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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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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19회 작성일 13-03-2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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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9)
原本; 이와 같이 西洋의 資本帝國主義의 勢力이 東洋의 中心인 中國全土를 유躪하고 西으로 北으로 浸浸然히 半島三千里를 掩襲하고 들어오는 이때에 있었서 朝鮮의 上下는 그에對하여 오즉 異樣의 感을 가졌을뿐 아무런 對策이 없었으며, 마침내 純祖三十一年(一八三一年)에英船一隻이 洪州古代島에 出現한 일과 憲宗 十一年에 英船一隻이 또다시 南海岸을 廻遊한 일과, 그이듬해에 佛船의 洪州外烟島에 致書함과 같은 일은 當時民心을 極度로 刺戟시키었었다.
修 2; 이와 같이 西洋의 資本帝國主義의 勢力이 東洋의 中心인 中國 全土를 유린하고 西로 北으로 浸浸然히 半島三千里를 掩襲하고 들어오는 이때에 있어서 朝鮮의 上下는 그에 對하여 오직 異壤의 感을 가졌을 뿐 아무런 對策이 없었으며, 마침내 純祖 三十一年(一八三一年)에 英船一隻이 洪州 古代島에 出現한 일과 憲宗 十一年에 英船 一隻이 또다시 南海岸을 回遊한 일과, 그 이듬해에 佛船의 洪州 外烟島에 致書함과 같은 일은 當時 民心을 極度로 刺戟시켰다.
修 1; 이와 같이 서양의 자본주의의 세력이 동양의 중심인 중국 전토를 유린하고 西로 북으로 점진적으로 반도 三천리를 향해 밀려들어오는 이 때에 있어 朝廷의 上下는 다만 이를 관망할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으며 마침내 純祖 三一年(一八三一年)에 英船 한척이 洪州 古代島에 出現한 일과 憲宗 十一年에 英船 一隻이 또 다시 南海岸을 회유한 일, 그리고 그 이듬 해에 佛艦이 洪州 外烟島에 書信을 가져 온 일 같은 것은 당시의 민심을 극도로 자극시키었다. / 전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이와 같이 서양의 자본 제국주의의 세력이, 동양의 중심인 중국의 전 지역을 유린하고 서로 북으로 점진적으로 반도 삼천리를 향해 밀려들어오는 이때에 있어 조정의 상하(官民)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위험을 남의 일처럼 바라다만 볼 뿐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마침내 純祖 三一年(一八三一年)에 영국의 배 한 척이 洪州 古代島에 나타난 일과 憲宗 十一年에 영국의 배 한 척이 또 다시 남해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해안(海岸)의 형편을 살펴보는 일과 그 이듬해에 프랑스 함선(艦船)이 洪州 外烟島에 書信을 가져 온 일 같은 것은 당시의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註 00; 유린(蹂躪/蹂躙/蹂蹸)- 다른 나라의 영토 따위를 함부로 짓밟음 또는 남의 권리나 인격 등을 침해하여 짓밟는 것을 의미한다.
註 00; 침침연(浸浸然)- 오랫동안 조금 조금씩 물에 젖듯이 스며들어 오는 모양. 또는 힘이나 세력 따위가 조금 조금씩 약해져 전보다 못한 상태로 접어드는 것. 類似語로 漸次的, 漸進的이 있다.
註 00; 이양(異壤)의 감(感)- 자기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내 나라의 위험을 다른 나라의 위험처럼 여겨 내 일이 아닌 듯이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
註 00; 회유(廻遊/回游/洄遊)- 물고기가 알을 낳거나 먹이를 찾기 위하여, 계절에 따라 떼를 지어 일정한 진로를 되돌아 헤엄쳐 가거나 오는 것과 같이 배가 여러 곳을 도라 보며 오고 가는 것.
