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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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3)
천도교의 교의적인 사상과 신념의 실현이, 바로 근대사에 빛나는,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화운동, 기미독립운동. 이라는 3 대 운동을 통하여,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에로의 전환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전환(轉換)을 교단과 천도교 청우당이 조선총독부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혹(苛酷)한 감시(監視)와 통제(統制) 속에서도 300여 만 명의 교도를 가진 대 교단으로서 굴복(屈伏)하지 않고, 당당(堂堂)히 민중에 앞에 서서 종교와 사회문화운동을 이끌었던 것을, 한국의 근대사가 증명해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송주(誦呪)에 있어서 수운이 재세(在世)시에 와송(臥誦; 누워서 주문을 외는 것)은 금하였기 때문에, 단좌(單坐)를 주로 권장(勸獎)하였던 것이다. 선비와 군자(君子) 또는 지상신선(至上神仙)과 같은 단아(端雅)하고 품격(禀格)있는 교인의 자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송(口誦)이 어느 시기에 현송(顯誦)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것은 정확치가 않다. 포덕 46(1905)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현도기념일로 정한 것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천도교회월보』통권 17호(제 2권 제7호)인 포덕 52년 12월호의 중앙총부휘보 란에 보면 "敎日紀念盛況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布德 五十二年 12月 1日은 敎日(本校의 名稱과 目的을 大告天下 날)인 故로 同月(동월 동일의 잘못인 듯 /필자) 上午 11時 聖化會堂內에 紀念의 禮式을 擧行하얏ㅣ 參式의 人이 5 百餘員이더라. 都執禮 羅龍煥 講士 吳尙俊 鄭廣朝 三氏가 紀念의 趣旨와 本敎의 眞理를 次第로 說明고 同日 下午 七時에 總部構內에 懸燈의 壯觀과 歌頌의 奏樂이 有야 一大盛況을 呈얏더라.’ 라 하여 敎日記念式을 매우 성대하게 행하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일기념일(敎日紀念日)이란, 포덕 46(1905)년 12월 1일에 ‘지난날의 동학을 오늘의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일기념일(敎日紀念日)에 대한 다른 자료는,『천도교회월보』통권 18호(제 2권 제8호)인 포덕 53년 1월호의 부록으로 교인들에게 달력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에 나누어 준, 포덕 53년(壬子年)도 달력(月曆)에 명시(明示)된 "천도교의 기념일과 기도 표(祈禱表)"를 보면, 7대 기념일과 4대 기도일이 표시되어 있다. 7대 기념일이란 ‘천일기념일, 지일기념일, 인일기념일, 대도주 승통일, 교일기념일, 성사 탄일, 대도주 탄일’이며, 4대기도일이란 ‘제1대 기도일, 제2대 기도일, 대신사 탄일, 신사 탄일’ 로 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기념일로 거행되고 있는 현도기념일의 명칭은, 포덕 109(1968)년부터 사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제63회(포덕 109(1968)년) 현도기념일의 교령기념사에서 "우리는 후천개벽의 역사적 시점인 이 날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고,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결심을 다짐하기 위하여, 현도기념일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라고 과거 ‘교일 기념일’로 정한 이후 해방과 6.25 동란이라는 혼란기를 지나는 동안 계속하여 포덕 50년에 제정되어 기념이로 성대히 거행해 오던「교일 기념일」 즉 대고천하한 날인, 12월 1일을 ‘다시개벽’의 역사적 시점이라 할 수 있는 이 날을,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결심을 다짐하기 위하여「현도기념일(顯道紀念日)」로 변경하여 거행하겠다는 교단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현송(顯誦)의 의미는, 현도(顯道)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뚜렷하게,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소리 내어 주문을 외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헤아릴 수 있다. 신앙자유의 당당한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시비(是非) 곡직(曲直)을 따지기 보다는, 어느 용어(用語)가 천도교의 교의(敎義)를 잘 담은 신앙 수련이 될 수 있는가를 먼저 가늠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보다 먼저 수행을 하는 이유를 명백히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개인의 욕구를 해결해주는 그런 종교(祈福宗敎)의 수행(修行)이 아니라,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한 자신의 희생(犧牲)을 전제(前提)로 한 신앙(信仰)의 결의(決意)와 몸가짐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각지불이(各知不移)하여 동귀일체(同歸一體)하고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로 지상천국 건설의 시기를 앞당기는 마음에서(與世同歸)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천도교는 현실참여(現實參與) 종교이며 작복종교(作福宗敎)이기 때문이다./ 『東學之人生觀』과 『天道敎政治理念』그리고『敎政雙全』을 필독(必讀)하여 참고(參考)할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본 주문 21자를 기본으로 “선생주문” 21자(至氣今至四月來,侍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 그리고 “제자주문”의 초학주문(爲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宜) 13자와 강령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 8자, 그리고 본주문(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13자의 체계를 확립하여 재세 시엔 여러 주문을 상항에 따라 심송과 구송으로 하였으나 1890년대 동학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본 주문 중심의 신앙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천도교 시대에 들어와서는 연원중심에서 총부 중심의 중앙 집권적(執權的)인 교화(敎化)가 실시됨에 따라 간소화(簡素化)되어 3.7주문 만으로 모든 의식을 간소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더러는 아직도 신입교인의 올바른 신앙생활 지도를 위하여 선생주문, 제자주문, 강령주문과 본 주문을 구분하여 지도하고 있는 실정(實情)에 있다. 그리고 암송, 묵송, 심송 중에 어떤 것이 교의에 맞는가는 신앙의 필요에 따라 구분하여, 운영해도 무리는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자세도 평좌이건 궤좌이건 간에 상항에 따라 변형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줏대 있는 신앙자(固我心柱)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이런 수련방법의 선택보다는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가? 신앙자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수운심법에 맞게 지도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항상 말하듯이 ‘사람의 진정한 삶은, 삶의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공존공영의 대도만이 수운심법의 길이기 때문이다.
