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포덕 157년 9월 21일 ~ 24일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
~1편~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전북 정읍시 내장동 392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탑으로, 1997년 5월 11일 건립되었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 등으로 만든 탑으로, 주탑과 부탑으로 되어있다. 거창석(居昌石)으로 만든 주탑의 4각뿔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을 상징하고, 흰 대리석은 민족봉기의 정신을 상징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894m로 조성하였다. 상층부에 3단 3단 금(金)태는 고부 농민봉기, 3월 백산봉기, 9월 삼례봉기를 상징한다. 문경석(聞慶石)으로 만든 부탑은 부탑은 사민(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온 백성들의 평등, 수평사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4개의 원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원기둥은 높이 1,100m, 지름 85cm 규모이다. 이 기념탑은 정읍 출신의 설치미술가 전수천(全壽千)이 조성하였다.
백주년 기념탑 주변의 꽃무릇 군락지
1착으로 도착하신 화성당 김정화 동덕님을 모델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像
첫 일정(21일)으로 '백주년 기념탑' 참배에 나선 '천도교 수도회' 여러분.
두 번째 방문한 곳은 '동학혁명모의탑'
전봉준 등이 거사를 모의한 뜻을 기려 모의 장소인 고부 주산마을 입구에 세운 기념탑이다.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고부농민봉기를 계획한 동지들의 이름을 사발 주위에 둥글게 써 넣어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한 통문.
만석보 아래에 새로 보를 쌓은 1893년 가을 들어 고부의 농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배들평에 논을 가진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이 첫해에는 만석보의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한 두락에 두 말, 나쁜 논에는 한 두락에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거두어들이자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수세미 7백여 섬을 예동, 두전, 백산 세 곳에 쌓아 놓고 있었으니, 이것을 바라보는 농민들은 한숨과 원성이 뒤섞여 나왔다. 만석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배들평 농민들은 정읍천 아래에 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를 동명을 따라 예동보라 부르기도 하고 가뭄에도 물을 대서 풍년농사를 지은 탓으로 만석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조병갑이 부임해 와서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이 강제로 높은 보를 쌓았는데,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해 상류의 논들은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이 보야말로 원한의 대상이었는데 수세까지 거두니 아무리 양순한 농민들이라고 한들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조병갑의 불의와 비정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이 짓거리야말로 자신을 ‘막된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농민들은 40명 또는 60명씩 무리를 지어 고부관아로 가서 보세의 감면을 진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들을 내쫓거나 잡아 가두었다. 이렇게 되자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그리고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며 어디서든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에 이곳 농민군 지도자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고부관아에서 세 마장쯤 떨어진 곳에 서부면 죽산마을(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주변 30리 거리는 남의 땅 밟지 않고 다닌다는 송두호(1829~95)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전봉준의 처가도 송씨인데 이곳은 송씨들의 집성촌이었고 또 전창혁이 매를 맞아 죽기 직전 고부관아에서 쫓겨났을 적에 전봉준이 업고 이 마을로 왔다고도 한다. 전창혁은 여기서 치료를 받다가 죽어 이 마을 언저리에 묻혔다고 마을 노인들은 말한다.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전봉준, 송두호 등 주변의 농민지도자 20여 명이 11월 초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일을 모의하고 있었다. 이들은 방 가운데 백지를 펼치고 백지 중앙에 큰 사발을 엎어 놓고 사발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고부의 이집강(관가의 일에 협조하는 마을 책임자)에게 돌리는 통문을 적었다.
20명이 서명한 이 사발통문의 끝에는 행동강령 4조항이 적혀 있었다.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의 목을 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해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구실아치를 징치할 것
4.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이것이 최초로 조직적 봉기를 주도하고 행동 목표를 밝힌 문서이다. 이들 20명 중에 송 씨가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원로격인 송두호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 가운데는 송두호의 큰아들 대화(1858~1919, 본이름은 주언. 대화는 자인데 당시 변란 지도자들은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와 둘째 주성(1863~1924) 그리고 재종질 주옥(1853~95) 등이 끼어 있었다.
송두호는 예순다섯 살이나 되는 노인이어서 서른다섯 살의 송대화(宋大和)가 행동 책임을 맡았다. 더욱이 그는 키가 9척이고 힘이 센 장사로 유명했다. 이 마을에는 여덟 장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줄포의 세미를 나를 적에 한 섬을 거뜬히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것으로 힘자랑을 했다. 여덟 장사에는 죽산마을의 대성인 송 씨를 비롯해 임 씨, 황 씨 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사발통문의 서명에도 함께했다.
