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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同德께서는 東學의 道人인가? 天道敎의 敎人인가?(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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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70회 작성일 19-03-2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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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德께서는 東學의 道人인가? 天道敎의 敎人인가?(8-1)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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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0(2019)년 3월 23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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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필자가 1년여에 걸친 와병(臥病)중에 집필한 10여 편의 글 중의 하나로, 이 글 중에 필자의 글이 아닌, 자료문헌과 인용문장 그리고 주(註)의 해설 문장들 중에 오류(誤謬)가 있을 수 있사오니, 인용(引用)이 필요하신 분은 원문(原文)을 반드시 확인하여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완벽하게 재확인하지 못하고 게재한 점에 대하여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0여 편의 글 중에서 완성된 글은, 금년 천일기념일전까지 게재가 가능하면 게재하도록 하고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하여는 따로 정식으로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암 김용천 심고.
목 차.
들어가는 말.
1. 동학인가? 천도교인가?
2.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
3. 동양 윤리 사상의 흐름.
4. 천도교의 정체성.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2000년을 전후하여 학계와 교단은, 천도교가 종교단체인가? 사회개혁(사회개벽)을 위한 사회단체인가? 또는 동학인가? 천도교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교단은 학계와 동학과 천도교에 관심이 있는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납득할 만한 정답을 내지 못했다. 각자의 입장에서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학계와 교단은 합의된 어떤 결정도 없다는 것이 오늘의 천도교단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교단의 교세가 매우 미미하다보니까 학계에 대하여 교단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독자적인 연구역량의 부족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천도교가 종교단체인가? 사회단체인가? 또는 동학인가? 천도교인가? 에 대한 원하지 않는 혼란이 대내외적으로 가중되어 오고 있었다. 학계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서히 동학과 관련된 연구가 시작되는 중심에, ‘東學’이란 이름으로 시작되는 대학교수 중심의 연구소와 한국사상과 관련된 연구소 등이 다수 설립되어 연구가 활발하였고 그 결과물들인 수 백편의 연구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교단은 연구소 하나 없이 특별기도를 통한 수도수련에만 전념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나 필자도 1975년도에 석사 학위논문으로 『東學運動의 背景과 思想』을 집필하여 발표했듯이, 1970년도 무렵부터 지금까지 碩, 博士 學位論文으로 동학과 천도교에 관련된 수 백편의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학계와 교단이 상호보완적이 되지못하고 각자가 지향하는 바대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2000년 이후에도 학계의 연구소에서는 동학에 관련된 활발한 연구와 결과물은 대량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이에 발맞추어 종교로서의 천도교에 관련된 연구와 결과물이 어느 정도는 발표되어야 했었는데, 겨우 월간교화지인 『新人間』에, 일 년에 몇 편 정도의 의미있는 글이 실리는 정도였다. 교단이 이렇게 된 원인의 문제점은 다양하겠지만, 교세가 미약해짐으로 인하여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것이 첫째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직시해보면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천도교에는 존경받는 어른인 원로 지도자가 거의 없었고, 폭넓고 깊게 공부한 능력있는 교역자가 없었다는 점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의암성사 시대의 기라성(綺羅星)같은 교단의 교역자들, 이 나라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그들이 교단 발전에 많이 기여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의 후계자를 선발하고 교육하여 계승시키지 못하여 교단이 정체상태에 머물고 있었던 해방공간에서 원로급의 교역자들이의 상당수가 환원하거나, 일부 교역자들이 교세의 70-80%로가 북한 지역으로 움직여 활성화가 되자 지도자급의 교역자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 힘 때문에 북한지역으로 포덕과 교화를 위하여, 이돈화를 비롯한 다수의 우수한 교역자들이 북조선 종리원으로 이동하게 되자, 남쪽인 한국에는 그들이 이끌었던 교의해석의 중심의 명맥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어 교단의 역사가 일시적으로 중단에 가까운 암흑의 시대가 도래했다. 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李敦化와 옥고로 환원하신 梁漢黙 그리고 교단의 교리해석을 이끌었던 수많은 교역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교역자는 거의 사라져 명맥이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라 할 수가 있다. 평가하는 측면에 따라 몇몇 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李敦化와 梁漢黙과 같은 영향력 있는 교의 해설가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천도교는 외형은 살아 숨을 쉬고 있지만 동학과 천도교의 궁극적인 혼령(정신 또는 사상/지상천국건설이라는 종교적 목표)은 멸절(滅絶;멸망하여 완전히 없어짐)되었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중간 교역자 이상의 원, 주직에 있는 분들 중에, 교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교리연구가였던 李敦化와 梁漢黙의 講道를 직접 받은 분이 몇 분이나 되며. 설혹 강도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분들이 남기신 저작물들을 얼마나 많이 숙독(熟讀)과 독해(讀解)를 통하여 완벽히 이해하여 포덕교화에 활용하실 수 있는 교역자 얼마나 되는 지는 알 수 가 없다.
