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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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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52회 작성일 13-09-1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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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2)
위에서 제시된 천도교의 우주관에 대하여「천도교」라는 신입 교인 안내서와 이항녕의 ‘동학의 우주관’의 설명만으로는 천도교의 우주관을 충분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필자는 경전에서 좀 더 많은 법설들을 살펴서, 진정 천도교의 우주관이 근원적(根源的)으로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교단의 일관(一貫)되지 못한 산만(散漫)한 여러 기록들과 교단의 전문기구를 통하여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합의되어 확정(確定)된 내용이 아닌 것들이, 즉 집필자의 자의적(恣意的) 해설에 맡긴 것 같은 내용들이 동학과 천도교의 근본사상을 곡해(曲解)와 왜곡(歪曲)을 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을 너무나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 같은 교단의 태도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교단 내에 교리 교사의 전문연구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단내외에서 연구되어 발표되는 연구논문의 내용들의 검토가 없이 수용(受容)도, 용인(容認)도 하지 않은 채 너무나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발표된 연구결과물들이 동학시대와 천도교시대의 핵심적인 사상이나 주의와 수운과 해월 그리고 의암의 사상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평가를 하지 못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불행하게도 우리들은 매년 몇 편의 연구결과물들이 발표되고 간행물들이 출간되어 판매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의 하나로, 표영삼(表暎三)은 「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 에서, 그간 교단에서 논의를 꺼리거나 피해왔던 부분인 ‘천도교가 종교냐 도학이냐’ 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의 논의 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갖고 설명을 하고 있다. 표영삼이 천도교의 기본사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룬 소제목들은, 종교냐 도학이냐, 창조적 순환사관, 시천주의 신 관념, 선악의 기준, 수행과 신앙, 보국안민의 이상, 그리고 접과 포의 교단조직으로 나누어 PP. 43-69 까지 설명을 하고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짓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천도교」라는 신입교인과 초보자를 위해 만든 안내서의 내용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진정 교단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 (上)卷 제 3 장 동학사상의 태동. 3. 동학의 우주관에서 집필자인 李恒寧은 교단 밖의 학자이라 교단에서 무엇이라 할 수는 없는 입장일 수는 있지만,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은 교단이 관여한 東學革命百周年紀念事業會에서 간행된 공식 간행물이기 때문에, 원고 수집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밝혔어야 한다. 집필자의 견해라든가 총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든가 아니라 든가. 를 분명하게 밝혔어야 했다. 교단 내에서 간행된「천도교」라는 신입교인과 초보자를 위해 만든 안내서의 내용이 옳은지, 표영삼이 주장하는「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이 옳은지와 진정 교단의 입장은 무엇인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위 두 개의 글은, 모두 천도교 중앙총부나 총부가 지도하는 천도교청년회에서 간행된 공식적인 간행물이기 때문이다. 집필자인 표영삼은 ‘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동학의 신념체계는 ’다시 개벽‘을 위한 해답의 체계이므로 신 관념이나 세계와 인간을 보는 시점이 독특하다. 한울님 관념은 시천주의 신 관념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인내천과 사인여천을 실천적인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원론적 세계를 극복하고 현세를 중시하는 도학으로서 개체 영혼이나 내세를 부정하고 현실 세계의 삶만이 소중하다는 철저한 현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여천지합기덕과 여천지위기명으로 그 기준을 삼았으며, 여천지합기덕은 높은 차원의 생명체계에 합일하는 삶이고 여천지위기명은 개체 생명의 차원에 머무는 삶을 말한다. 결국 인간 중심주의를 지향하고 온 천지의 생명공동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과 수행의 목표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데 두고 있다.
동학의 목표는 현숙한 군자가 역사의 추체이므로 자신을 한 차원 높이는 동시에 사회제도도 한 차원 높여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을 실현시키자는 데 있다. 이상사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인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사회인 보국안민을 먼저 실현 시켜야 한다. 이것이 동학의 목적이며 신념이라 할 수 있다.’ / P.69.