고부 일대에는 이 서명자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1894년의 새해가 밝았다. 10일 밤 10여 마을의 풍물을 동원해 배들평에 자리 잡은 예동에 걸군을 모으니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 군중은 사발통문 서명자들의 지도 아래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조병갑은 이 소식을 듣고 변장을 하고서 재빨리 도망쳤다. 관아로 밀려든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어 억울한 죄인을 풀어주고 군기고를 열어 총기를 꺼냈다. 이들은 날이 새자 말목 장터로 나가 농민들을 더 모으고 이어 새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쌓아 놓은 보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이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송대화가 여기에 앞장을 섰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은 무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해 다시 고부로 진출해 백산에 웅거했다. 이때 송대화는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그 뒤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증언에 따르면, 유식하고 힘이 센 그에게 농민군을 훈련시키는 훈련대장의 직책이 주어졌다고 한다.(주산마을에 사는 임두영의 증언)
이로 보아 그가 집강소 기간 농민군의 훈련을 맡았고 9월의 2차 봉기에도 열렬히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2차 봉기 때 공주전투가 끝난 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에 잡혀가 죽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나주에 초토영을 두고 농민군을 체포해 서울로 보내기도 하고 현지에서 처형하기도 했다. 송두호와 송주옥은 나주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때 사발통문의 서명자 중 9명이 나주, 전주, 서울에서 처형을 당했으나 몇몇은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송대화는 마지막 단계에서, 전봉준으로부터 “너라도 살아남으라”는 당부를 받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때쯤 죽산마을의 송두호 집과 그 앞에 있는 송대화의 집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었고 죽산마을 역시 역적의 소굴이라 해 쑥대밭이 되었다.
송대화는 나주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전북 옥구군 임피로 달아났다. 그곳 어느 집에 들어가 장승팔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했다 한다. 그가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은 어머니 성을 따른 것이다.
머슴 송대화는 힘도 세고 일도 잘한 탓으로 주인의 사위가 되었다. 원래 그는 전처 박씨에게서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이 후처 강씨에게서도 아들 하나를 두었다. 늦게 아들을 두었다 하여 이름을 뒤 후 자가 든 후섭(1911~?)으로 지었다 한다.
이렇게 도피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때였을까. 그는 조심스레 고향을 찾아들었다. 그의 동생 주성은 용케 살아남아 고향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집터에는 임 씨가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그는 집도 없고 땅도 모조리 빼앗겼기에 먹고살 길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남의 일을 해주며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10여 년을 고향에서 보낸 뒤 외로운 생애를 마감했다.(임두영의 증언)
동학농민전쟁 전에 4백여 호가 살던 송씨는 겨우 다섯 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 송씨는 재산이 없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더욱 어렵게 살고 있다. 송대화의 아들 후섭도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했다. 지금 그 마을 입구에는 동학혁명모의기념탑이 덩그러니 서 있지만 이것으로 어찌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으랴. 이곳은 송씨 집안이 동학농민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산 증거가 되고 있다.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중에서 발췌한 내용)
동학농민혁명 홍보관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천도교 수도회가 드리는 정성어린 心告
고부관아터
(현 고부초등학교)
영조 41년(1765년) 성황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편입될때 까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적 현장이다.고부관아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아건물은 전부 철거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전통문화유산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옆에 보이는 기와집은 고부향교 .
부안 변산 격포 닭이봉 전망대에서...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의 장 '묵방산 들국화'
처음으로 수도회 수련에 참여하신 법성당 김재순 동덕님의 모습.
(수암 김희수 동덕님의 여동생이십니다.)
포덕 157년 9월 21일 저녁 기도식
인화당 조보아 사모님 내외를 위로하기 위한 특별 기도.
발성 심고 : 청암 이국진
"한울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이튿날(22일) 첫 일정으로
정읍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교육관' 방문
'광주유교대학' 팀과 합류하여 교육과 탐방 일정이 진행됩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문병학님의 강의.