필자는 오늘에 이르게 된 교단을 바라보면서 그런 능력있는 교역자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근자에는 ‘존경받는 도력이 높으신 큰 어른’이 한 분도 안 계신다는 것을 자타가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해방이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특별기도와, 종학대학원과 10여개가 넘는 수도원을 가지고, 헤아릴 수 없는 기도와 수도수련을 해왔는데도, 교단의 중흥을 앞장 서 이끌고 갈 교역자와 갖가지 교단 내외의 분쟁을 중재할만한 ‘존경받는 도력이 높으신 큰 어른’이 없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註 00 ; 중재(仲裁/arbitration) - 제삼자가 분쟁을 하는 당사자나 조직 또는 집단의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여 화해를 모색하는 일.
1. 東學인가? 天道敎인가?
현재, 천도교 교단의 핵심교역자 중의 한 분인 李東初는 천도교가 당면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초대칼럼「東學인가 天道敎인가/천도교 정체성을 생각한다.」에서 ‘우리는 천도교라는 명칭에서부터 교단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할 것이다.’ 라는 핵심적인 주장과 요구를 담아, 그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그 배경과 과정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는 ‘동학이냐 천도교냐’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천도교 교인들이 ‘동학의 도인이냐 천도교의 교인이냐’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글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문제제기를 했다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금은 길더라도 핵심적인 부분만을 발췌하여 필자의 의도와 주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천도교는 인내천(人乃天)을 종지(宗旨)로 하고 있기 때문에 人乃天으로 宗敎의 客體를 이루고 人乃天을 믿는 마음을 교체(敎體)로 삼는 宗敎이다.
포덕 47년의 천도교약설(天道敎略說)에는 우리 천도교의 지의(旨義)를 “한울과 사람이 서로 융합하는 하는 것”(天人兩方의 融合)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目的에서도 “천도교는 영(靈)과 신(身)을 쌍방지호(雙方持護)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宗敎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다. -중략-
포덕 130년대부터 우리 천도교의 이름을 부르는데 있어서 일반 사회에서나 학계에서는 ‘東學’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 내에서도 보편화되어 가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마땅히 ‘天道敎’라는 이름을 사용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에서 조차 ‘동학 천도교’ ‘천도교 동학’ ‘동학(천도교)’ 등의 이름이 혼용되거나 병용되면서 천도교는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갖게 된다.
천도교는 포덕 46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한 후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대헌을 제정하여 동학을 근대적 종교체제로 마련하였다.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자 동학혁명 이후 흩어졌던 동학도인은 물론 일반 민중과 특히 국권이 상실되는 시기에 방황하던 많은 지식층들이 모여들어 천도교는 동학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300백만이라는 교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140여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포덕 130년(1990)대부터는 ‘천도교’라는 이름보다는 ‘동학’이란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앙총부의 동학혁명100주년기념사업으로 인하여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점차 가속화되어 대국민강좌를 개최하면서도 ‘천도교강좌’라 하지 않고 ‘동학강좌’ ‘동학사상강좌’라고 하고 있다. 천도교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적어 동학이란 명칭을 붙여야 사람이 많이 참석한다는 변명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교단의 전위단체라는 ‘동민회’도 천도교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동학민족통일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광복 후 국토가 분단이후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던 북한에서 조차 천도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천도교 이름을 내세우지 못 하고 동학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교단 내외에서 나오는 출판물에서는 더욱 동학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동학뉴스닷컴“이란 사이트가 있는데, 여기에는 ”×××의 동학이야기“라는 글들이 있는데 필자들이 거의 젊은 천도교인들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왜 천도교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동학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도지 않는다.
