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經의 資料分析 比較硏究(10-3) > 중앙총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중앙총부

자유게시판 後經의 資料分析 比較硏究(10-3)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16회 작성일 16-10-21 23:07

본문

後經의 資料分析 比較硏究(10-3)
■ 가결(歌訣) /동의어 구결(口訣) ; 동양산학(東洋算學)에서 수학 공식을 시(詩) 형식으로 만들어 기억하기 쉽게 만든 것.
[내용] ; 구결(口訣)이라고도 한다. 다분히 한시의 형식을 답습하였다. 전통 산학에서는 창조적 노력보다는 경전시(經典視)된 산서(算書)를 그대로 기억하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가결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결이 가장 유행한 시기가 중국에서 수학이 가장 침체됐던 명나라 때였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1450년에 발간된 오경(吳敬)의 『구장산법비류대전(九章算法比類大全)』에는 「난법가(難法歌)」가 있으며,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 白米三石五斗, 芝麻換得三石, 芝麻五斗五升, 知八斗小麥, 換己却有小麥換米, 九石六斗無移 知公能算間 端的不合人笑儞(백미삼석오두, 지마환득삼석, 지마오두오승, 지팔두소맥,환기각유소맥환미, 구석육두무이 지공능산간 단적불합인소이). …… (右西江月)
그 뜻은 백미 석 섬 닷 말은 지마(깨) 석 섬으로, 또 지마 닷 말 닷 되는 소맥(밀) 여덟 말로 환산할 수 있다. 소맥 아홉 섬 여섯 말을 백미로 바꾸면 얼마냐는 문제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서강월의 가락이다. 즉, 수학문제를 노래처럼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노랫가락으로 수학을 다룬 것은 『구장산법비류대전』이 최초의 것이다.
『산법통종(算法統宗)』은 이 책의 영향을 크게 받아 구결·가결을 대폭 채용하였다. 특히, 수학의 학습요령, 주의할 점 등을 한시의 형식으로 기술하였고, 주판의 계산법에 관해서는 구귀가(九歸歌)라 하여 그 내용을 모두 시 형식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일본에서 출판됨과 더불어 널리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구수략(九數略)』을 비롯하여 수많은 산서가 가결의 형식을 취하였다.
참고문헌
『산법통종(算法統宗)』
『구수략(九數略)』
『한국수학사(韓國數學史)』(김용운·김용국, 열화당, 1982)
『中國數學史』(商務印書館, 195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현토(懸吐) ; 한자어를 끊어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
‘현토(懸吐)’란 한문 문장에 우리말의 토를 다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의 경우 붙여 쓰기의 형태로 적혀 있는 한문 문장을 보다 원활하게 이해하기 위해 문장과 문장 사이, 혹은 문장 안의 구절이 끝나는 곳에 우리말의 조사를 붙여 토를 다는 것을 지칭한다. 한자의 일부를 따서 한문의 구절 끝에 다는 우리말 식의 토인 ‘구결’이나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서 우리말을 적는 표기체계인 ‘이두’와 달리, ‘현토’는 한문 체언에 붙는 우리말 조사와 한문 어간 뒤에 붙는 우리말 어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현토’는 ‘문어(文語)’인 한문을 ‘구어(口語)’인 우리말의 특성에 맞추어 의미를 용이하게 해석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 토(吐/ 懸吐)를 달다.
본뜻/ 흔히 한자에 토를 달았다. 는 말의 의미를, ‘天地’라는 한자에 우리말로 ‘천지’라고 독음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자의 우리말 소리는 ‘독음’이지 ‘토’가 아니다. ‘토’라 함은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을 쉽게 알기 위하여 한문으로 된 글에 語節이나 句節 끝에 붙여 쓰고 읽는 우리말로서 우리말의 조사에 해당한다. ‘토씨’라고 쓰기도 한다.
조현용은 토를 달았다. 에 대하여 「‘토’는 ‘조사’의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북한에서나 일부 학자들은 ‘조사’와 ‘어미’를 모두 ‘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심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인 의미를 더한다는 생각으로 쓰는 용어입니다. 이 ‘토’라는 단어는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토를 달다’에서처럼 원래 쓰이고 있었던 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한문 어구를 읽을 때 해석의 편이를 위해서 한글로 토를 달아 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표현들을 살펴보면 토는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요? 우리말에서는 조사를 쓰는 것이 안 쓰는 것보다 오히려 어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글로 쓸 때보다 말로 할 때는 조사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조사가 생략되었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생각해 보면 생략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첨가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조사가 없어도 그 말이 쓰인 상황을 보면 의미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재외 동포 신문2016.04.12
예를 들면 ‘-하야, -하고, -더니, -하사, -로, -면, -에’ 등이 토에 해당한다.
한문 문장의 예: 有朋이 自遠訪來하니 不亦樂好아
바뀐 뜻/ 오늘날에 와서는 위에서 설명한 본래의 뜻보다는 얘기 중에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경우에 뒤에 덧붙여 하는 얘기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관련 자료 종합.
■ 조사(助詞) / 品詞 중의 하나.
문장 내에서 주로 체언에 연결되어 뒤에 오는 다른 단어에 대하여 가지는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특별한 의미요소를 첨가 하여주는 기능을 지닌 형태이다. 토씨라고도 한다. 조사는 형태상으로는 활용하지 않고, 의미상으로는 독립된 구체적 의미를 표시하지 못하여 관념사(觀念辭)에 부속되는 관계사(關係辭)이고, 기능상으로는 자립어에 부속되어 그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의미를 덧붙여준다.
국어의 어미변화는 크게 곡용과 활용의 두 유형이 있는데, 조사는 곡용어미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착어(膠着語)에 속하는 국어에서 조사는 문법상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며, 조사의 이러한 특성에 의하여 문장에서의 어순(語順)도 비교적 자유롭게 된다. 조사는 독립형식이 되지 못하지만 문법적으로는 한 단위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사를 독립된 품사, 즉 조사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단어의 일부인 어미 또는 접미사로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국어에서 굴절체계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학자들의 주장은 크게 조사를 품사로 인정하고 활용어미는 품사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와, 조사와 활용어미를 품사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문장의 모든 요소를 완전한 의미의 단어로 분석해 내고자 하는 입장에서가 아니고, 단지 문법적인 면을 중시하여 조사를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는 것이 국어문법의 기술에 유익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어미로 보다는 조사로 인정하는 쪽으로 점차 기울고 있다.
조사는 그 기능·의미·분포 등에 따라 격조사(格助詞)와 보조사(補助詞, 이를 보조조사 또는 특수조사라고도 한다.)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사의 기능이 통사기능이냐 의미기능이냐에 따라 이같이 분류되는 것인데, 통사기능은 격조사가, 의미기능은 보조사가 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격조사·보조사로 분류하는 방법 이외에 격조사·보조사·접속조사·감탄조사, 격조사·보조사·연결조사, 격조사·구문조사(構文助詞)·한정조사, 격조사·접속조사·한정조사, 격조사·후치사·첨사 등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격조사의 설정은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분류가 달라지는 것은 보조사에 대한 명칭이나 이를 세분하는 태도에 말미암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정조사는 보조사에 해당하며, 접속조사·연결조사·구문조사는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명칭만 달리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격조사·후치사·첨사의 분류는 특히 중세국어 및 근대국어의 조사체계를 기술할 때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분류상의 차이는 결국 격조사와 보조사만 인정하느냐, 그밖에 접속조사나 감탄조사를 더 인정하느냐 하는 태도에 말미암은 것이다.
