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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총. 균. 쇠」란 무엇인가?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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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4-03-07 16:54 조회 4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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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란 무엇인가? (6 -1)
/ GUNS, GERMS. AND STEEL / 武器, 病菌, 金屬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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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5(2014)년 3월 7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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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武器, 病菌, 金屬; GUNS, GERMS. AND STEEL).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펴냄.
/ 초판 1쇄; 1998년. 總 751페이지의 大作. - 2판 33쇄; 2012년 발간.
참고문헌 자료.
史觀이란 무엇인가 ; 車河淳 篇. 증보 2쇄. 청람. 1982.
歷史의 意味 ; 칼 뢰비트 著. 李翰雨 譯. 文藝出版社. 1987.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아 저. 곽복희 역, 청년사. 234P. 1990.
역사란 무엇인가(범우사상신서 009); E. H. CARR. 김승일 역. 범우사. 1998.
역사란 무엇인가(하이클래스 43); E. H. CARR. 육문사 폄, 2000.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아 저. 길현모 역. 탐구신서. 2004.
역사란 무엇인가(개정판).; E.H. 카아 지음. 박성수 옮김. 민지사 펴냄. 2007.
총. 균. 쇠(武器, 病菌, 金屬; GUNS, GERMS. AND STEEL). -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펴냄. / 초판 1쇄; 1998년. 總 751페이지의 大作. - 2판 33쇄; 2012년 발간.
이 책의 초판 1쇄는 1998년이었고, 개정판이 2005에 나왔고, 특별 증보판이 나온 2012년에 들어서서야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보이다가, 2013년 초부터 폭발적인 인기도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에 인기도서 1위가 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초판이 간행되었을 1998년 당시 우리 사회는,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설명하고 문제를 제기한 상황이 아직 도래(到來)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책이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분야에서 지체(文化遲滯 또는 文化落後; culture lag)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기술 과학문명 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분야에서도 지체(文化遲滯現狀; Culture retardation phenomena)되고 있었다. 그러나 밀리엄 시대(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산업과 인문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세계 1위를 달리는 기술 산업의 생산 품종들이 속속 늘어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분야에서 격변(激變)의 시기를 맞게 되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가 말하는 문명의 시작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우리게 되었다.
이 책은, 2판 33쇄; 2012년 발간된 번역본을 기준으로, 증보판을 포함하여 어마어마한 두께를 가진 국판 751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을 담은 저서이다. 문화지체로 인한 상위문화의 전이(轉移)과정에서 기존문화 전통과의 충돌로 인한 문제의 발생과 상위문화의 수용에 따라서, 전통문화의 계승에 따른 갈등은 다소(多少)는 해소(解消)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반 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독특한 전통문화와의 갈등은 쉽게 봉합(封合)되지 못하고, 사회적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면 외래문화에 대한 반발(反撥)과 배척(排斥)은 미래로 발전해 나가는 길목을 잡을 수도 있게 된다.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하는 현재의 입장을 가로막아 현재에 머무르거나 퇴행(退行)에 길로 나갈 수도 있게 된다. 종전(終戰) 후의 바로 천도교가 가지고 있고, 사회에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조선 총독부로부터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혹한 종교탄압을 받았던 일제의 식민지 시대를 지나 1950년 6. 25동란까지 지켜 온, 교도 300여 만의 대 교단이, 불과 60여 년 만에 이제는 교도의 연, 월성으로 교단의 운영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존립(存立)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현실이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아픔이 있다.
필자가 정리하고 있는 ‘제 4물결이란 무엇인가’ 에서 『총. 균. 쇠』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고 있어, 독자들께서 생소(生疎)한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내용 있고, 구체적인 소개를 하고 싶어 ‘제 4물결이란 무엇인가’와 별도로 정리를 하여 게재합니다. 필자는 새로운 신관의 정립을 위하여, 포덕 152(2011)년 11월 25일.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 신이라는 망상』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생애와 사상(1-5)’ 를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그러한 차원에서 ‘새로운 역사관의 정립(미래지향적인 안목과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이 책을 소개합니다.