이것은 천도교라는 종교의 이름을 기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학이라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교인들로 하여금 혼란을 갖게 한다. 이것은 분명히 교단의 위상과 정체성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하겠다. 물론 시대적인 구분으로 또는 학술적인 용어로서 ‘동학’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종교로써의 명칭은 반드시 ‘天道敎’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왜 ‘천도교’ 앞에 동학을 붙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대신사와 해월신사는 이름을 개명하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대신사의 ‘濟宣’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거나, 해월신사의 ‘慶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천도교라는 이름을 떳떳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의암성사의 법통을 어기는 것이라 하겠다.
-중략-
천도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천도교는 어지럽다. 지금은 교세를 탓할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한다. 우리는 천도교라는 이름을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지켜냈다. 교세가 약하면 더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천도교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동학을 앞세워 말하는 사람들이나 많은 단체들, 특히 동학사상을 연구한다는 학자일수록 천도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지 종교로써 보지 않는 것이다.’/ 이동초 /2006.07.15
/http://saso8888.egloos.com/8582893
이동초가 지적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 즉 ‘천도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천도교는 어지럽다. 지금은 교세를 탓할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한다.’ 라고 한 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시급한 일로, 천도교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빠르면 빠를수록 교단의 미래가 밝아지고 지속되는 퇴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도교를 믿는 사람의 마음과 신앙 속에 동학이 들어 있다면 천도교가 어지러워지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도교인은 없어지고 동학의 도인들만 남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도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이동초가 강조했던 ‘천도교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가 무산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천도교가 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우려되는 부분은 상당수의 교인들이 자신은 ‘東學의 道人’ 아니고 ‘天道敎의 敎人’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 주장이 맞는다면, 왜 그들은 참여종교인 천도교의 교인으로서 종교적인 4대 목적인 포덕천하가 어떤 세상이며, 광제창생은 어디까지이며, 보국안민은 누가 주체가 되어야 하며, 지상천국은 어떤 새로운 세상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대안이 없는 것은 물론, 천도교가 왜 이런 종교적인 목적을 세워 신앙하도록 권장했는가에 대한 이해부족은 물론이요 실천여부에 분명한 답을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신이 철저한 ‘天道敎의 敎人’이라면서 왜 교인들은 실천궁행을 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천도교 신앙의 대 원칙은, 종교적인 4대 목표를 중단함이 없이 지향하여 빠른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이룩하는 것이다. 필자는 천도교를 종교학적 측면에서 참여종교(參與宗敎)에 해당된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돈화가 설명하고 있는 水雲主義의 사상적 목적이 지상천국건설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적 목적인 지상천국건설을 실현하기 위해선 3대 개벽인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先制的認識(優先的인 判斷과 考慮)으로 완벽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상천국건설을 실현하기 위해선 누구보다도 먼저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 새사람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미래사회 창조를 위해서 선도적으로 천도교가 사회참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천도교는 참여종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참여종교의 필수적 사명은, 社會的 惡弊(매우 심한 폐단 / 積幣淸算 ;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관행, 부정, 비리 등 옳지 못한 일(不條理現狀)이나 해로운 현상을 깨끗이 씻어 냄)를 제거하기 위한 민중항쟁에 버금가는 사회참여의 적극성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상천국건설의 실현이라는 것의 기둥이요 발판이므로 이것들이 참여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쉽게 교단에는 이런 사회참여종교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존경받는 도력이 높으신 큰 