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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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2)
註 05; 공자(孔子; K'ungtzu,); 기원전 551년 출생 기원전 479년 사망.)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 철학자· 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 천제(天祭)· 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육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를 다루는 기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 번 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 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 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 말과 50대 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 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죽기 4년 전에 아들이 사망했고, 수제자 안회가 31세로 사망하였으며 9세 연하의 자로도 사망하게 되어 공자 말년을 쓸쓸했다 한다.〈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 브리태니커 백과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註 06; 맹자(孟子; Mengtzu,); BC 371경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의 출신인 BC 289경 중국의 고대 철학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성선설은 현대에 와서도 유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띠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BC 1111경~255)나라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善政)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 반대말은 無恒産 無恒心/필자가 삽입함)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經〉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 "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맹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註 07; 성선설 - 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 왔지만 특히 송대(960~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 브리태니커 백과
註 08; 地上神仙과 신선(神仙; shen hsien,) - 중국 도교에서, 도교의 의식과 가르침에 따라 심신(心身)을 수양(修養)하여 신성(神性)을 얻은 ‘불멸(不滅)의 존재(存在)’이다. 장자(莊子)를 비롯한 초기 도가의 현인(賢人)들은 신통력(神通力)을 가진 불멸의 존재를 자주 언급했지만, 그것은 아마 비유였을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추종자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선약(仙樂)을 찾거나 호흡조절, 요가와 비슷한 운동, 곡기를 끊는 식이요법 등의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썼다. 이런 수행을 높이 쌓은 사람들은 비록 겉으로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생(永生)을 얻고 평범한 사람의 영혼이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천상(天上)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것을 추구한 결과, 도교는 연단술(鍊丹術)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법(秘法)과 전설을 낳았다.
신선에 대하여, 좀 더 종합적인 설명을 한다면,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도교(道敎)에서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인간(人間)인 신선은, 인간계를 떠나 산속에 살며, 선도(仙道)를 닦아서 도통(道通)하여 도술을 부리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천도교에서의 지상신선은, 도교가 말하는 신성(神性)을 얻어 ‘불멸(不滅)의 존재(存在)’가 신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 맹자가 말하는 군자로서 천국과 극락과 같은 신의 세계가 아닌,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너, 나가 없이 우리가 된 새 인간들이 공존공영(共存共榮)하는 행복한 세상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 브리태니커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송주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연원 간에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수도 수련의 형식이나 암송(暗誦)과 구송(口誦)의 방법도 차이가 생겼다. 이 시기에는 동학을 유학(儒學)과 유사(類似)한 도학으로 인식하는 교단 지도부와 연원주가 많았기 때문에, 수련방법에서 유생(儒生)이 유학을 학습하는 자세인 궤좌(跪坐)를 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동학시대에는 삼 덕행(三德行; 誠, 敬, 信- 이중에서 先信後誠이 중요했다.)과 사계명(四戒命)을 중요시하고 수도 수련에 정진(精進)을 했다. 천도교 시대에 들어서서는, 이에다 오관(五款)의 실행(實行)을 더했다. 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동학의 시대가 지나고, 동학이 대고천하로 천도교가 되어, 천도교 시대가 열리자 나라가 금(禁)하는 종교가 아니라, 당당하게 온 세상에 알리고 신앙할 수 있는 자유 신앙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동학이 천도교가 된 시대의 도인 또는 교인들은 동학쟁이가 아니고, 더더구나 관헌에게 쫓기어 오늘, 내일의 생사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동비(東匪)도 아닌, 당당한 천도교의 교인인 것이다. 동학시대에는 신앙자를 도인(道人)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呼稱)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천도교 시대에서는 완전한 종교인(宗敎人)으로서 신앙자인 교인(敎人)이 된 것이었다. 이런 시대적인 변화로 인하여, 교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마당포덕 등을 통하여) 대중의 종교로서 수도 수련에 있어 도학에 따른 수도 수련 방식을 고수(固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총부가 관여하여 운영되는 모든 의식에선, 어떤 합의(合議)된 결정(決定)은 없었지만, 암묵적(暗黙的)으로 평좌(平坐)에 암송(暗誦)과 구송(口誦)이 핵심적(核心的)인 수도 수련의 한 형식(形式)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인으로서 ‘나는 천도교인이다. 동학쟁이다(동학쟁이라는 호칭은, 동학시대에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었으나 천도교 시대에는 자랑스러운 교인이었다.).’라고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알릴 수 있는 것이 구송(口誦)인 것이었다. 강령(降靈)주문보다는 본 주문을 크게 구송함으로써 당당하게 천도교인이 되었고, 인정도 받고 한 때는 관헌(官憲)에 쫓기던 도인이, 교인이 되어 부러움도 받았다.
구송에 대한 대신사의 의지를 알아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일성록(日省錄)에 기술된, 선전관(宣傳官)인 정운구(鄭雲龜)가 수운의 동태를 살핀 狀啓(또는 狀書)에 의하면, 1863년 11월을 전후하여 정운구는 수운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휘하에 수십 명을 풀어 동정을 살피면서 수 명을 수운의 문하에 보내어 거짓으로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여 수운과 주문에 대한 문답을 한 것을 일성록에 기술하고 있다. 제자를 가장한 관군 한 사람이 수학(修學)을 하려면,
‘주문을 외울 때에 밖으로 소리 내어 읊지 않고(口誦하지 않고) 속으로만 왼다면(心誦으로만 한다면)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당당하게 답하기를,
‘소리 내어 읊지 않고, 속으로만 외우려거든 처음부터 동학을 배우지 않는 것이 낫다.(옳다)라. 답을 했다. 한다. 그 제자가 물러서지 않고 재차 이렇게 물었다.
