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칼럼)5.18광주민주항쟁과 1894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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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ㅣ 2016. 5. 18 ㅣ오피니언>아침의 창
5.18광주민주항쟁과 1894동학농민혁명
이윤영/전주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5.18시민혁명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한 민주혁명의
진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월, 이때쯤이면 천변과 들녘에 노오란 유채꽃이 마냥 산들거리며 고개를 떨군다. 오월, 저때쯤이면 흔해빠진 아카시아 꽃향기가 문턱을 넘어 안방까지 성큼 다가온다. 오월 하면 붉은 넝쿨장미들이 체면 따위를 물론 하고 가시 돋친 온몸으로 맘에 드는 것들을 감아버린다. 그래도 오월이면 말랐던 논에 물들이 넘실대며 모내기의 그림에 가슴까지 두근거린다.
흙냄새, 초록의 향연, 꿈과 희망들이 한바탕 춤이라도 출 듯한 5월의 그날이 오면 혁명의 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느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지금도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지고 국가보훈처와 5.18기념단체간의 실랑이를 보면서 나라의 수준이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다.
오늘(5.18)이 광주민주항쟁 36주기이다. 당시에 왜곡된 언론보도는 물론 미친 국가홍보에, 광주민주화운동은 시쳇말로 빨갱이들의 반란 즉 북한의 사주를 받은 민란으로 알려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하고 비통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커다란 민주화 운동의 영향과 희생적 노력으로 5.18기념일은 1997년 특별법에 의한 국가(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고. 광주민주화운동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명예회복과 국제화에 큰 걸음을 내디뎠다.
동학농민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동학민중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36년 전의 광주항쟁의 근원적 배경에는 바로 동학항쟁이 있다. 동학이 농민혁명이었다면 광주는 시민혁명의 시대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학항쟁과 광주항쟁의 사이에 3.1혁명과 4.19혁명이 또한 역사로 연결된다. 그런데 3.1혁명과 4.19혁명은 비폭력평화운동을 끝까지 추구하였다면, 동학농민항쟁과 광주시민항쟁은 평화시위운동에서 출발하여, 결국 무장을 하고 피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에 동일하다. 그래서 광주민주항쟁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직접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학계에서나 연구자들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을 동학으로 많이들 본다. 그런데 36년 전의 광주민주항쟁에 비해, 그 정신적 모태이자 규모와 피해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 122년 전의 동학농민혁명의 법정(국가)기념일이 아직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동학관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못하고 있다. 기념일 문제는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기록물등재는 2년 전으로 기억난다. 정하지 못한 이유야 많겠지만, 지역이기주의에 의한 문화관광 상품화에 서로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주고 있다.
역사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자
필자는 오래전부터 그 어떤 고난의 시간이 오면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황토현 전적지에 가곤 하였다. 또한 혁명군의 본격 출발지인 무장기포지, 혁명군의 조직을 완수한 백산기포지, 혁명군의 큰 성과인 전주성점령지 등에 갔었다. 갑오년 선열님들의 정신이 깃든 곳은 물론 광주와 전국 어느 곳의 역사유적지에 가면 참회와 반성은 물론 그 무엇인가의 신비스런 힘이 솟아났었다.
그런데 요즘 수시로 언론에 나오는 정치인들이 광주를 자주도 찾는다. 여론이 탁해 환기를 시키려고 그러는지, 뻔히 알고 속아주는 유권자로 착각들 하는지, 굽신거리는 모습들이 어떨 때는 역겨울 때도 있다. 광주를 찾는 분들에게, ‘5.18시민혁명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한 민주혁명의 진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정말 ‘우리 후손들은 역사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고, 선열님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오월, 시방 내 가슴에서 슬픔의 꽃들은 눈물처럼 떨어지고, 기쁨의 꽃들은 웃음처럼 피어나 꿈과 희망을 속삭인다.
5.18광주민주항쟁과 1894동학농민혁명
이윤영/전주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장
"5.18시민혁명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한 민주혁명의
진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월, 이때쯤이면 천변과 들녘에 노오란 유채꽃이 마냥 산들거리며 고개를 떨군다. 오월, 저때쯤이면 흔해빠진 아카시아 꽃향기가 문턱을 넘어 안방까지 성큼 다가온다. 오월 하면 붉은 넝쿨장미들이 체면 따위를 물론 하고 가시 돋친 온몸으로 맘에 드는 것들을 감아버린다. 그래도 오월이면 말랐던 논에 물들이 넘실대며 모내기의 그림에 가슴까지 두근거린다.
흙냄새, 초록의 향연, 꿈과 희망들이 한바탕 춤이라도 출 듯한 5월의 그날이 오면 혁명의 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느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지금도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지고 국가보훈처와 5.18기념단체간의 실랑이를 보면서 나라의 수준이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다.
오늘(5.18)이 광주민주항쟁 36주기이다. 당시에 왜곡된 언론보도는 물론 미친 국가홍보에, 광주민주화운동은 시쳇말로 빨갱이들의 반란 즉 북한의 사주를 받은 민란으로 알려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하고 비통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커다란 민주화 운동의 영향과 희생적 노력으로 5.18기념일은 1997년 특별법에 의한 국가(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고. 광주민주화운동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명예회복과 국제화에 큰 걸음을 내디뎠다.
동학농민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동학민중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36년 전의 광주항쟁의 근원적 배경에는 바로 동학항쟁이 있다. 동학이 농민혁명이었다면 광주는 시민혁명의 시대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학항쟁과 광주항쟁의 사이에 3.1혁명과 4.19혁명이 또한 역사로 연결된다. 그런데 3.1혁명과 4.19혁명은 비폭력평화운동을 끝까지 추구하였다면, 동학농민항쟁과 광주시민항쟁은 평화시위운동에서 출발하여, 결국 무장을 하고 피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에 동일하다. 그래서 광주민주항쟁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직접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학계에서나 연구자들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을 동학으로 많이들 본다. 그런데 36년 전의 광주민주항쟁에 비해, 그 정신적 모태이자 규모와 피해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 122년 전의 동학농민혁명의 법정(국가)기념일이 아직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동학관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못하고 있다. 기념일 문제는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기록물등재는 2년 전으로 기억난다. 정하지 못한 이유야 많겠지만, 지역이기주의에 의한 문화관광 상품화에 서로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주고 있다.
역사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자
필자는 오래전부터 그 어떤 고난의 시간이 오면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황토현 전적지에 가곤 하였다. 또한 혁명군의 본격 출발지인 무장기포지, 혁명군의 조직을 완수한 백산기포지, 혁명군의 큰 성과인 전주성점령지 등에 갔었다. 갑오년 선열님들의 정신이 깃든 곳은 물론 광주와 전국 어느 곳의 역사유적지에 가면 참회와 반성은 물론 그 무엇인가의 신비스런 힘이 솟아났었다.
그런데 요즘 수시로 언론에 나오는 정치인들이 광주를 자주도 찾는다. 여론이 탁해 환기를 시키려고 그러는지, 뻔히 알고 속아주는 유권자로 착각들 하는지, 굽신거리는 모습들이 어떨 때는 역겨울 때도 있다. 광주를 찾는 분들에게, ‘5.18시민혁명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한 민주혁명의 진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정말 ‘우리 후손들은 역사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고, 선열님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오월, 시방 내 가슴에서 슬픔의 꽃들은 눈물처럼 떨어지고, 기쁨의 꽃들은 웃음처럼 피어나 꿈과 희망을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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