어른’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멈추지 않는 退行에 退行을 부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명심해야 할 점은, 천도교를 신앙하는 교인 중에 누가 ‘東學의 道人’ 이고, 누가 ‘天道敎의 敎人’인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 중에 필자가 생각하는 원초적인 것은, 경전을 신성시하고, 기도를 바탕으로 한 수도수련으로 군자나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면 그는 ‘東學의 道人’이고, 敎義를 바탕으로 기도를 통한 수도수련을 하는 것이 천도교의 종교적 4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수단과 방법이라고 믿고 신앙하는 사람은 ‘天道敎의 敎人’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학적인 시각으로 분별한다면, 宗敎的 根本主義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東學의 道人’이라 할 수 있고, 경전의 말씀을 시대적 정신에 맞추어 해석하고 대안을 만들어 새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인간중심의 세상인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用時用活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을 ‘天道敎의 敎人’ 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천도교 교인들 중의 상당수의 교인들이 신,성사의 진정한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경전만을 맹신하고 특별기도라는 수련 속에서 ‘東學으로 回歸’ 즉 경전과 기도에만 매달리는 근본주의자들의 집단(東學의 道人들)으로 잘못된 同歸一體를 해버린 셈이 된다 하겠다. 교단 내에서 영향력이 큰 어떤 중견 교역자는 의도적인 지는 몰라도 ‘동학의 인내천’이라고 글을 써서 일간지 신문에 게재된 글을 보고, ‘東學의 侍天主와 天道敎의 人乃天’을 어떻게 설명할런 지 매우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수운과 해월의 동학과 의암의 천도교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경솔함이 동학과 천도교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목적을 흐리게 하여 올바른 신앙을 한다고 믿을 수 없게 하므로, 그들의 신앙이 동학인지 천도교인지에 대한 혼란과 회의를 느끼게 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든다면, 현재 천도교 교단의 중견 교역자의 한 사람인 OOO 동덕의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람 또한 자연이다.'(00지역에서 발행되는 00일보 / opinion 오피니언, 아침의 창 /2017년 9월 20일 수요일/인터넷 판 9월 19일)에서
‘하늘사람은, 두루 평등하고 존엄하다’라는 소제목을 붙인 글 중에 ‘사람을 하늘님(한울님)처럼 섬기고, 자연만물 또한 하늘님 생명으로 모실 때 즉 모심과 섬김의 세상이 열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지상천국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강조한 글을 읽고 놀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나 틀림없는 글이었다. 왜 이러한 황당한 글을 사회정론지의 오피니언이란 란에 게재하게 되었을까? 오피니언(opinion)이란. 기본의미로는 개인적인 의견, 일반적인 의견, 전문적인 의견, 평가 등등으로 폭넓게 사용되는 단어로, 언론기관의 하나인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는, 개인이나 단체의 주장이나 의견을 적은 글. 또는 그런 글이 실리는 칸(지면)을 의미한다. 그런 지면에 이런 글을 게재하는 용기가 무섭다. 진정한 천도교인이라면 ‘한울님처럼 섬기고’ 하면 될 것을 ‘사람을 하늘님(한울님)처럼 섬기고’라고 하고 있다. 이보다 앞 문장에서 ‘하늘사람’이란 생소한 용어를 여러 번 사용하다가 맨 마지막 문장에서 ‘하늘님(한울님)처럼’이라고 한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왜 생소한 신조어인 ‘하늘사람’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과감성을 보이다가 지상천국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천도교의 종교적 신앙의 최종단계에 이르는 신념과 자세에서 ‘하늘님(한울님)처럼’이라고 한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천도교의 종지인 ‘人乃天’을 ‘하늘사람’이라고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공인하여 사용한 바가 없다. ‘하늘사람’의 漢文套의 언어는 ‘天人’이기 때문이다. 천도교의 신앙대상의 공식 명칭은 ‘한울님’이다. 교역자가 ‘한울님’이란 용어를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기피한다는 것은, 교역자 이전의 교인으로서의 자격도 미달인 것이다.
하늘이란 무한하고 둥근 하늘을 의미하며, 이 단어는 광활하고 평평한 땅과 구분하여 사용되는 공간적 개념의 언어이다. 동양사상 특히 유교사상의 주축인 천,지,인 삼재의 하나인 것이다. 하늘은, 대우주의 숨은 질서 즉 수운이 논학문에서 설명한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를 의미하는 한울이란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인 것이다.
그리고 더욱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수운과 해월의 동학시대와 의암이후의 천도교 시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이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람 또한 자연이다.'인데 동학시대의 수운의 시천주와 해월의 사인여천 또는 인시천 그리고 천도교 시대의 인내천의 관계를 한마디 설명도 없이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표현이다. 동학의 시천주, 천도교의 인내천이어야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동학시대의 수운과 해월은 인내천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도 없고 구경한 적도 없는 스승님들인 것이다.