(1) 격조사
격조사는 체언을 같은 문장 안의 다른 단어와 일정한 문법적 관계를 맺게 해주는 조사이다. 그래서 격(格) 개념의 차이에 따라 격조사의 하위분류방법이 달라진다. 변형생성문법에서는 격을 내면구조상의 내면격(또는 심층격)과 표면구조상의 표면격으로 구분한다. 격조사를 표면상에 나타난 형태에만 국한하여 분류하는 것이 표면격에 대한 분류다. 이러한 표면격의 조사에 대한 분류는 대개 일형태일격(一形態一格)의 원칙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이 온당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주격(이·가)·속격(의)·처격(에)·여격(에게)·대격(을·를·ㄹ)·기구격(으로·로)·공동격(와·과)·호격(아·야)의 조사들이 그것이다.
종래에는 한 형태가 문맥에서 여러 의미기능을 나타내는 사실에 집착하여, ‘이·가’를 주격·변성격(變成格)·변위격(變爲格)·보어격 등의 이중 삼중의 명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후행하는 용언의 의미내용에 의한 분류라 하겠다. 이러한 분류는 전통문법 또는 학교문법에서 주로 행하여졌는데 매우 다양하다.
격문법(格文法)의 이론에 의하면, 격은 한 단문의 내면구조상에서 서술어를 핵으로 한 명사구들의 통사론적·의미론적 관계이다. 그리하여 격조사는 그 형태에 따라 기술, 분류되지 않고 그 통사론적·의미론적 기능에 따라 기술, 분류되었다. 예컨대 “사슴이 포수에게 잡혔다.”에서 ‘사슴이’의 ‘이’와 ‘포수에게’의 ‘에게’는 종래에 각각 주격조사·여격조사라고 하였으나 내면격에서는 각각 목적격·행위격이 된다.
이 문장의 내면구조가 “포수가 사슴을 잡았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면격의 조사는 행위격·기구격·목적격·출발격·경로격(經路格)·도달격·처격·시간격·공동격·여격·경험격 등의 조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러한 내면격의 설정은 동일한 격이 동일한 격조사에 의해서만 표현되지 않고 많은 조사에 의하여 표현되고, 또 한 격조사가 여러 격에 두루 사용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2) 보조사
보조사는 그것이 연결된 체언을 일정한 격으로 규정하지 않고 여러 격에 두루 쓰이게 하고, 또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여 주는 조사를 말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특수조사라고도 한다. 보조사는 격표시기능과 의미표시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견해와 의미표시기능만 담당한다는 견해가 있으나 후자가 유력하다. 따라서, 보조사의 하위분류는 의미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대조·단독·동일·각자·시발·도달·추종·종결·비교·본연·동류·정도를 나타내는 보조사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의미규정의 객관적 기준에 문제점이 있다.
한정조사란 격문법 이론에 입각한 보조사에 대한 이칭(異稱)이다. 접속조사는 체언과 체언을 연결하여 한 문장성분이 되게 하는 조사이다. 체언과 체언을 접속시켜 주는 접속조사는 명사구와 서술어와의 관계표시가 격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격조사도 아니며 의미첨가도 시키지 못하므로 보조사도 아니다. 이것이 접속조사를 독립시키는 학자들의 이유이다. 감탄조사는 감탄의 느낌이나 의미를 나타내는 조사를 말하는데, 보조사에 귀속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3) 특징
조사는 선행체언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이형태(異形態)가 존재하기도 한다(‘이·가’, ‘을·를·ㄹ’ 등). 이 이형태는 대부분 격조사에서 보이고 보조사에서는 ‘은·는’이 특별히 보일 뿐이다. 조사는 선행체언의 의미자질(意味資質)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기도 한다. ‘께서·께’는 선행체언이 항상 존칭체언이며, ‘에게’는 유정체언이다. 조사는 따로따로 체언에 연결되는 것이 원칙이나, 때로는 둘 이상의 조사가 합성되어 연결되기도 한다. 이를 이중곡용이라 하여 하나의 격조사가 나타나는 단순곡용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 이중곡용은 합성된 격조사의 기능을 함께 표시하나, 대개 뒤에 오는 격조사의 기능이 앞에 오는 격조사의 기능도 취합하여 그 체언의 기능을 표시한다.
또한, 국어에서는 한 단문내에 동일한 조사가 연결된 명사구가 둘 이상 오기도 한다. 이것을 격의 중출(重出)이라 한다. 국어에서는 특히 격조사가 생략되기도 한다. 격조사 없이 쓰인 체언을 부정격(不定格)으로 처리하는 학자도 있다. 국어의 조사는 그 형태가 이형(異形)과 복합형(複合形)을 합쳐서 약 480여 개나 되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조사는 국어문장의 통사·의미의 모든 부문에 관여되기 때문에 국어문법의 중심적인 과제의 하나가 되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
『우리말본』(최현배, 정음사, 1937)
『국어학개설』(이희승, 민중서관, 1955)
『국어문법체계의 사적연구』(이승욱, 일조각, 1973)
『한국어조사의 통시적연구』(김승곤, 대제각, 1978)
『국어조사의 연구』(성광수, 형설출판사, 1978)
『국어특수조사론』(홍사만, 학문사, 1983)
「격의 독립품사시비」(이숭녕, 『국어국문학』 4, 1953)
「조사설정의 재검토」(이숭녕, 『동양문화』 5, 1966)
「중세국어의 속격어미 ‘―ㅅ’에 대하여」(안병희, 『이숭녕박사송수기념논총』, 1968)
「국어의 격에 대하여」(김민수, 『국어국문학』 49·50, 1970)
「현대국어특수조사의 연구」(채완, 『국어연구』 39, 1977)
「국어의 조사」(홍윤표, 『언어』 4-2, 1979)
■ 『後經』(一)과 (二)의 比較分析資料의 選定에 대한 說明.
天道敎中央總部가 1912년에 편찬 간행한 印刷本인 後經一과 二를 原本으로 하여 新派關聯 比較分析資料 4編과 舊派關聯 比較分析資料. 4편을 對照하여 比較分析을 하였다. 比較分析 資料로 選定한 基準은 다음과 같다.
新, 舊派의 關聯 資料들의 選定은 自他가 認定할 수밖에 없는 인쇄본 이후에 다룬 자료들로써 敎理와 敎史의 側面에서 변화를 보였던 자료들을 선정했다. 특히 관련 자료들은 敎義的인 解釋에서 변화를 가져왔고 體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重視했다.
■ 新派 관련자료 해설
※『後經一』과 『後經二』/ 印刷本 ; 『後經一』과 『後經二』는 天道敎中央總部 藏版으로 布德 43(1912/明治45年)年 3月 16日에, 朴寅浩의 編述로 普書館에서 漢文體으로 刊行되었다. 後經一과 後經二는 각각 上, 中, 下편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孫秉熙의 法說을 「正義」라는 小 項目으로 解說하고 있다. 後經 一은 24페이지로, 後經 二는 100페이지로 출간되었다. 이번 『後經一』과 『後經二』의 比較硏究의 比較文章의 나눔은, 위의 印刷本 原文의 文章 分節을 따랐다. 1920年에 刊行된 『天道敎書』 謄寫本에서는 後經一과 後經二의 내용이 뒤바뀌어 있다. 後經一에는 後經二의 내용이, 後經二에는 後經一의 내용이 잘못 筆寫되어 蒐錄되어 있다. 後經 一/ 第 三編. 義菴聖師 PP. 50-54. 後經 二/ PP. 54-55 참조하여 확인 바람./ 筆者의 카페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의 김용천 자료실 240번 천도교 창건사 이본의 비교분석연구/2014년 2월 과 254번 천도교서의 이본에 대하여 / 2014년 4월. 를 참고바람.