황토현 전적지
천도교 수도회 특별 초청 (재) 고봉학술원 강기욱, 김진미 선생님 부부
원평집강소는 1882년 4칸 초가로 지어졌으며, 집강소로 활용된 이후에는 금산면사무소, 불법연구회(원불교) 교당, 개인
주택등으로 사용되었다. 2014년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2015년 12월에 동학농민혁명 집강소 시기 원형으로 보수정비하였다.
백정 출신 동록개라는 사람이 김덕명 대접주에게 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건물을 헌납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울 민족통일포럼 팀도 합류하여 같은 동선으로 탐방 일정 진행.
1894년 6월 10일(음력 5. 7) 정부로부터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은 풀지 않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서(原情書)를 보내 폐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다.
관군은 농민군이 해산한 며칠 후에 강화병 200명을 남겨두고 대부분 전주에서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의 무장력이 상실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장악한 상태였으나 정부에서는 계속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다. 6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6월 하순에는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大都所·都所·大義所·行軍義所 등)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집강소 시기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집강소는 분산적으로 운영되면서 관리·양반·부민의 약탈 등 억울함을 해소하는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7월 17일경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어,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두어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집강소는 억울한 일을 해소하는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행정기관의 성격으로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성격의 집강소는 나주(羅州)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지역 52개 고을에 설치되었고, 농민군의 의식·이념도 집강소의 경험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점차 성장했다.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집강소에는 집행기관으로 서기(書記)·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夢)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세징수 등 행정관련 사무를 처리했다. 의결기관으로는 매 읍에 의사원(議事員) 약간을 두고 이를 통해 정책과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한편 집강소에는 농민군의 무력으로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 시기에 전라도 농민군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전봉준은 수천 명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좌도를, 손화중(孫和中)은 광주(光州) 일대를 관할했다.
수령은 형식상의 지위였고, 서리는 동학에 가입해야만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개혁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제시한 폐정개혁 요구에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를 비롯한 정치·경제 제도의 개혁 등 반봉건적인 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미곡의 밀무역금지 등 반침략적 요구가 결합되어 있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한 후 탐관오리와 탐학한 부호들을 색출해 징계하고, 양인과 천민의 신분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또한 삼정을 개혁하고 고리채를 무효화했으며, 지주의 소작료를 압수하는 등 지주제도 개혁을 지향했다. 한편 방곡령을 실시하고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을 엄격히 금지하는 등 반외세적인 활동도 했다.
집강소 질서하에서의 농민군의 폐정개혁은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봉건적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해체시켰고 정치·경제 면에서의 봉건적 폐단도 개량·개혁할 수 있었다. 집강소가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확립됨에 따라 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생활질서를 변화시켜나갔는데, 이는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 -
전주로 이동하여 완산칠봉을 오릅니다.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20번지)
기념비 전면 하단부 비문에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이후 벌인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제2차 삼례봉기, 공주우금티전투
등에 대한 내용과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후 5월 8일(음)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완산칠봉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연 이들에 걸쳐 열정 강의를 펼쳐 주신 문병학님.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대동의 장
동학농민군 출진상
전주성 함락 직후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대파병을 요청, 5월 5일(양 6. 8.) 청국군이 아산만으로 들어왔고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일 양국 사이에 체결된 명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5월 6일 인천항으로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처럼 조선을 중심에 두고 동북아시아 정치정세가 격동하자 조선중부와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 27개 조항을 매개로
이른바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철병을 커녕 도리어 경복궁 무단점령, 친일내각수립, 청일전쟁 등을 도발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1894년 7월 15일
전라좌도 남원에서 대회를 개최한 후 8월 말경부터 삼례로 모여들어 9월 10일경 반일항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를 단행하였다.
하룻밤 묵게 될 계룡시 갑사유스호텔에 도착하여 맨 먼저 판소리 감상.
'천명' 영상관람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참여 회원
지성당 고온자 / 법성당 김재순 / 화성당 김정화 / 경천당 라인경 / 인화당 라정숙 / 성수당 박징재
성인당 백영희 / 정심당 변주원 / 수암 김희수 / 일포 이우원 / 청암 이국진 / 다천 김환기
특별 초청 인사
(재) 고봉학술원 강기욱 / 김진미 선생님 부부
동학농민운동 유적지 탐방 동행 단체
광주 유교대학 / 서울 민족통일포럼
포덕 157년 9월 21일 ~ 24일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
~1편~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전북 정읍시 내장동 392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탑으로, 1997년 5월 11일 건립되었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 등으로 만든 탑으로, 주탑과 부탑으로 되어있다. 거창석(居昌石)으로 만든 주탑의 4각뿔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을 상징하고, 흰 대리석은 민족봉기의 정신을 상징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894m로 조성하였다. 상층부에 3단 3단 금(金)태는 고부 농민봉기, 3월 백산봉기, 9월 삼례봉기를 상징한다. 문경석(聞慶石)으로 만든 부탑은 부탑은 사민(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온 백성들의 평등, 수평사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4개의 원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원기둥은 높이 1,100m, 지름 85cm 규모이다. 이 기념탑은 정읍 출신의 설치미술가 전수천(全壽千)이 조성하였다.