註 00; 英船一隻이 洪州 古代島에 出現- 純祖 三一年(一八三一年)과 純祖 三二年. 두 해에 걸쳐 충남 洪州(지금의 홍성)의 古代島 부근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一隻이 찾아와 교역(交易)을 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외국 선박이 정식으로 교역을 요청해온 최초의 경우로서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관민(官民)은 해외정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憲宗 十一(一八四五)年 여름에 영국의 군선(軍船) 사마랑(Samarang)호가 전라도 흥양(興陽)에서 제주도 연안까지 바다의 깊이를 측량한 일이 있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중국정부를 통하여 영국 측에 조선은 이양선(異樣船)의 금단구역(禁斷區域)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등, 자주적인 외교권을 행사하기 보다는 쇄국을 굳게 지키고 시끄러운 일을 중국측에 떠미는 태도를 취했다./ 韓國史大系 7. PP.23-25.에서 요약./1973. 발행. 千寬宇. 三珍社. 서울.
註 00;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고종 3)년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으로,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요청을 받은 주중 공사 벨로네는 "조선 국왕이 우리 불행한 동포에게 박해를 가한 그날은 조선 왕조의 최후의 날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 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註 00;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고종 8) 미국 함대가 조선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으로,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국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上海]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미국 함대는 그해 4월 3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4월 8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그해 4월 14일 조선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월 15일 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 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해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 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 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 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 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排外意識)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참조./브리태니커
正本; 이와 같이 西洋의 資本帝國主義의 勢力이 東洋의 中心인 中國 全土를 蹂躪하고 西로 北으로 浸浸然히 半島 三千里를 掩襲하고 들어오는 이때에 있어서 朝鮮의 上下는 그에 對하여 오직 異壤의 感을 가졌을 뿐 아무런 對策이 없었으며, 마침내 純祖 三十一年(一八三一年)에 英船 一隻이 洪州 古代島에 出現한 일과 憲宗 十一年에 英船 一隻이 또다시 南海岸을 回遊한 일과, 그 이듬해에 佛船의 洪州 外烟島에 致書함과 같은 일은 當時 民心을 極度로 刺戟시켰다.
原本; 이것이 그때 國際政勢의 대략이었던바 崔水雲은 亦是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功取天下 立其堂行其道」
曰 「西洋 (戰/탈자)勝攻取 無事不成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嘆 保(輔)國安民 計將安出」(布德文)
曰 「西洋之人 功鬪干과 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論學文)
라고 하였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첫째 西洋사람들은 말로는 하느님을 爲하기 때문에 富貴는 取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實際行動은 武力을 가지고 天下를 攻取하며 그러고는 그땅에다 敎堂을 세우고 自己네의 宗敎를 宣傳한다는 것이요, / 誤字와 脫字가 있음.
修 2; 이것이 그때 國際政勢의 大略이었던 바 崔水雲은 亦是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功取天下 立其堂行其道」
曰 「西洋 戰勝功取 無事不成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嘆 保國安民 計將安出」(布德文)
曰 「西洋之人 功鬪干戈 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論學文)
라고 하였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첫째 西洋사람들은 말로는 하느님을 爲하기 때문에 富貴는 取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實際行動은 武力을 가지고 天下를 攻取하며 그리고는 그 땅에다 敎堂을 세우고 自己네의 宗敎를 宣傳한다는 것이요,
修 1; 이것이 그 때 국제정세의 대략이었던바 崔 水雲은 이것을 단적으로 비판하기를
曰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功取天下 立其堂行其道」
曰 「西洋戰勝功取 無事不成 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嘆 保國安民 計將安出」(布德文)
曰 「西洋之人 功鬪干戈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論學文)
라고 하였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첫째 서양 사람들은 말로는 하느님을 위하기 때문에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무력을 가지고 천하를 공취하며 그리고는 그 땅에다 교당을 세우고 자기네의 종교를 선전한다는 것이오, / 일부 문장을 첨삭 수정하였다. 비교 참고바람.
解說; 이것이 그 때 국제정세의 큰 흐름이었던바 崔水雲은 이러한 국내외 정세를 올바르고 분명하게 비판하기를
曰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功取天下 立其堂行其道」
포덕문에 있는 글로, 至於庚申 傳聞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功取天下 立其堂 行其道故 吾亦有其然 豈其然之疑에서 필요한 인용부분을 발췌했다.