동학의 도인과 천도교의 교인은 궁극적으로 학문과 신앙면에서 다른 신앙인들인 것이다. 반드시 구별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동학시대에는 도인은 있으나 교인은 없으며, 천도교시대에는 교인은 있으나 도인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수운의 올바른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수운의 올바른 제자가 되는 것은, 천도교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수운과 해월의 심법과 법설을 바탕으로 의암이 대고천하한 천도교의 종지인 인내천을 실천궁행으로 올곧게 신앙하는 모든 교인들이 한결같이 한울님을 모신다(侍天主)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있어 의미없이 맴돌고 있는 현실아인 소아(小我)를 과감히 버리고 의미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우주적인 대아(大我)를 찾으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기심)이라는 소아적인 사고를 넘어섰을 때, 자아는 우주적 대아로 동귀일체 되어, 본연의 나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며, 우주적 대아로 돌아간 본연아(本然我)는, 신인간(人間格 중심의 사회 즉 인간 중심주의 사회의 주인공인 새 인간)으로서 민족 역사창조의 주인공이 되며 선지자이며 선구자로서의 후천개벽의 주인공다운 말과 행동이 거침이 없이, 미래사회 창조를 위하여 즉 다시개벽을 위하여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자세로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바로 이 길이 지상천국 건설의 길인 것이기 때문이다.
註 00 ; 「人乃天/사람이 곧 한울」이란 용어의 등장시기 - 1905년을 전후하여 간행된 손병희의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사용되어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상적 근원은 최제우의 동경대전에 담겨짐 수운의 侍天主思想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대신사께서 논학문에서 주문의 뜻을 직접 풀어 말씀하시기를, 모심이란 안으로 신령함을 지니고 있으며 밖으로 기화(氣化)함을 지니고 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이를 옮길 수 없는 것으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니, 이는 영(靈)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정의를 말씀한 것이다. 單行本 『大宗正義』PP.2-3.와 『天道敎經典』. P.560.에서/單行本 『大宗正義』와 『天道敎經典』에 수록된 『大宗正義』의 문장이 다음과 같이 다르다.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수운대신사는 천도교의 원조이시다. 대신사의 사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어 그 뜻을 따라 간략하게 윤리적 요점을 잡아 말하면, 그 사상의 중요한 핵심은 인내천이다. 인내천으로 천도교의 객체로 삼고, 인내천사상으로 인식하는 마음을 그 사상의 주체로 하여 각자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우러러 받드는 것을 천도교의 핵심으로 삼아 한울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처음으로 발명한 위대한 종교의 바른 도리라 말하기에 충분하다. /水雲大神師ᄂᆞᆫ天道敎元祖라其思想이博으로從ᄒᆞ야約히倫理的要點에臻ᄒᆞ니其要旨ᄂᆞᆫ人乃天이라 人乃天으로敎의客體ᄅᆞᆯ成ᄒᆞ며人乃天으로認ᄒᆞᄂᆞᆫ心이其主體의位를占ᄒᆞ야自心自拜ᄒᆞᄂᆞᆫ敎體로天의眞素的極岸에立ᄒᆞ니此ᄂᆞᆫ人界上初發明ᄒᆞᆫ大宗正義라謂ᄒᆞᆷ이足ᄒᆞ도다./-單行本 『大宗正義』 PP.2-3.
大神師는 吾敎의 元祖라 其思想이 博으로 從하여 約에 至하니 其要旨는 人乃天이라 人乃天으로 敎의 客體를 成하고 人乃天을 認하는 心이 其主體의 位를 占하여 自心自拜하는 敎體로 天의 眞素的極岸에 立하나니 此는 人界의 初創한 大宗正義라 謂함이 足하도다./『天道敎經典』 P.560.
또 의암성사 법설 성령출세설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대신사께서 일찍이 주문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시기를,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는 신령을 지니고 있으며 밖으로는 기화(氣化)함을 말하는 것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으로 깨달아 앎이니, 이는 영(靈)의 유기적 관계를 표현한 것을 가리킨 것이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의를 갈파하시여 말씀한 것이다.(大神師 嘗呪文之意 解釋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 是指稱以靈之有機的表顯道破人乃天之定義也/『天道敎經典』性靈出世說. P.654.라 하였다.
註 00 ; 한울과 한울님 ; 한울과 한울님에 대해서 이돈화의 『新人哲學』에서 밝힌 견해(PP. 9 -12.)를 인용하여 살펴보면,
1. 한울의 名義.
