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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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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3-09-13 08:58 조회 8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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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6)
표영삼은 「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 제2절 창조적 순환사관/ PP.48-51.에서 수운의 역사의식을 창조적 순환사관에서 출발되었다고 진단함으로써 천도교의 역사관을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하였다. 상주 선도사로서 오랫동안 천도교 중앙 총부에 상주하면서 교단을 대표하여 교단내외의 교리교사 해설자로 강연과 연구논문을 써온 표영삼은, 포덕 141(2000) 2월, 교리교사연구 제4호에 ‘대신사와 동학사상’이란 글을 게재한 바가 있다. 표영삼은 이 글에서 교단에서 그간 어떠한 교서에서 다루지 않은 수운의 역사관을 처음으로 ‘창조적(創造的) 순환사관(循環史觀)’ 이란 신조어(新造語)로 교리교사를 설명했다.‘창조적 순환사관’ 이란 용어에 대하여 교단 공식기구를 통하여 논의한 바가 있는 지는 확실치 않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수운의 역사의식을 창조적 순환사관에서 출발되었다고 진단하고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록물에 사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운심법이 보여주고 있는 수운의 역사의식을, 창조적 순환사관에서 출발되었다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적 순환사관’ 이란 용어는 지금도 생소(生疎)하지만 이 용어가 발표될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주목을 받지도 않았고 ‘창조적 순환사관’ 이란 용어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은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용어에 대하여 물었다면 ‘창조적 순환사관’ 이 어떤 사관이며 동학과 천도교의 기본사상으로 충분하고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한 적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런 문답이 있었다는 전문(傳聞)을 들은 바가 없다. 다른 말로 말하면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관이 ‘창조적 순환사관’이라는 신조어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거나, 무엇이라 표현하더라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거나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관을 무엇이라 하던 알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침잠(沈潛)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표영삼은 ‘창조적 순환사관’ 에 대하여 머리말에서 ‘동학 역시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가 형이상적(形而上的) 역사관이고, 둘째가 한울님 관념이고, 셋째가 선악의 기준이고, 넷째가 수행과 신앙의 방법이고, 다섯째가 교단 조직이고, 여섯째가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한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구조를 검토하여 보듯이 먼저 창시자인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가 포덕(布德) 1년(1860)에 무극대도(無極大道, 天道)라는 신념체계를 창시하기까지의 구도과정을 알아보고, 동학은 종교인가 도학(道學)인가를 살피는 한편 그 신념의 핵심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고 그 의도를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표영삼은 이 글에서 수운의 동학을 창도한 것을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가 포덕(布德) 1년(1860)에 무극대도(無極大道, 天道)라는 신념체계를 창시하기까지의 구도과정을 알아보고, 동학은 종교인가 도학(道學)인가를 살피는 한편 그 신념의 핵심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고 하여 동학의 창도를 ‘무극대도(無極大道, 天道)라는 신념체계를 창시’라고 하고 있다. 잘못된 이해에서 온 매우 잘못된 기술이라고 판단된다. 동학이 신념의 체계라는 기술이 옳은 판단인가 매우 의심스럽다.
표영삼은 또 ‘동학은 서학을 물리치기 위해 창도된 것이라고들 하나 이 세상에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 위해 대항 종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대신사는 자신의 신념을 무극대도 또는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동학이란 명칭은 포덕 후 반년이 지나서 "도는 비록 천도라 하지만 학은 동학이라"고 하여 비로소 자신의 학을 동학으로 선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라고 하여 기존의 해석에서 그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표영삼은 계속해서 ‘동학을 바로 이해하자면 대신사의 구도적 과제상황과 그 해답의 체계를 낱낱이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대신사의 독특한 역사관을 살펴보기로 한다.’라고 전제한 다음,