※ 天道敎書 謄寫本 ; 천도교 청년 교리 강연부에서 포덕 61(1920)년 4월 1일에 筆耕이 완료되어 謄寫되어 講材로 사용된 것으로, 교단 최초로 만들어진 國漢混用體의 敎史로서 동학과 천도교의 70여년의 방대한 교단사로 총 489페이지로 되어 있다. 가로17.5cm X 세로25.5cm. 미농지에 등사된 교서. 제 1편. 52장/104페이지. 제 2편. 79장/158페이지. 제 3편. 64장/128페이지. 儀禮 2장/4페이지. 天道敎書謄抄 附/義菴聖師 法說모음 48장/95페이지.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1962年 5月) P.211./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 - 通卷 十一號(1963年 5月)의 天道敎書 謄寫本에 대한 게재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資料는 끝에 붙어 있는 編輯餘言에 의하면 西紀一九二ㅇ年(西紀一九一九年 九月 二日에 창립된 天道敎靑年敎理講硏部에 의해 준비되었다.) 에 있었던 「天道敎 敎理 臨時 講習會」의 敎材로서 마련된 것으로 謄寫本으로 傳해지고 있다. 編輯餘言에도 指摘되어 있는 바와 같이 時間上의 制限으로 「編輯上 多少 不完全한 遺憾이 有」하나 「後日 敎書를 大成함에 있어서 그 資料가 될 것이라고 믿고」내놓은 것이 이 資料다. 그 뒤에 이 資料를 土臺로 하여 「天道敎創建史」가 出版되었다. 이리하여 自然히 이 資料는 날로 世人의 耳目에서 멀어져 갔고 또 그 保存이 等閑하여 졌다. 그러나 後日의 取捨選擇 이전의 史料를 찾아 볼 수 있는 이 資料는 東學의 硏究에 參考가 될 것으로 믿고 이 資料欄에 連載키로 했다.
이 資料는 黃業周先生의 所藏本임을 밝히는 바이다.(編輯者) /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1962年 5月) P.211./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 - 通卷 十一號(1963年 5月)에 전편이 수록됨.‘ 이후 이 자료는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28권(1996년에 전체 30권짜리로 나온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관련 자료들을 필자가 종합 기술함
吾菴 註 ; 天道敎書 第三編 義菴聖師 編 P.64.의 編輯餘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布德六十一庚申年四月一日編終
編輯餘言
一、本書는天道敎敎理臨時講習會員의要求에應하야蒐集함.
一、本書는時間의短縮함에因하야編輯上多少不完全한遺憾이有함.
一、本書는後日敎書大成의原稿資料에萬一의助가될줄로自信함. / 필자가 관련자료를 보고 정리함.
※ 天道敎創建史 ; 1933년에 천도교 중앙종리원에서 간행한 교단 최초의 교사이다 대표 집필자인 이돈화는 1920년대부터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라는 관점에서 천도교 교리 및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는데, 이 책도 그러한 기본방향에서 천도교 70년의 역사를 다루었다. 내용은 대신사편, 해월신사편, 의암성사편, 중의제편 등 4부로 나누어져 있다. 1920年 天道敎書 謄寫本/謄寫本을 바탕으로, 오상준의 본교역사는 물론 천도교서 등을 망라해서 참고하여 기술되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제1편은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최제우(崔濟愚)를 다루어 탄생부터 순교까지를 서술하고, 말미에는 최제우가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싣고 있다. 총 95페이지이다.
제2편은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時亨)을 다루고 있는데, 최시형이 동학을 재건하여 나가는 과정과 교세가 커진 뒤의 동학운동을 밝히고 있다. 제10장은 최시형의 순교를 서술하고 있으며, 제9장은 최시형의 기본사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총 85페이지이다.
제3편은 의암성사(義菴聖師)손병희(孫秉熙)를 다루고 있다. 손병희가 제3대 교주로 되는 과정과 실권을 잡은 뒤의 활동상황을 서술하였다. 말미에는 손병희가 지었다는 많은 종류의 글들이 실려 있다. 총 134페이지이다.
제4편은 손병희가 사망한 1922년 이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신파·구파가 갈등을 겪는 가운데 진행된 교회의 민주화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자 자신이 신파·구파 싸움에 휘말려 있어서 객관적인 서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사료와 고증에 충실한 역사서술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총 20페이지이다. 그러나 천도교의 교리와 사상에 관한 연구활동에 있어서 이돈화의 명성이 워낙 확고하였기 때문에, 이 책이 미친 영향은 한동안 거의 압도적이었다.
이와 같이 각 편의 끝에 교주들의 저서와 법설(法說)의 주요 내용을 실은 것은 “사(史)와 경(經)을 개괄적으로 통일하여 교리연구상 참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천도교 창건사』는 총 334페이지의 교사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과 관련자료 종합.
※ 天道敎經典/三部經典本 ; 삼부 경전 편찬에 있어 수록 범위와 번역 그리고 해석에 총 책임을 지고 있었던 철암 박응삼(喆菴 朴應三)이 쓴 ‘붓을 놓으며’ 에 의하면 이 경전 체제와 간행의도와 의미 그리고 그 경위를 살펴볼 수가 있다.
一. 책 이름과 체제
이 책은 그 내용을 「천종법경」(최수운대신사편)「도종법경」(최해월신사편)「교종법경」(손의암성사편) 등 三편으로 가려서 엮었다.
천종, 도종, 교종이란 것은 의암성사 시대부터 일커러온 바요, 특히 우리는 삼세교조를 후천(後天)의 천황, 지황, 인황(天皇, 地皇, 人皇)으로 모시는 것이며 더욱이 이것은 우리들 제자의 생각이라기보다 직접 세 분 스승님께서 법설로 하신 것임을 교사의 기록에서 고증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천종법경」이라 「도종법경」이라 한 것도 이번에 새삼스러히 지어낸 것이 아니요, 일직히 지강 양한묵(芝江 梁漢黙)선생께서 「동경연의」를 다시 주해하여 「천종법경」이라 하고 다 같이 강습 교재로 쓰던 것이다.(활자화 되지는 못하였으나-----)
二. 원고 수집과 번역의 경위
지금부터 약 십년전 불초 역자는 「천도교 경전은 삼세 신성사의 법설을 원문만이라도 한 책에 엮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마침 포덕 九十一년 十二월에 충남 대전(大田)에 「천도교 월남교인 연락처」가 생겼을 때에 불초한 이 사람이 약 삼개월간 「연락처」에서 일을 보게 되면서 경전 편찬에 관한 원문을 개인적으로 수록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九十六년 四월부터 총부 직원중 한 사람이 된 영광을 입음으로 부터 넓히 원문을 수록 하는데 힘썼던 바 「천도교 창건사」를 비롯 하여 백중빈(白重彬)씨가 간직 하였던 「동경대전」원문(포덕 二十四년에 목천(木川)에서 출판된 것을 포덕 四十八년에 복간한것/ ‘癸未仲春版인 木川版/木活字本으로 1907년에 간행된 것/오암)과 부안수도원에 간직 되었던 「용담유사」(목천판) 원문과 고 김우경(金友卿)사모님이 생전해 계실 때에 간직 하셨다가 역자에게 나리어 주신 「무체법경」원문과 그 밖에 김동현(金東顯)씨의 수록한 것을 복사한 백운정(白雲亭)씨의 수기와 황업주(黃業周)씨의 수기에서 「도종법경」에 대한 원문을 많이 참고 하였으며 기타 시문(詩文)에 있어서는 「도종법경」의 것은 정갑수(丁甲秀)씨 (생전시에)의 것을 「교종법경」의 것은 역시 황업주씨의 것을 많이 수록 하였으며 「도종법경」중의 「유고음」은 역자가 십여년 전 황해도 은율 지방 모 독신부인(성명미상)댁에서 수록 한 것이다.