참고사항 ; 윗글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이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아래의 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위에서 기술한 글들의 모든 자료의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신, 구파의 시작과 끝의 갈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필독하시기 부탁드립니다. 아래의 글들 중, ‘포덕 145(2004). 11. 28.에 게재 발표된 ’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와 포덕 150(2009). 01. 22.에 게재 발표된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벌써 포덕 155(2014). 03. 15. 에 다시 게재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포덕 150(2009). 01 .22.에 게재 발표한 바가 있는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은 내용이 매우 중요함으로, 아래에 별첨으로 하여 다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 현재 당면하고 있는 천도교의 실상과 신, 구파에 관련된 내용들을 아래에서 참조바람.
포덕 145(2004).08.05. 남북통일만이 지상과제가 아니다.
포덕 145(2004).11.28. 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포덕 147(2006).04.29.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가?
포덕 147(2006).04.29.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포덕 150(2009).01.22.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포덕 150(2009).01.22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 하)
포덕 150(2009).01.22.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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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포덕 150(2009)년 1월 22 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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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 글들을 쓰게 된 이유는, 과거 150년간의 한국 근, 현대에 있어서, 나의 조국의 근, 현대사와 교단사에 획기적인 역할로, 빛나는 역사창조에 참여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살았던 300여 만 명의 교인들을, 훌륭한 교단 지도자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온, 영광의 대 교단이었던 천도교 교단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더 이상은 황폐해져 처참한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의 단순함에서 출발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교단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수 만 가지의 이유에 대해서는,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는 이 참담한 현실이 받아드려지지 않는 아픔이 있습니다.
필자가 이런 글들을 써서, 여러 동덕 분들에게 부탁을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단지 과거 40여 년 전에, 10여 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교역자로서 중앙총부의 종무를 담당했던 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돌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음을 널리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국에 계신 교역자와 교인 여러 분들께서는, 부디 한 걸음씩 물러나시어 우리 모두가 맞이해야 할 교단의 장래를 깊이깊이 생각하시면서 신실한 신앙인으로서의 처신을 하여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단합된 교단으로 천도교의 중흥을 위한 교단사업에 다 같이 동참합시다. 필자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의 소원뿐입니다.
「한울님과 스승님, 조상님 감응하옵소서. 지금 제가 바라는 소원이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울님과 스승님, 조상님께 피를 토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심고를 드리오니, 단순하여 어리석고 우직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저버리지 마시옵고 지극히 불민(不敏)한 저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기를, 엎드려 한없는 통곡(痛哭)의 심고를 드립니다.」 / 오암 김 용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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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교단에는 진실과 정의라는 것이 없다고 질타(叱咤)해도 할 말이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는 참혹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애교자이고, 진성교인이고, 수운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하는 ‘정의의 신도’라고 주장하면서,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또 다른 폭력으로 교단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현재, 천도교 중앙 총부가 교단을 대표하는 집행부로서의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소통의 유일한 공간인 천도게시판에서, 총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교인들을 불법적으로 제명하고 있는 행위를, 부당한 행위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일부 동덕들 중에는, 총부를 옹호하거나 방조하는 듯 하는 교인들의 글을 맹공격하여 게시판에서 다 내 쫓아 그들만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려 황량한 들판을 휘젓고 다니는 강한 자들만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소수의 다양한 의견이나 주장은 사라져 버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신만은 수도 수련으로 단련된 신실한 교인이라는 듯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폭언과 암시적인 위협공갈과 인신공격과 인간적인 모욕을 주는 등의 진성교인답지 않은 언행으로 게시판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가, 총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교인들을 홈페이지에서 내몰고, 또 불법적으로 제명하고 있는, 천도교 중앙 총부의 파행적인 행위와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현 집행부의 처사나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교인들에게, 무자비한 폭언을 하여 <천도교인이라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이란 것을 떠나 인간이라는 자긍심>마저 처절히 무너뜨린 행위가 수운의 심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체행하는 수도의 도력이 높은 진성교인들의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 교단은 점점 해체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들고, 열성적이고 적극적이며 신실한 교인들 중 단골 방문자였던 200여 명이, 참여하여 참 신앙의 고백과 삶의 고난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신앙을 통하여 어렵게 극복해가며 활기 있게 대화를 나누던 홈페이지는, 피아를 막론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몰려 황량하고 고요함만 남았습니다. 지금은 15명 내외의 몇 사람만이 독점하여, 자신들의 이런 저런 생각을 게재하는 개인 홈이나 카페, 블로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버림받고 있는 홈페이지는, 피아를 막론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몰려 황량하고 고요함만 남았습니다.