‘문화사가인 도슨(Christopher Dawson)은 "한 사회의 생명력이 종교와 얼마나 밀접하고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종교를 잃어버린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문화를 잃어버린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문화와 도(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10년간 팔도강산을 누비던 대신사는 온 세상이 병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깨닫고 돌아다니기를 중단하는 한편 국운을 되살릴 길을 모색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몽중노소문답가>에 보면 "이 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시요,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이라. … 윤회시운 구경하소. 십이 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고 하였다. "십이 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이 한마디에는 대신사의 역사관이 들어 있고 구도적 과제상황이 담겨져 있다. 모든 종교와 도는 나름대로의 형이상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 유형은 크게 순환사관, 영원 회귀사관, 발전사관 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 대신사의 역사관은 이 중 어느 하나에 속하기보다는, 순환사관과 발전사관을 합친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할 수 있다. 달이 둥글었다가 이지러지기를 반복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물이 성쇠하며 순환하는 것처럼 역사도 주기적으로 순환한다고 믿는 것이 순환사관이다. - 중략-.그러면 창조적 순환사관은 어떤 것인가. 대신사는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말 속에 자신의 역사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다시 개벽이란 개념을 분석해 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개벽이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모두 세 번 사용되었다. 한 번은 "개벽 후 오만 년"이라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개벽(開闢)이란 말뜻은 "열었다"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개벽은 열었던 무엇을 다시 연다는 뜻이다. 원래 개벽은 천지개벽을 이르는 말이다. "개벽 후 5만 년"이라 하였으므로 천지만물이 처음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지구상에 생물이 처음 나타난 것(열린 것)은 35억 년 전이라 하며 사람이 지상에 나타난 것도 150만 년 전이라 한다. 5만 년 전이라면 농업사회의 출현을 상정하여 인문 개벽을 생각할 수 있다. 인문이란 인류의 문화이며 쉬운 말로 바꾸면 '삶의 틀'이라 할 수 있다. 즉 개벽 후 5만년이란 삶의 틀이 열린 지 5만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삶의 틀을 문명이라 해도 좋고 문화라 해도 좋다.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는 여럿이 공존한다는 다원론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양 문명, 동양 문명,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불교 문명, 유교 문명 등 지역이나 종교별로 나뉘어 다원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신사는 삶의 틀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라고 생각하는 점이 특이하다. 지역이나 종교에 따라 나뉜 다원적인 문명과 문화는 전체로서의 삶의 틀에 속하는 하위 개념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틀은 다시 몇 개의 틀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크게 나누면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법률, 규칙, 전래의 습속 및 습관 그리고 도덕적인 요소들을 합친 규범적인 틀이 첫 번째 틀이요, 과학과 기술에 의한 생산관계 및 시장관계, 배분관계 등을 포함한 경제적인 틀이 두 번째의 틀이다. 그리고 다양한 음향과 글자, 몸짓과 색채, 공간장식 등을 통한 언어 표현 및 전달수단의 틀이 세 번째 틀이요, 세계와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방향을 지향시키는 생각하는 틀이 네 번째 틀이라 할 수 있다. 대신사는 이 삶의 틀이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탄생→성장→융성→노쇠→해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환의 측면은 동양적인 순환관과 통하고 있다. 맹자는 일찍이 왕조의 역사는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순환한다고 하였다. 요순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5백년마다 한 번씩 질서가 잡혔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 왕조들은 주기적으로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개벽 후 5만년", "5만년지 운수"라 하여 지난 시절도 5만년이요, 오는 시절도 5만년이라 하였다. 이 5만년을 실수(實數)로 보면 왕조의 순환사관처럼 5만년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순환사관이 된다. 실수로 보지 않고 온 시간의 절반이라는 상징적인 햇수로 보면 해석이 달라진다. 즉 상징수의 5만년이라고 할 때는 질적으로 다른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는 역사관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고고학에서는 실제로 문화의 발상 시기를 5만년 전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대신사는 "지난 시절, 오는 시절", "하원갑(下元甲), 상원갑(上元甲)", "전 만고 후 만고", "전 춘추(春秋), 후 춘추(春秋)" 등으로 온 시간을 과거와 미래, 전과 후, 하와 상으로 나누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실수의 5만년이 아니라 온 시간의 절반을 상징하는 5만년을 나타낸 것이다. 소옹(邵雍, 邵康節)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을 예로 들면 대신사의 10만년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원(一元)을 129,600년으로 잡고 다시 64,800년씩 둘로 나누어 음양(陰陽) 또는 하원과 상원으로 나누었다. 소옹은 12(하루의 시간)와 30(한 달의 날짜)을 기본수로 하여 원회운세설에 따라 일원의 연수를 산정하였다. 이처럼 소옹은 일원 즉 온 시간을 129,600년으로 잡은 데 반해 대신사는 10만년을 온 시간으로 잡았다. 10만년은 어떤 계산에 의해 산출한 수가 아니라 온 시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수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십을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수로 여기고 있다. 십은 온 시간이며 그 절반은 5로써 상징한 것이다. 이 전후와 상하의 절반을 상징하는 5만년의 표현은 창조적 순환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창조적 순환사관에 의하면 경신년 즉 1860년 4월 5일은 낡은 전반기의 5만년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후반기의 5만년 시대가 시작되는 대전환의 역사적 시점이다. 