이렇듯 원문을 수록해 놓고 보니 「원문을 이대로 내 놓아서 과연 젊은 세대에 사람들이 어느정도 이해 할수 있을까」하는 의심으로 부터 「한글로 번역을 해야겠다」는 홀로의 결심을 가지고 시간이 있는대로 초고 작성을 게을리 하지 않었었다. 「어느 때던지 이 뜻이 이루어 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下略 -
이 삼부경전은 포덕 九十七년에 간행된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이 越南 교인들이 늘어나자 부족하게 되어 간행된 경전이다.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은 구파의 원로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찬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지암 정환석의 주해해설을 부쳐 간행된 경전이다. 체제는 토를 단 원문을 문단으로 나눈 뒤, 직역을 하고 주해를 붙인 형식이다. 포덕 九十四년에 간행된 『東經大全 附 龍潭遺詞』는 原文만 수록한 것으로 四版까지 간행했으나 부족하여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을 새로운 체재로 간행하게 되었다.
이 삼부경전은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의 체재와는 완전히 다른 체재를 가진 것뿐만 아니라 삼세 스승님의 법설의 종합판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환기를 만든 새로운 체재의 경전 간행이다.
※ 天道敎經典/2001年度版 ;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경전으로서, 포덕 133(1992)년도에 개정한 개정판이후 5판에 해당됨. 1980년대부터 시작된 讀音標示와 의암성사 재세 시부터 사용된 한문체 원문에 吐가 붙은 경전이다. 기본 체재는 삼부경전의 체재를 따르고 있으며 수록된 법설내용에서 삼부경전의 오류를 상당부분 수정한 경전이다.
※ 舊派 관련자료 해설
※ 天道敎書 / 筆寫本; 구파에서 청년들과 전 교역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講材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전편찬실의 김성근의『天道敎書 抄錄本』의 解說. / 천도교서(필사본) 동학 교주 연대기 담은 교리강습 교재 에 의하면 1920년에 간행된 교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이 가는 것은, 後經의 필사본 원문을 보면 『天道敎 創建史』의 原文表記(원문과 조사의 붙임)와 다수가 똑 같은 것이 많다. 왜『天道敎 創建史』후경 (二)의 직역본을 신파의 등사본을 따르지 않고, 구파의 필경본을 따랐는가 하는 의문점이다. 이 의문점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이 될 수 있는 것은, 敎團史를 보는 視覺과 評價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김성근은 ‘초판본인 등사판은 희귀본이 되었고 이 자료는 《천도교 창건사》를 출판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고 하고 있는데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있다. 김성근이 설명하고 있는 『天道敎書』에 대한 해설에서 ‘이 책은 1920년에 있었던 천도교청년회의 임시 교리강습회를 개최할 당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편찬됐다. -중략- 다음해인 1921년에 이 등사판을 저본으로 하여 천도교 4대 교주인 춘암 박인호 상사 명의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신 활자본으로 발행된 적이 있다. 이 책은 국한문혼용으로 주 내용은 한문으로 쓰고 조사부분은 국문으로 달았다.’ 는 설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天道敎書』印刷本은 天道敎中央總部에서 大正 十(1921)年 四月 五日에 發行한 敎書로, 著作 兼 發行人에 朴寅浩. 印刷人에 李駿錫. 印刷所는 新文館. 發賣所는 普文館으로 된 單行本이다. / 아래의 註 00 을 참조.
註 00 ;『天道敎書』印刷本 - 『天道敎書』印刷本은 天道敎中央總部에서 大正 十(1921)年 四月 五日에 發行한 敎書로, 著作 兼 發行人에 朴寅浩. 印刷人에 李駿錫. 印刷所는 新文館. 發賣所는 普文館으로 된 單行本이다. / 大正 十年은 1923年이 아니고, 1921年이다. / 필자는 원본인 단행본을 아직도 직접 보지를 못했다. 다만 기록으로 남은 자료를 모았다. 印刷本인『天道敎書』는 결과적으로, 1930년도에 편찬된 舊派의 天道敎史의 底本이 된 셈이 되었다./ 天道敎書의 異本에 대하여 -포덕 155(2014)년 4월 22일에 천도교 자유게시판과 동학, 천도교 관련 게시판에 게재.
이 單行本은 ‘교단의 한 계파인 구파의 자료로 보느냐 와 신, 구파와 관련이 없이 天道敎中央總部의 公式 出版物인가’ 에 대한 敎團史를 보는 視覺과 評價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수가 있다. 이 單行本을 구파 측의 청년들을 위한 교재로만 局限한다면, 이 책은 교단 일부의 한 계파인 구파의 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될 당시는 교단을 책임진 大道主이신 朴寅浩가 著作 兼 發行人으로 되어있지만, 義菴聖師가 在世時였기 때문에 天道敎中央總部의 공식 출판물인 것이다. 이런 교단사를 보는 시각과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天道敎書』印刷本은 어떤 계파와 관련이 없는 총부의 공식 출판물인 것이다. 이런 前提로 본다면 『天道敎 創建史』後經 (二)의 直譯本이 왜 天道敎書 / 筆耕本을 따르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고 이해될 수가 있다. 『天道敎書』印刷本은 天道敎中央總部의 공식 출판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성근도 ‘초판본인 등사판은 희귀본이 되었고 이 자료는 《천도교 창건사》를 출판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1940년7월에 치안 출판법 위반으로 금서 처분을 받았다.’ 란 결론을 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單行本을 구파 측의 청년들을 위한 교재로 국한한다면, 이 책은 교단 일부의 한 계파인 구파의 자료일 뿐이다. 이런 시각과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구파만의 자료인 印刷本인『天道敎書』는 결과적으로, 1930년도에 편찬된 舊派의 天道敎史의 底本이 된 셈이 되었다. 는 결과를 導出해 낼 수가 있다.
『天道敎書』는, 韓裝紙 표지에 靑色縱線으로 한 면에 12 칸이 그려진 大同 貿易 株式會社 紙物部에서 印行된 印札紙에 먹지를 넣어 쓴 筆寫本의 매 장을 접어 오른 쪽을 묶은 것을 원본으로 했다. 다른 한 종류는 이 抄錄原本을 바탕으로 하여, 한 면이 13행의 筆耕으로 간행된 謄寫本이 있다. 이 원본과 등사본의 내용이 동일하므로 초록원본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 초록본의 구성과 체재는, 초록 원본은 제 1편이 35매(70p.), 제 2편이 31매(62p). 제 3편이 21매(42p.)로 총 87매 174p.되어 있고 가로 세로가 19.1cmX 25.8cm이고 이 크기로 접어 양면이 되게 했다, /无體法經 比較分析 硏究./<무체법경>이 게재된 천도교 각종 교서 비교 분석 연구.에서.
