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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총. 균. 쇠」란 무엇인가?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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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4-03-07 16:51 조회 4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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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란 무엇인가? (6 -2)
-중략-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중에서 그 의미가 부정확(不正確)하고 편중(偏重)되거나 편향적(偏向的)인 언어나 지식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하여 신중하지 못한 사고행태(思考行態)와 해석과 언어사용으로 인하여 수많은 갈등을 초래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사회의 불안을 초래하는 잘못된 언어 사용과 불확실한 지식의 남용(濫用)을 우리 사회는 가볍게 여기고 있다. 그 결과, 사회는 더 많은 갈등과 불안을 초래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몇 가지 사례(事例)와 용례(用例)를 들어 그 진실은 무엇이고 그 허상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상식에 맞는 것이며 올바른 사용을 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올바른 지식을 갖고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역사관(歷史觀)을 바탕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미래의 세상을 창출(創出)하는 것이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 안정을 이룩할 수 있는 첩경(捷徑)이라 할 수 있다. 그 의미가 부정확(不正確)하고 편중(偏重)되거나 편향적(偏向的)인 언어나 지식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을 왜곡(歪曲)되게 해석하는 주체는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는 안정된 사회(地上天國)를 절대로 창출(創出)할 수 없으며, 만약 그들이 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국민의 집단지성(集團知性)이라면, 그 국가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될 것이며, 국민의 삶은 참담(慘憺)한 고난(苦難)의 긴 여정(旅程)이 될 것이 자명(自明)한 일이다. / 필자의 글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에서 인용.
-중략- 우리나라에서는 유독이 많은 사람들이 에이브라햄 링컨이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링컨이 생존한 시대와 그가 정치적인 활동을 한 그 시대의 미국의 역사와 링컨의 정치활동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안다면, 절대로 위대한 인물이며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평가되는 기준으로 에이브라햄 링컨의 공과 과오의 전모를 보게 된다면 과연 존경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약에 링컨의 과오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드린다면, 수백 년간의 중화사상(中華思想, Sinocentrism)을 바탕으로 한 중화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대주의로 주체성을 잃은 지 오래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상대를 중국에서 서양으로 바꾼 한국의 집단지성은 신 사대주의에 철저하게 함몰(陷沒)된 이중 잣대를 가진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인물들은 무비판적으로 위대한 인물이고, 5천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이 나라의 명맥(命脈)을 목숨 받쳐 이어오고 전통문화를 빛나게 한, 우리의 존경스럽고 위대한 인물들은 모르는 구차하고 부끄러운 민족이 되어가는 우리는, 바람직한 국민인가를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이 링컨이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의 미래지향적인 역사관의 영향 때문인 것이다. 서구의 역사 인식은,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의 역사를 평가하고 단죄(斷罪)하는 과거로 회귀(回歸)하는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시대적 상황을 가감(加減)없이 직시하여 철저히 고려하여 인정하고 미래 국가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여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보완하고 평가하고 해석하여 미래지향적인 역사관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위대한 인물들의 공적은 찬양하되, 국가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평가되는 과오(過誤)를 과감히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에이브라햄 링컨도 공과(功過)가 극명(克明)한 위대한 인물 중에 하나로, 그의 과오는 지워져 버리고 있다. 그러면 링컨의 어떤 점들이 재해석 되었는가를 위키 백과사전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면서 필자의 평가를 가미(加味)시켰다. -이하 생략- / 필자의 글 ‘아무에게나 농락당해도 즐거운 우리들.’ 4). 에이브라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진실.’에서 인용.
역사 비평가들은,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이 책에서 인류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왜 어떤 민족들은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왜 원주민들은 유라시안들에게 도태되고 말았는가. 왜 각 대륙들마다 문명의 발달속도에 차이가 생겨났을까. 인간사회의 다양한 문명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슈펭글러와 토인비이후 전혀 다른 사관이라 할 수 있다.