백주년 기념탑 주변의 꽃무릇 군락지
1착으로 도착하신 화성당 김정화 동덕님을 모델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像
첫 일정(21일)으로 '백주년 기념탑' 참배에 나선 '천도교 수도회' 여러분.
두 번째 방문한 곳은 '동학혁명모의탑'
전봉준 등이 거사를 모의한 뜻을 기려 모의 장소인 고부 주산마을 입구에 세운 기념탑이다.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고부농민봉기를 계획한 동지들의 이름을 사발 주위에 둥글게 써 넣어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한 통문.
만석보 아래에 새로 보를 쌓은 1893년 가을 들어 고부의 농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배들평에 논을 가진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이 첫해에는 만석보의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한 두락에 두 말, 나쁜 논에는 한 두락에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거두어들이자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수세미 7백여 섬을 예동, 두전, 백산 세 곳에 쌓아 놓고 있었으니, 이것을 바라보는 농민들은 한숨과 원성이 뒤섞여 나왔다. 만석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배들평 농민들은 정읍천 아래에 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를 동명을 따라 예동보라 부르기도 하고 가뭄에도 물을 대서 풍년농사를 지은 탓으로 만석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조병갑이 부임해 와서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이 강제로 높은 보를 쌓았는데,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해 상류의 논들은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이 보야말로 원한의 대상이었는데 수세까지 거두니 아무리 양순한 농민들이라고 한들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조병갑의 불의와 비정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이 짓거리야말로 자신을 ‘막된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농민들은 40명 또는 60명씩 무리를 지어 고부관아로 가서 보세의 감면을 진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들을 내쫓거나 잡아 가두었다. 이렇게 되자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그리고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며 어디서든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에 이곳 농민군 지도자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고부관아에서 세 마장쯤 떨어진 곳에 서부면 죽산마을(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주변 30리 거리는 남의 땅 밟지 않고 다닌다는 송두호(1829~95)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전봉준의 처가도 송씨인데 이곳은 송씨들의 집성촌이었고 또 전창혁이 매를 맞아 죽기 직전 고부관아에서 쫓겨났을 적에 전봉준이 업고 이 마을로 왔다고도 한다. 전창혁은 여기서 치료를 받다가 죽어 이 마을 언저리에 묻혔다고 마을 노인들은 말한다.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전봉준, 송두호 등 주변의 농민지도자 20여 명이 11월 초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일을 모의하고 있었다. 이들은 방 가운데 백지를 펼치고 백지 중앙에 큰 사발을 엎어 놓고 사발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고부의 이집강(관가의 일에 협조하는 마을 책임자)에게 돌리는 통문을 적었다.
20명이 서명한 이 사발통문의 끝에는 행동강령 4조항이 적혀 있었다.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의 목을 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해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구실아치를 징치할 것
4.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이것이 최초로 조직적 봉기를 주도하고 행동 목표를 밝힌 문서이다. 이들 20명 중에 송 씨가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원로격인 송두호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 가운데는 송두호의 큰아들 대화(1858~1919, 본이름은 주언. 대화는 자인데 당시 변란 지도자들은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와 둘째 주성(1863~1924) 그리고 재종질 주옥(1853~95) 등이 끼어 있었다.
송두호는 예순다섯 살이나 되는 노인이어서 서른다섯 살의 송대화(宋大和)가 행동 책임을 맡았다. 더욱이 그는 키가 9척이고 힘이 센 장사로 유명했다. 이 마을에는 여덟 장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줄포의 세미를 나를 적에 한 섬을 거뜬히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것으로 힘자랑을 했다. 여덟 장사에는 죽산마을의 대성인 송 씨를 비롯해 임 씨, 황 씨 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사발통문의 서명에도 함께했다.