경신년(1860년)에 이르러서 전해오는 말을 듣건대 서양 사람들은 천주의 뜻이라 하여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고 하면서 이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을 공격하여 빼앗아 그곳에다 교당을 세우고 그들의 도인 서도(西道/洋道)를 배우고 익혀 실천한다고 하므로 내 또한 그것이 그럴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曰 「西洋 戰勝功取 無事不成 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嘆 保國安民 計將安出」(布德文)
포덕문이 있는 말로,
是故 我國惡疾滿世 民無四時之安 是亦傷害之數也 西洋戰勝功取 無事不成而 天下盡滅亦不無脣亡之歎 輔國安民計將安出에서 필요한 인용부분을 발췌했다. 원문에서는 戰勝功取에서 ‘戰’ 字가 脫字되어 勝功取로 되어 있다. 그리고 ‘輔國安民’을 ‘保國安民’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는 사람마다 몸과 마음에 나쁜 병이 들어 온 세상에 가득 차서 백성들의 삶이 한시도 편안할 때가 없으니, 이것 또한 사람마다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는 운수요,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아 성공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천하가 다 멸망하면 또한 순망지탄이 없지 않을 것이라. 보국안민을 할 수 있는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첫째 서양 사람들은 말로는 하느님을 위하기 때문에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무력을 가지고 천하를 공취하며 그리고는 그 땅에다 교당을 세우고 자기네의 종교를 선전한다는 것이다,
註 00; 순망지탄(脣亡之歎)- 이 단어는 脣亡齒寒之歎의 줄임 말이다. 脣亡之患(脣亡齒寒之患)이라고도 쓰인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 입술을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에서 한쪽이 망(亡)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影響)을 받아 온전(穩全/모두 완전하다.)하기 어려움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쓰는 말. 또는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나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成立)되는 관계(關係)를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 오패의 한 사람인 진(秦)나라 문공의 아버지 헌공이 괵, 우, 두 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 괵 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통과국인 우 나라의 우공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 나라와 우 나라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 나라가 망하면 우 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 나라와 우 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 나라를 치려는 진(秦)나라에 길을 빌려 준다는 것은 언어도단 이옵니다." "경은 진(秦)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秦)나라와 우 나라는 모두 주 황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를 줄 리가 있겠소?" "괵 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하오나 진(秦)나라는 동종의 정리를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秦)나라는 종친인 제나라 환공과 초나라 장공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께서 그런 무도한 진(秦)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財寶)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秦)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을 이끌고 우 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 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秦)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 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유의어) 조지양익(鳥之兩翼), 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보거상의(輔車相依), 보거(輔車), 독장난명(獨掌難鳴), 고장난명(孤掌難鳴), 등이 있다.
註 00; 보국안민(輔國安民/保國安民)- 輔國安民은 나라의 임금님을 도와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또는 ‘輔’는 ‘正也’라 하였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워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는 것. 保國安民은 나라를 보호하여 올바로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 또는 나라를 보호하여 올바로 지키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曰 「西洋之人 功鬪干과 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論學文)은 논학문에 있는 글로 전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경신(1860)년 4월에 이르러, 천하가 분란(紛亂/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움)하고 민심이 효박(淆薄/ 인정이나 풍속이 아주 각박함)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에, 이치에 어긋나고 괴이한 말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서양 사람들은 도성입덕(道成立德/ 천도교적인 인격의 완성을 이르는 말로 道成德立이라고도 함)을 하여 그 조화(造化/신비한 힘으로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다)를 부려 뜻을 이루지 못함이 없고, 무기로 다른 나라를 침공(侵攻/침략하기 위해 공격하다)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하니, 중국이 전쟁에 져 멸망하게 되면 어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근심과 탄식이 없겠는가.」「도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이렇게 말하고 믿는 것은 하늘이 주는 이치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걱정을 했다. /夫庚申之年 建巳之月 天下紛亂 民心淆薄 莫知所向之地 又有怪違之說 崩騰于世間 西洋之人 道成立德 及其造化 無事不成 功鬪干戈 無人在前 中國燒滅 豈可無脣亡之患耶 都緣無他 斯人 道稱西道 學稱天主 敎則聖敎 此非知天時而 受天命耶 에서 필요한 인용부분을 요약 발췌했다. 원문에서는 ‘功鬪干戈’를 ‘功鬪干과’로 ‘戈’를 독음 ‘과’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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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에 있는 한 쪽(나라)이 망하게 되면 다른 한쪽(나라)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가 어렵다(망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脣亡齒寒之患, 또는 脣亡齒寒之嘆 脣亡之患, 脣亡之嘆으로 두루 사용한다. 여기에서는 중국이 소멸되면 우리나라도 편안할 수가 없게 될 것이라는 걱정과 탄식을 의미한다. 중국을 天下 또는 中原이라고 불렀다.