라고 했다. 무엇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지금은 천도교 시대인데 ‘천도교’는 없고 ‘동학’만 있다. 동학은 우리 교사에서 1905년 12월 1일에 지워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1860부터 1905년 12월 1일 이전 까지를 ‘동학시대(東學時代)’라고 말하고 있고, 1905년 12월 1일부터 오늘 이 시각까지를 ‘천도교 시대(天道敎時代)’라 하고 있다. 윗글의 제목이 ‘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으로 제시되어 있어, 동학은 전부 천도교가 주어(主語)가 되어야 올바른 글이 되고 의미가 재천명(再 闡明)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단내의 상당수의 교인들은 수행 우월론을 내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학이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이후, 교리의 사상화나 찰학화 이념화 또는 주의화가 오늘의 교단의 퇴행(退行)을 자초(自招)했다고 보는 경향도 있어, 위의 결론을 수용할 수 있는 지 매우 의문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결론은 교단의 공식기구에서 다루어진 합의가 아니라 개인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교단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지금, 교단이 처해있는 현실이 매우 암담하고 슬프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이에 따라 인내천과 사인여천을 실천적인 덕목으로 삼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른 말이다. 천도교가 1905년 12월 1일에 한 ‘천도교의 대고천하’의 광고문의 내용의 변경을 하지 않는 한, 인내천(人乃天)은 천도교의 종지(宗旨)이고, 실천 덕목은 誠, 敬, 信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지만, 大告天道敎出顯의 광고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으로, 동학이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이후(1905년 이후) 어떤 大會나 公式機構의 決議에 따라 단 한 번도 改正이나 修訂 또는 變更된 적이 없다. 천도교의 교인마다 마음 속 깊이 새겨할 ‘천도교의 宗旨이고 綱領이며 目的이고 倫理이며 修行道德’인 것이다. 동학의 신념이며 수행이고 신앙이며 목표가 아닌 것이다. 윗글의 필자인 표영삼이 제시한 제목이 ‘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도교의 기본사상’이라 제시하고 ‘이것이 동학의 목적이며 신념이라 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마지막 문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110년에 가까운 역사를 걸어 온 天道敎時代의 天道敎를 지우고, 東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天道敎時代의 天道敎를 절대로 잊어서도 안 되고 다른 말을 해서도 안 된다.
大告天道敎出顯
道則(雖)天道 學則東學이니 卽 古之東學이 今之天道敎라.
宗旨는 人乃天이요,
綱領은 性身雙全 敎政一致요,
目的은 輔國安民 布德天下 廣濟蒼生 地上天國建設이요,
倫理는 事人如天이요,
修行道德은 誠敬信이다./ 趙基周 編著 「東學의 源流」/ PP.230-232.
또 의암은 포덕 57(1906)년 6월의 어느 설법에서 천도교의 나아갈 바와 人乃天의 大旨에 대하여 分明하고 斷乎하게 말씀을 하셨다.
‘「吾敎의 過去는 依賴時代라 故로天이 奇蹟靈蹟으로 人을導하였으나 吾敎의 今日은 熙和時代라 譬하면 白日이當天에萬像이 含耀함과같으니 비록 纖雲이 잇다할지라도 午天에 至하야는 天下大明하리라 우리信徒는 이제로부터 天主와 神師께 依賴하는 마음을 打破하고 自天을自信하라 만약自天을 自信치못하고 天師만依賴하면 臨事에 自力을 얻지못하며 眞實한 健步를 얻지못하리라 自天은 侍天主의 本體니 唯我信徒는 主體와 客體를 區別하야 修煉하라」 하시고 또갈오되 「吾敎의 人乃天의大旨는 五萬年이 終토록 一日과 같을지나 時宜에 依하야 敎의 制度는 屢變하리니 十年에 小一變하고 百年에 中一變하고 千年에 大一變하야 恒常新面을 가춤이 可하니라」하시다./ 天道敎創建史 第三編 P.72.