註 01; 文化遲滯 現狀(Culture retardation phenomena)과 아노미 現狀(anomie phenomenon) -
문화지체란 기술적으로 발달 된 사회에서 살지만, 그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수준과 문화가 괴리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W. F 오그번(Ogburn, William Fielding: 1886~1959)이 그의 저서 “사회 변동론”에서 주장한 이론으로, 현대에 이르러 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과학기술)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 물질문화 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 현상 그 격차현상을, 일컬어 ‘문화지체(Cultural lag)'현상이라고 했다. 이것은 과학기술과 같은 물질적인 문화와 정신적인 문화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변화에 대한 속도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속도의 차이에 따라서 우리 사회에는 과도기적인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확대 해석해 보면 과학기술은 벌써 앞서가는데 사회문화적 환경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문화지체현상은 사회병리현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한 사회의 문화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문화변동의 속도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 두 가지 영역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나, 실제로는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변화가 앞서기 때문에, 정치, 경제, 종교, 윤리, 행동양식 등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나 가치관의 변화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비 물질문화가 물질문화의 변동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부조화현상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문화지체현상이 심각해지면, 아노미 現狀(anomie phenomenon)을 초래하게 된다. 아노미는 일반적으로 가치가 전도(顚倒) 되어버린 무 규범적(無 規範的)인 상태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노미는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규범이 사라지고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 삶의 가치와 목적의식을 잃고, 심한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지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공통된 가치관이 붕괴되고 목적의식이나 이상이 상실됨에 따라 사회나 개인에게 나타나는 혼돈상태는, 대중사회로서의 거대도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회해체(집단아 조직의 해체)는 또한 아노미로 인하여 발생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 위키 백과사전과 국어사전, 영어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들에서 종합 요약정리.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평가하고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필자는 자주 강조해 왔다. 특히나 동학과 천도교의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이 지상천국의 건설에 있기 때문에,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평가가 요구된다고 자주 강조해왔다. 필자가 누차 강조한 미래를 위한 역사관에 꼭 알맞은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총. 균. 쇠(武器, 病菌, 金屬; GUNS, GERMS. AND STEEL)』 을 소개함으로써, 필자가 그간에 강조한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평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역사를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며 그 신선(新鮮)함을 느껴 보았으면 한다.
영국의 국제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E. 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므로 ‘주관적 의미의 역사’ 라고 하며, 이 경우 역사라는 말은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와 같은 의미가 된다.’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 의 본문 서두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를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역사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라고 말은 했지만, E. H. Carr는 자신의 저서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상당히 명쾌하게 답을 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6개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각각의 주제마다 저자의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으며 논리적인 설명으로 저자의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기존의 실증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역사관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써진 사실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모든 역사가들에게 공통된 소위 기초적 사실이라는 것은, 보통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원료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지, 역사 그 자체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P 12. 역사가란 불가피하게 선택적이게 마련이다. 역사가의 해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립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굳은 핵을 믿는다는 것은, 전후가 전도(顚倒)된 오류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를 근절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P 13.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 지위는 결국 해석의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 해석이라는 요소는 역사의 모든 사실 속에 들어가 있게 마련이다. / P 15. 어떤 문서라 할지라도 그 문서의 필자가 생각하고 있던 이상의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 P 20. 라고 하여 역사가의 개인적인 시각이 보여주는 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E. H. Carr는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다」라고 크로체가 언명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 하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 임무는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가가 가치의 재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기록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P 28. 하며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코 순수한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곡(屈曲)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P 31. 라 했다.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비로소 과거를 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이해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p34. 역사가는 과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속해 있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한다는 것도 아니요, 과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도 아니요,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써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P 36. 보는 각도가 다를 때마다 산(山)의 모양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산에는 객관적인 모양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없다든가, 무한한 모양이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상의 사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해석이라는 것이 불가결(不可缺)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해서, 또한 현존하는 해석이 어느 것이고 완전히 객관적인 것이 못된다고 해서, 이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가 모두 매한가지라든가, 역사상의 사실이란 본래부터 객관적 해석에 의하여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든가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 P 38. 라고도 했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울러 내포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 없는 무의미한 존재이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P 43.라고 결론을 내렸다.