‘슈펭글러는 그의 文明形態論이 법칙을 탐구하고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기본이라고 믿고, 문화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기간을 약 천 년으로 생각하여 각 문화의 역사적 生成을 예측하였다. 토인비도 역시 문명을 생물체로 비유했으나 그가 『歷史의 一硏究/ A Study of History /1934-1954』에서 보인 방대한 테이터는 일찍이 사관을 주장한 사람들 중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토인비는 문명의 생성, 해체를 외적 조건의 도전(challenge)에 대한 응전(response)이란 공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슈펭글러나 토인비의 사관 역시 역사 발전의 諸 段階를 圖式化하고 그 科學性에 대한 사실 입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目的論的 史觀과 다르다./ 史觀이란 무엇인가. PP. 20-21에서 발췌 종합정리.
『史觀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사관을 만날 수 있다. 역사주의 사관, 실증주의 사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기독교 사관, 상대주의 사관, 터너의 프론티어 사관, 토인비의 문명사관, 중국인의 전통적인 역사관, 유교사상에 있어서의 진보관, 일제치하에서서 식민사관, 미래지향적인 역사관 등등이 각각 다른 시각으로 동일한 역사의 사실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중략- 南滄 孫晉泰의 新民族主義史觀(孫晉泰 朝鮮民族史 槪論 1948) 같은 것은, 그 이론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하나의 새로운 노력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이제 우리는 과거의 韓國史學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韓國史學을 전개시켜야 할 時期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史觀이란 무엇인가.』의 ‘韓國史學에 있어서의 史觀의 問題’ 중에서 P. 261.라고 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기록되었거나 기록되지 않았거나와 관계없이 인류의 문명의 진실한 실체는 무엇이며, 우리가 도외시(度外視)했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문명들은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들이 인류문명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를 지금의 시각(視覺)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인류문명의 발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그 의미가 사라져 버리고, 우리가 전혀 상상(想像)하지 못한 조건(條件)들과 상황(狀況)들이 진정한 역사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인류의 문명의 발전과정과 몰락과정(沒落過程) 그리고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총. 균. 쇠」가 인류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다른 도서와는 확연(確然)히 다르게 목차의 각 장(章)마다 주제의 핵심과 문제 제기를 하고 그 답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목차만 읽어도 이 책이 추구하고자 하는 역사의 의미와 새로운 해석이 왜 필요하고, 그 해석이 인류문명의 탄생(誕生)과 발전(發展) 및 쇠퇴(衰退)의 이유를 분명하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다. 특히 선진문명(先進文明)과 후진문명(後進文明)이 무엇이며 왜 생기는가를 그 이유를 알 수 있고, 21세기인 현재에도 지구의 어느 구석엔 아직도 문명의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인류의 삶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제6장. 식량 생산민(生産民)과 수렵(狩獵) 채집민(採集民)의 경쟁력 차이 /159 P.’ 에서 ‘20세기까지도 수렵 채집민으로 살아남아 있었던 몇몇 민족들은 사막이나 북극 지방 등, 식량 생산에 부적합한 지역에 국한되어 살게 된 결과 식량 생산자들에 의해 정복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은 문명의 유혹(誘惑)에 굴복(屈服)하고 말 것이다.’라고 예언이 아니고 확신을 하고 있다.
목차 / 2판 33쇄. 2012년 발행본.
친애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편지 - 6 P. / 목차에는 없는 편지 내용이지만, 저자의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에 감동하여 전 문장을 옮겨 보았다. / PP. 6-9. 참조.