‘여러 가지 주변의 형편상 좀 꺼릴 일이 있어 구송은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자 ‘그런 형편이라면,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요. 사람마다 공부가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직 한울님밖에 무서울 것이 없다.’ 하여 주문을 숨어서 하지 말고 도인들은 한울님밖에 무서울 것이 없으니 당당히 하라. 는 수운의 뜻을 밝히고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포덕 4(1863)년 11월 20일을 전후로 한, 수운을 체포와 압송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정운구의 장서(狀書)가 있다.
송주(誦呪)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갖게 된 대표적인 사례는, 신, 구파간의 갈등(葛藤)에서 출발하게 된다. 1920년대 초 의암이 순절(殉節)하게 되자, 교단의 주도권(主導權)을 장악(掌握)하기 위한 교권(敎權)의 분쟁(紛爭)이 시작된 것이 화근(禍根)의 시작이었다. 박인호(朴寅浩)를 필두로 한 구파의 핵심세력과 추종세력들은 4세 교조 옹립을 위한, 한심한 싸움이 300여 만의 대 교단(敎團)을 분열(分裂)시켜, 해방 무렵에 구파의 추종세력이 2, 30여 만 안팎으로 붕괴되었다. 이 중에는 남도 쪽의 교인들 중에는 신파에 속하는 교인들이 있어, 약 10만 명으로 추산하면, 실제로 구파의 교인은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교단(敎團)의 불행(不幸)을 자초(自招)한 근본적(根本的)인 이유는, 부끄럽게도 교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각 파에 속한 지휘부(指揮部)와 중간(中間) 교역자(敎役者)들의 개인적(個人的)인 욕심(慾心)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만약 그들이 교단을 위했다면, 7개 부문 운동을 바탕으로 전위운동(前衛運動)을 강화(强化)했던 천도교 청우당(天道敎 靑友黨) 운동을 붕괴(崩壞)시켜 발전적(發展的) 해체(解體)라는 명분(名分)아래, 1930년대 말에 자진(自進) 해단(解團)을 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도교 청우당이 ‘자수 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라는 독특(獨特)한 포럼을 통하여, 교단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인재(人才)들을 양성(養成)한 것은,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런 일을 신, 구파의 갈등이 망쳐 놓았다. 필자로 하여금 더 황당하게 한 것은, 구파의 추종세력들의 종문심법(宗門心法)이라는 말만 듣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박인호 스스로 그들을 꾸짖어 ‘우리 교단에는 4세 교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 일갈(一喝)하면서 ‘나는 4세 교조가 될 생각이 없으니 작당(作黨)하여 난법난도(亂法亂道)를 하지 말고, 수운(水雲)의 심법(心法)으로 돌아가 정성을 다하여 따르라.’고 대인(大人)답게 했더라면 오늘날의 참담(慘憺)한 천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매우 아쉬운 처신(處身)의 모습이었다. 이 잘못된 욕심이 해방이후 1960년대 초까지 끌고 오면서 매우 추악(醜惡)한 일들로 점철(點綴)되게 되었다. 그래서 구파는 역사에서 아름다운 퇴장(退場)을 할 기회를 놓쳤다. 60년대 초, 신구 합동 수습위원회(新舊 合同 收拾委員會)에 소속되어, 구파 쪽의 파견 근무자이었던 최 병제(崔秉濟)는 총부에 근무하는 기간에, 신, 구파간의 갈등(葛藤)이 더욱 심화(深化)되어, 신, 구파의 합동이 실질적(實質的)으로 파기(破棄)시키는데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최 병제는, 그 후 구파와는 단절(斷絶)하다시피 하고, 상당기간을 총부에서 근무하다가 떠나가, 천도교 임시본부의 원로(元老)로 추대(推戴)되어 교화(敎化)를 담당(擔當)하여 구파(舊派)를 재건(再建)하려다가 환원(還元)했다.
구파의 실질적(實質的)인 마지막 지도자였던 한 순회(韓順會)와 이 종해(李鍾海) 두 분이 환원하게 되어, 신구의 갈등이 사라지는가? 했지만, 박인호(朴寅浩)의 문하(門下)에서 자란, 박 상익(朴商益)이 포덕 115(1974)년 8월 5일 새벽 3시에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춘암상사(春菴上師)께서 나타나시어 하시는 말씀이, ‘이제 때가 되었으니 동(動)하라.’라고 명(命)을 내리셨다고 하면서, 지난날 포덕 87(1946)년 4월 5일에 화암장(化菴丈 崔俊謨 /필자)님으로부터 “때가 되면 동(動)하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 한다./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 245에서 요약함.
그 후 박 상익은 잔존(殘存)의 구파세력(舊派勢力)들을 모아, 포덕 86(1975)년 1월 5일에 ‘통일운동’을 주된 운동으로 하여, ‘통일선언’을 포덕 115(1974)년 8월 14일 지일기념을 기하여 연성(練性)을 시작하여 17일 간의 연성을 마친 후에, 최 병제(崔秉濟)가 써서 다듬은 ‘만천하에 고한다.' 라는 제목으로 116(1975)년 1월 5일에, 동아일보가 광고 탄압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龍潭 淵源會’ 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성금 3만원을 내면서, 광고를 5만원에 계약하여, 116(1975)년 1월 7일자로 광고를 게재했다. /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246-247에서 요약함. ‘만천하에 고한다.' 라는 광고문은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246-247에서 읽기 바람.
이로부터 2000 년대 초까지 활동을 계속하다가, 중심적인 활동을 하던 원로들이 환원하게 되자 교단을 떠나 핵심적인 활동을 하던, 최 병제와 종의원(宗議院) 의원까지 지낸 이 용우(李龍宇; ‘극동의 태양’ 의 著者) 마저 힘을 잃자, 해체(解體)의 수순(手順)을 밟아 마지막 구파의 실무자(實務者)였던 이 위경(李威卿)이 필자에게 구파에 대한 정당(正當)한 평가(評價)를 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구파의 업무가 중단되었다. 이 위경은 마지막 정리를 하면서 구파의 관련 자료를 전부 필자에게 넘겨주어 받아 보관하면서, 각 종 기록에 활용하고 있다. 최 병제 이후, 전부터 총부에 관여했던 박 래원(朴來源)원로를 거처, 근자에 이위경을 끝으로 구파계열의 총부의 진출(進出)은 그 막(幕)을 내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수 명의 구파계열의 후손(後孫)들이 총부와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지만, 구파계열의 주장은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로써 수도 수련 전념(專念)의 신앙(信仰)은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결론이 될 것이다.