註 02; E. H. 카아(E. H. CARR) -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역사학자이다.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의 실증사학 - ‘역사란 객관적 자료를 실증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과거를 복원한다.’는 역사관 - 을 거부하고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연구자의 관점을 중요하게 부각시켰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그 당시 물들어 있던 역사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도 큰 영향을 받아 기존의 정사, 왕조사 중심의 역사 연구에서 벗어나 민중사관, 계급사관에 입각한 사회사나 경제사 등이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성과 이성’, ‘해방 전후사 인식’, ‘소유의 역사’, ‘노동의 역사’ 등 책들과 더불어 386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저자는 평생 역사학만을 추구해온 학자는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대학에 들어와서는 정치학을 강의하다가 60세가 넘어서야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늦깎이 역사가였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폭넓은 현장체험을 통해 참신하면서도 유연한 역사관을 체득함으로써 일정한 틀에 갇힌 역사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역사관을 196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을 통해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이 <역사란 무엇인가>로 출간된 것이다. 1892년 런던에서 출생하여 런던의 머천트 데일러즈 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1916년에 외무부에 들어가서 수많은 업무들에 종사한 후 1936년에 사임했으며, 웨일스 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1년부터 1946년까지는 ‘더 타임스’의 부편집인을 역임했고, 48년에는 국제연합의 세계 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5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정치학 튜터(개별지도교수)였고,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러지의 펠로우(특별연구원)가 되었고, 1966년에는 베일리얼 칼리지의 명예연구원이 되었다. 1982년 타계했다.
다른 주요 저서로 양대 세계대전 사이 국제정치 흐름을 다룬 <위기의 20년, 1919~1939>, <낭만의 망명객>을 비롯해 <평화의 조건>, <새로운 사회>,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 등이 있다. 특히 소비에트 러시아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4부작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그의 대표작이자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1945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거의 30년간 이 책에 매달렸다고 한다. 모두 합쳐 14권에 이른다. / 각종 백과사전과 관련자료 들에서 발췌 종합 정리함
E. H. Carr가 위에서 역사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해해야 올바른 것인가의 길라잡이를 해주고 있다. E. H. Carr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크로체가 언명(言明)하고 있는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이다.」라는 바탕으로,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제일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져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역사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비로소 과거를 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이해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과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속해 있다. 고 하여 역사를 읽는 사람의 상식과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시공(時空)에 대한 복합적 또는 공감감적인 인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 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와 같은 역사에 대한 혜안(慧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하늘부터 받은 복(福)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어 최선을 다하여 학문에 정진(精進)을 한다면 도달할 수 있는 경지(境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높은 경지에 이르도록 남다른 혜안을 가진 사람들 중에, E. H. 카(E. H. CARR), 슈펭글러(Spengler, Oswald), 토인비(Toynbee, Arnold Joseph), 그리고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있다. 이들의 혜안은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며, 그들이 내다보는 미래의 세상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을 보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부족한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안목(眼目)과 남다른 역사인식(歷史認識)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미래지향적인 안목과 역사인식에 대하여, 천도교 교인이 필수적으로 구비해야 할 요건(要件)으로 여러 번 강조해왔고,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에서 현재를 사는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었다.
‘이와 같은 논리의 선상에서 ‘인간이 평등하다’는 명언(名言)도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이지만, 1, 2세기만 되돌아가도 평등할 수가 없는 상하(上下)가 있는 세상이었다. 지금도 상당부분에서 평등이 아닌 것이다. 인생이란 근원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혈통인 가문에서부터, 성공한 집안, 명예로운 집안, 존경받는 집안, 학력이 높은 집안, 인맥이 좋은 집안 등등에서 불평등하다. 그래서 더 평등하고 싶은 것이다. 생존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어려워 평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와 경쟁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평등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는, 18세기 말엽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설파(說破)한 토머스 페인의 “상식(常識; common sense.)”이라는 책을 1776년 1월 10일에 발간한 이후부터 어떤 것이 상식이며 상식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서구사회로부터 논의되었고, “상식”이란 책이 발간된 날을 ‘상식이 세상에 선포된 날’ 로 오래도록 기억되어 오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하여 설명하였던 상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상식의 상당 부분은 과거 어느 시대에는 비상식이었던 것들이며, 지금에 상식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시간이 흘러 미래의 어느 시기에는 비상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상식이 진리인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라는 절규에 가까운 희망이라 할지라도 더러는 일시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으나 내용과 주제에 따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꿈일 수 있는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상반된 주장을 갖고 극단적으로 상호 공박(攻駁)을 하며 생사(生死)를 거는 개인이나 집단에서의 주장들은, 어느 쪽이 상식이고 비상식인가? 명쾌(明快)하게 결판을 낼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이 있을 수 있을까? 란 물음에 대한 답은 없다. 이다. 서로가 주장하고 얻고 싶은 입장에서, 서로는 상식이고 비상식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 선택자의 자의(恣意)에 던져진 가치(價値)의 혼란(混亂)일 뿐이다.