위대한 한글로 공유하게 된 공감대
나의 한국인 친구들이 위대한 기념비인 한글로 기록된,
역사의 자리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총. 균. 쇠〉는 지리적 조건이 지난 13000년간 전 세계인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책.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한 저의 또 다른 저서《제 3의 침팬지》에 이어 〈총. 균. 쇠〉를 통해 친애하는 한국 독자 여러분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게 됨으로써, 세 가지 의미에서 각별한 시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첫째로, 한국어판 출간은 저의 지난 번 한국 방문 때 한국인 친구들과 동료들, 학생들과 나눈 따뜻한 정과 즐거웠던 추억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 저서가 그들의 언어로 나오게 되었는데 어찌 반갑고 기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이 책의 주제가 한국 독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관심사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총. 균. 쇠〉는 지리적 조건이 지난 13000년간 전 세계인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밝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개중 몇몇 나라의 성원들은 지리적 조건이 인간사에 미치는 중요성을 간과할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모든 한국인에게 그 영향력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한국은 중국과 가까이 이웃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농업화와 가축화가 용이한 야생작물과 동물을 가진 까닭에 본격적인 농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물을 경작활동에 이용해 세계 최초의 문명 중심지 중 하나인 황허문명을 일으켰고, 그 성과의 대부분이 한국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중궁에 단순한 예속국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한국은 한반도의 좁고 긴 지리적 특성, 황해라는 자연의 방벽, 그리고 땅덩이 대부분이 중국보다 북쪽에 위치한 기후적 장벽으로 인해 별도의 역사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또 한국을 둘러싼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풍부한 어장과 해산물을 지닌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토기 문화와 정주 부락을 이룩했던 선사 시대의 인간 사회를 부양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은 아시아 대륙에 잘 융합되어 있는 섬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학의 기본적 사실은 한국인이 어떻게 해서 독특한 문화, 언어, 민족과 크고 강대한 이웃 나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사실이지만 지리적 조건은 한국인들이 일본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한국은 일본에 아시아 대륙의 작물, 가축, 식량 생산 방법과 문화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어왔습니다. 독특하게 여겨지는 일본어도 어쩌면 2000년 전 한반도의 유민들이 일본에 전해준 말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어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 현재 한반도에서 쓰고 있는 한국어와 같은 신라 말이 대체해 버린 여러 고대 언어 중 하나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 체계 한글.
마지막으로 한국의 위대한 문자 체계인 한글은 전파라고 부르는 과정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발명은 일본에서 쓰이는 중국 문자에 기초한 문자 체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나라에서 나라로 세부까지 완벽한 형태로 전해진 다음 새로 도착한 나라의 실정에 맞게 변형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발명의 기번적인 개념만이 한 날에서 다른 나라로 전파되어, 수용한 나라에서 스스로 모든 세부 조건을 창조해야 할 필요가 생기기도 합니다.
한글의 탄생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국어에 적합한 문자 체계를 고안하는 데 몽골 또는 티베트의 불교 문자의 예에서 착안한 표음문자의 개념과 중국 한자의 블록 형식의 문자 형태로부터 영감을 얻었지만, 몽골 문자나 중국의 블록 문자 중 어느 것도 세부까지 차용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 세종대왕은 표음 문자와 블록형 문자 형태의 기본적인 개념만을 차용했습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문자의 운용 원칙과 형태 등 모든 세부 사항을 스스로 고안해 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의 어떠한 문자 체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놀랍고도 새로운 워칙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음소(音素)를 블록 안에 배열하여 음절별로 분류하도록 했고 특정문자 형태가 정해진 소리를 대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특정 자음을 발음할 때의 혀와 입술 모양에 착상한 자음의 형태를 생각해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는 그동안 그토록 많이 들어왔던 한글을 가는 곳마다 보면서 세종이 발명한 그 유명한 문자를 읽는 방법을 배웠던 일이었습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한글은 전 세계 언어학자들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게 고안된 문자 체계라는 어쩌면 당연한 칭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한국인 친구들이 인간의 창조성과 한국인인의 천재성에 대한 위대한 기념비인 한글로 기록된, 역사와 지리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으며,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제레드 다이아몬드 서명 싸인.