학계와 일부 학자들은 그들의 저서에, 천도교의 전체 교인의 20-30%인 50 내지 70여만 명 안팎으로, 남한의 천도교인 수를 말하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남한의 천도교 교인수를 연, 월성 납입을 기준으로 추정한다면, 10만 명도 되지 않고 있었다. 전체 교인의 70-80%인 200여 만 명의 많은 교인들이 북한에 있었기 때문에, 교세(敎勢)는 신파계열(新派系列)이 장악(掌握)하고 있었다. 1950년 6.25동란 시 까지 북조선 종리원(北朝鮮 宗理院)에 의해 밝혀진 북한의 교인 수는 280여 만 명이었고, 천도교 청우당(天道敎 靑友黨) 당원이 55여 만 명으로 알려져(朴延壽의 證言) 북한의 교인 수는 300여 만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종리원의 교인수와 청우당 당원을 산술적(算術的)으로 합치면, 340여 만 명이 되겠지만 청우당 당원 중에는, 교인으로서 당원이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300여 만 명을 넘어섰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1960년대 초 신, 구파 합동 수습위원회 일을 총부의 교화관서(敎化觀書)의 직책으로 심부름을 하였을 적에, 구파 계열의 입장(立場)과 처지(處地)를 알게 되었다. 1960년대 초 신, 구파의 합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구파와 신파 간의 서로 맞고소를 걸은 적이 있는데, 구파가 패소(敗訴)를 하였는바 그 이유가 교단(敎團)에 연, 월성을 납부하지 않아 교인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구파의 교인들은 1,000 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인들이 내는 연, 월성과 일부의 특성금(特誠金)으로도 구파의 운영이 벅찼다. 3부경전의 간행을 서두르고 있을 때, 구파에서 일정(一定) 금액(金額)을 부담(負擔)해줄 것을 권유(勸諭)했으나 도울 의사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만치 재정이 어려워 한 순회와 이 종해 두 분 원로가 자담(自擔)하는 부분이 많았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교인들의 연 월성을 총부에 납입하지 않아 교인의 자격을 상실하여 소송에서 창피를 당하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각 파에서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수도 수련을 강조하여 신앙을 도모(圖謀)했던 구파는, 50 내지 70여 만 명에서 불과 10여 년 만에 10 만 이내로 붕괴(崩壞)되었다. 1960년대에서는 각종 성명서(聲明書)나 소송(訴訟)에 참여했던 2-3백 명의 교인만이 의무실행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재정이 해결되지 않아 구파의 강력한 동력(動力)을 잃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 종리원에 소속된 300 여 만 명 중에서 월남한 약 100여만 명의 교인들이, 1970년대 초까지 열성적으로 참여했으나 북한에서와는 다른 수도수련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뀌자 불과 10년 만인 1980 년대 초에 벌서 10 만 명 이내로 떨어졌다. 대 사회 참여 중심의 신앙생활이 무기력(無氣力)한 수도중심修道中心)의 신앙으로 운영되자, 북한 출신의 다수의 교인들이 썰물이 빠지듯이 교인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안주파(安州派)의 일원(一員)인 이 영복(李永福)이 교령을 연임하면서 김승복(金昇福)의 등장이 교단 붕괴(敎團 崩壞)의 핵심적(核心的)인 요소(要素)가 되었다고 필자는 평가하고 있다. 그 근본(根本)도 알 수 없는 수도 수련 방법이 계속되므로 인하여 현재의 처참(悽慘)한 교단(敎團)으로 추락(墜落)하게 된 것이다.
註 09; 안주파(安州派)의 초기의 대표적 인물은 김 일대(金一大)였으나, 6.25동란이후 대표자는 척암(拓菴) 이 응진(李應辰)이었다. 회원은 이 영복(李永福), 박 연수(朴延壽), 장 기운(張基云) 등 약 10여 명으로, 그들을 중심으로 한때 번창했던 O O 관광 버스회사를 운영하다가 중심인물이었던 이 태근(李泰根)이 일찍이 환원하자, 사업이 기우러져 해체되었다. 관광 버스회사를 운영할 무렵에, 안주파(安州派)의 최대 약점인 교리해설을 담당해 줄 사람으로, 월산(月山 / 空菴) 김 승복(金昇福)을 받아드려, 이 영복이 교령으로 연임하는 과정에서 김 승복이 선도사로 총부에 진출하여, 무체법경의 논란에 중심에 서 있게 되었다. 한 때 안주파가 김 승복을 받아드릴 때, 이 영복이 만주에서부터 잘 알던 사람이라는 낭설(浪說)이 떠돌아 곤혹을 치른 일도 있다. 필자가 대학시절에 김 승복의 형님의 아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 월산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월산은 폐(肺)에 관련된 질병으로 계룡산에서 오랫동안 수도수행을 하다가 거의 완쾌되어 귀가하여 형님 댁에 있었다, 그래서 월산의 신앙에서 불교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즈음 길 건너 앞집에 살던, 남강 제약회사(南崗 製藥會社)의 대표이며, 교단의 중심인물이었던 장 준섭(張俊燮)원로의 권유로 천도교 교인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필자가 월산의 조카를 가르치게 된 것도, 장 준섭(張俊燮)원로의 소개였다. 장 준섭 원로는 안주파의 일원이 아니었다. 월산이 안주파에 합류할 때, 사전(事前)에 장 준섭 원로와 상의를 하지 않은 점은, 전수인(傳受人)이 전교인(傳敎人)에 대한 결례(缺禮)이고 오점(汚點)이라 할 수 있다. 그 사건이후 두 분의 정다운 모습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또 김 일대(金一大)의 아들인 김 공로(金公魯)도 안주파의 일원이었으나 남미로 이민을 가, 더 이상의 활동이 없었다. 신인간이 독립채산제로 전환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여 이사장을 지낸, 김 영덕(金永德)과 미국으로 이민을 간, 장 재철(張在哲)도 안주파의 일원이었다. 신인간의 독립채산제의 성패여부를 필자에게 물어왔을 때, 신인간을 직접 운영해본 경험을 가진 필자는,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를 했지만. 총부로부터 독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신인간의 독립채산제는, 우리 교단으로서는 예측한 대로 채산성이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가 교인들의 기부금만 하늘에 날려 보낸 셈이 되었다.