지금까지의 순환사는 커다란 삶의 틀 속에서 일어나는 잔물결과 같은 변화였다면 이제부터 맞게 되는 변화는 지난 시절의 삶의 틀이 완전히 해체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틀로 뒤바뀌는 대전환의 변화인 것이다. 그 동안의 사회 변동은 다른 문화와 접촉하거나, 다른 집단에 정복되거나, 과학 기술이 발전하거나,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거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등 여러 요인들이 겹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그 사회의 기본 틀은 변화하지 않고 외형적으로 동일한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변동의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변동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는 것이므로 과거의 변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외적인 요인들이 종합하여 이를 유발시키지만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창조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이루어 낼 수 없는 대변동인 것이다.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생각하는 틀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새로운 삶의 틀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춘하추동의 계절 변동은 자연의 법칙이요 숙명적인 것이지만 어떤 농법으로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는 농부의 주체적 선택에 달려 있듯이 어떤 삶의 틀을 창조하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인 우리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낡은 삶의 틀이 해체되고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려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생각하는 틀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 생각의 틀이 새롭게 바뀌면 이어서 규범의 틀, 경제의 틀, 언어표현의 틀과 교호작용을 일으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틀과 그 밖의 틀은 어느 시점에는 한쪽이 선도적 지위에 있기도 하다가 어느 시점에는 뒤따르기도 하는 교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한다. 그 특징은 삶의 틀이, 탄생→성장→융성→노쇠→해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일정한 시점에서 낡은 삶의 틀과 새로운 삶의 틀이 대전환하며 이는 새로운 생각의 틀을 갖춘 인간들의 창조적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PP.48-51. 하고 결론을 내렸으며 이 글을 분절(分節)하고 내용을 약간의 수정을 하여 「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 으로 그대로 게재했다.
표영삼은 제 2절 창조적 순환사관의 말미의 결론부분에다 다음과 같이 첨가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회 변동의 요인으로 다른 문화와의 접촉이나 다른 집단에 의해 정복되거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변화, 새로운 지식의 수용을 들도 있다. 이런 사회 변동은 같은 삶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변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개벽의 대전환은 낡은 삶의 틀이 해체되고 새로운 삶의 틀이 창조되는 대전환이므로 그 차원이 다르다. 대신사가 이러한 대전환을 예측한 것은 자신의 역사관인 창조적 순환사관에 의한 것이다.’/ PP.50-51.라고 했다.
표영삼은 2000년에 간행된「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제 1장 천도교의 기본사상’ 제 1절 종교냐, 도학이냐/PP. 46-48 의 서두에서 ‘대신사의 신념체계(無極大道 東學)는 종교라 해야 하는가. 동학(道學)이라 해야 하는가 동학을 종교라 하려면 서구적인 종교개념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라고 전제(前提)하고 여러 가지 해석을 붙인 다음, 결론 부분에서
'이 도는 개인이 참되고 뜻 있고 바르게 사는 길인 동시에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을 말한다. 개인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신념체계이면 모두 도라고 한 것이다. 대신사는 자신의 신념체계를 천도 또는 무극대도라 하였다. 그러면(學, 法. 敎, 術)이란 무엇인가. 학이란 ‘도를 바로 알고 배워 몸에 익히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즉 무극대도를 닦(修)고 익히(習)고 행(行)하는 수행과 한울님을 믿고 섬기는 종교행위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동학을 바로 이해하려면 종교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동양적인 도와 학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정상이라 여겨진다.’/ P.48. 라고 설명하고 있다.
표영삼이 말하고 있는 ‘종교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동양적인 도와 학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정상이라 여겨진다,’ 라는 해석방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동학을 도학(道學)으로 보는 견해를 가진 연구자가 또 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인 박맹수는 2005년에 간행된 ‘박맹수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의 해설에서’ 19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우리 학문, 우리 종교’로 등장한 동학(東學)의 핵심 경전 ≪동경대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동학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
첫째,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한 일종의 대항 이데올로기라는 견해다.
둘째, 동학은 기존의 유불선(儒佛仙) 삼교 사상에서 장점만을 따온 혼합 사상이지, 그 자체로 독창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사이비 사상이라는 견해다.