‘無窮한 그 理致를 無窮히 살펴내면 無窮한 이 울 속에 無窮한 내아닌가’ 이것은 水雲의 노래이다. 水雲은 無窮의 意義를 自我속에서 發見하고 그를 吟味하여 스스로 無窮을 讚美한 것이다. ‘無窮한 이 울’이라 함은 곧 ‘한울’을 가르쳐 하는 말이니 無窮은 ‘한’을 意味한 말이며 ‘한’은 ‘크다.’는 뜻이다. 우리말에 ‘큰 길’을 ‘한길’이라하며 할아버지를 큰아버지라 함은 ‘한’과 ‘큰’것이 同一한 것을 意味한 것이다. 그리하여 ‘울’이라는 뜻은 量的 意味에서는範圍를 表象하는 것으로 解釋할 수 있는데 空間上으로 본 無窮의 範圍와 時間上으로 본 通三界의 範圍를 總合한 宇宙全體를 가르쳐 ‘울’이라 말한 것이니 이 意味에서 ‘울’이라는 것은 宇宙의 全體 全量을 가르쳐 하는 말이며 質的意味에서의 ‘울’ 이라 함은 ‘우리’라는 뜻이니 우리집 우리民族 우리人類라는 것과 같은 ‘우리’이니 우리는 곧 나의 同類를 包含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한울’ 은 곧 ‘큰 나’라는 뜻으로 解釋할 수 있다. 이를 漢字로 말하면 ‘한울’은 ‘大我’라는 뜻으로 個體인 小我에 對하여 小我와 關係되는 ‘우리’를 ‘大我’라 名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神的 對象을 普通 ‘하느님’ ‘하나님’이라 이름하나 이것은 우리말의 語源에 어글어진 것이며 設使 그러한 말이 우리固有語라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한울’이라는 對象과는 槪念에서 甚遠한 差異點이 있다. ‘하나님’이라는 名辭는 基督敎信者들이 부르는 이름로 이것은 純全히 一神敎的 人格的 神을 가르쳐 부르는 이름이오 ‘한울’이라 함은 人格的 神을 가르쳐 하는 말이 아니라 部分에 對한 全體라는 意味이며 小我에 對한 大我라는 이름이오 一層 나아가 宗敎的 名稱으로 볼지라도 ‘한울’은 汎神觀的이며 萬有神觀으로 解釋할 수 있고 또는 이것을 哲學的 또는 科學的으로 본다면 小我에 對한 大我는 때와 곳에 따라 方便的으로 使用할 수 있으니 한 個人이 自己團體를 생각할 때에 이를 大我라 부를수 있으며 한 百姓이 自己國家를 생각할 때에 이를 大我라 할 수 있고 한 사람이 社會를 생각할 때에 亦是 大我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름하는 ‘한울’의 槪念은 어떤 部分에 限定하는 말이 아니오 宇宙全體를 이르는 말이다. 小我 卽 個體我는 全宇宙에 對하여 大我 卽 ‘한울’이라 부르는 것이다. ‘無窮한 그 理致를 無窮히 살펴내면 無窮한 이 울 속에 無窮한 내아닌가’하는 意味로 본다면 小我 卽 我의 個體와 大我 卽 ‘한울’은 根本에서 同一하다는 것으로 小我는 大我에 融合一致될수 있다 함이니 ‘한울’의 名義는 이 노래의 뜻으로 因하여 더욱 明白해졌다./이돈화 『新人哲學』/PP. 9 –12.)/ 계속해서 2. ‘한울’本體의 屬性을 참조하기 바람.
註 00 ; 天의 의미 - 馮友蘭에 의하면 중국 문자 중에서 天의 함의는 적어도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한다. 蒼天이라고 말할 때의 하늘은 物質의 天, 人格神이나 至上神을 의미할 때는 主宰의 天, 사회생활 중의 운을 가리킬 때는 命運의 天, 자연을 지칭할 때는 自然의 天, 우주의 도덕의 법칙을 뜻할 때에는 義理의 天이 그것이다. / 金鍾美의 「孔․孟의 天人合一과 審美意識」에서
朴文鉉의「墨子의 天人關係論」에서, 天은 중국 철학 사료중 대단히 복잡한 뜻을 지니고 있다. 馮友蘭은 그의 ?中國哲學史?에서 漢字의 天을 ‘物質之天’ ‘主宰之天’ ‘運命之天’ ‘自然之天’ ‘義理之天’의 다섯 가지로 말했는데, 묵자의 天은 ‘主宰之天’에 해당되는 것으로 의욕과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행위하는 人格神인 것이다.