신파와 구파 또는 남한과 북한의 신앙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상고(上考)해 보면, 북한의 대 사회참여 활동의 신앙이 해방 직후 200여만 명이었던 북한 지역의 교인수가 불과 5년 만인 1950년 6,25 당시 교인수가 300여 만 명이 된 것은, 그 원인이 대 사회참여 활동의 신앙이 그 힘의 저력(底力)이고 근원(根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이유 때문에 60 년대의 100여 만 교인이 7, 80년대를 접어들면서 10 만 명 이내로 추락하게 된 것이라고 평가를 해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북한이 200 여 만에서 300여만으로 팽창(膨脹)했던 같은 시기에, 수도 수련을 중시했던 남한에서는 50 내지 70여만 명에서 10만 명 이내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 결과로 미루어 보면, 천도교는 수도 수련을 중시하는 신앙태도에서 벗어나, 활기 있는 대사회운동에 참여하여 궁극적인 목표인 지상천국건설에 매진(邁進)하는 길만이, 과거의 영광(榮光)을 되찾을 수 있는 ‘중흥(中興)의 시대(時代)’가 올 것이라는 것이 자명(自明)해진 것이었다.
수도 수련에서 궤좌던 평좌던, 암송이던 묵송이던, 심송이던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도교를 왜 믿는가? 천도교를 왜 믿어야 하는가? 에 대한 명료(明瞭)한 답을 주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매진(邁進)해 나아가게 해야 하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매진(邁進)해 나갈 때, 신앙의 방법은 문제가 되질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상(正常)인 것이다. 수도수련을 하는 중에 강령(降靈/ 接靈現象;ecstasy)이란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광경은, 매우 낯이 설을 뿐만 아니라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의 최령자(最靈者)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註 10; ecstasy - 종교학에서는 접신현상(接神現象) 또는 접령현상(接靈現象)이라 하기도 하고, 신앙자가 수련 중에 강령으로 인한 몸 털림의 강령(降靈) 상태를, 접신현상(接神現象) 또는 접령현상(接靈現象)이라 한다. 불교의 용어로는, 법열(法悅)의 황홀경(怳惚境)의 경지로, 무아(無我)의 경지와 황홀경으로 표현을 한다. 무아(無我)의 경지를 의식 혼탁 상태, 정신 혼미한 상태를 말하고, 황홀경의 경지를, 미칠 듯한 기쁨, 광희(狂喜)를 의미하고 있다. cf. RAPTURE. 이외에는, 문인들에 있어서 몰아(沒我)의 세계, 종교의 신앙에서 법열(法悅). 또는 환희(歡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천도교의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이, 재래종교(在來宗敎 또는 旣成宗敎)들이 추구하는 기복(祈福)이나 개인구령(個人救靈)에 있지 않고, ‘너, 나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어, 각지불이(各知不移)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를 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하기 위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신앙은, ‘개인의 행복은 추구하되, 공존공영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의 행복 속에, 나는 그 중에 하나’ 라는 것이다. ‘다중(多衆)이 幸福해야 내가 幸福하고, 多衆 이 不幸하면 나도 不幸하다.’ 는 교의적(敎義的)인 사상(思想)과 신념(信念)을 가지고 있다. 천도교는 기복종교(祈福宗敎)가 아니, 작복종교(作福宗敎)이며, 현세기피종교(現世忌避宗敎)가 아니고, 현실참여종교(現實參與宗敎)이다. 영생(永生)과 내세(來世)에 대한 그 어떤 약속(約束)도 없기 때문이다.
註 11; 水雲主義와 地上天國 建設 - 水雲主義와 地上天國 建設의 상관관계를 夜雷 李敦化는 그의 저서인 『新人哲學』第四編 開闢思想 第二章 開闢方式 三大開闢 147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體系圖를, 수운주의의 理想과 計劃이라고 하고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地上天國 建設은, 이 체계도에서, 수운주의의 목적으로서, 宗旨와 綱領을 바탕으로, 精神開闢, 民族開闢. 社會開闢의 3 대 개벽을 통하여 地上天國을 건설해야 된다고 했다. 만약 이체계도가 다운을 하는 과정에서 제 모습을 잃을 경우, 수고스럽지만 『新人哲學』의 147 페이지에 수록된 原圖를 참고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필자. 오암.
人乃天의 宇宙觀.
原理上人乃天 人乃天의 人生觀.
人乃天의 世界觀.
宗旨 人乃天
사람性自然의歷史.
應用上人乃天
思想 사람性自然의新倫理新制度.
人間格 中心의精神解放及建設.
綱領 性身雙全
人間格中心의制度解放及建設.
水雲主義
精神開闢, 民族開闢.
目的 地上天國
社會開闢, 地上天國.
人間中心의信念.
信念
後天開闢의信念.
種子사람으로의力量.
誠米로의力量.
力量
組織體로의力量.
運用으로의力量.