義菴의 이러한 신념에 대한 확신은, 義菴이 가진 獨自的인 宗敎에 대한 定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간다. 포덕 53(1912)년 四月에 의암이 敎理講習所를 京城에 設置하고 靑年弟子들로 하여금 敎理를 專門케하고 各 地方 頭目 105人을 뽑아 49日 煉性祈禱式을 擧行하게 하고 道場을 牛耳洞 鳳凰閣과 道詵寺로 정하고 의암은 날마다 徒弟들에게 설법을 試圖하였다. 의암은 대신사의 心法闡明과 敎理啓發에 全力을 다하여 하셨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 人乃天. 2. 性身雙全. 3. 敎政一致. 4. 性靈出世說. 5.以身換性. 6. 規模一致. 7. 信仰統一. 8. 宗敎의 定義. 9. 無體法說」 / 天道敎創建史 第三編 PP.66-.69 등 이였다
의암은 이 중 ‘8. 宗敎의 定義.’에서 ‘聖師는 宗敎의定義에 對하야 一般學者의說을 힘써 否認하고 宗敎는 오즉知情意의 人格的崇高에依하야 定義를 낼일수잇다하엿으니 卽 宗敎의定義는 어떤學者의 偏見에依하야 永久不變할것이아니요 高尙한人格에依하야 天然自然으로 化出된것을 이름이라하엿다. 그럼으로 宗敎는 己往사람이 解釋한바와같은 模型에서뿐 볼것이아니요 大神師의말슴한바 今不聞古不聞의 理와 法에서 宗敎의定義를 낼일수잇으니 이것이 天道敎라하엿다’ / 天道敎創建史 第三編 P.69. 는 정의에서 출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표영삼은 위의 글을 쓴 이후, 교리해설에서 조금씩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천도교의 독특한 신앙대상인 한울님에 대한 태도이다.
‘삼암 표영삼의 한울님에 대한 태도를, 김용옥은 ‘도올심득 東經大全 1’중 P.159의 註 49.에서 ‘한울님’이 잘못된 표현이며, 야뢰 이돈화의 개념 규정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은 비단 나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평생을 동학을 실천해 오신 표영삼 선생의 고견이다. 단지 표영삼 선생이 ‘한울님’이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 것은, 천도교내의 관행에 파문을 던지지 않기 위함일 뿐이며, 표선생 자신은 ‘님’ 의 본래적 맥락대로 사용할 뿐이라고 천명했다.’라고 ‘한울님’의 기술의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글로 보아 표영삼은 이중성을 가진, 보기 드문 부끄러운 중앙 교역자였음을 알 수 있다. 중앙교단은 물론 지방의 교역자라 할지라도 현직(現職) 교역자 전원은, 교단의 입장이 아닌 내용을 교단 내외의 어디에서든 개인의 견해로 교의(敎義)를 벗어난 즉 교단이 합의(合議)하여 공식적(公式的)인 입장(立場)이 아닌 설명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개인적 설명이 필요할 때에는 교단의 공식적인 이장의 내용을 먼저 설명한 다음에, 사견(私見)이라고 전제를 하고 보충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직(現職) 교역자의 의무(義務)이고 윤리(倫理)인 것이다. 만약 자기의 개인적인 해설과 주장을 하려면, 현직(現職)의 교역자라는 보직(補職)을 떠나 재야(在野) 연구자로, 또는 개인의 사견(私見)으로 주장하고 설명하는 것이, 천도교를 신봉하는 교인으로서의 올바른 태도이고, 도리(道里)인 것이다. 현직에 봉사하는 교역자로서 교단 안에서와 밖에서 교의를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교인들과 일반인들을 향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교역자로서의 자격 미달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해교자(害敎者)라 할 수 있다. 모든 교의 해설은, 교단이 합의하여 지향하는 바대로 통일되게 나아가야 한다. 비록 교단의 합의된 교의 해설이 개인의 해석과 주장에 흡족하지 않다하더라도 개인의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해석과 주장이 있을 때에는, 설명하기 전에 먼저 공식 기구에 제안을 하여 토의를 거쳐 합의되도록 해야 하고, 자신의 해석과 주장이 합의 되지 못하여 흡족하지 않더라도 공식적으로 합의된 내용에 따라서 설명해야 한다.
註 00; 참고적으로 표영삼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선 PP. 108-121까지 광범위하게 숙독하여야 하고 /표영삼 지음 “동학”(서울 통나무 2004) PP. 111-112. 도올의 잘못된 생각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도올심득 東經大全 1’의 PP.223-225.의 V “용담유사”는 “龍潭諭詞”다. 를 숙독하면 이해할 수 있다.