그 어느 편도 교단의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중흥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이룩해야 할 미래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이 없이 너무나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묻혀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편이라도 교단의 미래를 내다보고 처신을 한다면 지금의 이전구투(泥戰狗鬪)식의 싸움은 자제되었어야 했습니다.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순수한 교도들의 이탈이 없는 원만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1년이 넘도록 이 긴 시간 동안 이 싸움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얻은 것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잃은 것은, 교단의 추한 싸움에 실망한, 누구의 편도 아닌 순수한 교도들의 이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천도교 교단에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깊은 실망감으로 인하여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교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오직 그들만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 싸움에서 쟁취하려는 궁극적인 결과가 우리라는 패거리의 교권이 아니라, 진정 신실한 교인인 여러 분들이 교단발전을 위한 최선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오직 여러분들은 인간이 가진 숭고한 성령이나 인간적인 품격마저 내동댕이쳐 가면서까지, 이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천도교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 혼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일군의 교역자는 있었지만, 이 싸움을 더 회복할 수 없도록 확전(擴戰)만 시켰을 뿐 문제해결의 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단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만한 능력 있고, 신망 있는 지도자는, 그 어느 편에도 없었다는 처참한 현실인 것입니다.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을 육성하지 못해서 야기된 이 파국의 모든 책임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은, 무능력하고 신망을 받지 못하는 교역자들에게 교단을 내맡기고 있다는 처참한 현실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만이 진실 되고 정의로운 처신을 하고 있다는 강변(强辯)과 진실되게 수운의 심법을 체행(體行)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으로 가득 찬 강변과 체행들은 결과적으로, 교단과 신실한 교인들에게 불신의 폭력을 마구 휘둘러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대신사님께서는 만유의 최령자가 인간이며, 한울님을 모신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으로 가득 찬 강변과 체행들은,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부끄럼 한 점 없이 이런 행위를 자행하는 행위는, 신실한 천도교인과 매우 고결한 성령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자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교헌에도 명시되지 않는 방법과 기준으로 교직자와 교인들을 징계 일변도로 운영하는 감사원의 적절하지 못한 행위와 기껏해야 3년간의 총부운영을 위임받은 교역자들이 교단의 장래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듯한, 처신이나, 총부에 봉직하고 있는 교역자의 행위가 교단 정신에 위배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일군의 교역자와 적극적인 교인들은, 순수한 교역자나 교인들이 아니라, 대 다수가 해방이후 지금까지 길던, 짧던 교단에 참여하여 오늘과 같은 교단풍토 조성에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들이므로, 지금의 불거진 문제만을 성토한다는 것은, 이런 풍토를 만든 자신들의 책임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교권을 장악하거나 천도교 교단 사업에 참여 했을 때, 여러분은 정말로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구가 오늘에 이 사태를 초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70년대 초, 100만이 넘는 교인을 가졌던 거대한 교단을, 불과 30여년 만에 처참하게 초토화시킨 교역자들이 누구이십니까? 그간의 참여했던 교역자 여러분들 중에, 나는 절대로 교단을 초토화 시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이번 사태와 같은 창피한 교단의 현실을 자초한 원인에 대하여 모두가 깊이 연구했어야 했고, 발전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젼을 준비해야 했었고, 이런 사태와 같은 일이, 수운의 창도 정신과 교헌에 위배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운영했어야 했습니다. 모든 책임의 근원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교단의 발전에 참여했던 기간과 신앙에 있어 매사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 책임의 일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깊이 반성하고 자신들의 처신이, 교단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와 걸림돌이 되는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며, 이 사태를 수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됩니다.
지금 교단주변을 맴돌고 있으면서, 자신의 설 자리를 엿보고 있거나 자신의 주장이 정의라고 울부짖으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시는 분들 중에는, 필자가 그들의 언행을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하기에는, 위에 인용한 수운대신사님의 말씀을 받아드려 체행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 드러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이 자신만은 진성교인이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다는 신념과 기개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3자 입장에서 그들의 언행을 구체적으로 살펴 분석해보면, 천도교 신앙의 종교적 목적이나, 상대가 어떤 신앙인지에 대한 정보도 없으면서, 함부로 폭언을 해대면서, 자신들만이 교단의 장래를 걱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언해서 말한다면, 이런 분들을 수운의 제자인 천도교의 진성교인이 아닌 ‘유사 천도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진성교인 분들은 조용히 수운심법에 따른 재가신앙(在家信仰)에만 전념하고 게신 것 같습니다.