註 00; 효박(淆薄)- 마음의 씀씀이가 쌀쌀하고 각박(刻薄; 인정이 없고 모질다./ 야박;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차갑고 인정이 없다)한 것을 의미한다. 民心淆薄 또는 民情淆薄(민정효박)- 민심 또는 민정이 각박하게 된다. 로 쓰인다.
註 00; 도성입덕(道成立德)- 도성덕립(道成德立)이라고도 하는 말로 도를 닦아 대덕(大德)을 갖추게 되면, 사람의 높은 인격을 완성한다. 또는 인격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도를 완성하고 덕을 확립한다는 뜻으로, 천도교에서 종교적인 인격 완성을 의미하는 말로 천도교적인 수행하는 목적의 하나이다.
正本; 이것이 그때 國際政勢의 大略이었던 바 崔水雲은 亦是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不取富貴 功取天下 立其堂行其道」
曰 「西洋 戰勝功取 無事不成而天下盡滅 亦不無脣亡之嘆 保國安民 計將安出」(布德文)
曰 「西洋之人 功鬪干戈 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論學文)
라고 하였다. 이것을 풀어 말하면 첫째 西洋사람들은 말로는 하느님을 爲하기 때문에 富貴는 取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實際行動은 武力을 가지고 天下를 攻取하며 그리고는 그 땅에다 敎堂을 세우고 自己네의 宗敎를 宣傳한다는 것이요,
原本; 둘째는 西洋은 武力이 發達되었기 때문에 어느나라와든지 싸우면 반듯이 이기어 成功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대로 나간다면 天下가 다消滅할 터이니 우리朝鮮도 이에따라서 脣亡齒寒의 歎息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保國安民할 計策은 將次 어떻게 하여야 되겠는가 한것이요,
修 2; 둘째는 西洋은 武力이 發達되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와든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어 成功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대로 나간다면 天下가 다 消滅할 터이니 우리 朝鮮도 이에 따라서 脣亡齒寒의 歎息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保國安民할 計策은 將次 어떻게 하여야 되겠는가 한 것이요,
修 1; 둘째는 西洋은 무력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와든지 싸우면 반듯이 이기어 성공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대로 나간다면 천하가 다 소멸될 터이니 우리 한국도 이에 따라서 입술 떨어지는 탄식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保國安民할 계책은 장차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한 것이오, / 일부를 수정하였다. 참고 바람.
解說; 둘째는 서양은 무력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와 싸우던지 반드시 이기어 성공을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대로 나간다면 온 세상(여기에선 세상의 중심인 中原의 땅, 중국을 의미함)이 다 사라져 없어지게 될 것이니 우리나라도 이에 따라서 중국의 이웃으로서 그 들의 침략이 곧 미칠 것이라는 탄식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보국안민을 할 계획과 책략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한 것이오, / 수정본 1에서는 ‘朝鮮’을 한국으로 수정하고 있는 데, 문장내용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朝鮮’이 맞는 경우가 많으므로 잘못된 수정이라 할 수 있다.