교단 내에서 일부 즉, 도올이 자신의 스승이라 하는 삼암 표영삼은 교단내의 글에서는 한울님이라 하지만, 밖에서의 강연에서는 ‘님’(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 하였기 때문에 도올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고 보아지고, 수운의 천서(天書)를 천주실의(天主實義; 천주교의 교리서이며 입문서로. 서양에 소개된 책이름은 “De Deo Verax Disputatio”로 ‘신에 대한 참된 토론’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도올의 입장에선 기독교가 안고 있는 신의 호칭을 염두에 두고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최동희 교수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고 많을 글에서 ‘하느님’이라 기술하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한 동안 총부와 교인들 사이에서 비난하거나 소원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포덕 152(2011)년 5월 7일에 게재된, 필자의 ‘天道敎의 神觀定立에 對하여’ 에서 재인용
註 00; 포덕152(2011)년 지일기념일 전에 필자인 김용천과 현재 교단의 중진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어떤 교역자분과 교단 자료들의 관리와 전시에 따른 대화 도중, 三菴 表暎三 元老의 所藏 東學 天道敎 關聯 資料가 모두 도올 김용옥 측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필자가 교단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므로, 반환(返還)해 와야 될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반환해올 것을 부탁을 드린 바. 그 교역자분이 직접 그 일로 김용옥 측과 논의를 한 결과 ‘동학 3’의 집필이 끝나는 대로 그해 말까지(포덕152(2011)년 末) 반환할 것을 언약(言約)하였다고 해서, ‘매우 잘 된 일입니다.’ 하고 반환에 대한 재차 당부를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동학 3’이 출간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자료들이 총부에 반환되었다는 傳聞도 없고, 필자에게 반환에 대한 자신감(自信感)과 확약(確約)까지 하셨던 그 분도 이 시각까지 반환 결과에 따른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 교역자분과는, 이런 대화가 있기 이전에 다른 일로 개별적으로 만나 교단의 일을 이야기한 바가 있기 때문에, 터놓고 구체적으로 반환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들을 열거(列擧)하여 설명을 한 바가 있습니다. 삼암의 유족이 왜 ‘동학 3’과 직접 관련이 없는 자료들까지 모두 도올 김용옥 측에 넘겨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또 三菴이 所藏한 東學 天道敎 關聯 資料들을 모두 寄贈했는지, 一時 貸與를 했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끝으로 필자가 알기에는, 그 자료들 중에는 개인의 자료가 아닌, 교단의 자료 일부와 외부(外部)에서 기증(寄贈)받은 귀중한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매우 개탄(慨歎)스러운 일이 벌어졌는데 통분(痛忿)을 느끼는 사람도 없고 일이 이렇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매우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어 앞으로 총부는, 동학과 천도교 관련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분들에게 무슨 면목(面目)으로 기증해줄 것을 부탁을 드릴 수 있습니까? 20여 년을 교직에 봉사한 원로까지, 자신이 소장(所藏)한 자료들이 교단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인 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소장했던 방대(尨大)한 자료들을 교단에 기증하지 않고, 친분(親分)이 있는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교단에는,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동학과 천도교가 걸어 온 길을 훑어 볼 수 있는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제대로 된 자료실 하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에서 살펴 본 「천도교」라는 신입 교인 안내서와 이항녕의 ‘동학의 우주관’에서 우주관에 대한 설명의 기본적인 논리의 바탕은, 李敦化의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우주관에 있기 때문에 이 두 개 교서의 기본적인 논리의 주장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新人哲學」은 「人乃天要義」와 함께 1924년에 출간된 교서로, 그 당시의 국내외의 사상이 바탕이 되어 있고, 「東學之人生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 때 강의한 내용인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후에는 北朝鮮 宗理院, 宗學院의 교화일정에 따른 講道會를 열고 교인들에게 강의를 한 講道敎材로서 夜雷 李敦化의 晩年의 최후의 著書이다. 포덕 113(1972)년에 간행된 「東學之人生觀」의 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冊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않게 變하였음을 發見할 수 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 다른 點가이 許多히 散見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것은 우리 後學들로서는 判斷할 所任이 아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의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制約에서 오는 先生의 지나친 표현들을 무조건 변호할 정도로 頑固해서는 옳지 않을 줄 안다. 新人哲學을 通讀하면서 우리가 이미 退色한 사상적 표현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거이 四十年前에 出版된 책인 것을 생각한다면 勢의 當然이라 하겠으나 그 以外에도 남의 사상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너무 조급했던점 예컨대 唯物論과 經驗論의 混同이라든가 唯物論의 認識方法이 科學的이라 한다든가 하는 結論을 散見하게 된다. 