교단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들 중에는 부끄러움도 없이, 자신만이 주문 독성과 수도를 많이 하여 도력이 높은 진성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를 가혹하게 처단하여 천도교를 신앙하고자 하는 동덕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아 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천도교를 신앙했고, 수많은 수도 수련을 했다고 자부하는 그들의 언행 속에서, 진성교인답거나 원로의 기품과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고 판단일까요? 이번 사태의 진행을 살펴보면서, 수도 수련이 많아 도력이 높다고 자타의 공인을 받던, 일부 교역자들의 처신에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천도교가 일세기 동안 육성해낸 교역자와 원로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인가를 생각할 때 그 부끄러움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에 있기 때문에, 수도 수련의 목적 또한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교단은 70년대 중엽부터 수도수련의 취지와 목적이, 천도교의 핵심적인 종교적 목적의 범위를 크게 벗어났기 때문에 교단은 침체되었고, 존경받을 수 있는 위엄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수도 수련의 목적과 교리 해석에 있어서, 의암성사 시절에 버린, 비기(秘記), 비결(秘訣), 잠언(箴言), 주역(周易)등의 예언에 매달려 개인의 기복신앙에 깊이 빠져, 천도교가 의암성사의 대고천하이후 1세기를 걸어오는 동안, 간단없이 추구하려 했던 종교적 4대 목적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 갈수 있는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인류역사에 대한 책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도교의 신앙과 종교적 목적은 수도수련을 통해서, 개인은 교인 각자의 본연아(無窮我)의 발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념의 강화를 형성하여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서는 선지자적인 역군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운대신사께서는 탄 도유심급 첫머리에서 ‘줏대 있는(固我心柱) 도인’이 되라고 하셨고, 의암성사께서도 무체법경 말미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되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줏대 있는(固我心柱) 도인과 주체적인 인간이, 신념에 불타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서는 선지자적인 역군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천도교의 올바른 신앙과 수도 수련을 통하여 이룩해야할, 이 시대가 절실하게 요구하는 역사적 사명이고, 책무인 당면과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사상과 신앙방법과 수도 수련을 통하여, 인간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래적(生來的)이고, 본원적(本源的)이며, 본능적인 욕구를 승화(昇華)시켜, 공동체(共同體)의 목표로 설정한, 지상천국 건설의 실현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천도교의 숭고하고 고급 종교다운 종교적 목적’ 인 것입니다. 수운대신사께서 동학으로 “다시 개벽의 세상의 실현”을 제시한 것은, 선천(先天)의 악질(惡疾)인 개개인의 본능적(本能的) 욕구에 얽매여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가는 세상을 개탄하여, 각자가 본연아(無窮我)의 발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념(信念)의 강화(强化)를 형성(形成)하도록 권장(勸獎)하였습니다. 이렇게 고급스럽고 탁월한 종교적인 사상이, 바로 후천의 ‘다시 개벽의 종교’로 빛난 탄생을 낳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인간 각각의 개인의 욕구를 절제(節制)하고, 고양(高揚)하여 승화시켜, ‘공동(共同)의 선(善)을 추구하고, 공동의 목표에 도달’ 하도록 해야 할 책무(責務)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사상인 ‘균형(均衡 ; balance)과 조화(調和 ; harmony)’의 실현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召命)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늘의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로운 기운을 받아 태어나지만, 타고난 그 기운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약점(弱點)인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인은 시천주(侍天主/人乃天)를 깨닫고 실천궁행(實踐躬行) 을 함으로써 하늘의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로운 기운 즉 지기(至氣)를 다스리려고 한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지기(至氣)가 온전히 신앙자의 마음 안으로(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수운의 제자로서 강령주문(降靈呪文)인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지기가 지금 내 안에 온전히 내려 담겨져야 하기 때문에 강령주문을 정성을 다하여 외워야 하는 것이다. 즉 지기 이전의 상태인 ‘음양(陰陽)이 균형(均衡, Balance)과 조화(調和, Harmony) 가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만사(萬事)의 운용(運用)에 있어서, 음양이 균형과 조화를 유지(維持)하게 되면 정상(正常; Normal)이라 하고, 음양이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그러한 상태를 비정상 (非正常; Abnormal)이라 한다. 사람의 삶의 추구는, 참된 삶이어야 함으로, 천도(天道/ 또는 天理, 天命)가 정상이 되어야 한다. 주문의 결과에 대해서는, 수운은 ‘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이라고 했다.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즉 수운이 제자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뜻은, 제자 주문을 정성을 다하여 송주를 하면, 주문의 뜻이 마음속에 깊이 담겨져, 그 주문의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마침내 지기가 화하여 매우 훌륭한 성인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성인은, 수운이 다른 법설에서 구체적으로 군자(君子) 또는 지상신선(至上神仙)이라고 했다.
註 12; 수운은 제자가 주문과 강령 주문의 뜻을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논학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음 원문의 내용은, 『천도교 경전』을 참고하여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曰呪文之意何也 曰 至爲天主之字故 以呪言之 今文有古文有
曰降靈之文 何爲其然也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今至者 於斯入道 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註 13; 呪文에는 다음과 같이 先生呪文과 弟子呪文이 있고, 先生呪文과 弟子呪文에는 각각 降靈呪文과 本呪文이 있다. 先生呪文과 弟子呪文의 다른 점은 弟子呪文에는 初學呪文이 있다는 것이다.