셋째, 동학을 단순히 서양의 ‘Religion[종교(宗敎)]’으로 이해하는 견해다. 중 셋째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학은 결코 서양의 ‘Religion’이 아니다.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동학은 ‘Religion’이라는 용어, 즉 그것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용어가 이 땅에서 대중화되기 이전에 성립했다. 우리나라에서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종교’라는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대체로 1900년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같은 근대적 신문, ‘대한학회’와 ‘기호 흥학회’ 등과 같이 근대문화운동을 펼치던 각종 학회들이 잡지들을 속속 발간해 내면서 비로소 ‘종교’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철학(哲學)’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용어 역시 일본을 통해서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동학이 ‘종교’, 즉 ‘Religion’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인가. 수운 선생 말씀을 빌리자면, 동학은 ‘도(道)로서 말한다면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천도(天道)요, 학(學)으로서 말한다면 동쪽, 즉 조선 땅에서 받았기 때문에 동학(東學)’(≪동경대전≫ <논학문>)이라 했다. 이를 풀어 말하면, 수운 선생께서 창시한 가르침은 서학(西學)이 아니라, 도라는 관점에서는 천도, 즉 하늘의 길이라 할 수 있고, 학이라는 관점에서는 동학, 즉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운 선생께서 말씀하는 ‘천도’와 ‘동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도란 사람이 마땅히 밟아가야 할 길이요, 학이란 사람이 마땅히 배우고 익혀서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필자가 동학 공부를 하면서 동학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 교단의 원로(元老) 어른들께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일찍이 동학의 선배들은 동학을 ‘믿는다.’ 하지 않고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학이 ‘Religion’이 아닌 까닭이 숨어 있다. ‘동학을 한다.’ 는 말은 동학이야말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길이요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는 뜻이겠고, 이른바 유일신(唯一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요약하자면, 동학은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도(道)이자 학(學), 즉 도학(道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학의 장점을 두루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극복해 가장 자주적(自主的)이고 주체적(主體的)인 ‘조선의 학문, 조선의 사상’을 지향하고자 했던 동학! 포함 삼교뿐 아니라 서학과 민간신앙마저 널리 포함해 뭇 생명을 다 살리기 위한 새로운 생명 사상으로 등장했던 동학! 그리고 서양식 종교가 아닌 조선 땅 도학의 새로운 전개로서 경상도 경주 땅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학!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동학을 온당하게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경대전 [東經大全] (고전해설ZIP, 2009.5.10, 지만지) 라고 하여 동학을 종교가 아닌 도학으로 해석하고 있다.
‘창조적 자연관’이나 ‘창조적 순환사관’이란 용어는 학계에서는 드물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것은 그 용어에 대한 개념 정의에 적절성(適切性)과 명료(明瞭)함을 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학계에서 ‘창조적 자연관’이나 ‘창조적 순환사관’이란 용어 대신 ‘생장염장 순환사관(生長斂藏 循環史觀)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추세(趨勢)이다. ‘창조적 자연관’이나 ‘창조적 순환사관’과 ‘생장염장 순환사관’의 구체적인 내용이 약간 다를 수는 있으나, 어떤 사물이나 이치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에 다른 표현을 쓰고 있지만, 동학과 천도교의 기본 사상을 설명하는 데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순환사관(循環史觀)이 수운의 심법에 매우 가깝고 올바른 표현일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어원(語源)은, 동양에서 최고(最古)의 병서(兵書)인「六韜三略」의 文蹈 守國 第八 放伐과 禪讓 / PP.67-72.으로 생장염장의 이치를 밝힌 글에 있다.