그러니 이책이 著述되던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우리사회文化의 近代化에 當時 知識人들이 얼마나 無謀할만큼 정열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歷史的 證據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시대의 變移로 말미아마 言及된 문제와 借用한 理論이 이미 시대의 後景으로 물러나고 文體가 鈍重하지만 그러한 表皮를 뚫고 진실로 「한국적인것을」 발견한 선생의 사상적 核心에 接할수만 있다면 그것도 오늘날 우리自身의 主體性을 회복하는 作業에 큰 役割을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우주관이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개략적(槪略的)으로나마 살펴,「천도교」라는 신입 교인 안내서와 이항녕의 ‘동학의 우주관’이 올바르게 해석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註 00; 東學之人生觀」의 原文 緖言에서는 ‘『 拙著 「人乃天要義」「新人哲學」「水雲心法講義」「修道要領」「福念」「敎理讀本」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의 人生觀은 先生의 본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용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1968년에 重刊된 「新人哲學」 後尾에 「東學之人生觀」이 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 PP. 215-270. 라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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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東學之人生觀』異本의 比較硏究
『東學之人生觀』異本의 比較硏究에 사용된 자료는, 1945년 초에 著述되어 프린트로 인쇄되어 講道會의 敎材로 사용되었던「東學之人生觀」이,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後尾에 附錄/ PP. 215-270.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과 1972년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간행한 「東學之人生觀」으로 하였다. 「東學之人生觀」은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 에 집필과정과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동학지인생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때 강의한 것이다.
저자인 야뢰선생의 사실상 교리서로서 최후작품 그간 논란도 있었고 또 프린트본이 흩으러져 일시 신인철학 부록으로 포덕 107년도에 일부 미완성 원고로 출간되었으나 완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이 책이 간행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중에는 프린트본을 전부 모아 보내주신 김경창 동덕, 출판비를 자담한 김상준동덕과 원고를 바로 잡는데 三개월여를 신인간사 편집실이 수고했다.(당시 필자 김용천이 신인간사 주간으로 재직기간 중으로 마지막 출판물이 되었다./필자 삽입) 또 부록으로 실린 「교정쌍전」 역시 초판 인쇄로서 다만 전문을 게재치 못하고 일부 삭제한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라고 하고 있다.
註 00; 比較硏究에서 사용된 異本 資料
新人哲學; 李敦化. 1924 3. 30.초간. 천도교 중앙총부. 서울. 1968.復刊.
東學之人生觀; 李敦化. 천도교 중앙총부. 서울. 1972. 重刊 原典本.
그러나 1968년도 판 初刊本「東學之人生觀」은「新人哲學」의 부록/ PP. 215-270.으로
간행된 것으로 「新人哲學」의 머리말인 重刊辭 末尾에「東學之人生觀」에 대하여, 위의 ‘刊行에 부쳐’ 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前略- 附錄으로 실은「東學之人生觀」은 先生께서 講道會를 열고 교인들께 說敎하던 講義案 草稿로서 선생으로 서는 晩年에 屬하는 최후 著述이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그리고 이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절판이 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것을 밝혀둔다.’ 라고 하고 있다.
註 00; 이돈화(李敦化/포덕 25(1884)년(고종 21) - 還元 未詳/일부 기록에는 還元年度를 1950년이라 기술하고 있으나 확인된 바가 없음/필자) - 1920년대부터 해방공간까지 천도교의 대표적인 교리 연구가이며 사상가이다. 함경남도 고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190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910년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가 발족되자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천도교사상의 정립과 보급에 힘썼다. 1919년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만들고, 1920년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 해 6월 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있으면서 1926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회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해석과 민족자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썼다. 1922년 『부인지(婦人誌)』를 창간하여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여성의 권익보호에 앞장섰으며, 1923년 김기전(金起田), 박내홍(朴來弘) 등과 천도교 청년당을 창설하였다. 1926년 『신인간(新人間)』을 창간하고 편집인 및 발행인이 되었다. 또한, 천도교 중앙종리원 편집과 주임종리사(主任宗理師), 지도관장(知道觀長), 상주선도사(常住宣道師),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 행정상의 여러 중책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 6·25전쟁 때 평안남도 양덕 천도교 수도원에서 공산군에게 납치되었다.