E. H.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p 43 - 중략- 훌륭한 역사가들 역시, 그것(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건 말건, 미래라는 것을 뼈 속 깊이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역사가는 ‘왜냐’ 라고 묻는 동시에 ‘어디로’ 라고 묻는 법입니다./ p 170./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독일의 철학자로, 1880. 5. 29.에 독일 블랑켄부르크에서 태어나 1936. 5. 8.에 뮌헨에서 돌아갔다. 브리태니커 에 의하면 그는 사회이론에 크게 이바지한 영향력 있는 연구서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2권, 1918~22)으로 유명하다. 할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1904) 뒤 1911년까지 교사로 일했다. 같은 해 뮌헨으로 옮겨 얼마 되지 않는 유산으로 살아가면서 〈서구의 몰락〉을 쓰기 시작했다. 제1권은 1918년에 나왔는데, 이 책은 나오자마자 대중에게 즉각 호응을 얻었다. 제2권은 1922년에 나왔고 이듬해 제1권의 개정판이 나왔다. 1919년 이후로 슈펭글러는 자기 명성을 이용하여 정치평론가로 출세하려 애썼으나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서구의 몰락〉은 역사철학 연구서이다. 대부분의 문명은 반드시 일련의 주기를 거치기 때문에 역사가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직 진행되지 않은 우리 서양역사의 정신적 형식· 수명· 리듬· 의미·결과 등을 예측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훗날 문화는 대개 지나간 문화의 '재현'이라고 주장한 아널드 토인비와 달리 한 문화의 정신은 결코 다른 문화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양은 이미 '문화'(그의 용어법으로는 '문명'이 더 적절함)의 창조 단계를 지나 반성과 물질적 안락의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미래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문학자들은 그의 작품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슈펭글러의 비정통적 방법에 분개했고 사실에 대한 오류를 경멸했다. 그밖의 작품 중에는 〈인간과 기술 Der Mensch und die Technik〉(1931)이 눈에 띈다. H. 스튜어트 휴즈는 그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1952)을 썼으며, R. G. 콜링우드는 〈고대 Antiquity〉(1927)에서 그의 역사주기론에 관해 이야기했다. 슈펭글러는 문화를 유기체로 보아, 문화도 생성, 번영, 쇠퇴, 몰락의 과정을 밟는다고 주장하였다. / 브리태니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영국의 역사가로, 1889. 4. 14.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975. 10. 22.에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요크에서 생을 마쳤다. 브리태니커에 의하면 그는 역사철학을 확립한 저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는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조카로서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공부했다(1911). 아테네에 있는 영국학교에서도 잠시 공부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문명쇠퇴에 관한 철학을 전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12년 베일리얼 칼리지의 고대사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15년부터 영국 외무부 정보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의 영국대표를 지낸 뒤 런던대학 비잔틴과 근대 그리스 교수로 임명되었다. 1921~22년 그리스-투르크 전쟁 동안 〈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 신문의 통신원으로 일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와 투르크의 서부 문제 The Western Question in Greece and Turkey〉(1922)를 썼다. 1925년 런던 경제학교의 국제사 연구교수 및 런던에 있는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연구책임자가 되었다.
1922년 그는 불가리아 농민이 여우가죽 모자를 쓴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역사의 연구〉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머리쓰개로 묘사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저서는 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질, 즉 그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 그 형태에 대한 시각, 엄청난 학식, 예리한 관찰 등을 특색 있게 보여주었다. 〈역사의 연구〉에서 토인비는 인간역사 과정에서 26개 문명의 등장과 쇠퇴를 검토하고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결론지었다. 문명은 그 지도자들이 창조적으로 대응하기를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에서 분석했던 것과는 달리 토인비는 문명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연속되는 도전에 계속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도 달리 역사가 경제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역사의 연구〉를 쓰는 동안에도 토인비는 수많은 저서를 썼고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해외연구 책임자(1939~43)로, 외무부 연구담당 부서의 책임자(1943~46)로 일했으며 은퇴할 때까지 영국경제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많은 책을 저술했던 그는 1950, 1960년대에 세계종교·서구문명·고전역사·세계여행 등에 관한 책들도 계속 출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토인비는 그가 중점을 두는 역사의 주인공을 문명에서 고등종교의 탁월성으로 바꾸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시련의 문명 Civilization on Trial〉(1948)·〈동방에서 서방으로 : 세계여행 East to West : A Journey Round the World〉(1958)·〈헬레니즘 : 문명의 역사 Hellenism : The History of a Civilization〉(1959) 등이 있다. 토인비는 다른 역사가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비판은 그가 실제자료와 필적하는 가치로 신화와 은유를 사용한 것과 문명의 등장과 몰락에서 그 재생력으로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에 집중되었다(→ 색인 : 헬레니즘). 많은 비평가들은 토인비가 도달한 결론이 역사가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도덕가의 것이라고 불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현대 역사연구의 전문화 경향에 대한 고무적인 해답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브리태니커.
토인비는 역사철학을 확립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에서 역사의 연속성과 반복성에 대한 인식 아래 세계사 26개 문명의 발생과 성장, 해체의 과정을 비교 분석했다.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하며, 물리적 혹은 환경적 도전이 아닌 도덕적·종교적 도전에 대응하지 못할 때 생존에 실패한다고 결론지었다
토인비는 하나의 문명이 이런 <도전(挑戰) >을 받았을 때, 잘 <응전(應戰) >하지 못하면 그 문명은 쇠퇴- 몰락의 과정을 걷게 되지만, 훌륭하게 <응전 >한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비약(飛躍) 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역사의 연구 >에서 입증함으로써 슈펭글러의 자연 법칙적이며 결정론적인 역사 해석을 비판하였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이론>에서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 둘만한 개념이 창조적 소수자와 지배적 소수자이다.