文王問太公曰 守國奈何 太公曰 齋將君語 天地之經 四時所生 仁聖之道 民機之情 王卽齋七日 北面再拜而問之 太公曰 天生四時 地生萬物 天下有民 仁聖牧之 故春道生 萬物榮 夏道長 萬物成 秋道斂 萬物盈 冬道藏 萬物靜 盈則藏 藏則復起 莫知所終 莫知所始 聖人配之以爲天地經紀 故天下治 仁聖藏 天下亂 仁聖昌 至道其然也 聖人之在天地問也 其寶固大矣 因其常而視之則民安 夫民動而爲機 機動而得失爭矣. / 守國 第八 放伐과 禪讓 / PP.66-70중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문왕이 태공에게 물어 "나라를 지키려면(守國)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태공이 "군주께서는 먼저 목욕재계를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군주께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법칙, 사계절에서 일어나는 이치와 인자(仁者)와 성인(聖人)의 도리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실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공의 말을 들은 문왕은 7일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한 다음, 북쪽을 향하여 두 번을 절하고 스승인 태공에 대한 예를 갖추고 다시 묻자 이에 태공이 대답하였다. "하늘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절을 낳고(天生四時), 땅은 만물을 태어나게 했습니다(地生萬物). 하늘 아래에는 많은 백성이 있는데 성인이 이들을 기르고 다스려 왔습니다. 봄의 법칙(이치 또는 천도)은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만물의 씨를 퍼뜨려 기르게 합니다. 여름의 법칙은 자라게 하는 것으로 만물을 성장시킵니다. 가을의 법칙은 익은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만물을 거두어 창고가 가득 차게 합니다. 겨울의 법칙은 감추는 것으로 풀과 나무가 마르고 벌레도 땅 속으로 숨어들어 만물이 고요하고 조용해집니다. 만물은 열매를 맺어 가득차면 대지로 떨어지면, 대지는 그 열매를 땅 속에 감추고 감추었다가 어느새 봄이 오면, 만물은 다시 새 생명이 담긴 싹으로 돋아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그 종말(終末)을 알 수 없게 되어 어디가 처음이며 어디가 끝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성인은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이 하늘과 땅이 순환하는 영원한 법칙(天地經紀/원리와 방법)을 본받아 정치(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성인은 세상 사라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숨어버립니다(감추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해지면 성인이 나타납니다(드러납니다). 세상의 지극한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백성을 보배롭게 여기는 그의 지위는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천하가 무사(無事)할 때에는 그 정당(正當)한 상태에 따라 보살피게 되면 백성들은 모두 안심하고 삽니다. 그러나 백성의 마음이 동요(動搖)하게 되면 천하는 변전(變轉)할 조짐이 생기고 천하가 변전(變轉)할 조짐이 발동하면 천하를 얻고 잃는 일에 매달려 다투게 됩니다. -이하 생략-
註 00; 삼역대경(三易大經) - 삼역대경(三易大經)은 동학(東學)의 경전 중의 하나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년)의 말씀을 제자들이 정리한 책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천도교 교단에서는 일부 동학(東學)의 사상이 담겨진 자료로는 더러 이용하지만, 경전으로써는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삼역대경에서 제시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원리는 격암유록의 원리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 말하는 연구가도 있다.
1923년에 수운대신사의 강령에 의해 삼역대경을 기록한 이민제(李民濟/1880-1943)는, 성도교(性道敎)를 창시하여 대도주가 되고 삼역대경은 경전으로 사용했다. 이민제는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동학에 입신하였다가 시천교로 전향하여 교리연구와 도각(道覺)을 위하여 입산수도(入山修道)하던 끝에, 1923년 3월 15일에 득도하였다.『삼역대경(三易大經)』을 저술하고 자신이 깨달은 교리를 발표함으로써 이를 추종하는 신도들을 모아서 교단을 형성하였다. 본부를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두고, 교명을 성도교라 하며, 자신의 호를 화운(火雲)이라고 하였다. 화운이라는 호를 최제우의 호인 수운과 상대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민제가 자신이 깨달은 교리를 최제우의 교리에 상대되는 것으로 보려 한 의미도 있을 것이다.
성도교에서 수운 최제우를 대도주(大道主)로 보고, 화운 이민제를 태극대도주(太極大道主)로 보는 것도 이런 뜻을 담은 것 같다. 교주 이민제가 포교를 시작하자 일제는 성도교를 사도(邪道)로 간주하여 민심을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교주를 체포, 9개월 간 수감시켰다. 출옥 뒤에 교명을 성도교에서 ‘제세교(濟世敎)’라 개칭하고 다시 포교를 계속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사하였다. 그 뒤 교주의 수제자였던 이응종(李應鍾)이 교맥을 계승하여 성도교로 다시 개칭하고, 충청남도 홍성군 은하면 장곡리 자택에서 포교를 계속하였다. 한편 이민제가 지었다는 『삼역대경(三易大經)』의 내용에 감복한 조일제(趙一濟)라는 인물이 제세교의 명의를 이어 계룡산 밑에서 포교하다가 1948년부터는 교명을 ‘선교(仙敎)’로 개칭하고 계룡면 하대리에 교당을 짓고 포교를 하기도 하였다 하나 현재로서는 찾아볼 길이 없다.
