있던 터입니다. 보성사는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고, 3월 1일 <조선독립신문> 1호 15,000부를 비밀리에 인쇄한
곳으로 3.1운동의 시작과 확산, 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지요.
당시 보성사는 30평의 2층짜리 근대식 벽돌 건물로서 골조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6월 28일, 일제의 방화로 불에 타버렸지요.
다행히 보성사 건물 옆에 있던 회화나무는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안에는 보성사 표지석, 보성사 사장 이종일 동상,
독립선언서 기념조형물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태화관 터(현 태화빌딩)입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3창을 한 곳이지요.
현재는 태화빌딩(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 들어서 있고, 건물 앞에는
3.1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1층 로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기록화가 걸려 있습니다.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에 자리 잡은 승동교회는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인데요,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3.1운동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학생단은 이곳에서
3.1운동 학생조직 체계 정비, 3월 1일 학생동원 최종 점검,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했지요. 승동교회는 1912년 벽돌 양옥으로 1차 준공된 이후
1558년 수리 및 증축된 상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답니다.
승동교회에 이어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단이 찾아간 곳은 탑골공원입니다.
1919년 3월 1일, 이곳을 독립선언식 집결지로 알고 속속 모여든 학생들과 시민들이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던 역사적 현장이지요.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들과 시민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펼쳤습니다. 이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가에 나와 있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지요.
탑골공원에는 현재 3.1운동 부조물, 3.1독립선언기념탑, 한용운 기념비, 의암 손병희
동상 등이 서 있습니다. 원래 의암 손병희 동상 자리에는 이승만 동상이 있었지요.
하지만 4.19 혁명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철거한 후 빈 좌대만 남아 있다가
1966년에 이르러 손병희 동상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3.1운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입니다.
천도교의 총본산으로, 1945년 12월 24일,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열린
천도교 인일기념식에 참석하여 “이 대교당이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없었다. 천도교 정신으로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3.1운동을 앞두고 진행된 각종 비밀회합과 자금은
사실 모두 천도교중앙대교당 건축 성금의 일부로 충당된 것이었지요.
일제강점기 서울시내 3대 건물 중 하나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중앙종리원,
수운기념관 등 웅장한 양옥들과 함께 천도교타운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안국역을 지나 본격적으로 북촌한옥마을로 접어듭니다.
현대 본사 옆길로 주욱 올라갑니다. 아기자기 예쁜 샵들과 커피향이 흘러나오는
카페들을 지나면 인촌 김성수 숙소 터(김사용의 집)가 나옵니다.
인촌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교장,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전신) 교장 등을 역임하고 3.1운동에도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인촌 김성수 숙소 터는 전북 고창 출신인 김성수가 3.1운동 당시 중앙학교를 경영하며
숙식을 해결하던 장소로 계동 김사용의 집입니다. 현재 김사용의 집은 멸실되고 그 터에는
2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집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이 만나 독립운동을 일원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장소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화합으로 3.1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사용의 집이 있는 길 끝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김성수의 옛집인 인촌고택이 있습니다.
2.8독립선언 준비, 3.1운동 초기 단계에서 항일 독립투사들이 모여 거사를 논의했던 곳이지요.
만해 한용운이 머물던 유심사는 인촌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낡은 한옥 건물에 붙어 있는 유심사 터 표지석은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잘못 설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 측의 최린은 계동 유심사로 찾아가서 불교계의 참여를 성사시킵니다.
이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로 구성된 민족연합전선이 구축된 것이지요.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로,
3.1운동 거사의 도화선이 된 장소이지요. 북촌의 끝자락 중앙고등학교 구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19년 1월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보고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를 방문하여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과 준비 상황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장소입니다.
또한 이 숙직실은 최린,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등이 2월 초에 최린의 집에서
회합을 가진 뒤 다시 모여 독립운동 거사를 숙의했던 장소이지요.
현재 숙직실은 멸실되고 기념비만 세워져 있는데, 교정 동북쪽 담장 주변에
당시 숙직실 건물을 복원해서 ‘삼일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근대적 건축물이 늘어서 있는 중앙고등학교 교정에도
긴 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 답사는
여기서 마무리되었지만 참가자들은 쉽게 교정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전 프레젠테이션까지 합해 무려 3시간을 북촌 일대 3.1운동 유적지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래도 더 보고 싶은 유적들,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볼 수밖에요.
자세히 듣고 보니, 자세히 살피고 공부하다 보니 북촌 일대가 새롭게 보입니다.
탑골공원에서부터 북촌한옥마을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남아 있는 3.1운동의 흔적!
앞으로는 더 자세히 들여다보리라, 더 깊이 공부해보리라 다짐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3.1운동에 대한 탐구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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