-------------------------------------------------------------------

■ 가결(歌訣) /동의어 구결(口訣) ; 동양산학(東洋算學)에서 수학 공식을 시(詩) 형식으로 만들어 기억하기 쉽게 만든 것.
[내용] ; 구결(口訣)이라고도 한다. 다분히 한시의 형식을 답습하였다. 전통 산학에서는 창조적 노력보다는 경전시(經典視)된 산서(算書)를 그대로 기억하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가결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결이 가장 유행한 시기가 중국에서 수학이 가장 침체됐던 명나라 때였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1450년에 발간된 오경(吳敬)의 『구장산법비류대전(九章算法比類大全)』에는 「난법가(難法歌)」가 있으며,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 白米三石五斗, 芝麻換得三石, 芝麻五斗五升, 知八斗小麥, 換己却有小麥換米, 九石六斗無移 知公能算間 端的不合人笑儞(백미삼석오두, 지마환득삼석, 지마오두오승, 지팔두소맥,환기각유소맥환미, 구석육두무이 지공능산간 단적불합인소이). …… (右西江月)
그 뜻은 백미 석 섬 닷 말은 지마(깨) 석 섬으로, 또 지마 닷 말 닷 되는 소맥(밀) 여덟 말로 환산할 수 있다. 소맥 아홉 섬 여섯 말을 백미로 바꾸면 얼마냐는 문제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서강월의 가락이다. 즉, 수학문제를 노래처럼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노랫가락으로 수학을 다룬 것은 『구장산법비류대전』이 최초의 것이다.
『산법통종(算法統宗)』은 이 책의 영향을 크게 받아 구결·가결을 대폭 채용하였다. 특히, 수학의 학습요령, 주의할 점 등을 한시의 형식으로 기술하였고, 주판의 계산법에 관해서는 구귀가(九歸歌)라 하여 그 내용을 모두 시 형식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일본에서 출판됨과 더불어 널리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구수략(九數略)』을 비롯하여 수많은 산서가 가결의 형식을 취하였다.
참고문헌
『산법통종(算法統宗)』
『구수략(九數略)』
『한국수학사(韓國數學史)』(김용운·김용국, 열화당, 1982)
『中國數學史』(商務印書館, 195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현토(懸吐) ; 한자어를 끊어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
‘현토(懸吐)’란 한문 문장에 우리말의 토를 다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의 경우 붙여 쓰기의 형태로 적혀 있는 한문 문장을 보다 원활하게 이해하기 위해 문장과 문장 사이, 혹은 문장 안의 구절이 끝나는 곳에 우리말의 조사를 붙여 토를 다는 것을 지칭한다. 한자의 일부를 따서 한문의 구절 끝에 다는 우리말 식의 토인 ‘구결’이나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서 우리말을 적는 표기체계인 ‘이두’와 달리, ‘현토’는 한문 체언에 붙는 우리말 조사와 한문 어간 뒤에 붙는 우리말 어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현토’는 ‘문어(文語)’인 한문을 ‘구어(口語)’인 우리말의 특성에 맞추어 의미를 용이하게 해석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 토(吐/ 懸吐)를 달다.
본뜻/ 흔히 한자에 토를 달았다. 는 말의 의미를, ‘天地’라는 한자에 우리말로 ‘천지’라고 독음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자의 우리말 소리는 ‘독음’이지 ‘토’가 아니다. ‘토’라 함은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을 쉽게 알기 위하여 한문으로 된 글에 語節이나 句節 끝에 붙여 쓰고 읽는 우리말로서 우리말의 조사에 해당한다. ‘토씨’라고 쓰기도 한다.
조현용은 토를 달았다. 에 대하여 「‘토’는 ‘조사’의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북한에서나 일부 학자들은 ‘조사’와 ‘어미’를 모두 ‘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심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인 의미를 더한다는 생각으로 쓰는 용어입니다. 이 ‘토’라는 단어는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토를 달다’에서처럼 원래 쓰이고 있었던 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한문 어구를 읽을 때 해석의 편이를 위해서 한글로 토를 달아 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표현들을 살펴보면 토는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요? 우리말에서는 조사를 쓰는 것이 안 쓰는 것보다 오히려 어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글로 쓸 때보다 말로 할 때는 조사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조사가 생략되었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생각해 보면 생략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첨가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조사가 없어도 그 말이 쓰인 상황을 보면 의미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재외 동포 신문2016.04.12
예를 들면 ‘-하야, -하고, -더니, -하사, -로, -면, -에’ 등이 토에 해당한다.
한문 문장의 예: 有朋이 自遠訪來하니 不亦樂好아
바뀐 뜻/ 오늘날에 와서는 위에서 설명한 본래의 뜻보다는 얘기 중에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경우에 뒤에 덧붙여 하는 얘기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관련 자료 종합.
■ 조사(助詞) / 品詞 중의 하나.
문장 내에서 주로 체언에 연결되어 뒤에 오는 다른 단어에 대하여 가지는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특별한 의미요소를 첨가 하여주는 기능을 지닌 형태이다. 토씨라고도 한다. 조사는 형태상으로는 활용하지 않고, 의미상으로는 독립된 구체적 의미를 표시하지 못하여 관념사(觀念辭)에 부속되는 관계사(關係辭)이고, 기능상으로는 자립어에 부속되어 그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의미를 덧붙여준다.
국어의 어미변화는 크게 곡용과 활용의 두 유형이 있는데, 조사는 곡용어미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착어(膠着語)에 속하는 국어에서 조사는 문법상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며, 조사의 이러한 특성에 의하여 문장에서의 어순(語順)도 비교적 자유롭게 된다. 조사는 독립형식이 되지 못하지만 문법적으로는 한 단위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사를 독립된 품사, 즉 조사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단어의 일부인 어미 또는 접미사로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국어에서 굴절체계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학자들의 주장은 크게 조사를 품사로 인정하고 활용어미는 품사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와, 조사와 활용어미를 품사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문장의 모든 요소를 완전한 의미의 단어로 분석해 내고자 하는 입장에서가 아니고, 단지 문법적인 면을 중시하여 조사를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는 것이 국어문법의 기술에 유익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어미로 보다는 조사로 인정하는 쪽으로 점차 기울고 있다.
조사는 그 기능·의미·분포 등에 따라 격조사(格助詞)와 보조사(補助詞, 이를 보조조사 또는 특수조사라고도 한다.)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사의 기능이 통사기능이냐 의미기능이냐에 따라 이같이 분류되는 것인데, 통사기능은 격조사가, 의미기능은 보조사가 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격조사·보조사로 분류하는 방법 이외에 격조사·보조사·접속조사·감탄조사, 격조사·보조사·연결조사, 격조사·구문조사(構文助詞)·한정조사, 격조사·접속조사·한정조사, 격조사·후치사·첨사 등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격조사의 설정은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분류가 달라지는 것은 보조사에 대한 명칭이나 이를 세분하는 태도에 말미암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정조사는 보조사에 해당하며, 접속조사·연결조사·구문조사는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명칭만 달리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격조사·후치사·첨사의 분류는 특히 중세국어 및 근대국어의 조사체계를 기술할 때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분류상의 차이는 결국 격조사와 보조사만 인정하느냐, 그밖에 접속조사나 감탄조사를 더 인정하느냐 하는 태도에 말미암은 것이다.