창조적 소수자( Creative Minority )란 한 문명을 쇠퇴케 하는 그 도전의 기미를 예민하게 간파하고 그 도전에 올바로 응전 하도록 그 사회 구성원을 일깨우고 격려하며 극복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앗수르가 멸망하였다고 좋아하는 이스라엘에게 북방의 끓는 기름 가마의 환상으로 더 무서운 바벨론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예레미야나 이스라엘의 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시대의 징조를 선취하여 알리는 사람들 말이다. 정치, 경제, 예술, 탐험, 과학, 종교, 문학, 교육, 각 분야에 그런 창조적 소수자가 있는 사회는 비약이 가능합니다만 이런 창조적 소수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무시당하고 조롱 받는 분위기의 사회는 멸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배적 소수자(Dominant Minority)란, 쉽게 말해서 창조적 소수자가 타락한 모습이다. 창조적 소수자로서의 사명감과 순수성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그 시원한 창조성은 말라붙고 스러진 채, 빈껍데기뿐이면서도 과거의 공로와 투쟁 경력을 밑천 삼아 이미 지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도자로 버텨보려는 사람들을 말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전락 할 때 그 사회나 집단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종내는 몰락하게 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행위에 의해 역사와 문화가 형성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미래에는 문명의 중심이 구라파와 북미 대륙으로부터 동북아시아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토인비는 역사철학을 확립한 저서『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는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조카로서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공부했다(1911). 아테네에 있는 영국학교에서도 잠시 공부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문명쇠퇴에 관한 철학을 전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12년 베일리얼 칼리지의 고대사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15년부터 영국 외무부 정보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의 영국대표를 지낸 뒤 런던대학 비잔틴과 근대 그리스 교수로 임명되었다. 1921~22년 그리스-투르크 전쟁 동안 〈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신문의 통신원으로 일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와 투르크의 서부 문제; The Western Question in Greece and Turkey〉(1922)를 썼다. 1925년 런던 경제학교의 국제사 연구교수 및 런던에 있는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연구책임자가 되었다.
1922년 그는 불가리아 농민이 여우가죽 모자를 쓴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역사의 연구〉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머리쓰개로 묘사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저서는 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질, 즉 그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 그 형태에 대한 시각, 엄청난 학식, 예리한 관찰 등을 특색 있게 보여주었다. 〈역사의 연구〉에서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 과정에서 26개 문명의 등장과 쇠퇴를 검토하고,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결론지었다. 문명은 그 지도자들이 창조적으로 대응하기를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 고 했다. 오스왈드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에서 분석했던 것과는 달리, 토인비는 문명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연속되는 도전에 계속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도 달리 역사가 경제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역사의 연구〉를 쓰는 동안에도 토인비는 수많은 저서를 썼고,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해외연구 책임자(1939~43)로, 외무부 연구담당 부서의 책임자(1943~46)로 일했으며, 은퇴할 때까지 영국경제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많은 책을 저술했던 그는 1950, 1960년대에 세계종교· 서구문명· 고전역사· 세계여행 등에 관한 책들도 계속 출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토인비는 그가 중점을 두는 역사의 주인공을 문명에서 고등종교의 탁월성으로 바꾸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시련의 문명; Civilization on Trial〉(1948)·〈동방에서 서방으로 : 세계여행; East to West : A Journey Round the World〉(1958)·〈헬레니즘 : 문명의 역사; Hellenism : The History of a Civilization〉(1959) 등이 있다. 토인비는 다른 역사가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비판은 그가 실제자료와 필적하는 가치로 신화와 은유를 사용한 것과 문명의 등장과 몰락에서 그 재생력으로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에 집중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토인비가 도달한 결론이 역사가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도덕가의 것이라고 불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현대 역사연구의 전문화 경향에 대한 고무적인 해답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 아래의 자료에 의해 정리된 것을 종합 정리함.
註 10; 참고문헌.
역사는 인간의 편인가 : A. 토인비, 최혁순 역, 인문당, 1981.