?묵자?에 나오는 天은 地와 상대되는 물질적인 天을 제외하곤 거의가 주재적인 天이다. 이러한 성질의 天은 ‘法儀’에 22회, ‘天志上’ 35회, ‘天志下’ 48회, ‘兼愛下’ 3회, ‘非攻下’ 21회, ‘貴義’ 4회, ‘尙賢’ 13회, ‘尙同下’에 3회 나와 있으며 그 밖의 다른 편에도 약간씩 나와 있다. ?묵자?에 나타난 天의 본질과 특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아래 소제목의 구체적인 설명은 모두 생략함.
① 天은 우주의 창조자이다.
② 天은 ‘至高無上’의 존재이다.
③ 天은 인류 만물의 주재자이다.
④ 天은 理智的이다.
⑤ 天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朴文鉉의「墨子의 天人關係論」에서
劉勝鍾의「孔孟의 天人關係論」에서는 ‘天人合一’을 주장하는 유가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유가에 있어서 천이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천은 인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서, 천이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따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이미 西周 초기에 등장한 天命思想은 敬天의 의미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孔子가 ?論語?, 「述而」篇에서, “하늘이 나에게 德을 주셨다”고 한 것이나, 孟子가 ?孟子?, 「盡心 上」篇에서 “인간의 性을 알면, 天을 알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천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천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므로 먼저 천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천의 의미를 人格的인 천, 自然的인 천, 運命的인 천, 道德法則的인 천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劉勝鍾의「孔孟의 天人關係論」에서
註 00 ; 천인(天人)
한국어에서의 의미 - 하늘과 사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예문 천인이 공노(共怒)하다(天人共怒/天人共憤). 또는 도를 닦은 사람. 불교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하계 사람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을 의미하며 이외에도. 재주나 용모가 매우 뛰어난 사람. 매우 아름다운 여자. 천체의 현상과 인간의 일.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욕심 등등의 문장의 내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중국어에서의 의미 – 천인(天人/tiānrén)은 우주와 인생. 하늘과 사람. 천상(天上)의 사람. 천상에서 내려온 사람.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천상(天象)과 인사(人事) 등등 문장의 내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비유적으로는 유덕한 사람. 또는 학문의 재능. 또는 용모가 뛰어난 사람. 미인(美人)의 의미로 사용된다./각종 어학사전을 바탕으로 재정리함.
註 00 ; 天地人 三才 -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만물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하늘이 만물울 만들어 내고, 땅이 그것을 키우고, 사람이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늘은 효심과 형제애를 불어넣어 만들고, 땅은 옷과 음식으로 키우고, 사람은 예악으로 완성한다. 이 셋은 수족과 같아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天地人,萬物之本也。天生之,地養之,人成之。天生之以孝悌,地養之以衣食,人成之以禮樂,三者相為手足,合以成體,不可一無也。 (董仲舒, ?春秋繁露」-卷第六. 立元神 第十九)
위의 주에서 살펴본 天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알아본다면, 먼저 天/하늘에 대한 제자원리와 의미의 변동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천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지고무상(至高無上). 밝음. 큼. 천체. 태양. 자연. 임금, 왕. 아버지. 지아비. 세상, 세계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天/하늘에 대한 제자원리는 天은 사람 위에 하늘이 있는 모습을 본뜬 지사자(指事字)이다. 본래 天은 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오다가 절대신의 속성 중 하나인 세상의 이치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면서 점차 천리로서의 理天의 의미로서 더 자주 쓰이게 되었다. 天은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대략 大자 모양과 비슷하다.) 형상 위에 一(한 일)을 첨가하는 지사의 원리를 통해 한 제자(制字)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說文解字』의 해설에 의하면, 天은 사람 위에 있다는 의미에서 ‘하늘'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天은 양의 상징이며, 음의 상징인 地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한편 天의 지사원리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는, 天이 두 이(二)와 사람 인(人)의 결합이며, 이는 곧 하늘과 땅을 나타내는 두 이(二)와 인간(人)이 조화를 이루어 그것이 대자연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한다. 