성도교의 신앙대상은 삼천상제(三天上帝)로서의 한울님인 천주를 믿으며 이를 삼황천주(三皇天主)라고 한다. 아울러 최제우(崔濟愚)를 도주(道主)로, 화운(火雲)을 태극대도주(太極大道主)로 받든다. 교리는 최수운의 동학 교리에다가 이민제의 삼역교리(三易敎理)를 혼합한 것이다. 이 교의 목적은 심학(心學)을 근본으로 하여 도명덕화(道明德花)하고 죄악이 없는 이상세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이 교의 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보국안민(保國安民)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들이 수련할 때 외우는 주문은 동학의 삼칠 주(三七呪)를 송주(頌呪)하며, 사계절에 치성(致誠)을 드리는 제사를 올린다. 교세는 교조 이민제 생존 때에 약 1만 명에 이르렀으나 교조 사망 뒤 쇠퇴하여 1970년대에는 백 명 남짓으로 소멸 직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교단의 존재마저 확인되지 않는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땡 땡 땡의 삼역대경 해설에서 종합 정리.
註 00; 육도삼략(六韜三略); - 일반적으로는 중국의 고대 兵書 중의 하나로 六韜는 주나라의 太公望 呂尙의 지었다고 알려져 오는 동양 최고의 병서로 알져 있다. 三略은 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張良이 神人 黃石公에게서 전수 받았다는 기이한 전설이 담긴 상, 중, 하 3편으로 된 병서이다. 이 두 병서의 의도는 好戰的인 목적이나 전략 전술을 강의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병법이 인류의 오랜 경험과 지혜의 결정이며 위대한 처세술로서, 인생의 승리를 보장하는 진리로서의 기치를 발견하고 재확인하려는 데 있다. 六韜는 1. 文韜. 2. 武韜. 3. 龍韜. 4. 虎韜. 5. 豹韜. 6. 犬韜이고, 三略은 上略 英雄에의 길. 中略 皇帝에의길. 下略 賢人에의길 로 되어 있다. / 머리말과 목차에서 요약정리.
또 다른 육도삼략(六韜三略)은 삼역대경에서 제시한 것으로 병서가 아닌 예언서에 가깝다. / 三易大經이 所以出世也 ㅣ 니 以河洛之數로 推算則天地之道 ㅣ 終于癸亥之宮故로 天皇氏之三八木運이 更生於大海之中하야 海今之乾道 ㅣ 乃以三天之大甲子로 起頭則先后中三極之乾坤이 立其德하야 圖書符 ㅣ 各定其天而六韜三略이 發明于世也 ㅣ 니 正是三才成功之秋也 ㅣ 라. / 땡 땡 땡 제 65 편 P.1078.에서
삼역대경에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이란 다음과 같다.
육도[六韜]란 선천[先天], 후천[后天], 중천[中天-正易] 시대를 이끌어갈 대표적인 여섯 명의 인물이 출현하는 이치를 표현한 것이다.
一韜[일도]란 甲子[갑자]요, 先天之先天龍馬河圖[선천지선천용마하도]이다. 삼십육궁[三十六宮]의 주인공이 복희[伏羲]임을 나타낸 것이다.→甲子年 1,984년.
二韜[이도]란 甲戌[갑술]이요, 先天之后天靈龜洛書[선천지후천령귀낙서]이다. 사십오궁[四十五宮]의 주인공이 문왕[文王]임을 나타낸 것이다.→甲戌年 1,994년
三韜[삼도]란 甲申[갑신]이요 后天之先天神仙河圖[후천지선천신선하도]이다. 오십사궁[五十四宮]의 주인공이 수운[水雲]임을 나타낸 것이다.→甲申年 2,004년
四韜[사도]란 甲午[갑오]요, 后天之后天神仙洛書[후천지후천신선낙서]이다. 육십삼궁[六十三宮]의 주인공이 화운[火雲]임을 나타낸 것이다.→甲午年 2,014년
五韜[오도]란 甲辰[갑진]이요, 中天之男子仙神靈河符[중천지남자선신령하부]이다. 칠십이궁[七十二宮]의 주인공이 목운[木運]임을 나타낸 것이다.→甲辰年 2,024년
六韜[육도]란 甲寅[갑인]이요, 中天之女子仙神靈洛符[중천지여자선신령낙부]이다. 팔십일궁[八十一宮]의 주인공이 금운[金運]임을 나타낸 것이다.→甲寅年 2,034년
삼략[三略]이란 선천[先天], 후천[後天], 중천[中天]을 의미한다. 우주가 완성되어 나가는 변환 과정의 이치를 세 단계로 분류한 것이다.
一略[일략]이란 先天河圖龍龜之圖[선천하도용귀지도]를 말한다. 일도[一韜]와 二韜[이도]를 포함한다.