토인비와 문명 : 강기철, 샘터, 1982.
토인비역사전집 전10권 : A. 토인비, 공덕룡 외, 대중서관, 1982.
역사의 연구(범우사상신서 49) : A. 토인비, 박광순 역, 범우사, 1992.
일반적으로 사회와 종교에 있어서의 한 인간의 이성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칼 뢰비트가 쓴 『歷史의 의미』의 에필로그에서 종교에 관련하여 인간의 이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연적 이성은 구 유럽의 종말에 대한 키에르케고르, 바우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놀라운 예측을 이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성은 자신의 예견력(豫見力)을 자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예측의 경우처럼 예측의 실현 내지 완성은 어마어마한 만족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은 최후의 심판과 구원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말」의 정언적인-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역사적 과정」의 연속성을 더욱 신뢰하며, 근본적이고 철저한 변화애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화 때문에 더욱 더 그 과정을 신뢰한다. 그리고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파국에 직면했을 때의 우리의 실천적 태도를 결정한다. 즉 그러한 파국을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게 한다. -중략-
그러나 연속성에 대한 신뢰는 이론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순환」운동이라는 고전적 이론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왜냐하면 연속성이 실제로 증명될 수 있는 근거는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적이고 무한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단선적인」 징행 과정 안에서 단절적인 시작과 끝을 전제함이 없이 역사를 연속적인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근대인 정신은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근대인 은 한편으로는 지노적인 세계관에서 기독교적인 창조와 완성의 함축성을 배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인의 세계관으로부터 순환적 구조를 배제한 무한적이고 연속적인 운동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근대인 정신이 기독교적인지 이교도적인지는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 근대인의 한쪽 눈은 신앙의 눈이고 다른 한쪽 눈은 이성의 누이다. 이리하여 근대인의 시각은 그리스적 사고나 성서적 사고에 비해 어쩔 수 없이 희미할 수밖에 없다. / 歷史의 의미』의 에필로그 PP. 310-311.라고 했다.
윗글에서 이성이 자신의 예견력(豫見力) 또는 예측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적 이성 즉 타고난 이성이라 한다고 했다. 이 놀라운 예측을 이제는 받아들인 사람들로 키에르케고르, 바우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이라고 했다. 니체는 1884년 《자라투스트라》를 완성시킨 후에 니체는 베니스에서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나는 내가 마치 현재의 특수한 문제에만 몰두했던 듯이 오해되는 것이 싫다. 아마도 앞으로 50년쯤이 지나서야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의 작업이 이룩해 놓은 바를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를 무한히 뒤로 남겨두지 않고서 나에 대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역사적 전망의 법칙을 따르면) 거의 불가능하다.
「앞으로 50년」이라고 하면 1934년인데 이때에 니체는 실제로 공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중요성을 가졌었다. 그의 사상은 비겨적인(esoteric) 측면과 개방적인(exoteric) 측면 양자를 모두 지니고 있었는데, 전자는 「신이교주의(新異敎主義; neo- paganism)라 불리우고 후자는 「영원회귀(永遠回歸; eternal recurrence)」라 불리운다. / 歷史의 의미』의 니체에 의한 「영원회귀」설의 부활에서 PP. 324-325. -중략- 그 후 20년이 지나고 나서 니체는(코페르나쿠스 이래로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기독교적인 자아를 우주적 필연성의 질서, 즉 동일자(同一者)의 영원회귀에 재통합시키면서 인간의 우연적 존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세계라고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새로운 이론에 대한 최초의 명백한 언급은《즐거운 지혜》에서 「가장 무거운 짐」(제 341절과 제 342절)이라는 제목 하에 나오며, 또한 이 언급은 「신의 죽음」(제 343절)에 대한 당시의 천명과 연관된다. / 歷史의 의미』의 니체에 의한 「영원회귀」설의 부활에서 P. 327.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한 역사에 대한 혜안의 실례(實例)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미래지향적인 역사관을 의미한다.
註 11; 자라투스트라(Zarathushtra) - Zoroaster. Zarathustra라고도 함. / 유의어는 조로아스터 (Zoroaster). BC 628경 이란 라게스(?)- 551경.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즉 배화교(拜火敎)의 창시자이며 종교개혁자이다. 스무 살경에 종교 생활에 들어가서 서른 살경에 아후라 마즈다신(Ahura Mazdah神)의 계시를 받고 새로운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고 하며, 니체의 소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인도에서 파르시교로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 , 파르시 )(→ 색인 : 이란 종교).