(1) 격조사
격조사는 체언을 같은 문장 안의 다른 단어와 일정한 문법적 관계를 맺게 해주는 조사이다. 그래서 격(格) 개념의 차이에 따라 격조사의 하위분류방법이 달라진다. 변형생성문법에서는 격을 내면구조상의 내면격(또는 심층격)과 표면구조상의 표면격으로 구분한다. 격조사를 표면상에 나타난 형태에만 국한하여 분류하는 것이 표면격에 대한 분류다. 이러한 표면격의 조사에 대한 분류는 대개 일형태일격(一形態一格)의 원칙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이 온당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주격(이·가)·속격(의)·처격(에)·여격(에게)·대격(을·를·ㄹ)·기구격(으로·로)·공동격(와·과)·호격(아·야)의 조사들이 그것이다.
종래에는 한 형태가 문맥에서 여러 의미기능을 나타내는 사실에 집착하여, ‘이·가’를 주격·변성격(變成格)·변위격(變爲格)·보어격 등의 이중 삼중의 명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후행하는 용언의 의미내용에 의한 분류라 하겠다. 이러한 분류는 전통문법 또는 학교문법에서 주로 행하여졌는데 매우 다양하다.
격문법(格文法)의 이론에 의하면, 격은 한 단문의 내면구조상에서 서술어를 핵으로 한 명사구들의 통사론적·의미론적 관계이다. 그리하여 격조사는 그 형태에 따라 기술, 분류되지 않고 그 통사론적·의미론적 기능에 따라 기술, 분류되었다. 예컨대 “사슴이 포수에게 잡혔다.”에서 ‘사슴이’의 ‘이’와 ‘포수에게’의 ‘에게’는 종래에 각각 주격조사·여격조사라고 하였으나 내면격에서는 각각 목적격·행위격이 된다.
이 문장의 내면구조가 “포수가 사슴을 잡았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면격의 조사는 행위격·기구격·목적격·출발격·경로격(經路格)·도달격·처격·시간격·공동격·여격·경험격 등의 조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러한 내면격의 설정은 동일한 격이 동일한 격조사에 의해서만 표현되지 않고 많은 조사에 의하여 표현되고, 또 한 격조사가 여러 격에 두루 사용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2) 보조사
보조사는 그것이 연결된 체언을 일정한 격으로 규정하지 않고 여러 격에 두루 쓰이게 하고, 또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여 주는 조사를 말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특수조사라고도 한다. 보조사는 격표시기능과 의미표시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견해와 의미표시기능만 담당한다는 견해가 있으나 후자가 유력하다. 따라서, 보조사의 하위분류는 의미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대조·단독·동일·각자·시발·도달·추종·종결·비교·본연·동류·정도를 나타내는 보조사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의미규정의 객관적 기준에 문제점이 있다.
한정조사란 격문법 이론에 입각한 보조사에 대한 이칭(異稱)이다. 접속조사는 체언과 체언을 연결하여 한 문장성분이 되게 하는 조사이다. 체언과 체언을 접속시켜 주는 접속조사는 명사구와 서술어와의 관계표시가 격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격조사도 아니며 의미첨가도 시키지 못하므로 보조사도 아니다. 이것이 접속조사를 독립시키는 학자들의 이유이다. 감탄조사는 감탄의 느낌이나 의미를 나타내는 조사를 말하는데, 보조사에 귀속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3) 특징
조사는 선행체언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이형태(異形態)가 존재하기도 한다(‘이·가’, ‘을·를·ㄹ’ 등). 이 이형태는 대부분 격조사에서 보이고 보조사에서는 ‘은·는’이 특별히 보일 뿐이다. 조사는 선행체언의 의미자질(意味資質)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기도 한다. ‘께서·께’는 선행체언이 항상 존칭체언이며, ‘에게’는 유정체언이다. 조사는 따로따로 체언에 연결되는 것이 원칙이나, 때로는 둘 이상의 조사가 합성되어 연결되기도 한다. 이를 이중곡용이라 하여 하나의 격조사가 나타나는 단순곡용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 이중곡용은 합성된 격조사의 기능을 함께 표시하나, 대개 뒤에 오는 격조사의 기능이 앞에 오는 격조사의 기능도 취합하여 그 체언의 기능을 표시한다.
또한, 국어에서는 한 단문내에 동일한 조사가 연결된 명사구가 둘 이상 오기도 한다. 이것을 격의 중출(重出)이라 한다. 국어에서는 특히 격조사가 생략되기도 한다. 격조사 없이 쓰인 체언을 부정격(不定格)으로 처리하는 학자도 있다. 국어의 조사는 그 형태가 이형(異形)과 복합형(複合形)을 합쳐서 약 480여 개나 되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조사는 국어문장의 통사·의미의 모든 부문에 관여되기 때문에 국어문법의 중심적인 과제의 하나가 되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
『우리말본』(최현배, 정음사, 1937)
『국어학개설』(이희승, 민중서관, 1955)
『국어문법체계의 사적연구』(이승욱, 일조각, 1973)
『한국어조사의 통시적연구』(김승곤, 대제각, 1978)
『국어조사의 연구』(성광수, 형설출판사, 1978)
『국어특수조사론』(홍사만, 학문사, 1983)
「격의 독립품사시비」(이숭녕, 『국어국문학』 4, 1953)
「조사설정의 재검토」(이숭녕, 『동양문화』 5, 1966)
「중세국어의 속격어미 ‘―ㅅ’에 대하여」(안병희, 『이숭녕박사송수기념논총』, 1968)
「국어의 격에 대하여」(김민수, 『국어국문학』 49·50, 1970)
「현대국어특수조사의 연구」(채완, 『국어연구』 39, 1977)
「국어의 조사」(홍윤표, 『언어』 4-2, 1979)
■ 『後經』(一)과 (二)의 比較分析資料의 選定에 대한 說明.
天道敎中央總部가 1912년에 편찬 간행한 印刷本인 後經一과 二를 原本으로 하여 新派關聯 比較分析資料 4編과 舊派關聯 比較分析資料. 4편을 對照하여 比較分析을 하였다. 比較分析 資料로 選定한 基準은 다음과 같다.
新, 舊派의 關聯 資料들의 選定은 自他가 認定할 수밖에 없는 인쇄본 이후에 다룬 자료들로써 敎理와 敎史의 側面에서 변화를 보였던 자료들을 선정했다. 특히 관련 자료들은 敎義的인 解釋에서 변화를 가져왔고 體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重視했다.
■ 新派 관련자료 해설
※『後經一』과 『後經二』/ 印刷本 ; 『後經一』과 『後經二』는 天道敎中央總部 藏版으로 布德 43(1912/明治45年)年 3月 16日에, 朴寅浩의 編述로 普書館에서 漢文體으로 刊行되었다. 後經一과 後經二는 각각 上, 中, 下편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孫秉熙의 法說을 「正義」라는 小 項目으로 解說하고 있다. 後經 一은 24페이지로, 後經 二는 100페이지로 출간되었다. 이번 『後經一』과 『後經二』의 比較硏究의 比較文章의 나눔은, 위의 印刷本 原文의 文章 分節을 따랐다. 1920年에 刊行된 『天道敎書』 謄寫本에서는 後經一과 後經二의 내용이 뒤바뀌어 있다. 後經一에는 後經二의 내용이, 後經二에는 後經一의 내용이 잘못 筆寫되어 蒐錄되어 있다. 後經 一/ 第 三編. 義菴聖師 PP. 50-54. 後經 二/ PP. 54-55 참조하여 확인 바람./ 筆者의 카페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의 김용천 자료실 240번 천도교 창건사 이본의 비교분석연구/2014년 2월 과 254번 천도교서의 이본에 대하여 / 2014년 4월. 를 참고바람.