先生呪文
降靈呪文: 至氣今至四月來
本呪文 : 侍 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
弟子呪文
初學呪文: 爲 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宜
降靈呪文: 至氣今至願爲大 降
本呪文 : 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오늘날 천도교인들 중의 일부는, 위에서 설명한 천도교의 탁월한 종교적 사상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선천의 종교사상에 물들어 잘못된 동학, 천도교 사상을 갖고 수도 수련을 함으로서, 숭고한 천도교의 궁극적 목적을 망각(忘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의 실현이라는 신념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주문의 암송과 현송을 바탕으로 하는 수도 수련은, 천도교를 몰락(沒落)의 구렁텅이로 처박는 참담(慘憺)한 행위(行爲)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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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교의적인 사상과 신념의 실현이, 바로 근대사에 빛나는,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화운동, 기미독립운동. 이라는 3 대 운동을 통하여,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에로의 전환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전환(轉換)을 교단과 천도교 청우당이 조선총독부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혹(苛酷)한 감시(監視)와 통제(統制) 속에서도 300여 만 명의 교도를 가진 대 교단으로서 굴복(屈伏)하지 않고, 당당(堂堂)히 민중에 앞에 서서 종교와 사회문화운동을 이끌었던 것을, 한국의 근대사가 증명해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송주(誦呪)에 있어서 수운이 재세(在世)시에 와송(臥誦; 누워서 주문을 외는 것)은 금하였기 때문에, 단좌(單坐)를 주로 권장(勸獎)하였던 것이다. 선비와 군자(君子) 또는 지상신선(至上神仙)과 같은 단아(端雅)하고 품격(禀格)있는 교인의 자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송(口誦)이 어느 시기에 현송(顯誦)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것은 정확치가 않다. 포덕 46(1905)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현도기념일로 정한 것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천도교회월보』통권 17호(제 2권 제7호)인 포덕 52년 12월호의 중앙총부휘보 란에 보면 "敎日紀念盛況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布德 五十二年 12月 1日은 敎日(本校의 名稱과 目的을 大告天下 날)인 故로 同月(동월 동일의 잘못인 듯 /필자) 上午 11時 聖化會堂內에 紀念의 禮式을 擧行하얏ㅣ 參式의 人이 5 百餘員이더라. 都執禮 羅龍煥 講士 吳尙俊 鄭廣朝 三氏가 紀念의 趣旨와 本敎의 眞理를 次第로 說明고 同日 下午 七時에 總部構內에 懸燈의 壯觀과 歌頌의 奏樂이 有야 一大盛況을 呈얏더라.’ 라 하여 敎日記念式을 매우 성대하게 행하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일기념일(敎日紀念日)이란, 포덕 46(1905)년 12월 1일에 ‘지난날의 동학을 오늘의 천도교’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일기념일(敎日紀念日)에 대한 다른 자료는,『천도교회월보』통권 18호(제 2권 제8호)인 포덕 53년 1월호의 부록으로 교인들에게 달력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에 나누어 준, 포덕 53년(壬子年)도 달력(月曆)에 명시(明示)된 "천도교의 기념일과 기도 표(祈禱表)"를 보면, 7대 기념일과 4대 기도일이 표시되어 있다. 7대 기념일이란 ‘천일기념일, 지일기념일, 인일기념일, 대도주 승통일, 교일기념일, 성사 탄일, 대도주 탄일’이며, 4대기도일이란 ‘제1대 기도일, 제2대 기도일, 대신사 탄일, 신사 탄일’ 로 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기념일로 거행되고 있는 현도기념일의 명칭은, 포덕 109(1968)년부터 사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제63회(포덕 109(1968)년) 현도기념일의 교령기념사에서 "우리는 후천개벽의 역사적 시점인 이 날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고,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결심을 다짐하기 위하여, 현도기념일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라고 과거 ‘교일 기념일’로 정한 이후 해방과 6.25 동란이라는 혼란기를 지나는 동안 계속하여 포덕 50년에 제정되어 기념이로 성대히 거행해 오던「교일 기념일」 즉 대고천하한 날인, 12월 1일을 ‘다시개벽’의 역사적 시점이라 할 수 있는 이 날을,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결심을 다짐하기 위하여「현도기념일(顯道紀念日)」로 변경하여 거행하겠다는 교단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현송(顯誦)의 의미는, 현도(顯道)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뚜렷하게,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소리 내어 주문을 외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헤아릴 수 있다. 신앙자유의 당당한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시비(是非) 곡직(曲直)을 따지기 보다는, 어느 용어(用語)가 천도교의 교의(敎義)를 잘 담은 신앙 수련이 될 수 있는가를 먼저 가늠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보다 먼저 수행을 하는 이유를 명백히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개인의 욕구를 해결해주는 그런 종교(祈福宗敎)의 수행(修行)이 아니라,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한 자신의 희생(犧牲)을 전제(前提)로 한 신앙(信仰)의 결의(決意)와 몸가짐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각지불이(各知不移)하여 동귀일체(同歸一體)하고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로 지상천국 건설의 시기를 앞당기는 마음에서(與世同歸)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천도교는 현실참여(現實參與) 종교이며 작복종교(作福宗敎)이기 때문이다./ 『東學之人生觀』과 『天道敎政治理念』그리고『敎政雙全』을 필독(必讀)하여 참고(參考)할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본 주문 21자를 기본으로 “선생주문” 21자(至氣今至四月來,侍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 그리고 “제자주문”의 초학주문(爲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宜) 13자와 강령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 8자, 그리고 본주문(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13자의 체계를 확립하여 재세 시엔 여러 주문을 상항에 따라 심송과 구송으로 하였으나 1890년대 동학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본 주문 중심의 신앙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천도교 시대에 들어와서는 연원중심에서 총부 중심의 중앙 집권적(執權的)인 교화(敎化)가 실시됨에 따라 간소화(簡素化)되어 3.7주문 만으로 모든 의식을 간소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더러는 아직도 신입교인의 올바른 신앙생활 지도를 위하여 선생주문, 제자주문, 강령주문과 본 주문을 구분하여 지도하고 있는 실정(實情)에 있다. 그리고 암송, 묵송, 심송 중에 어떤 것이 교의에 맞는가는 신앙의 필요에 따라 구분하여, 운영해도 무리는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또한 자세도 평좌이건 궤좌이건 간에 상항에 따라 변형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줏대 있는 신앙자(固我心柱)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이런 수련방법의 선택보다는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가? 신앙자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수운심법에 맞게 지도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항상 말하듯이 ‘사람의 진정한 삶은, 삶의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공존공영의 대도만이 수운심법의 길이기 때문이다.