세계 종교사의 주요인물인 자라투스트라는 2가지 이유에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첫째, 그는 헬레니즘 시대(BC 300경~AD 300경)에 근동과 지중해 지역에서 신비학 지식 및 마술과 관련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둘째, 그의 유일신 사상은 그의 가르침과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의 관련성을 고찰한 현대 종교사가의 관심을 끌어왔다. 범(汎)이란주의(pan Iranianism:자라투스트라 또는 이란 사상이 그리스·로마·유대교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의 극단적인 주장을 무시하더라도, 자라투스트라의 종교사상이 끼친 포괄적인 영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로아스터교를 연구할 때 이 종교의 창시자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첫째, 조로아스터교의 어떤 부분이 자라투스트라가 속한 부족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며, 어떤 부분이 그의 환상과 종교적 창의력의 산물로서 새로 대두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둘째, 사산 왕조시대(224~651)의 후기 조로아스터교(마즈다교)가 어느 정도 자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반영했는가 하는 질문이다. 셋째, 〈가타 Gāthās〉(오래된 찬송)를 수록한 〈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 경전), 중기 페르시아의 팔라비서(書), 그리스 저자들의 보고 등과 같은 자료들이 자라투스트라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어느 만큼이나 믿을 만한 지침을 제공하는가이다
자라투스트라의 전기는 좋게 말하면 빈약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고, 나쁘게 말하면 사변의 산물이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조로아스터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알렉산드로스보다 258년 앞서' 활동했다고 한다.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559~330년에 페르시아를 다스린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했다. 이 연대에 따르면 자라투스트라는 BC 588년 코라스미아(중앙 아시아 아랄 해 남부지역)의 왕이 분명한 비슈타스파를 개종시켰다. 전승에 따르면 자라투스트라가 그를 개종시켰을 때 40세였다고 한다. 따라서 BC 628년경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자라투스트라는 메디아에 있는 라게스(지금의 테헤란 근처 레이) 마을의 소박한 기사 집안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가 살던 지역은 도시가 되지 않았던 때였으니만큼 가축 사육과 목양으로 경제를 꾸려가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이런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약탈하고는 했는데, 자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침략적인 질서 파괴자로 보고 '악마'(Lie)의 추종자들이라고 불렀다. / 브리태니커
증보판에 부쳐 일본인의 조상은 한민족인가 - 임홍빈(문학사상 편집 고문) - 674 P.
추천의 글 1998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명저 <총, 균, 쇠>의 진가 - 이현복(서울대 명예 교수) - 680 P.
옮긴이의 글 인류 문명의 불평등에 관한 수수께끼 풀이 - 김진준(번역 문학가) - 684 P.
프롤로그 현대 세계와 불평등에 대한 의문을 푼다. - 16 P.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지리 환경은 분명히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역사의 광범위한 경향도 지리적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제1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운명의 갈림길.
제1장 문명이 싹트기 직전의 세계 상황. - 47 P.
각 대륙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제각기 달랐던 것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타임머신을 타고 B.C. 11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가정하여 당시의 세계 상황을 짐작할 때, 과연 각 대륙의 인간 사회에서 오늘날의 무기와 병원균, 쇠 등의 단계적 발전 순서와 오늘날의 세계적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지 밝힌다.
제2장 환경 차이가 다양화를 빚어 낸 모델 폴리네시아 - 73 P.
폴리네시아는 환경과 관련하여 인간사회가 다양화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여기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폴리네시아를 통해 다른 대륙도 그러한 변화를 겪었으리라는 개연성뿐이다. 과연 다른 대륙에서 다양화를 야기시킨 환경적 차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를 철저하게 밝힌다.
제3장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힘의 원천 - 92 P.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사건은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식민지로 만든 직접적인 요인(군사 기술,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 해상 기술, 중앙집권적 정치조직, 문자 등)의예를 보여준다. 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을 식민지로 만들지 못하고 그 반대 현상이 발생했을까를 밝힌다.
/「총. 균. 쇠」란 무엇인가? (6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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