二略[이략]이란 后天河洛陰符圖章[후천하낙음부도장]을 말한다. 三韜[삼도]와 四韜[사도]를 포함한다.
三略[삼략]이란 中天河洛陽符圖章[중천하낙양부도장]을 말한다. 五韜[오도]와 六韜[육도]를 말한다. / 格菴遺錄에서 은비가(隱秘歌)와 삼역대경에서 종합 정리.
그러므로 천지부모가 인간과 만물을 낳아 기르는 근본원리는 생장염장이다. '낳고, 기르고, 거두고, 감싸 안는다(貯藏).' 인간을 비롯하여 만물 즉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두가 시종(始終)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란 점에서는 다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산천초목(山川草木)이든 생장소멸(生長消滅)이 시간의 차이 즉 생존기간의 차이는 다르지만 같은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생은 변화의 맨 처음 단계로서 만유 생명이 처음 태어나는 봄입니다. 천지가 인간과 만물을 낳는 것! 이것이 우주 변화의 첫 번째 단계이다. 생 다음의 변화가 장이다. 생겨난 것이 성장하는 여름을 지나 결실을 맺으면 세 번째 단계인 가을에서 모두 거두어들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추수한 결실들을 저장하는 것으로 하나의 과정이 마무리 되고 새 봄이 오면 '생장염장'이 순환하여 반복하는 것이 천리천도이고 무위이화(無爲而化)인 것이다. 무위이화란 노자의 도덕경 일장에서 말한 창조주가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은, 인간이 인간의 의도로 꾸며서 만들어 내지 않은 것 즉 인위적(人爲的)이거나 작위적(作爲的)인 아닌 매우 자연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조화(造化)이며, 천리천도에 따른 변전(變轉)을 의미한다.
註 00;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 1장의 전문의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儌.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老子 莊子 P.27.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히 불변하는 도가 아니다. 어 떤 사물이든 이름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름은 영원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을 때부터 하늘과 땅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엄마가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항상 욕심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도의 현묘함을 살펴 볼 수 있다. 만약 늘 욕심이 있다면, 그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볼 것이다. 이 둘은(욕심이 있고 없음으로 보는 현상들) 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현묘함에서 나타나며. 현묘하고 심원한데서 모든 현묘함의 이치와 변화가 생기는 근원이 된다.
최민자는 「동학사상과 신문명」의 ‘수운의 후천개벽과 에코토피아(Ecotopia)'에서 생장염장(生長斂藏)과 후천개벽의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註 00; 에코토피아(Ecotopia) - 여기에서 에코토피아는 주거지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유래한 ecology 와 없음 을 뜻하는 그리스어 topos 가 합쳐진 데서 유래한 utopia 의 합성어로 생태적 이상향을 의미한다. / P.81
최민자는 수운의 후천개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운의 후천개벽의 요체는 무엇인가 수운의 『용담유사(龍潭遺詞)』 「용담가」에 나오는 ‘개벽후 오만년’은, 선천(先天) 오만년’을, ‘오만년지 운수’는 ‘후천(後天) 오만년’을 일컫는 것으로 「검결(劍訣)」에서는 후천(後天) 오만년 대운(大運)을 ‘오만년지 시호(時乎)라고 하고 있다. 선천개벽(先天開闢)이 하늘과 땅이 열리는 무위(無爲)의 천지창조라면, 후천개벽은 「시천주(侍天主)」를 통해 사람과 하늘이,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어 새로운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다시개벽’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 ‘명(名)’과 ‘무명(無名)’의 피안에서 본체와 현상을 모두 포괄하는 그 ‘하나’를 모심(侍天主)으로써 이성과 신성, 내재와 초월, 자유의지와 필연의 이분법적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의 진리가 드러나게 되면 인위(人爲)의 사회개벽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천지개벽의 구분 또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왜야하면 불연(不然)의 본체계(本體界)와 기연(其然)의 현상계(現象界)를 상호관통(相互貫通)하게 되면 불연과 기연이 본래 하나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궁한 한울의 조화를 깨닫게 되면 조물자인 한울과 그 그림자인 인간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조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수운의 후천개벽이 본질적으로 에코토피아적 지향성을 띠는 것은 생태학과 영성 간의 심오한 연계에 기인하는 것이다. 생태적 자각이란 혼원일기(混元一氣)로 이루어진 생명의 유기성과 상호 관통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이는 인내천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시(侍)」가 함축하고 있는 세 가지 의미. 