참고사항 ; 윗글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이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아래의 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위에서 기술한 글들의 모든 자료의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신, 구파의 시작과 끝의 갈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필독하시기 부탁드립니다. 아래의 글들 중, ‘포덕 145(2004). 11. 28.에 게재 발표된 ’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와 포덕 150(2009). 01. 22.에 게재 발표된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벌써 포덕 155(2014). 03. 15. 에 다시 게재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포덕 150(2009). 01 .22.에 게재 발표한 바가 있는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은 내용이 매우 중요함으로, 아래에 별첨으로 하여 다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 현재 당면하고 있는 천도교의 실상과 신, 구파에 관련된 내용들을 아래에서 참조바람.
포덕 145(2004).08.05. 남북통일만이 지상과제가 아니다.
포덕 145(2004).11.28. 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포덕 147(2006).04.29.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가?
포덕 147(2006).04.29.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포덕 150(2009).01.22.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포덕 150(2009).01.22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 하)
포덕 150(2009).01.22.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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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포덕 150(2009)년 1월 22 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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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 글들을 쓰게 된 이유는, 과거 150년간의 한국 근, 현대에 있어서, 나의 조국의 근, 현대사와 교단사에 획기적인 역할로, 빛나는 역사창조에 참여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살았던 300여 만 명의 교인들을, 훌륭한 교단 지도자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온, 영광의 대 교단이었던 천도교 교단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더 이상은 황폐해져 처참한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의 단순함에서 출발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교단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수 만 가지의 이유에 대해서는,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는 이 참담한 현실이 받아드려지지 않는 아픔이 있습니다.
필자가 이런 글들을 써서, 여러 동덕 분들에게 부탁을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단지 과거 40여 년 전에, 10여 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교역자로서 중앙총부의 종무를 담당했던 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돌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음을 널리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국에 계신 교역자와 교인 여러 분들께서는, 부디 한 걸음씩 물러나시어 우리 모두가 맞이해야 할 교단의 장래를 깊이깊이 생각하시면서 신실한 신앙인으로서의 처신을 하여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단합된 교단으로 천도교의 중흥을 위한 교단사업에 다 같이 동참합시다. 필자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의 소원뿐입니다.
「한울님과 스승님, 조상님 감응하옵소서. 지금 제가 바라는 소원이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울님과 스승님, 조상님께 피를 토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심고를 드리오니, 단순하여 어리석고 우직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저버리지 마시옵고 지극히 불민(不敏)한 저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기를, 엎드려 한없는 통곡(痛哭)의 심고를 드립니다.」 / 오암 김 용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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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교단에는 진실과 정의라는 것이 없다고 질타(叱咤)해도 할 말이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는 참혹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애교자이고, 진성교인이고, 수운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하는 ‘정의의 신도’라고 주장하면서,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또 다른 폭력으로 교단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현재, 천도교 중앙 총부가 교단을 대표하는 집행부로서의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소통의 유일한 공간인 천도게시판에서, 총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교인들을 불법적으로 제명하고 있는 행위를, 부당한 행위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일부 동덕들 중에는, 총부를 옹호하거나 방조하는 듯 하는 교인들의 글을 맹공격하여 게시판에서 다 내 쫓아 그들만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려 황량한 들판을 휘젓고 다니는 강한 자들만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소수의 다양한 의견이나 주장은 사라져 버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신만은 수도 수련으로 단련된 신실한 교인이라는 듯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폭언과 암시적인 위협공갈과 인신공격과 인간적인 모욕을 주는 등의 진성교인답지 않은 언행으로 게시판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가, 총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교인들을 홈페이지에서 내몰고, 또 불법적으로 제명하고 있는, 천도교 중앙 총부의 파행적인 행위와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현 집행부의 처사나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교인들에게, 무자비한 폭언을 하여 <천도교인이라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이란 것을 떠나 인간이라는 자긍심>마저 처절히 무너뜨린 행위가 수운의 심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체행하는 수도의 도력이 높은 진성교인들의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 교단은 점점 해체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들고, 열성적이고 적극적이며 신실한 교인들 중 단골 방문자였던 200여 명이, 참여하여 참 신앙의 고백과 삶의 고난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신앙을 통하여 어렵게 극복해가며 활기 있게 대화를 나누던 홈페이지는, 피아를 막론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몰려 황량하고 고요함만 남았습니다. 지금은 15명 내외의 몇 사람만이 독점하여, 자신들의 이런 저런 생각을 게재하는 개인 홈이나 카페, 블로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버림받고 있는 홈페이지는, 피아를 막론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몰려 황량하고 고요함만 남았습니다.