그의 저술인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는 천도교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整理)한 기본교사가 되고 있으며, 『신인철학』은 천도교사상을 근대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체계를 세운 천도교의 대표적 사상서이다. 이돈화는 민중종교 동학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구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종교철학적 사유를 전개했으며, 「개벽」의 편집인으로서 ‘종교’와 ‘사회’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雅號는 야뢰(夜雷), 백두산인(白頭山人), 도호(道號)는 긍암(亘菴)이다./ 亘(또는 亙)을 豆로 잘못 보아 두암(豆菴)이라 표기한 것이 많이 있다. 亘(또는 亙)은 讀音이 선 환 긍이다. 代表的인 經歷은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이다.
代表的인 著書로는, 『신인철학』『인내천요의(人乃天要義)』·『수운심법강의(水雲心法講義)』·『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천도교교리독본』·『복념(福念)』·『수도요령』·『천도교요의』·『천도교사전(天道敎史傳)』·『천도교경전해의(天道敎經典解義)』『새말』·『교정쌍전(敎政雙全)』·『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 등등의 著書와 天道敎會月報, 黨志, 開闢, 新人間, 등 月刊誌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신인철학의 저자 약력에서 요약정리함.
註 00; 윗글 중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은 필자가 알기로는 사실과 다르다. 천도교는 해방을 전후하여 북한지역의 교세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이시기에 서울에 있는 천도교 중앙 총부의 주요 교역자들이 북한 지역을 자주 왕래하면서 또는 거주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강도회를 열어 해방이전에 하던 대로 설법을 했다. 고태우가 쓴 「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63페이지 하단에서 ‘이처럼 민족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던 천도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교세가 확장되었고, 일제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8.15광복 전후에는 280만의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중 약 70%인 169만 여명이 북한에 있었다. 이러한 천도교의 교세와 교리 체계는 북한 공산당으로서는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시기는 남북의 분단이 고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래가 어느 정도 가능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지역의 천도교의 명칭은 해방전과 같이 군(郡)마다 일부는 면(面)지역으로 교구가 설립되어 있으므로 천도교 OO교구 또는 전교실로 불리워졌다 일부에서는 ‘북조선 천도교 종무원’이라고도 했지만, 공식명칭은 아니었다. 분단이 된 후에 알려진 명칭으로는 ‘천도교 북조선 종리원’이었다. 북한에서는 교단보다는 청우당 활동이 활발하였으므로 공개적인 조직으로 천도교 청우당이 먼저 조직화되었다.「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122-123페이지 의하면 ‘북한지역에서의 청우당은 발족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 되었으므로(일제시대 1939년 4월 3일 전당대회에서 해산 결정으로 16 년 만에 해산되었기 때문에/필자) 부활된 것이다. 북한 정권이 공고해지기 전인 1945년 11월 초에 김달현을 중심으로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공산당은 일제 시대부터 활발한 정치, 사회, 문화활동을 전개했던 천도교 청우당의 전통을 이용하자는 의도에서 일종의 종교 단체적 성격으로의 정당을 변질시켜 나갔고, 그후 소위 ’우당/우당(友黨) 필자삽입’으로 존속시켰던 점으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겠다.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은 1946년 2월 8일에 위에서 말한 청우당을 골간으로 다시 창당되었는데, ‘북조선 중앙연감(1949판)’에는 1948년 전당대회에서 수정하여 채택하였다는 강령 및 정책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PP123-125까지 참조바람. 1983년 3월 11일에 내외통신에 의하면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또는 종리원)은 1949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126페이지.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돈화가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이라는 기술은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직무를 수행하던 시기일 뿐, 이돈화는 해방전 후에 관계없이 상시 북한지역에서의 강도회(講道會)를 자주 열어 포덕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註 00; 「新人哲學」과 「人乃天要義」그리고「水雲心法講義」은, 모두 布德 65(1924)년 3月 30日에 初版發行된 것으로, 布德 109(1968)년 2月 20日에 처음으로 同時에 復刊되었다. 이 세 권의 교서는 천도교 중앙 총부 명의로 간행되어 있지만, 교단에서 간여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신인간」이 「새인간」이란 이름으로 隔月刊으로 간행될 무렵이고, 필자가 「새인간」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세 권의 교서는, 필자보다 앞선 시기에 「신인간」의 主幹으로 계셨고, 이 세 권의 교서가 간행될 시기에는 韓國思想 硏究會의 幹事로 硏究會가 간행하는「韓國思想」의 편집과 간행을 總括하고 계셨던 李光淳 元老에 의해 간행된 교서들이다. 