/ 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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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5; 공자(孔子; K'ungtzu,); 기원전 551년 출생 기원전 479년 사망.)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 철학자· 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 천제(天祭)· 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육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를 다루는 기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 번 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 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 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 말과 50대 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 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죽기 4년 전에 아들이 사망했고, 수제자 안회가 31세로 사망하였으며 9세 연하의 자로도 사망하게 되어 공자 말년을 쓸쓸했다 한다.〈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 브리태니커 백과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註 06; 맹자(孟子; Mengtzu,); BC 371경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의 출신인 BC 289경 중국의 고대 철학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성선설은 현대에 와서도 유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띠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BC 1111경~255)나라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善政)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 반대말은 無恒産 無恒心/필자가 삽입함)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經〉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 "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맹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註 07; 성선설 - 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 왔지만 특히 송대(960~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 브리태니커 백과
註 08; 地上神仙과 신선(神仙; shen hsien,) - 중국 도교에서, 도교의 의식과 가르침에 따라 심신(心身)을 수양(修養)하여 신성(神性)을 얻은 ‘불멸(不滅)의 존재(存在)’이다. 장자(莊子)를 비롯한 초기 도가의 현인(賢人)들은 신통력(神通力)을 가진 불멸의 존재를 자주 언급했지만, 그것은 아마 비유였을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추종자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선약(仙樂)을 찾거나 호흡조절, 요가와 비슷한 운동, 곡기를 끊는 식이요법 등의 방법으로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썼다. 이런 수행을 높이 쌓은 사람들은 비록 겉으로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생(永生)을 얻고 평범한 사람의 영혼이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천상(天上)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것을 추구한 결과, 도교는 연단술(鍊丹術)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법(秘法)과 전설을 낳았다.
신선에 대하여, 좀 더 종합적인 설명을 한다면,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도교(道敎)에서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인간(人間)인 신선은, 인간계를 떠나 산속에 살며, 선도(仙道)를 닦아서 도통(道通)하여 도술을 부리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천도교에서의 지상신선은, 도교가 말하는 신성(神性)을 얻어 ‘불멸(不滅)의 존재(存在)’가 신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 맹자가 말하는 군자로서 천국과 극락과 같은 신의 세계가 아닌,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너, 나가 없이 우리가 된 새 인간들이 공존공영(共存共榮)하는 행복한 세상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 브리태니커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송주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연원 간에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수도 수련의 형식이나 암송(暗誦)과 구송(口誦)의 방법도 차이가 생겼다. 이 시기에는 동학을 유학(儒學)과 유사(類似)한 도학으로 인식하는 교단 지도부와 연원주가 많았기 때문에, 수련방법에서 유생(儒生)이 유학을 학습하는 자세인 궤좌(跪坐)를 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동학시대에는 삼 덕행(三德行; 誠, 敬, 信- 이중에서 先信後誠이 중요했다.)과 사계명(四戒命)을 중요시하고 수도 수련에 정진(精進)을 했다. 천도교 시대에 들어서서는, 이에다 오관(五款)의 실행(實行)을 더했다. 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동학의 시대가 지나고, 동학이 대고천하로 천도교가 되어, 천도교 시대가 열리자 나라가 금(禁)하는 종교가 아니라, 당당하게 온 세상에 알리고 신앙할 수 있는 자유 신앙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동학이 천도교가 된 시대의 도인 또는 교인들은 동학쟁이가 아니고, 더더구나 관헌에게 쫓기어 오늘, 내일의 생사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동비(東匪)도 아닌, 당당한 천도교의 교인인 것이다. 동학시대에는 신앙자를 도인(道人)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呼稱)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천도교 시대에서는 완전한 종교인(宗敎人)으로서 신앙자인 교인(敎人)이 된 것이었다. 이런 시대적인 변화로 인하여, 교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마당포덕 등을 통하여) 대중의 종교로서 수도 수련에 있어 도학에 따른 수도 수련 방식을 고수(固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총부가 관여하여 운영되는 모든 의식에선, 어떤 합의(合議)된 결정(決定)은 없었지만, 암묵적(暗黙的)으로 평좌(平坐)에 암송(暗誦)과 구송(口誦)이 핵심적(核心的)인 수도 수련의 한 형식(形式)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인으로서 ‘나는 천도교인이다. 동학쟁이다(동학쟁이라는 호칭은, 동학시대에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었으나 천도교 시대에는 자랑스러운 교인이었다.).’라고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알릴 수 있는 것이 구송(口誦)인 것이었다. 강령(降靈)주문보다는 본 주문을 크게 구송함으로써 당당하게 천도교인이 되었고, 인정도 받고 한 때는 관헌(官憲)에 쫓기던 도인이, 교인이 되어 부러움도 받았다.
구송에 대한 대신사의 의지를 알아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일성록(日省錄)에 기술된, 선전관(宣傳官)인 정운구(鄭雲龜)가 수운의 동태를 살핀 狀啓(또는 狀書)에 의하면, 1863년 11월을 전후하여 정운구는 수운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휘하에 수십 명을 풀어 동정을 살피면서 수 명을 수운의 문하에 보내어 거짓으로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여 수운과 주문에 대한 문답을 한 것을 일성록에 기술하고 있다. 제자를 가장한 관군 한 사람이 수학(修學)을 하려면,
‘주문을 외울 때에 밖으로 소리 내어 읊지 않고(口誦하지 않고) 속으로만 왼다면(心誦으로만 한다면) 선생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물음에 당당하게 답하기를,
‘소리 내어 읊지 않고, 속으로만 외우려거든 처음부터 동학을 배우지 않는 것이 낫다.(옳다)라. 답을 했다. 한다. 그 제자가 물러서지 않고 재차 이렇게 물었다.