그 어느 편도 교단의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중흥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이룩해야 할 미래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이 없이 너무나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묻혀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편이라도 교단의 미래를 내다보고 처신을 한다면 지금의 이전구투(泥戰狗鬪)식의 싸움은 자제되었어야 했습니다.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순수한 교도들의 이탈이 없는 원만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1년이 넘도록 이 긴 시간 동안 이 싸움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얻은 것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잃은 것은, 교단의 추한 싸움에 실망한, 누구의 편도 아닌 순수한 교도들의 이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천도교 교단에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깊은 실망감으로 인하여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교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오직 그들만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 싸움에서 쟁취하려는 궁극적인 결과가 우리라는 패거리의 교권이 아니라, 진정 신실한 교인인 여러 분들이 교단발전을 위한 최선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오직 여러분들은 인간이 가진 숭고한 성령이나 인간적인 품격마저 내동댕이쳐 가면서까지, 이렇게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천도교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 혼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일군의 교역자는 있었지만, 이 싸움을 더 회복할 수 없도록 확전(擴戰)만 시켰을 뿐 문제해결의 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단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만한 능력 있고, 신망 있는 지도자는, 그 어느 편에도 없었다는 처참한 현실인 것입니다.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을 육성하지 못해서 야기된 이 파국의 모든 책임은, 천도교를 신앙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은, 무능력하고 신망을 받지 못하는 교역자들에게 교단을 내맡기고 있다는 처참한 현실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만이 진실 되고 정의로운 처신을 하고 있다는 강변(强辯)과 진실되게 수운의 심법을 체행(體行)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으로 가득 찬 강변과 체행들은 결과적으로, 교단과 신실한 교인들에게 불신의 폭력을 마구 휘둘러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대신사님께서는 만유의 최령자가 인간이며, 한울님을 모신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으로 가득 찬 강변과 체행들은,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부끄럼 한 점 없이 이런 행위를 자행하는 행위는, 신실한 천도교인과 매우 고결한 성령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자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교헌에도 명시되지 않는 방법과 기준으로 교직자와 교인들을 징계 일변도로 운영하는 감사원의 적절하지 못한 행위와 기껏해야 3년간의 총부운영을 위임받은 교역자들이 교단의 장래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듯한, 처신이나, 총부에 봉직하고 있는 교역자의 행위가 교단 정신에 위배된다고 항변하고 있는 일군의 교역자와 적극적인 교인들은, 순수한 교역자나 교인들이 아니라, 대 다수가 해방이후 지금까지 길던, 짧던 교단에 참여하여 오늘과 같은 교단풍토 조성에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들이므로, 지금의 불거진 문제만을 성토한다는 것은, 이런 풍토를 만든 자신들의 책임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교권을 장악하거나 천도교 교단 사업에 참여 했을 때, 여러분은 정말로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구가 오늘에 이 사태를 초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70년대 초, 100만이 넘는 교인을 가졌던 거대한 교단을, 불과 30여년 만에 처참하게 초토화시킨 교역자들이 누구이십니까? 그간의 참여했던 교역자 여러분들 중에, 나는 절대로 교단을 초토화 시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이번 사태와 같은 창피한 교단의 현실을 자초한 원인에 대하여 모두가 깊이 연구했어야 했고, 발전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젼을 준비해야 했었고, 이런 사태와 같은 일이, 수운의 창도 정신과 교헌에 위배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운영했어야 했습니다. 모든 책임의 근원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교단의 발전에 참여했던 기간과 신앙에 있어 매사에 소홀했기 때문에, 그 책임의 일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깊이 반성하고 자신들의 처신이, 교단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와 걸림돌이 되는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며, 이 사태를 수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됩니다.
지금 교단주변을 맴돌고 있으면서, 자신의 설 자리를 엿보고 있거나 자신의 주장이 정의라고 울부짖으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시는 분들 중에는, 필자가 그들의 언행을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하기에는, 위에 인용한 수운대신사님의 말씀을 받아드려 체행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 드러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이 자신만은 진성교인이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다는 신념과 기개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3자 입장에서 그들의 언행을 구체적으로 살펴 분석해보면, 천도교 신앙의 종교적 목적이나, 상대가 어떤 신앙인지에 대한 정보도 없으면서, 함부로 폭언을 해대면서, 자신들만이 교단의 장래를 걱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언해서 말한다면, 이런 분들을 수운의 제자인 천도교의 진성교인이 아닌 ‘유사 천도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진성교인 분들은 조용히 수운심법에 따른 재가신앙(在家信仰)에만 전념하고 게신 것 같습니다.