천도교인들이 깊이 간여한「韓國思想」은 韓國現代思想講座로 출간을 시작하여 제 1.2輯 合本이 1957年 7月 10日 刊行으로 시작하여(韓國現代思想講座 韓國思想」第1卷은 1958年 7月 1日로 單行本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1998年 8月14日字로 海月神師 殉道 100周年紀念特輯으로 第24輯을 끝으로 終刊되었다. 교단이 지원할 財源과 東學思想의 硏究人員도 크게 부족하였지만, 교단으로부터 持續的인 刊行의 必要性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것을 담당할 人才도 없고 집필자진의 충원도 여의치 않아 완전히 중단되었다. 第24輯을 간행을 하는 동안, 1957年年부터 終刊된 1998年까지 40餘年 동안 교단은 물론 人文社會 學界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의 短見인지는 몰라도, 교단이 깊이 관여 하지도 못하면서 일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온 「동학학보」「동학연구」를 지원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원로분들이 시작하여 간여하여 간행했던 그 의의와 그 결실을 생각해서라도「韓國思想」의 續刊이야말로 第 1輯부터 第24輯에 게재된 내용들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確信하고 있다. 지금 아무런 효과도 없는 雜多한 刊行物들을 모두 廢刊하고 「韓國思想」의 續刊을 하는 것이, 敎團이 미래를 향한 4大 宗敎的 目的에 符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윗글에서 李光淳 元老가 밝힌, 數年前에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한 「新人哲學」과「東學之人生觀」등의 자료들은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新人哲學의 重刊辭 末尾에서 ‘그리고 이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절판이 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것을 밝혀둔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韓國思想硏究會編과 1968年度 復刊本은 같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때문에 韓國思想硏究會編을 구하지 않아도 1968年度 復刊本으로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필자는 1968年度 復刊本과 1972年度 原典本을 比較硏究의 底本으로 삼았다.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東學之人生觀」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冊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않게 變하였음을 發見할 수 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 다른 點가이 許多히 散見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것은 우리 後學들로서는 判斷할 所任이 아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의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制約에서 오는 先生의 지나친 표현들을 무조건 변호할 정도로 頑固해서는 옳지 않을 줄 안다. 新人哲學을 通讀하면서 우리가 이미 退色한 사상적 표현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거이 四十年前에 出版된 책인 것을 생각한다면 勢의 當然이라 하겠으나 그 以外에도 남의 사상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너무 조급했던점 예컨대 唯物論과 經驗論의 混同이라든가 唯物論의 認識方法이 科學的이라 한다든가 하는 結論을 散見하게 된다. 그러니 이책이 著述되던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우리사회文化의 近代化에 當時 知識人들이 얼마나 無謀할만큼 정열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歷史的 證據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시대의 變移로 말미아마 言及된 문제와 借用한 理論이 이미 시대의 後景으로 물러나고 文體가 鈍重하지만 그러한 表皮를 뚫고 진실로 「한국적인것을」 발견한 선생의 사상적 核心에 接할수만 있다면 그것도 오늘날 우리自身의 主體性을 회복하는 作業에 큰 役割을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註 00; 1968년도 판「東學之人生觀」의 緖言에서는 『 拙著 「人乃天要義」「新人哲學」「水雲心法講義」「修道要領」「福念」「敎理讀本」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의 人生觀은 先生의 본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P.217.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용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1968년에 重刊된 「新人哲學」 後尾에 「東學之人生觀」이 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 PP. 215-270.
「東學之人生觀」의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은 모두 4X6 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1972년도 판은 洋裝本이다. 그리고 모두 문체(文體)는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이나 1968년도 판은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로 9호 활자로 종서(縱書)로 인쇄되었고, 1972년도 판은 국주한종체(國主漢從體)로 10호 활자로 종서(縱書)로 인쇄되었다.