‘여러 가지 주변의 형편상 좀 꺼릴 일이 있어 구송은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자 ‘그런 형편이라면,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요. 사람마다 공부가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직 한울님밖에 무서울 것이 없다.’ 하여 주문을 숨어서 하지 말고 도인들은 한울님밖에 무서울 것이 없으니 당당히 하라. 는 수운의 뜻을 밝히고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포덕 4(1863)년 11월 20일을 전후로 한, 수운을 체포와 압송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정운구의 장서(狀書)가 있다.
송주(誦呪)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갖게 된 대표적인 사례는, 신, 구파간의 갈등(葛藤)에서 출발하게 된다. 1920년대 초 의암이 순절(殉節)하게 되자, 교단의 주도권(主導權)을 장악(掌握)하기 위한 교권(敎權)의 분쟁(紛爭)이 시작된 것이 화근(禍根)의 시작이었다. 박인호(朴寅浩)를 필두로 한 구파의 핵심세력과 추종세력들은 4세 교조 옹립을 위한, 한심한 싸움이 300여 만의 대 교단(敎團)을 분열(分裂)시켜, 해방 무렵에 구파의 추종세력이 2, 30여 만 안팎으로 붕괴되었다. 이 중에는 남도 쪽의 교인들 중에는 신파에 속하는 교인들이 있어, 약 10만 명으로 추산하면, 실제로 구파의 교인은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교단(敎團)의 불행(不幸)을 자초(自招)한 근본적(根本的)인 이유는, 부끄럽게도 교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각 파에 속한 지휘부(指揮部)와 중간(中間) 교역자(敎役者)들의 개인적(個人的)인 욕심(慾心)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만약 그들이 교단을 위했다면, 7개 부문 운동을 바탕으로 전위운동(前衛運動)을 강화(强化)했던 천도교 청우당(天道敎 靑友黨) 운동을 붕괴(崩壞)시켜 발전적(發展的) 해체(解體)라는 명분(名分)아래, 1930년대 말에 자진(自進) 해단(解團)을 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도교 청우당이 ‘자수 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라는 독특(獨特)한 포럼을 통하여, 교단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인재(人才)들을 양성(養成)한 것은,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런 일을 신, 구파의 갈등이 망쳐 놓았다. 필자로 하여금 더 황당하게 한 것은, 구파의 추종세력들의 종문심법(宗門心法)이라는 말만 듣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박인호 스스로 그들을 꾸짖어 ‘우리 교단에는 4세 교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 일갈(一喝)하면서 ‘나는 4세 교조가 될 생각이 없으니 작당(作黨)하여 난법난도(亂法亂道)를 하지 말고, 수운(水雲)의 심법(心法)으로 돌아가 정성을 다하여 따르라.’고 대인(大人)답게 했더라면 오늘날의 참담(慘憺)한 천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매우 아쉬운 처신(處身)의 모습이었다. 이 잘못된 욕심이 해방이후 1960년대 초까지 끌고 오면서 매우 추악(醜惡)한 일들로 점철(點綴)되게 되었다. 그래서 구파는 역사에서 아름다운 퇴장(退場)을 할 기회를 놓쳤다. 60년대 초, 신구 합동 수습위원회(新舊 合同 收拾委員會)에 소속되어, 구파 쪽의 파견 근무자이었던 최 병제(崔秉濟)는 총부에 근무하는 기간에, 신, 구파간의 갈등(葛藤)이 더욱 심화(深化)되어, 신, 구파의 합동이 실질적(實質的)으로 파기(破棄)시키는데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최 병제는, 그 후 구파와는 단절(斷絶)하다시피 하고, 상당기간을 총부에서 근무하다가 떠나가, 천도교 임시본부의 원로(元老)로 추대(推戴)되어 교화(敎化)를 담당(擔當)하여 구파(舊派)를 재건(再建)하려다가 환원(還元)했다.
구파의 실질적(實質的)인 마지막 지도자였던 한 순회(韓順會)와 이 종해(李鍾海) 두 분이 환원하게 되어, 신구의 갈등이 사라지는가? 했지만, 박인호(朴寅浩)의 문하(門下)에서 자란, 박 상익(朴商益)이 포덕 115(1974)년 8월 5일 새벽 3시에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춘암상사(春菴上師)께서 나타나시어 하시는 말씀이, ‘이제 때가 되었으니 동(動)하라.’라고 명(命)을 내리셨다고 하면서, 지난날 포덕 87(1946)년 4월 5일에 화암장(化菴丈 崔俊謨 /필자)님으로부터 “때가 되면 동(動)하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 한다./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 245에서 요약함.
그 후 박 상익은 잔존(殘存)의 구파세력(舊派勢力)들을 모아, 포덕 86(1975)년 1월 5일에 ‘통일운동’을 주된 운동으로 하여, ‘통일선언’을 포덕 115(1974)년 8월 14일 지일기념을 기하여 연성(練性)을 시작하여 17일 간의 연성을 마친 후에, 최 병제(崔秉濟)가 써서 다듬은 ‘만천하에 고한다.' 라는 제목으로 116(1975)년 1월 5일에, 동아일보가 광고 탄압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龍潭 淵源會’ 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성금 3만원을 내면서, 광고를 5만원에 계약하여, 116(1975)년 1월 7일자로 광고를 게재했다. /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246-247에서 요약함. ‘만천하에 고한다.' 라는 광고문은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246-247에서 읽기 바람.
이로부터 2000 년대 초까지 활동을 계속하다가, 중심적인 활동을 하던 원로들이 환원하게 되자 교단을 떠나 핵심적인 활동을 하던, 최 병제와 종의원(宗議院) 의원까지 지낸 이 용우(李龍宇; ‘극동의 태양’ 의 著者) 마저 힘을 잃자, 해체(解體)의 수순(手順)을 밟아 마지막 구파의 실무자(實務者)였던 이 위경(李威卿)이 필자에게 구파에 대한 정당(正當)한 평가(評價)를 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구파의 업무가 중단되었다. 이 위경은 마지막 정리를 하면서 구파의 관련 자료를 전부 필자에게 넘겨주어 받아 보관하면서, 각 종 기록에 활용하고 있다. 최 병제 이후, 전부터 총부에 관여했던 박 래원(朴來源)원로를 거처, 근자에 이위경을 끝으로 구파계열의 총부의 진출(進出)은 그 막(幕)을 내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수 명의 구파계열의 후손(後孫)들이 총부와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지만, 구파계열의 주장은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로써 수도 수련 전념(專念)의 신앙(信仰)은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결론이 될 것이다.