교단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들 중에는 부끄러움도 없이, 자신만이 주문 독성과 수도를 많이 하여 도력이 높은 진성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를 가혹하게 처단하여 천도교를 신앙하고자 하는 동덕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아 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천도교를 신앙했고, 수많은 수도 수련을 했다고 자부하는 그들의 언행 속에서, 진성교인답거나 원로의 기품과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고 판단일까요? 이번 사태의 진행을 살펴보면서, 수도 수련이 많아 도력이 높다고 자타의 공인을 받던, 일부 교역자들의 처신에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천도교가 일세기 동안 육성해낸 교역자와 원로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인가를 생각할 때 그 부끄러움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에 있기 때문에, 수도 수련의 목적 또한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교단은 70년대 중엽부터 수도수련의 취지와 목적이, 천도교의 핵심적인 종교적 목적의 범위를 크게 벗어났기 때문에 교단은 침체되었고, 존경받을 수 있는 위엄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수도 수련의 목적과 교리 해석에 있어서, 의암성사 시절에 버린, 비기(秘記), 비결(秘訣), 잠언(箴言), 주역(周易)등의 예언에 매달려 개인의 기복신앙에 깊이 빠져, 천도교가 의암성사의 대고천하이후 1세기를 걸어오는 동안, 간단없이 추구하려 했던 종교적 4대 목적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 갈수 있는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인류역사에 대한 책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도교의 신앙과 종교적 목적은 수도수련을 통해서, 개인은 교인 각자의 본연아(無窮我)의 발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념의 강화를 형성하여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서는 선지자적인 역군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운대신사께서는 탄 도유심급 첫머리에서 ‘줏대 있는(固我心柱) 도인’이 되라고 하셨고, 의암성사께서도 무체법경 말미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되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줏대 있는(固我心柱) 도인과 주체적인 인간이, 신념에 불타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서는 선지자적인 역군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천도교의 올바른 신앙과 수도 수련을 통하여 이룩해야할, 이 시대가 절실하게 요구하는 역사적 사명이고, 책무인 당면과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사상과 신앙방법과 수도 수련을 통하여, 인간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래적(生來的)이고, 본원적(本源的)이며, 본능적인 욕구를 승화(昇華)시켜, 공동체(共同體)의 목표로 설정한, 지상천국 건설의 실현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천도교의 숭고하고 고급 종교다운 종교적 목적’ 인 것입니다. 수운대신사께서 동학으로 “다시 개벽의 세상의 실현”을 제시한 것은, 선천(先天)의 악질(惡疾)인 개개인의 본능적(本能的) 욕구에 얽매여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가는 세상을 개탄하여, 각자가 본연아(無窮我)의 발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념(信念)의 강화(强化)를 형성(形成)하도록 권장(勸獎)하였습니다. 이렇게 고급스럽고 탁월한 종교적인 사상이, 바로 후천의 ‘다시 개벽의 종교’로 빛난 탄생을 낳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인간 각각의 개인의 욕구를 절제(節制)하고, 고양(高揚)하여 승화시켜, ‘공동(共同)의 선(善)을 추구하고, 공동의 목표에 도달’ 하도록 해야 할 책무(責務)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학과 천도교의 핵심사상인 ‘균형(均衡 ; balance)과 조화(調和 ; harmony)’의 실현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召命)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늘의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로운 기운을 받아 태어나지만, 타고난 그 기운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약점(弱點)인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인은 시천주(侍天主/人乃天)를 깨닫고 실천궁행(實踐躬行) 을 함으로써 하늘의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로운 기운 즉 지기(至氣)를 다스리려고 한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지기(至氣)가 온전히 신앙자의 마음 안으로(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수운의 제자로서 강령주문(降靈呪文)인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지기가 지금 내 안에 온전히 내려 담겨져야 하기 때문에 강령주문을 정성을 다하여 외워야 하는 것이다. 즉 지기 이전의 상태인 ‘음양(陰陽)이 균형(均衡, Balance)과 조화(調和, Harmony) 가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만사(萬事)의 운용(運用)에 있어서, 음양이 균형과 조화를 유지(維持)하게 되면 정상(正常; Normal)이라 하고, 음양이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그러한 상태를 비정상 (非正常; Abnormal)이라 한다. 사람의 삶의 추구는, 참된 삶이어야 함으로, 천도(天道/ 또는 天理, 天命)가 정상이 되어야 한다. 주문의 결과에 대해서는, 수운은 ‘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이라고 했다.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즉 수운이 제자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뜻은, 제자 주문을 정성을 다하여 송주를 하면, 주문의 뜻이 마음속에 깊이 담겨져, 그 주문의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마침내 지기가 화하여 매우 훌륭한 성인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성인은, 수운이 다른 법설에서 구체적으로 군자(君子) 또는 지상신선(至上神仙)이라고 했다.
註 12; 수운은 제자가 주문과 강령 주문의 뜻을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논학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음 원문의 내용은, 『천도교 경전』을 참고하여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曰呪文之意何也 曰 至爲天主之字故 以呪言之 今文有古文有
曰降靈之文 何爲其然也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今至者 於斯入道 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註 13; 呪文에는 다음과 같이 先生呪文과 弟子呪文이 있고, 先生呪文과 弟子呪文에는 각각 降靈呪文과 本呪文이 있다. 先生呪文과 弟子呪文의 다른 점은 弟子呪文에는 初學呪文이 있다는 것이다.
先生呪文
降靈呪文: 至氣今至四月來
本呪文 : 侍 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
弟子呪文
初學呪文: 爲 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宜
降靈呪文: 至氣今至願爲大 降
本呪文 : 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오늘날 천도교인들 중의 일부는, 위에서 설명한 천도교의 탁월한 종교적 사상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선천의 종교사상에 물들어 잘못된 동학, 천도교 사상을 갖고 수도 수련을 함으로서, 숭고한 천도교의 궁극적 목적을 망각(忘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의 실현이라는 신념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주문의 암송과 현송을 바탕으로 하는 수도 수련은, 천도교를 몰락(沒落)의 구렁텅이로 처박는 참담(慘憺)한 행위(行爲)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주문(呪文) 수련에 대한 단상(斷想).(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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