고부 일대에는 이 서명자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1894년의 새해가 밝았다. 10일 밤 10여 마을의 풍물을 동원해 배들평에 자리 잡은 예동에 걸군을 모으니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 군중은 사발통문 서명자들의 지도 아래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조병갑은 이 소식을 듣고 변장을 하고서 재빨리 도망쳤다. 관아로 밀려든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어 억울한 죄인을 풀어주고 군기고를 열어 총기를 꺼냈다. 이들은 날이 새자 말목 장터로 나가 농민들을 더 모으고 이어 새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쌓아 놓은 보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이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송대화가 여기에 앞장을 섰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은 무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해 다시 고부로 진출해 백산에 웅거했다. 이때 송대화는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그 뒤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증언에 따르면, 유식하고 힘이 센 그에게 농민군을 훈련시키는 훈련대장의 직책이 주어졌다고 한다.(주산마을에 사는 임두영의 증언)
이로 보아 그가 집강소 기간 농민군의 훈련을 맡았고 9월의 2차 봉기에도 열렬히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2차 봉기 때 공주전투가 끝난 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에 잡혀가 죽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나주에 초토영을 두고 농민군을 체포해 서울로 보내기도 하고 현지에서 처형하기도 했다. 송두호와 송주옥은 나주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때 사발통문의 서명자 중 9명이 나주, 전주, 서울에서 처형을 당했으나 몇몇은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송대화는 마지막 단계에서, 전봉준으로부터 “너라도 살아남으라”는 당부를 받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때쯤 죽산마을의 송두호 집과 그 앞에 있는 송대화의 집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었고 죽산마을 역시 역적의 소굴이라 해 쑥대밭이 되었다.
송대화는 나주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전북 옥구군 임피로 달아났다. 그곳 어느 집에 들어가 장승팔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했다 한다. 그가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은 어머니 성을 따른 것이다.
머슴 송대화는 힘도 세고 일도 잘한 탓으로 주인의 사위가 되었다. 원래 그는 전처 박씨에게서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이 후처 강씨에게서도 아들 하나를 두었다. 늦게 아들을 두었다 하여 이름을 뒤 후 자가 든 후섭(1911~?)으로 지었다 한다.
이렇게 도피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때였을까. 그는 조심스레 고향을 찾아들었다. 그의 동생 주성은 용케 살아남아 고향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집터에는 임 씨가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그는 집도 없고 땅도 모조리 빼앗겼기에 먹고살 길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남의 일을 해주며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10여 년을 고향에서 보낸 뒤 외로운 생애를 마감했다.(임두영의 증언)
동학농민전쟁 전에 4백여 호가 살던 송씨는 겨우 다섯 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 송씨는 재산이 없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더욱 어렵게 살고 있다. 송대화의 아들 후섭도 머슴살이를 전전하다가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했다. 지금 그 마을 입구에는 동학혁명모의기념탑이 덩그러니 서 있지만 이것으로 어찌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으랴. 이곳은 송씨 집안이 동학농민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산 증거가 되고 있다.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중에서 발췌한 내용)
동학농민혁명 홍보관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
천도교 수도회가 드리는 정성어린 心告
고부관아터
(현 고부초등학교)
영조 41년(1765년) 성황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1914년 부군제 실시에 따라 정읍군에 편입될때 까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던
역사적 현장이다.고부관아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관아건물은 전부 철거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전통문화유산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옆에 보이는 기와집은 고부향교 .
부안 변산 격포 닭이봉 전망대에서...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의 장 '묵방산 들국화'
처음으로 수도회 수련에 참여하신 법성당 김재순 동덕님의 모습.
(수암 김희수 동덕님의 여동생이십니다.)
포덕 157년 9월 21일 저녁 기도식
인화당 조보아 사모님 내외를 위로하기 위한 특별 기도.
발성 심고 : 청암 이국진
"한울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이튿날(22일) 첫 일정으로
정읍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교육관' 방문
'광주유교대학' 팀과 합류하여 교육과 탐방 일정이 진행됩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문병학님의 강의.
황토현 전적지
천도교 수도회 특별 초청 (재) 고봉학술원 강기욱, 김진미 선생님 부부
원평집강소는 1882년 4칸 초가로 지어졌으며, 집강소로 활용된 이후에는 금산면사무소, 불법연구회(원불교) 교당, 개인
주택등으로 사용되었다. 2014년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2015년 12월에 동학농민혁명 집강소 시기 원형으로 보수정비하였다.