가치의 혼란이라는 것은, 사회와 역사 현실의 변동으로 상식과 비상식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만물(萬物)의 가치가 유동적(流動的)이어서 그 가치가 혼동될 때 상식과 비상식을 잘못 파악하여 삶의 방향 설정에 혼란을 자초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치판단을 잘못하여 선택한 삶은 불행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창조론(創造論)과 진화론(進化論), 천동설(天動說)과 지동설(地動說), 상투(上頭)와 단발(斷髮), 테러리스트(terrorist)와 독립투사(獨立鬪士), 마녀재판(魔女裁判) 등이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으로 각각의 흐름으로 상식과 비상식으로 전환(轉換)된 대표적인 사례(事例)들이라 할 수 있다. 상식이 영원불변하는 진리일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은, 여러분의 지식과 상식의 정도와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병리현상(病理現狀) 중에서, 국가의 장래가 매우 걱정되는 현상의 하나는, 어떤 현상을 부정(否定)하고 비난(非難)하면서 자신의 의도(意圖)를 철저히 감춘 채, 대중들의 관심사들을 선정(選定)하여, 다른 병리현상을 미사여구(美辭麗句)와 정교(精巧)한 논리로 교묘(巧妙)하게 제시(提示)하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런 행위의 가치기준(價値基準)을, 우리 사회와 인간들을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으로 구분하여 상식에서 명분(名分)을 찾는다는 점으로 매우 위험한 발상(發想)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구분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현상들이 각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다원화 사회인 것이다. 이 가치들은 우열(優劣)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가치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다양한 가치를 내포한 다원화 사회라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다양한 가치의 충돌로 인하여 사회의 혼란을 자초할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예로 들기에 매우 적합한, 다양한 성격의 종교들이 공존과 배척하는 현상, 여기에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내재되어 있는 민속 또는 무속신앙) 사회에서 현실의 병리현상들을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구분방법으로 해석(解釋)하는 지성(知性)이 있어 이런 논리가 집단지성(集團知性)이 되어 사회현상을 개혁(改革), 혁신(革新)하려 한다면, 매우 무모한 행동으로 우리의 미래는 암담(暗澹)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다원화(多元化)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다중 성격자(多重性格者 또는 人格者)들의 반사회성 인격장애(反社會性 人格障碍; 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를 드러내는 내재(內在)된 싸이코 패스(psychopath)의 하나의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언행의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적 배경에는 유전적(遺傳的)이며, 문화적(文化的)이고 전형적(典型的)인 한 현상이라 분류할 수 있을 수 있는 ‘흑백논리(黑白論理)와 극단적(極端的)인 판단(判斷)과 선택(選擇)과 언행(言行)’이라는 특이한 사고방식이 있다.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수용하며, ‘좋아서 죽겠다. 미워서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더워서 죽겠다. 추워서 죽겠다,’ ‘너 그냥 안 둬, 너 죽어, 죽여 버리겠어,’ 등의 상반된 현상에 대하여 ‘죽겠다’ ‘죽이겠다.’ 는 극단적인 판단과 선택과 언행이, 문제의 실상(實相)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오류(誤謬)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다원화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병리현상 중에 하나가 타인(他人/ 남)과 사회(社會)와의 단절(斷絶)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생존(生存), 또는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기피인물(忌避人物)이 된 왕따의 대상(對象)이 되는 인물들이다. 선악(善惡)의 이분법적 사고(二分法的 思考)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인간은, 다원주의의 사상에서 생성(生成)되고 있는 다원화 사회(多元化 社會)라는 매우 복잡(複雜)한 성격(性格)을 지닌 구조적(構造的) 사회(社會)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양(多樣)한 가치(價値)는 우열(優劣)이 없이 대등한 가치라는 것과 선악(善惡)의 개념(槪念)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만사(萬事)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과 자기와 밀접한 관계로 맺어진 혈족(血族)만이(최소 단위는 가족, 또는 門中), 사회에서는 작게는 자기가 소속된 부서(部署), 확대하여 회사(會社) 중심이 되어 자신들만의 생존(生存), 또는 이익(利益)만을 추구(追求)하기 위하여, 이해가 상반되는 개인이나 집단과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공영(共存共營)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국외자(局外者)나 이탈자(離脫者) 또는 소속감(所屬感)이 없는 방관자(傍觀者)가 되어 사회(社會)와 단절(斷絶)된다. 일부(一部)는 자신들만의 생존(生存), 또는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타인(他人)과 사회와의 소통(疏通)을 거부(拒否)하여 단절(斷絶)을 자초(自招)하기도 한다.