正本; 둘째는 西洋은 武力이 發達되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이던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어 成功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대로 나간다면 天下가 다 消滅할 터이니 우리 朝鮮도 이에 따라서 脣亡齒寒의 歎息이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保國安民할 計策은 將次 어떻게 하여야 되겠는가 한 것이요,
原本; 셋째는 西洋의 武力에 東洋의 中心인 中國이 만일 消滅되게 된다면 우리朝鮮은 어찌 脣亡齒寒의 화단이 없을줄아느냐하는 말씀이다.
修 2; 셋째는 西洋의 武力에 東洋의 中心인 中國이 만일 消滅되게 된다면 우리 朝鮮은 어찌 脣亡齒寒의 화단이 없을 줄 아느냐 하는 말씀이다.
修 1; 셋째는 西洋의 武力에 東洋의 중심인 中國이 만일 소멸되게 된다면 우리 한국인들 어찌 화단이 없을 것인가? 하는 말씀이다. / 일부가 수정되었으므로 비교바람.
解說; 셋째는 서양의 무력에 동양의 중심인 중국이 만일 소멸되게 된다면, 우리나라 국민인들 어찌 화단이 없을 것인가? 하는 말씀이다.
註 00; 화단(禍端)- 서세동점으로 인한 전쟁으로 인한 재앙이나 화가 일어날 조짐이나 실마리를 의미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은 15세기 이후 서양이 무력과 종교포교를 앞세워 동양을 지배하려 했다는 뜻으로,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이르는 말이다.
正本; 셋째는 西洋의 武力에 東洋의 中心인 中國이 만일 消滅되게 된다면 우리 朝鮮은 脣亡齒寒의 화단이 없을 줄 아느냐 하는 말씀이다.
原本; 그리고 崔水雲은 다시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嚴肅한 判斷을 내리우고 나아가 이世界는 장차 큰變이 생기리라, 그리하여 舊時代 舊社會 舊文化는 破壞되고 新時代 新社會 新文化가 創建되리라하고 이에 奮然궐起하여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게 되었나니 이것이 天道敎의 政治的革命思想의 첫出發이었다.
修 2; 그리고 崔水雲은 다시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嚴肅한 判斷을 내리우고 나아가 이 世界는 장차 큰 變이 생기리라, 그리하여 舊時代 舊社會 舊文化는 破壞되고 新時代 新社會 新文化가 創建되리라 하고 이에 奮然蹶起하여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게 되었나니 이것이 天道敎의 政治的 革命思想의 첫 出發이었다.
修 1; 그리고 崔水雲은 다시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엄숙한 판단을 내리고 나아가 이 세계는 장차 큰 변이 생기리라, 그리하여 구 시대 구 사회 구 문화는 파괴되고 신 시대 신사회 신 문화가 창건되리라 하고 이에 분연 궐기하여 濟世安民의 道를 구하게 되었나니 이것이 天道敎의 정치적 혁명사상의 첫 出發이었다.
解說; 그리고 최수운은 다시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엄숙한 판단을 내리고 나아가 이 세계는 장차 큰 변이 생기리라, 그리하여 구시대 구사회 구문화는 파괴되고 신시대 신사회 신문화가 크게 일어나 빛나게 되리라 하고, 이에 분연히 궐기하여 濟世安民(혼란의 세상을 구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과 길.의 도를 구하게 되었나니 이것이 천도교의 정치적 혁명사상의 첫 출발이었다.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말은 포덕문에 있는 글로, 또 요즈음에 이르러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이 혼란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莫知所向矣)의 문장에서 인용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다.
註 00; 各自爲心- 세상 사람들이 천리와 천명을 따르지 않고 이익이 되는 대로 제각기 마음을 달리 먹고 행동을 하여 온 세상의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註 00; 濟世安民의 道- 혼란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과 길.