학계와 일부 학자들은 그들의 저서에, 천도교의 전체 교인의 20-30%인 50 내지 70여만 명 안팎으로, 남한의 천도교인 수를 말하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남한의 천도교 교인수를 연, 월성 납입을 기준으로 추정한다면, 10만 명도 되지 않고 있었다. 전체 교인의 70-80%인 200여 만 명의 많은 교인들이 북한에 있었기 때문에, 교세(敎勢)는 신파계열(新派系列)이 장악(掌握)하고 있었다. 1950년 6.25동란 시 까지 북조선 종리원(北朝鮮 宗理院)에 의해 밝혀진 북한의 교인 수는 280여 만 명이었고, 천도교 청우당(天道敎 靑友黨) 당원이 55여 만 명으로 알려져(朴延壽의 證言) 북한의 교인 수는 300여 만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종리원의 교인수와 청우당 당원을 산술적(算術的)으로 합치면, 340여 만 명이 되겠지만 청우당 당원 중에는, 교인으로서 당원이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300여 만 명을 넘어섰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1960년대 초 신, 구파 합동 수습위원회 일을 총부의 교화관서(敎化觀書)의 직책으로 심부름을 하였을 적에, 구파 계열의 입장(立場)과 처지(處地)를 알게 되었다. 1960년대 초 신, 구파의 합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구파와 신파 간의 서로 맞고소를 걸은 적이 있는데, 구파가 패소(敗訴)를 하였는바 그 이유가 교단(敎團)에 연, 월성을 납부하지 않아 교인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구파의 교인들은 1,000 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인들이 내는 연, 월성과 일부의 특성금(特誠金)으로도 구파의 운영이 벅찼다. 3부경전의 간행을 서두르고 있을 때, 구파에서 일정(一定) 금액(金額)을 부담(負擔)해줄 것을 권유(勸諭)했으나 도울 의사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을 만치 재정이 어려워 한 순회와 이 종해 두 분 원로가 자담(自擔)하는 부분이 많았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교인들의 연 월성을 총부에 납입하지 않아 교인의 자격을 상실하여 소송에서 창피를 당하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각 파에서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수도 수련을 강조하여 신앙을 도모(圖謀)했던 구파는, 50 내지 70여 만 명에서 불과 10여 년 만에 10 만 이내로 붕괴(崩壞)되었다. 1960년대에서는 각종 성명서(聲明書)나 소송(訴訟)에 참여했던 2-3백 명의 교인만이 의무실행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재정이 해결되지 않아 구파의 강력한 동력(動力)을 잃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 종리원에 소속된 300 여 만 명 중에서 월남한 약 100여만 명의 교인들이, 1970년대 초까지 열성적으로 참여했으나 북한에서와는 다른 수도수련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뀌자 불과 10년 만인 1980 년대 초에 벌서 10 만 명 이내로 떨어졌다. 대 사회 참여 중심의 신앙생활이 무기력(無氣力)한 수도중심修道中心)의 신앙으로 운영되자, 북한 출신의 다수의 교인들이 썰물이 빠지듯이 교인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안주파(安州派)의 일원(一員)인 이 영복(李永福)이 교령을 연임하면서 김승복(金昇福)의 등장이 교단 붕괴(敎團 崩壞)의 핵심적(核心的)인 요소(要素)가 되었다고 필자는 평가하고 있다. 그 근본(根本)도 알 수 없는 수도 수련 방법이 계속되므로 인하여 현재의 처참(悽慘)한 교단(敎團)으로 추락(墜落)하게 된 것이다.
註 09; 안주파(安州派)의 초기의 대표적 인물은 김 일대(金一大)였으나, 6.25동란이후 대표자는 척암(拓菴) 이 응진(李應辰)이었다. 회원은 이 영복(李永福), 박 연수(朴延壽), 장 기운(張基云) 등 약 10여 명으로, 그들을 중심으로 한때 번창했던 O O 관광 버스회사를 운영하다가 중심인물이었던 이 태근(李泰根)이 일찍이 환원하자, 사업이 기우러져 해체되었다. 관광 버스회사를 운영할 무렵에, 안주파(安州派)의 최대 약점인 교리해설을 담당해 줄 사람으로, 월산(月山 / 空菴) 김 승복(金昇福)을 받아드려, 이 영복이 교령으로 연임하는 과정에서 김 승복이 선도사로 총부에 진출하여, 무체법경의 논란에 중심에 서 있게 되었다. 한 때 안주파가 김 승복을 받아드릴 때, 이 영복이 만주에서부터 잘 알던 사람이라는 낭설(浪說)이 떠돌아 곤혹을 치른 일도 있다. 필자가 대학시절에 김 승복의 형님의 아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 월산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월산은 폐(肺)에 관련된 질병으로 계룡산에서 오랫동안 수도수행을 하다가 거의 완쾌되어 귀가하여 형님 댁에 있었다, 그래서 월산의 신앙에서 불교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즈음 길 건너 앞집에 살던, 남강 제약회사(南崗 製藥會社)의 대표이며, 교단의 중심인물이었던 장 준섭(張俊燮)원로의 권유로 천도교 교인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필자가 월산의 조카를 가르치게 된 것도, 장 준섭(張俊燮)원로의 소개였다. 장 준섭 원로는 안주파의 일원이 아니었다. 월산이 안주파에 합류할 때, 사전(事前)에 장 준섭 원로와 상의를 하지 않은 점은, 전수인(傳受人)이 전교인(傳敎人)에 대한 결례(缺禮)이고 오점(汚點)이라 할 수 있다. 그 사건이후 두 분의 정다운 모습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또 김 일대(金一大)의 아들인 김 공로(金公魯)도 안주파의 일원이었으나 남미로 이민을 가, 더 이상의 활동이 없었다. 신인간이 독립채산제로 전환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여 이사장을 지낸, 김 영덕(金永德)과 미국으로 이민을 간, 장 재철(張在哲)도 안주파의 일원이었다. 신인간의 독립채산제의 성패여부를 필자에게 물어왔을 때, 신인간을 직접 운영해본 경험을 가진 필자는,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만류를 했지만. 총부로부터 독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신인간의 독립채산제는, 우리 교단으로서는 예측한 대로 채산성이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가 교인들의 기부금만 하늘에 날려 보낸 셈이 되었다.