※ 天道敎書 謄寫本 ; 천도교 청년 교리 강연부에서 포덕 61(1920)년 4월 1일에 筆耕이 완료되어 謄寫되어 講材로 사용된 것으로, 교단 최초로 만들어진 國漢混用體의 敎史로서 동학과 천도교의 70여년의 방대한 교단사로 총 489페이지로 되어 있다. 가로17.5cm X 세로25.5cm. 미농지에 등사된 교서. 제 1편. 52장/104페이지. 제 2편. 79장/158페이지. 제 3편. 64장/128페이지. 儀禮 2장/4페이지. 天道敎書謄抄 附/義菴聖師 法說모음 48장/95페이지.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1962年 5月) P.211./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 - 通卷 十一號(1963年 5月)의 天道敎書 謄寫本에 대한 게재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資料는 끝에 붙어 있는 編輯餘言에 의하면 西紀一九二ㅇ年(西紀一九一九年 九月 二日에 창립된 天道敎靑年敎理講硏部에 의해 준비되었다.) 에 있었던 「天道敎 敎理 臨時 講習會」의 敎材로서 마련된 것으로 謄寫本으로 傳해지고 있다. 編輯餘言에도 指摘되어 있는 바와 같이 時間上의 制限으로 「編輯上 多少 不完全한 遺憾이 有」하나 「後日 敎書를 大成함에 있어서 그 資料가 될 것이라고 믿고」내놓은 것이 이 資料다. 그 뒤에 이 資料를 土臺로 하여 「天道敎創建史」가 出版되었다. 이리하여 自然히 이 資料는 날로 世人의 耳目에서 멀어져 갔고 또 그 保存이 等閑하여 졌다. 그러나 後日의 取捨選擇 이전의 史料를 찾아 볼 수 있는 이 資料는 東學의 硏究에 參考가 될 것으로 믿고 이 資料欄에 連載키로 했다.
이 資料는 黃業周先生의 所藏本임을 밝히는 바이다.(編輯者) /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1962年 5月) P.211./ 亞細亞硏究 通卷 九號 - 通卷 十一號(1963年 5月)에 전편이 수록됨.‘ 이후 이 자료는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28권(1996년에 전체 30권짜리로 나온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관련 자료들을 필자가 종합 기술함
吾菴 註 ; 天道敎書 第三編 義菴聖師 編 P.64.의 編輯餘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布德六十一庚申年四月一日編終
編輯餘言
一、本書는天道敎敎理臨時講習會員의要求에應하야蒐集함.
一、本書는時間의短縮함에因하야編輯上多少不完全한遺憾이有함.
一、本書는後日敎書大成의原稿資料에萬一의助가될줄로自信함. / 필자가 관련자료를 보고 정리함.
※ 天道敎創建史 ; 1933년에 천도교 중앙종리원에서 간행한 교단 최초의 교사이다 대표 집필자인 이돈화는 1920년대부터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라는 관점에서 천도교 교리 및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는데, 이 책도 그러한 기본방향에서 천도교 70년의 역사를 다루었다. 내용은 대신사편, 해월신사편, 의암성사편, 중의제편 등 4부로 나누어져 있다. 1920年 天道敎書 謄寫本/謄寫本을 바탕으로, 오상준의 본교역사는 물론 천도교서 등을 망라해서 참고하여 기술되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제1편은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최제우(崔濟愚)를 다루어 탄생부터 순교까지를 서술하고, 말미에는 최제우가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싣고 있다. 총 95페이지이다.
제2편은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時亨)을 다루고 있는데, 최시형이 동학을 재건하여 나가는 과정과 교세가 커진 뒤의 동학운동을 밝히고 있다. 제10장은 최시형의 순교를 서술하고 있으며, 제9장은 최시형의 기본사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총 85페이지이다.
제3편은 의암성사(義菴聖師)손병희(孫秉熙)를 다루고 있다. 손병희가 제3대 교주로 되는 과정과 실권을 잡은 뒤의 활동상황을 서술하였다. 말미에는 손병희가 지었다는 많은 종류의 글들이 실려 있다. 총 134페이지이다.
제4편은 손병희가 사망한 1922년 이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신파·구파가 갈등을 겪는 가운데 진행된 교회의 민주화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자 자신이 신파·구파 싸움에 휘말려 있어서 객관적인 서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사료와 고증에 충실한 역사서술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총 20페이지이다. 그러나 천도교의 교리와 사상에 관한 연구활동에 있어서 이돈화의 명성이 워낙 확고하였기 때문에, 이 책이 미친 영향은 한동안 거의 압도적이었다.
이와 같이 각 편의 끝에 교주들의 저서와 법설(法說)의 주요 내용을 실은 것은 “사(史)와 경(經)을 개괄적으로 통일하여 교리연구상 참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천도교 창건사』는 총 334페이지의 교사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과 관련자료 종합.
※ 天道敎經典/三部經典本 ; 삼부 경전 편찬에 있어 수록 범위와 번역 그리고 해석에 총 책임을 지고 있었던 철암 박응삼(喆菴 朴應三)이 쓴 ‘붓을 놓으며’ 에 의하면 이 경전 체제와 간행의도와 의미 그리고 그 경위를 살펴볼 수가 있다.
一. 책 이름과 체제
이 책은 그 내용을 「천종법경」(최수운대신사편)「도종법경」(최해월신사편)「교종법경」(손의암성사편) 등 三편으로 가려서 엮었다.
천종, 도종, 교종이란 것은 의암성사 시대부터 일커러온 바요, 특히 우리는 삼세교조를 후천(後天)의 천황, 지황, 인황(天皇, 地皇, 人皇)으로 모시는 것이며 더욱이 이것은 우리들 제자의 생각이라기보다 직접 세 분 스승님께서 법설로 하신 것임을 교사의 기록에서 고증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천종법경」이라 「도종법경」이라 한 것도 이번에 새삼스러히 지어낸 것이 아니요, 일직히 지강 양한묵(芝江 梁漢黙)선생께서 「동경연의」를 다시 주해하여 「천종법경」이라 하고 다 같이 강습 교재로 쓰던 것이다.(활자화 되지는 못하였으나-----)
二. 원고 수집과 번역의 경위
지금부터 약 십년전 불초 역자는 「천도교 경전은 삼세 신성사의 법설을 원문만이라도 한 책에 엮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마침 포덕 九十一년 十二월에 충남 대전(大田)에 「천도교 월남교인 연락처」가 생겼을 때에 불초한 이 사람이 약 삼개월간 「연락처」에서 일을 보게 되면서 경전 편찬에 관한 원문을 개인적으로 수록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九十六년 四월부터 총부 직원중 한 사람이 된 영광을 입음으로 부터 넓히 원문을 수록 하는데 힘썼던 바 「천도교 창건사」를 비롯 하여 백중빈(白重彬)씨가 간직 하였던 「동경대전」원문(포덕 二十四년에 목천(木川)에서 출판된 것을 포덕 四十八년에 복간한것/ ‘癸未仲春版인 木川版/木活字本으로 1907년에 간행된 것/오암)과 부안수도원에 간직 되었던 「용담유사」(목천판) 원문과 고 김우경(金友卿)사모님이 생전해 계실 때에 간직 하셨다가 역자에게 나리어 주신 「무체법경」원문과 그 밖에 김동현(金東顯)씨의 수록한 것을 복사한 백운정(白雲亭)씨의 수기와 황업주(黃業周)씨의 수기에서 「도종법경」에 대한 원문을 많이 참고 하였으며 기타 시문(詩文)에 있어서는 「도종법경」의 것은 정갑수(丁甲秀)씨 (생전시에)의 것을 「교종법경」의 것은 역시 황업주씨의 것을 많이 수록 하였으며 「도종법경」중의 「유고음」은 역자가 십여년 전 황해도 은율 지방 모 독신부인(성명미상)댁에서 수록 한 것이다.