1968년도 판은 중간사(重刊辭)에서 「東學之人生觀」원고(原稿)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자료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 야뢰(夜雷)로 부터 직접 강의를 받은 원로들의 전하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교재는 프린트 물이었고 책으로 완성된 자료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미루어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다.
「東學之人生觀」은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 에서 기술하고 있는 ‘「동학지인생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때 강의한 것이다.’라는 것을 고려해서 그 때의 그 정황과 해방정국에서의 교단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참작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출(抽出)해내 볼 수가 있다. 1968년도 판은 緖言; P. 215.에서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의 # 3. 犧牲死; 268.(未完)까지로 미완(未完)이라고 하고 게재하고 있으나, 1972년도 판에는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의 # 3. 犧牲死에 이어서 四 死와 來世 로부터 계속하여 第 三 編 人生問題(福念編)과 第 四 編 人生問題(夜雷 對福 正菴 問答編)까지
1972년도 판 페이지로 PP. 146.- 333.로 약 190 페이지의 장문(長文)의 글이 추가(追加) 되고 있다. 전체분량의 3분의 2가 추가된 셈으로 「東學之人生觀」의 전편(全篇)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개의 자료를 꼼꼼히 살펴본 필자는, 1968년도 판은 해방 무렵까지의 강의록 자료이고 1972년도 판은 해방이후에 추가된 자료이라는 것이다. 1972년도 판은 1968년도 판의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정도 되고, 분장(分章)과 분절(分節)을 통하여 전체적 프레임을 조정하고 구체적으로 세분화(細分化)하여 야뢰가 전하고자하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필자가 이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는 내용뿐만 아니라 시대적 정황을 많이 고려했다. 당시의 교단은 해방으로 인하여 자유를 찾은 것은 잠시 미소의 개입으로 분단이 되자 교단은 혼란을 극복해야 했다.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 下卷의 ‘광복과 해방정국. 2) 분단과 교단조직’ 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나라 전체의 운명이 양단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니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온전할 수가 없으며 특히 중앙집권의 일사분란한 조직을 가졌던 천도교의 타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따라서 중앙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기능마저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해방이 되었으므로 나라도 새로 세워야 하고 빈사상태에 빠진 교회도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며 그것은 기관과 인물과 운영방법이 모두 일제시대와는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25일에 전국임시대회가 서울의 중앙대교당에서 열리고 여기서 3원1관제(三院一觀制)의 교약으로 개정 채택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그 임원을 선임하였다. -중략- 이때 38선의 경계가 점점 강화되면서 남북간의 왕래가 어렵게 됨에 따라 교회운영상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남북간의 통신 연락의 두절은 물론 7할 이상이 북한에 분포되어 있는 관계로 무엇보다 먼저 연월성미(年月誠米)의 중앙납부가 수월치 못하다는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6년 1월에 어쩔 수 없는 임시조치로 평양에 천도교 서선(西鮮)연락소와 함흥에는 천도교 북선(北鮮)연락소를 설치하여 연월성수납을 비롯한 제반 교무연락을 서울의 총부와 하게 되었다. - 중략- 이와 같은 조치는 나름대로 효과를 나타내면서 연월성을 중앙에 납부하는 일과 중앙의 각종 지시사항을 일반 교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불편한대로 운영해 나갈 수가 있었으므로 얼마동안 계속해 나갔다. /PP. 650-652.
이와는 달리 좀 더 구체적인 것도 있었다. 필자가 교화관과 신인간 주간으로 교역자로 봉직하는 기간 동안(1970년대 전후) 교단의 많은 원로 분들이 교화관이나 신인간사를 찾아와 필자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시는 노변한담(路邊閑談)에서, 교단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 가운데, 해방정국에 관련된 부분도 많았다. 해방 무렵에 서울에 계셨던 분들의 대 부분은, 일본군에게 군수물자 창고로 빼앗겼던 천도교 대교당을 1945년 8월경(8월 17일라고 명확히 말하시는 분도 있었다.) 돌려받았다고 했고, 해방 당시 북한에서 살다가 6,25동란으로 월남한 분들은, 1947년 2월경에(2월 11일로 기억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평양에서 북조선 원주직 전체회의를 열어 서선(西鮮)연락소와 북선(北鮮)연락소를 합쳐서 ‘북조선 종리원’이라고 정하였다고 했다.
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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