즉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각지불이(各知不移) 속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신성(神性/靈性)과 생명의 유기성(有機性)을 깨달아 순천(順天)의 삶을 지향한다는 것은 우주적 본성의 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혼원일기(混元一氣)로 이루어진 우주 ‘한생명’에 대한 자각적 실천의 나타남이며, 이는 곧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본래의 진여(眞如)한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요체라는 점에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태적이며 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개벽이란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린다는 ‘천지개벽(天地開闢)’에서 유래한 말로서 쉬임없이 열려 변화하는 우주의 본성을 일컫는 것이다. 우주 1년의 이수(理數)를 처음으로 밝혀낸 소강절(邵康節)에 의하면 우주 1년인 12만 9천 6백 년 가운데 인류문명의 생존 기간은 건운(乾運)의 선천(先天) 5만 년과 곤운(坤運)의 후천(後天) 5만 년을 합한 10만 년이며, 나머지 2만 9천 6백 년은 빙하기로 천지의 재충전을 위한 휴식기이다. 우주력(宇宙曆) 전반 6개월(春夏)을 생장(生長) 분열(分裂)의 선천시대라고 한다면, 후반 6개월(秋冬)은 수렴(收斂) 통일(統一)의 후천시대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융화에 기초한 정음정양(正陰正陽)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천 건도 시대는 천지비괘(天地否卦) 음양상극(陰陽相剋)의 시대인 관계로 민의(民意)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며 여성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시대로 일관해 왔으나 후천 곤도시대는 지천태괘(地天泰卦)인 음양지합의 시대인 관계로 대립물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종교적 진리가 정치사회 속에 구현되는 성속일여(聖俗一如)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운은 선천의 분열 도수(度數)가 다하여 후천의 통일 도수가 밀려옴을 감지하고 후천개벽에 의한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세계를 펼쳐 보였던 것이다.
수운의 후천개벽은 유위와 무위가, 사람과 하늘이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다시 개벽’이다. -중략- 말하자면 우주의 봄, 여름인 선천(先天) 오만 년이 끝나고 우주의 가을이 되면 우주 섭리에 따라 후천개벽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수운의 후천개벽 또한 이러한 천지개벽의 도수에서 벗어난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생(生) 장(長) 염(斂) 장(藏) 4계절의 순환 원리로 원(元) 회(會) 운(運) 세(世)의 이치를 밝혀 12만 9천 6백 년이라는 우주 1년의 이수(理數)를 통해 소강절이 밝힌 천지 운행의 원리는 수운의 후천개벽을 연구함에 있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소강절의 표현대로 천문(天文) 그 자체가 역(易)이고 천지 운행의 원리가 상수(象數)에 기초하고 있으니 이를 알지 못하고서는 후천개벽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강절은 춘하추동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통해 원회운세(元會運世)를 밝힘과 동시에 삼라만상의 일체의 변화를 꿰뚫고 있다. 천지의 시종(始終)은 1원(元)의 기(氣)이며 1원은 12만 9천 6백 년이요 1원에는 12회가 있으니 1회인 1만 8백 년마다 소개벽이 일어나고 우주의 봄과 가을에 우주가 생장 분열하고 수렴되는 선 후천의 대개벽이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후천개벽은 우주가 생(生) 장(長) 염(斂) 장(藏) 4계절로 순환하는 과정에서 후천 가을의 시간대로 접어들면서 일어나는 대 격변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가을인 미회(未會)에서는 음양동정(陰陽動靜)의 원리에 의해 양의 극에서 음으로 되돌아오면서 지축 정립과 같은 대변혁 과정을 거쳐 천지가 정원형이 되어 음양지합(陰陽之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수운은 새로운 성운의 시대를 맞이하여 만인이 한울의 마음을 회복하여 소아(小我)의 유위(有爲)가 아닌 대아(大我)의 무위(無爲), 즉 천리를 따르게 되면 동귀일체(同歸一體)기 이루어져 후천개벽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우주의 자정작용(自淨作用)의 일환인 천지개벽의 도수(度數)에 조응하여 인위의 정신개벽과 사회개벽이 이루어지게 되면 천지가 합덕(合德)하는 후천의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수운의 후천개벽의 논리가 변혁에 중점을 두고 인간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시운관(時運觀) 역시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사가 조응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후천개벽은단순히 정신개벽과 사회개벽을 통한 지구적 질서의 재편성이 아니라 천지운행의 원리에 따른 우주적 차원의 질서 개편으로 이를 통해 곤운(坤運)의 후천 5만 년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동학사상과 신문명」의 PP. 81-92 하였다.
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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