‘상식적인 인간과 비상식적인 인간’, ‘상식이 통하는 사회와 비상식적인 사회’로 양분(兩分)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사람과 비민주적인 사람’, ‘민주적인 사회와 비민주적인 사회’를 양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우파(右派)와 좌파(左派)’ 로 나누는 구분과 ‘부자(富者; 가진 자)와 빈곤자(貧困者; 가지지 못한 자)’의 구분들과 무슨 차이가 있으며, 그런 구분들이 무엇을 해결해 준다고 믿고 있는가? 상식적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은 현실적인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絶對的)인 권능(權能)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종교(宗敎)에서 만물(萬物)을 창조(創造)할 수 있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절대적(絶對的)인 권능(權能)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신(神)의 선택이, 불평등(不平等)을 자초(自招)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어떤 종교의 신앙자가 간구(懇求)한 기도(祈禱)나 기원(祈願)에 응답(應答)했다면, 신은 그를 추앙(推仰)하는 수많은 신앙자 중에 그를 선택하여, 선택하지 않은 신앙자와 차별성(差別性)을 두어 공정성(公正性)을 잃어버린 것이며, 그 기원을 들어줌으로써 다양(多樣)하거나 상반(相反)되는 수많은 문제 중에서 선택했다는 점에서 형평성(衡平性)은 물론 조화(造化)와 균형(均衡)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한 신은 신앙자의 기도나 기원에 응답할 수 없으며, 모든 기도나 기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신은 그 스스로의 선택을 통한 응답으로 인하여,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절대적(絶對的)인 권능(權能)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신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며, 그런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한 종교는, 종교가 아닐 수밖에 없다.
만약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절대적(絶對的)인 권능(權能)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 신이 인류와 전 세계의 문제를 선악(善惡)에 관계(關係)없이, 추종자(追從者)를 구분하지 않고(타 종교 신앙자와 무신론자와 무종교인들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해결(解決)할 수 있었다면. 왜 우리는 지나간 수 천 년 동안은 물론, 지금도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존경쟁(生存競爭)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추구(追求)하고 있는가? 새 시대에 부활(復活)해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 메시아가 오늘의 인류역사(人類歷史)에 구원자(救援者)가 될 수 있으며, 오시는 날에 만사형통(萬事亨通)하여 천국과 같은 삶을 살 수가 있을까? 를 자문자답(自問自答)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현대사회 특히 한국과 같은 휴전상태로 60년이라는, 한 인간의 평생에 해당하는 장구한 시간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평행선을 달리는 고속기관차와 같은 남북관계에서 북한과의 전면적인 대치 국면의 시대를 보내고 있는 복잡 다양한 사회를 가진 국가인 대한민국, 한 민족이면서 타민족과의 갈등 이상으로 합의가 되지 않는 민족으로 두 국가체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념의 갈등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혼돈(混沌)의 시대(時代)’ (pandemonium / topsy-turvydom , topsy-turvyness.)를 걷고 있는 이 나라의 다가올 미래 운명에 대하여 어떤 해결의 방법이 있을 것인가? 를 깊이 생각해보면 그 답을 그 누구도 간단히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세계의 복잡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신은 무엇을, 어떻게 어떤 것을 선택하여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한국의 현실에서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준비되어 있으며 그 결과를 민초(民草)들은 수용(受容)하고 자족(自足)하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성취(成就)하고픈 희망(希望)의 실현(實現)’을 확신할 수 있을까를 자문해봐야 한다. / 필자의 글인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에서 인용.