신파와 구파 또는 남한과 북한의 신앙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상고(上考)해 보면, 북한의 대 사회참여 활동의 신앙이 해방 직후 200여만 명이었던 북한 지역의 교인수가 불과 5년 만인 1950년 6,25 당시 교인수가 300여 만 명이 된 것은, 그 원인이 대 사회참여 활동의 신앙이 그 힘의 저력(底力)이고 근원(根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이유 때문에 60 년대의 100여 만 교인이 7, 80년대를 접어들면서 10 만 명 이내로 추락하게 된 것이라고 평가를 해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북한이 200 여 만에서 300여만으로 팽창(膨脹)했던 같은 시기에, 수도 수련을 중시했던 남한에서는 50 내지 70여만 명에서 10만 명 이내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 결과로 미루어 보면, 천도교는 수도 수련을 중시하는 신앙태도에서 벗어나, 활기 있는 대사회운동에 참여하여 궁극적인 목표인 지상천국건설에 매진(邁進)하는 길만이, 과거의 영광(榮光)을 되찾을 수 있는 ‘중흥(中興)의 시대(時代)’가 올 것이라는 것이 자명(自明)해진 것이었다.
수도 수련에서 궤좌던 평좌던, 암송이던 묵송이던, 심송이던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도교를 왜 믿는가? 천도교를 왜 믿어야 하는가? 에 대한 명료(明瞭)한 답을 주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매진(邁進)해 나아가게 해야 하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매진(邁進)해 나갈 때, 신앙의 방법은 문제가 되질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상(正常)인 것이다. 수도수련을 하는 중에 강령(降靈/ 接靈現象;ecstasy)이란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광경은, 매우 낯이 설을 뿐만 아니라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의 최령자(最靈者)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註 10; ecstasy - 종교학에서는 접신현상(接神現象) 또는 접령현상(接靈現象)이라 하기도 하고, 신앙자가 수련 중에 강령으로 인한 몸 털림의 강령(降靈) 상태를, 접신현상(接神現象) 또는 접령현상(接靈現象)이라 한다. 불교의 용어로는, 법열(法悅)의 황홀경(怳惚境)의 경지로, 무아(無我)의 경지와 황홀경으로 표현을 한다. 무아(無我)의 경지를 의식 혼탁 상태, 정신 혼미한 상태를 말하고, 황홀경의 경지를, 미칠 듯한 기쁨, 광희(狂喜)를 의미하고 있다. cf. RAPTURE. 이외에는, 문인들에 있어서 몰아(沒我)의 세계, 종교의 신앙에서 법열(法悅). 또는 환희(歡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천도교의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이, 재래종교(在來宗敎 또는 旣成宗敎)들이 추구하는 기복(祈福)이나 개인구령(個人救靈)에 있지 않고, ‘너, 나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어, 각지불이(各知不移)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를 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하기 위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신앙은, ‘개인의 행복은 추구하되, 공존공영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의 행복 속에, 나는 그 중에 하나’ 라는 것이다. ‘다중(多衆)이 幸福해야 내가 幸福하고, 多衆 이 不幸하면 나도 不幸하다.’ 는 교의적(敎義的)인 사상(思想)과 신념(信念)을 가지고 있다. 천도교는 기복종교(祈福宗敎)가 아니, 작복종교(作福宗敎)이며, 현세기피종교(現世忌避宗敎)가 아니고, 현실참여종교(現實參與宗敎)이다. 영생(永生)과 내세(來世)에 대한 그 어떤 약속(約束)도 없기 때문이다.
註 11; 水雲主義와 地上天國 建設 - 水雲主義와 地上天國 建設의 상관관계를 夜雷 李敦化는 그의 저서인 『新人哲學』第四編 開闢思想 第二章 開闢方式 三大開闢 147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體系圖를, 수운주의의 理想과 計劃이라고 하고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地上天國 建設은, 이 체계도에서, 수운주의의 목적으로서, 宗旨와 綱領을 바탕으로, 精神開闢, 民族開闢. 社會開闢의 3 대 개벽을 통하여 地上天國을 건설해야 된다고 했다. 만약 이체계도가 다운을 하는 과정에서 제 모습을 잃을 경우, 수고스럽지만 『新人哲學』의 147 페이지에 수록된 原圖를 참고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필자. 오암.
人乃天의 宇宙觀.
原理上人乃天 人乃天의 人生觀.
人乃天의 世界觀.
宗旨 人乃天
사람性自然의歷史.
應用上人乃天
思想 사람性自然의新倫理新制度.
人間格 中心의精神解放及建設.
綱領 性身雙全
人間格中心의制度解放及建設.
水雲主義
精神開闢, 民族開闢.
目的 地上天國
社會開闢, 地上天國.
人間中心의信念.
信念
後天開闢의信念.
種子사람으로의力量.
誠米로의力量.
力量
組織體로의力量.
運用으로의力量.
/ 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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