正本; 그리고 崔水雲은 다시 「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이란 嚴肅한 判斷을 내리우고 나아가 이 世界는 장차 큰 變이 생기리라, 그리하여 舊時代 舊社會 舊文化는 破壞되고 新時代 新社會 新文化가 創建되리라 하고 이에 奮然蹶起하여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게 되었나니 이것이 天道敎의 政治的 革命思想의 첫 出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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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理論的根據
原本; 當時의 朝鮮社會를 終幕에 들어선 末世로보고 時運時變의 社會法則에 依하여 新時代의 到來를 預斷하고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기 시작한 崔水雲은 十六歲로부터 三十七歲까지 약 二十一年間 苦行, 讀書, 思索을 繼續하다가 마침내 庚申四月五日에 이르러 天道를 大覺하게 되었다.
修 2; 當時의 朝鮮社會를 終幕에 들어선 末世로 보고 時運時變의 社會法則에 依하여 新時代의 到來를 預斷하고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기 시작한 崔水雲은 十六歲부터 三十七歲까지 約二十一年間 苦行, 讀書, 思索을 繼續하다가 마침내 庚申四月五日에 이르러 天道를 大覺하게 되었다.
修 1; 당시의 한국 사회를 종막에 들어선 말세로 보고 時運이 변하는 사회 법칙에 의하여 새로운 세대의 到來를 예단한 끝에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기 시작한 崔水雲은 一六세로부터 三십七세까지 약 二십一년간 고행, 독서, 사색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庚申 四月 五日에 이르러 天道를 大覺하게 되었다.
解說; 당시의 한국 사회를 종막에 들어선 말세로 보고 시대의 운이 변하는 사회 법칙에 의하여, 새로운 시대의 다가옴을 미리 예측한 끝에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길(방법)을 찾기 시작한 최수운은 一六세로부터 三십七세까지 약 二십一년간의 고행과 독서, 그리고 사색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庚申 四月 五日에 이르러 천도(天道)를 크게 깨닫게 되었다.
註 00; 종막(終幕)- 연극이나 오페라 등의 마지막 막을 의미하는 말로, 일의 끝이나 사건의 최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註 00; 제세안민(濟世安民)-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여 바로 세우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正文; 當時의 朝鮮社會를 終幕에 들어선 末世로 보고 時運時變의 社會法則에 依하여 新時代의 到來를 預斷하고 濟世安民의 道를 求하기 시작한 崔水雲은 十六歲부터 三十七歲까지 約二十一年間 苦行, 讀書, 思索을 繼續하다가 마침내 庚申 四月 五日에 이르러 天道를 大覺하게 되었다.
原本; 그리하여 崔水雲은 먼저 이時代를 先天 後天으로 갈라서 庚申以前을 先天時代, 庚申以後를 後天時代라 宣言하고 나아가 宗敎, 政治, 經濟, 倫理, 道德等 先天時代의 旣成文物은 此를 一切否認해 버리고 그낡은터전에다 새로운 經濟, 倫理等의 建設을 前提로하여 後天開闢運動을 이르키게 되었다.
修 2; 그리하여 崔水雲은 먼저 이 時代를 先天 後天으로 갈라서 庚申以前을 先天時代, 庚申以後를 後天時代라 宣言하고 나아가 宗敎, 政治, 經濟, 倫理, 道德 等 先天時代의 旣成文物은 此를 一切 否認해 버리고 그 낡은 터전에다 새로운 經濟, 倫理 等의 建設을 前提로 하여 後天開闢運動을 일으키게 되었다.