-중략- 또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의 모든 문제는 선택(選擇)해야 할 것들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다. 그래야 해결되거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직면(直面)하고 있는 문제들은 유일(唯一)하다거나 절대적(絶對的)이라거나 하여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패(失敗)를 각오하는 용기(勇氣)와 결단(決斷)이 요구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들은 상대적(相對的)일 뿐만 아니라 다양성(多樣性)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해도 또 다른 상대적이며 다양성을 가진 새로운 문제가 대두(擡頭)되게 되어 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끝없는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하고, 선택된 문제를 회피(回避)하거나 폐기(廢棄)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것,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버릴 수 없는 살아 있는 동안의 영원한 족쇄(足鎖)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한 결 같이 논리적이거나 합법적인인 것도 아니며, 흔쾌(欣快)히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 허다(許多)하다는 점이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친서민(親庶民) 정책이라든가. 인기 영합주의(人氣迎合主義)에 매몰(埋沒)된 현실은, 더욱 더 국민을 ‘비극(悲劇)의 장(場)’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로 인하여 일부의 국민은 법에도 없는 과도한 권리주장과 보호받을 수 없는 인권을 내세워 국가와 국민을 향해서,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대적하고 있다. / 필자의 글인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에서 인용
제가 알기로는 우리 인간과 사회에는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 일상적인 상식을 아는 바가 없음)’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무서운 무지(無知; ignorance), 몰상식(沒常識; lack of (common) sense; senselessness; thoughtlessness; absurdity; irrationality.) 부도덕(不道德)하고 비윤리적(非倫理的)인 언행(言行), 교언영색(巧言令色), 아유구용(阿諛苟容), 면종복배(面從腹背), 언행(言行)의 불일치(不一致), 배웠다는 사람들의 현학적(衒學的)인 말장난, 그리고 무지막지(無知莫知)한 폭력(暴力)들이 우리 삶과 사회발전을 암담(暗澹)하게 가로 막고 있어 우리의 삶을 허망(虛妄)하게 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들어나고 있는 수많은 병리현상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식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사람은 매우 순진하고 단순해서 세상을 모르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이거나 바보 영구일 것이다. 외눈을 가진 무리들 속에서는 두 눈을 가진 것은, 정상(正常)이 아닌 것이다. 만화경(萬華鏡)으로 본 세상은 선택된 아름다운 세상일 수 있으나, 지각(知覺)있는 두 눈으로 본 세상은 더럽고 치사(恥事)한 세상이 정상(正常)인 것이다.
주(註) 03;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에게 잘 보이려고 그럴듯하게 꾸며 대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 출전은 《논어》의 <학이편>과 <양화편>이다.
주(註) 04; 아유구용(阿諛苟容)- 남에게 아첨하며 구차스럽게 굴거나 빌붙는 것.
주(註) 05; 면종복배(面從腹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배반함
주(註) 06; 현학적(衒學的)인 말장난(修辭)- 스스로 자기 학문이나 지식을 뽐내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간교(奸巧)하게 남을 속이기 위하여 말장난하는 것.
주(註) 07; 만화경(萬華鏡)- 여러 개의 거울로 이루어져 있는 광학 장치, 빛의 현상을 이용하여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안에 들어 있는 색유리 조각의 영상이 거울에 비쳐 기하학적인 대칭 무늬를 이루는데, 이 색유리 조각이 들어 있는 부분을 돌리면 무늬가 끊임없이 변화하게 하는 기구. 또는 만화경 안에 들어 있는 풍자적인 세상.
주(註) 08; 돈키호테- 에스파냐(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은 풍자 소설인 “돈키호테” 의 주인공으로 무모한 이상주의자이며, 충동적인 인물.
주(註) 09; 번복지심(飜覆之心)과 물욕교폐(物慾交蔽)- 수운 대신사님이 지으신 <도덕가>의 마지막 단락(段落)에 다음과 같은 경계(警戒)의 말씀이 있다.
어질다 제군(諸君)들은 이런 말씀 본(本)을 받아
아니 잊자 맹세(盟誓)해서 일심(一心)으로 지켜내면
도성덕립(道成德立) 되려니와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이는 역시(亦是) 역리자(逆理者)요,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이는 역시(亦是) 비루자(鄙陋者)요,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이는 역시(亦是) 혹세자(惑世者)요,
안으로 불량(不良)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亦是) 기천자(欺天者)라.
뉘라서 분간(分揀) 하리 이같이 아니 말면
경외지심(敬畏之心) 고사(姑捨)하고 경천순리(敬天順理) 하단 말가.
(사계명의 실험적인 의역)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이는 역시(亦是) 역리자(逆理者)요,
/ 매사에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쫓아 자신만의 이익을 얻으려고 변덕스런 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천리를 거스르며 사는 사람이고,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이는 역시(亦是) 비루자(鄙陋者)요,
/ 세속적 욕망(재물과 명예 등등)에 싸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과 행동을 고상하게 하지 못하여 품위가 없는 천박(淺薄)한 사람이고,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이는 역시(亦是) 혹세자(惑世者)요,
/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온갖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교묘히 속여 해치는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천리를 속이는 사람이고,
안으로 불량(不良)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亦是) 기천자(欺天者)라.
/ 안으로는 한없이 불량하면서 겉으로는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꾸며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천리를 악용하고 한울님을 속이는 사람이다.
‘누가 사계명을 지키는가?’ 중에서 / 2004, 9, 10.에 천도교 관련 게시판에 게재.
/ 필자의 글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에서 인용.
/「총. 균. 쇠」란 무엇인가? (6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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