백정 출신 동록개라는 사람이 김덕명 대접주에게 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건물을 헌납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울 민족통일포럼 팀도 합류하여 같은 동선으로 탐방 일정 진행.
1894년 6월 10일(음력 5. 7) 정부로부터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은 풀지 않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서(原情書)를 보내 폐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다.
관군은 농민군이 해산한 며칠 후에 강화병 200명을 남겨두고 대부분 전주에서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의 무장력이 상실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장악한 상태였으나 정부에서는 계속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다. 6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6월 하순에는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大都所·都所·大義所·行軍義所 등)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집강소 시기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집강소는 분산적으로 운영되면서 관리·양반·부민의 약탈 등 억울함을 해소하는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7월 17일경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어,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두어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집강소는 억울한 일을 해소하는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행정기관의 성격으로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성격의 집강소는 나주(羅州)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지역 52개 고을에 설치되었고, 농민군의 의식·이념도 집강소의 경험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점차 성장했다.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집강소에는 집행기관으로 서기(書記)·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夢)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세징수 등 행정관련 사무를 처리했다. 의결기관으로는 매 읍에 의사원(議事員) 약간을 두고 이를 통해 정책과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한편 집강소에는 농민군의 무력으로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 시기에 전라도 농민군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전봉준은 수천 명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좌도를, 손화중(孫和中)은 광주(光州) 일대를 관할했다.
수령은 형식상의 지위였고, 서리는 동학에 가입해야만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개혁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제시한 폐정개혁 요구에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를 비롯한 정치·경제 제도의 개혁 등 반봉건적인 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미곡의 밀무역금지 등 반침략적 요구가 결합되어 있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한 후 탐관오리와 탐학한 부호들을 색출해 징계하고, 양인과 천민의 신분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또한 삼정을 개혁하고 고리채를 무효화했으며, 지주의 소작료를 압수하는 등 지주제도 개혁을 지향했다. 한편 방곡령을 실시하고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을 엄격히 금지하는 등 반외세적인 활동도 했다.
집강소 질서하에서의 농민군의 폐정개혁은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봉건적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해체시켰고 정치·경제 면에서의 봉건적 폐단도 개량·개혁할 수 있었다. 집강소가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 확립됨에 따라 농민군은 지역적 차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사회적·경제적 생활질서를 변화시켜나갔는데, 이는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자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 -
전주로 이동하여 완산칠봉을 오릅니다.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20번지)
기념비 전면 하단부 비문에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이후 벌인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제2차 삼례봉기, 공주우금티전투
등에 대한 내용과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후 5월 8일(음)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완산칠봉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연 이들에 걸쳐 열정 강의를 펼쳐 주신 문병학님.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대동의 장
동학농민군 출진상
전주성 함락 직후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대파병을 요청, 5월 5일(양 6. 8.) 청국군이 아산만으로 들어왔고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일 양국 사이에 체결된 명진조약을 빌미로 일본도 5월 6일 인천항으로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처럼 조선을 중심에 두고 동북아시아 정치정세가 격동하자 조선중부와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 27개 조항을 매개로
이른바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철병을 커녕 도리어 경복궁 무단점령, 친일내각수립, 청일전쟁 등을 도발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1894년 7월 15일
전라좌도 남원에서 대회를 개최한 후 8월 말경부터 삼례로 모여들어 9월 10일경 반일항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를 단행하였다.
하룻밤 묵게 될 계룡시 갑사유스호텔에 도착하여 맨 먼저 판소리 감상.
'천명' 영상관람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참여 회원
지성당 고온자 / 법성당 김재순 / 화성당 김정화 / 경천당 라인경 / 인화당 라정숙 / 성수당 박징재
성인당 백영희 / 정심당 변주원 / 수암 김희수 / 일포 이우원 / 청암 이국진 / 다천 김환기
특별 초청 인사
(재) 고봉학술원 강기욱 / 김진미 선생님 부부
동학농민운동 유적지 탐방 동행 단체
광주 유교대학 / 서울 민족통일포럼
관련링크
- 이전글무지(無知)보다 더 무서운 건 莫知 (작가 현기영) 16.09.26
- 다음글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2편) 16.09.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