이렇듯 원문을 수록해 놓고 보니 「원문을 이대로 내 놓아서 과연 젊은 세대에 사람들이 어느정도 이해 할수 있을까」하는 의심으로 부터 「한글로 번역을 해야겠다」는 홀로의 결심을 가지고 시간이 있는대로 초고 작성을 게을리 하지 않었었다. 「어느 때던지 이 뜻이 이루어 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下略 -
이 삼부경전은 포덕 九十七년에 간행된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이 越南 교인들이 늘어나자 부족하게 되어 간행된 경전이다.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은 구파의 원로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찬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지암 정환석의 주해해설을 부쳐 간행된 경전이다. 체제는 토를 단 원문을 문단으로 나눈 뒤, 직역을 하고 주해를 붙인 형식이다. 포덕 九十四년에 간행된 『東經大全 附 龍潭遺詞』는 原文만 수록한 것으로 四版까지 간행했으나 부족하여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을 새로운 체재로 간행하게 되었다.
이 삼부경전은 『天道敎 經典 附 天德頌』의 체재와는 완전히 다른 체재를 가진 것뿐만 아니라 삼세 스승님의 법설의 종합판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환기를 만든 새로운 체재의 경전 간행이다.
※ 天道敎經典/2001年度版 ;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경전으로서, 포덕 133(1992)년도에 개정한 개정판이후 5판에 해당됨. 1980년대부터 시작된 讀音標示와 의암성사 재세 시부터 사용된 한문체 원문에 吐가 붙은 경전이다. 기본 체재는 삼부경전의 체재를 따르고 있으며 수록된 법설내용에서 삼부경전의 오류를 상당부분 수정한 경전이다.
※ 舊派 관련자료 해설
※ 天道敎書 / 筆寫本; 구파에서 청년들과 전 교역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講材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전편찬실의 김성근의『天道敎書 抄錄本』의 解說. / 천도교서(필사본) 동학 교주 연대기 담은 교리강습 교재 에 의하면 1920년에 간행된 교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문이 가는 것은, 後經의 필사본 원문을 보면 『天道敎 創建史』의 原文表記(원문과 조사의 붙임)와 다수가 똑 같은 것이 많다. 왜『天道敎 創建史』후경 (二)의 직역본을 신파의 등사본을 따르지 않고, 구파의 필경본을 따랐는가 하는 의문점이다. 이 의문점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이 될 수 있는 것은, 敎團史를 보는 視覺과 評價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김성근은 ‘초판본인 등사판은 희귀본이 되었고 이 자료는 《천도교 창건사》를 출판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고 하고 있는데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있다. 김성근이 설명하고 있는 『天道敎書』에 대한 해설에서 ‘이 책은 1920년에 있었던 천도교청년회의 임시 교리강습회를 개최할 당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편찬됐다. -중략- 다음해인 1921년에 이 등사판을 저본으로 하여 천도교 4대 교주인 춘암 박인호 상사 명의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신 활자본으로 발행된 적이 있다. 이 책은 국한문혼용으로 주 내용은 한문으로 쓰고 조사부분은 국문으로 달았다.’ 는 설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天道敎書』印刷本은 天道敎中央總部에서 大正 十(1921)年 四月 五日에 發行한 敎書로, 著作 兼 發行人에 朴寅浩. 印刷人에 李駿錫. 印刷所는 新文館. 發賣所는 普文館으로 된 單行本이다. / 아래의 註 00 을 참조.
註 00 ;『天道敎書』印刷本 - 『天道敎書』印刷本은 天道敎中央總部에서 大正 十(1921)年 四月 五日에 發行한 敎書로, 著作 兼 發行人에 朴寅浩. 印刷人에 李駿錫. 印刷所는 新文館. 發賣所는 普文館으로 된 單行本이다. / 大正 十年은 1923年이 아니고, 1921年이다. / 필자는 원본인 단행본을 아직도 직접 보지를 못했다. 다만 기록으로 남은 자료를 모았다. 印刷本인『天道敎書』는 결과적으로, 1930년도에 편찬된 舊派의 天道敎史의 底本이 된 셈이 되었다./ 天道敎書의 異本에 대하여 -포덕 155(2014)년 4월 22일에 천도교 자유게시판과 동학, 천도교 관련 게시판에 게재.
이 單行本은 ‘교단의 한 계파인 구파의 자료로 보느냐 와 신, 구파와 관련이 없이 天道敎中央總部의 公式 出版物인가’ 에 대한 敎團史를 보는 視覺과 評價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수가 있다. 이 單行本을 구파 측의 청년들을 위한 교재로만 局限한다면, 이 책은 교단 일부의 한 계파인 구파의 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될 당시는 교단을 책임진 大道主이신 朴寅浩가 著作 兼 發行人으로 되어있지만, 義菴聖師가 在世時였기 때문에 天道敎中央總部의 공식 출판물인 것이다. 이런 교단사를 보는 시각과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天道敎書』印刷本은 어떤 계파와 관련이 없는 총부의 공식 출판물인 것이다. 이런 前提로 본다면 『天道敎 創建史』後經 (二)의 直譯本이 왜 天道敎書 / 筆耕本을 따르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되고 이해될 수가 있다. 『天道敎書』印刷本은 天道敎中央總部의 공식 출판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성근도 ‘초판본인 등사판은 희귀본이 되었고 이 자료는 《천도교 창건사》를 출판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1940년7월에 치안 출판법 위반으로 금서 처분을 받았다.’ 란 결론을 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單行本을 구파 측의 청년들을 위한 교재로 국한한다면, 이 책은 교단 일부의 한 계파인 구파의 자료일 뿐이다. 이런 시각과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구파만의 자료인 印刷本인『天道敎書』는 결과적으로, 1930년도에 편찬된 舊派의 天道敎史의 底本이 된 셈이 되었다. 는 결과를 導出해 낼 수가 있다.
『天道敎書』는, 韓裝紙 표지에 靑色縱線으로 한 면에 12 칸이 그려진 大同 貿易 株式會社 紙物部에서 印行된 印札紙에 먹지를 넣어 쓴 筆寫本의 매 장을 접어 오른 쪽을 묶은 것을 원본으로 했다. 다른 한 종류는 이 抄錄原本을 바탕으로 하여, 한 면이 13행의 筆耕으로 간행된 謄寫本이 있다. 이 원본과 등사본의 내용이 동일하므로 초록원본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 초록본의 구성과 체재는, 초록 원본은 제 1편이 35매(70p.), 제 2편이 31매(62p). 제 3편이 21매(42p.)로 총 87매 174p.되어 있고 가로 세로가 19.1cmX 25.8cm이고 이 크기로 접어 양면이 되게 했다, /无體法經 比較分析 硏究./<무체법경>이 게재된 천도교 각종 교서 비교 분석 연구.에서.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 정보

모시고넷 / 천도교 청주교구
(우) 28604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율로 92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630
어제
3,608
최대
3,608
전체
1,160,014
Copyright © mosigo.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