修 1; 그리하여 崔水雲은 먼저 이 時代를 先天 後天으로 갈라서 庚申年 이전을 선천시대, 庚申年 이후를 후천시대라 선언하고 나아가 종교, 정치, 경제, 도덕 등 선천시대의 기성문물은 일체 부인해 버리고 그 낡은 터전에다 새로운 경제, 윤리등의 건설을 전제로 하여 후천개벽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解說; 그리하여 최수운은 먼저 이 시대를 先天과 後天으로 나누어서 경신(1860)년 이전을 先天時代, 경신년 이후를 後天時代라 공개적으로 알리고 나아가 종교, 정치, 경제, 윤리, 도덕 등 선천시대의 기성문물(旣成文物)을 잘못된 것이라 전부 부인해 버리고, 그 낡은 터전에다 새로운 경제, 윤리 등의 건설을 전제로 하여 후천개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註 00; 선언(宣言)- 회의나 경기 따위에서, 의장이나 심판이 회의나 경기의 시작 및 종료, 중단, 규칙 위반 여부 따위의 진행에 관련된 사항을 구성원 전체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는 말이나 국가나 단체가 자기의 방침이나 주장, 의견 따위를 외부에 정식으로 공표함. 또는 그 내용 또는 자신의 주장이나 뜻을 널리 펴서 알림. 또는 그 말을 의미한다.
註 00; 기성문물(旣成文物)- 이미 이루어진 문화의 산물. 종교, 예술, 학문, 정치, 경제, 법률 등에 관한 모든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註 00; 후천개벽운동(後天開闢運動)- 다가오는 새 시대에 새로운 문물을 창조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이다. 본래 후천개벽이란 전래(傳來)의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에서 유래되었다. 후천개벽사상이란 미래에 신천지가 도래한다는 참위론적(讖緯論的) 운세사상(運世思想)이다.
이 사상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동학(東學), 정역(正易), 원불교, 증산교 등 민족의 자생적인 종교운동을 계기로 하여 공간적 대망(待望) 사상인 남조선신앙 및 정감록신앙과 함께 한국 신종교 특유의 시간적인 대망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이 양자의 결합은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명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급격한 변동 속에 있었던 민중들에게 현세구원사상으로 큰 힘이 되었다. 이는 서구적인 종말론과는 다른 영겁(永劫)의 회귀라는 동양의 역(易)의 논리에 기초한 시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후천개벽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우주적 시간을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현재 이전의 시대를 선천의 시대로, 이후의 시대를 후천의 시대로 구분하여 우주 및 인간사에 전면적으로 대변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주역周易〉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개벽이라는 말은 세상이 새로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거나,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맞붙어 기존의 일체 삼라만상을 갈아 없애고 세상이 새 출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재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에게는 그 개벽의 시기가 언제인가가 관심사가 된다. 바로 이러한 민중의 욕구에 응답한 것이 후천개벽사상이며, 조선시대 유교적 정통사상에 비하여 반사회적·혁명적인 성격을 띤 민중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성 종교에서는 주로 내세적 천국을 말하는 데 비하여 이 사상은 현세적 천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하여 현세에 도래하는 이상적 도원경인 극락선경(極樂仙境)·용화세계(龍華世界)·춘원선경(春園仙境) 등의 각종 공간적 관념이 현실적인 이상세계와 잘 결합하여 민중의 염원에 큰 호소력을 보였다. 특히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민중신앙(民衆信仰)의 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후천개벽사상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전승해 내려오는 미륵신앙 및 도참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혁세(革世) 또는 진인(眞人)의 출현을 대망하는 민간전승과 결합된 참위적 성격의 운세사상으로, 민중 사이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가 특정한 사회적 조건이 성숙되면 표층에 모습을 드러내왔다. 이러한 후천개벽사상은 한국 신종교의 공통적 이념인 신천지 도래의 운도적(運度的) 근거를 제공했으며, 이 종교들은 이 사상을 통해 민중과 사회에 대한 구원의 논리를 전개했다. 또한 오랫동안 불안과 고뇌 속에 살아오던 민중에게 희망의 청사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변혁에 있어서 민중의 희망을 담은 변혁사상으로 자주 원용되었다. 그래서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지상선경(地上仙境), 증산교의 교조 강일순(姜一淳)의 후천선경(後天仙境),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원불교 교조 소태산(少太山)의 이상적 불국토(佛國土) 등이 모두 후천개벽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현세에 도래할 후천낙원의 이념을 바탕으로 제시된 것이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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