천(天) 혹은 하늘의 의미는, 동양의 종교철학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적 변천 속에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의 서주(西周)에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대부분 종교적인 의미의 천, 즉 인격천(人格天)이었다. 이 천은 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화복을 주재한다. 는 의미로 이해되고 사용되어오다가 주나라 유왕(幽王)때(BC 781∼771)에 종교적인 천의 권위가 무너지고 차츰 그 의미 변화가 생겼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 제자백가가 일어난 뒤에도 인격천의 의미는 여전히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나, 몇몇 철학자들이 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것은 바로 천의 도덕화(道德化)와 자연화(自然化)이다. 전자는 도덕의 근원으로서의 천으로서 의리(義理)의 천이라 한다. 후자는 자연변화의 규칙인 도의 출현과 함께 단순히 자연이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는 천을 인격적이면서 자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천리(天理)사상이 출현하여 천의 인격적 요소는 사라졌다. 천에 다시 主宰的이며 인격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이(理)를 방극(方極/궁극적 실재)으로 보는 주자학을 비판한 것은, 마태오 리치의 『天主實義』에서였다. 이 책은 한국 천주교의 탄생과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에 일어난 실학파의 세계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가톨릭 정보와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이들의 ‘東學으로의 回歸’는 集團知性이 아닌 集團無知가 불러온 재앙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21세기라는 6,7의 물결이 빠르게 흘러가는 이 시대의 낙오자요 패배자인 것이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천도교의 사명은 미래지향적인 사상으로 새인간(新人間)이 살아 갈 人間格 중심의 사회인 지상천국을 선도적으로 건설해야 할 소명을 가진 집단인데, 집단무지로 인하여 천도교의 歷史的 召命을 외면하여 도도(滔滔)히 흘러가는 歷史의 眞實(時代潮流와 思想)을 逆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운이 그렇게 걱정했던 布德文에서 말씀하신 ‘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와 論學文에서의 ‘天下紛亂 民心淆薄 莫知所向之地’의 막다른 골목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註 00 ; 새인간(新人間/새사람) ; -前略- 비록 교단분규로 인하여 『新人間』이 창간되었다고는 하나 제호가 말하고 있듯이 사회개혁과 인간개조라는 진취적 기상을 담고 있다. 창간호 권두언(無何說 P.12)에서
‘-前略 -現代思想의混沌과 世界의暗黑은오즉 新人間이라야그를救援할수잇다함이엇다.
우리의바라는배는 오즉新人間의創造이다. -中略- 오즉그것을말할者는 新人間ᄲᅮᆫ이다 新人間의입으로나오는 宗敎 道德 倫理 政治經濟法律ㅣ그것이곳 新世界의創造임으로써이다. 新人間雜志의創刊은그目的이이에잇다.’라고 하여 내세적인 구시대의 신앙관에서 탈피, 현세지향적인 신인간을 통한 새 사회 건설 즉 지상천국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新人間』 창간호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부분 발췌하여 재정리함.
■ 人乃天要義 - 이돈화의 저서중의 하나인 이 교서의 구성은, 서언, 인내천과 천도, 인내천의 진리, 인내천의 목적, 인내천의 수련, 인내천의 잡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인쇄본으로 1권(288쪽)이며 1924년 3월 30일 개벽사출판부에서 초판을 발행하였다. 이 교서의 기본적인 취지는 “천도교의 종지가 인내천이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인내천의 발원’, ‘인내천의 신앙’, ‘인내천의 철리’가 인내천주의의 정신이고, 인내천의 목적은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고 하였다. 이는 천도교의 종지(宗旨)인 인내천(人乃天)사상을 확립하기 위해 간행한 것으로 ‘인내천’을 천도교의 목적이라고 강조하였다. 고 볼 수 있다./각종 백과사전에서 부분 발췌하여 재정리함.
동학과 천도교는 창도이후 1세기에 가까운 긴 시간을, 우리 민족이 걸어온 회오리치는 참혹한 역사의 도정 속에서 안으로는 작게는 동학과 천도교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분연히 몸을 던졌고, 밖으로는 척양척외를 바탕으로 보국안민을 위하여 동학혁명과 갑진개화운동, 기미독립운동 그리고 신문화운동인 7개 부문운동을 전위단체인 천도교 청년(우)당을 통하여 크고 작은 운동을 끊임없이 이어와 300여만 명의 대 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 교단이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그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천도교의 교역자와 신앙자들이 잊고 있는 우리의 순교적인 걸음을, 교단내의 학자들이 연구했어야 마땅한 것을, 우리가 준비하지 못한 이유로 교단내의 훌륭한 학자가 없게 되자 가슴이 아프게도 교단의 무능함이 들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외부의 학자들이 연구하여 설명하고 있는 교단의 창도로부터 1세기 여에 걸쳐서 일어났던 역사의 굴곡 많은 도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同德께서는 東學의 道人인가? 天道敎의 敎人인가?(8-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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