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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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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13-08-2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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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7)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왜곡(歪曲)되고 있는 부분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사라져 버리고 권리(權利)와 평등(平等)과 인권(人權)만이 존재하게 된 현상이다. 인권이 최상위(最上位) 개념(槪念)으로 존재하게 됨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들이 권리와 평등(平等)과 인권 속에 매몰(埋沒)되어 다른 가치의 존재(存在)와 존립(存立)이 있을 수 없게 된 비극적인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권리(權利)와 평등(平等)과 인권(人權)은 조직의 상하관계(上下關係)인 위계질서(位階秩序)를 완전히 무너뜨려 원활(圓滑)한 소통(疏通)이 되지 않고 있으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상사와 부하의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구성된 상하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평등하거나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 상위에 있게 되어, 가르치는 자를 능멸(凌蔑)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는 처참한 실상(實相)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패륜아(悖倫兒)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고, 군위신강(君爲臣綱)과 부자유친(父子有親)과 장유유서(長幼有序)는 간 곳이 없게 되었다.
기성세대가 고난(苦難)의 역경(逆境)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살만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세계 10위의 자리에 접어든 이 나라에서, 오늘에 들어나고 있는 부조리(不條理)의 책임을 기성세대의 과오(過誤)로 평가받아 사라져야할 저주(詛呪)의 대상이 되었고, 물색(物色)없이 인간의 도리(道理)를 말하여 귀찮은 대상으로 배척되고 있고, 신세대인 젊은 세대들에게는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역사에 대하여, 부모에 대한 공경(恭敬)에 대하여 자신들의 인식(認識)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認定)하거나 고백(告白)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모든 책임을 져 주어야 자신들의 주장이 올바른 주장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고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고백하고 인정하게 되면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듣기 싫거나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에 거슬리는 것은 들을 필요가 없어 들으려고 하지 않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합리화(合理化)하기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쓴다. 가관(可觀)인 것은,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확률을 가진 경외수(境外數)도 필요하면 그런 논리로 억지를 부린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대화를 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소통을 말한다(疏通不在/non-communication).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에 들어난 모든 불합리(不合理)하고 불리(不利)한 여건들의 현상에 대한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덮어씌우려 하고 단죄하려 한다. 자신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이 비난하고 단죄하려는 사회의 여러 분야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성장한 지가 10년에서 20년에 이르고 있으면서 그 긴긴 시간에 무엇을 하였길래, 자신들의 잘못은 없고, 모든 것을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지워 단죄(斷罪)하려 하는가? 한 시대의 역사적(歷史的)인 공과(功過)와 책임(責任)과 영광(榮光)은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과 그 시대의 모든 영역에서 각각의 역할(役割)을 담당했던 참여자들의 몫인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기성세대에겐 과오와 책임이 있고 신세대에겐 공적(功績)과 영광(榮光)이 있다는 주장과 논리는 너무나 편중(偏重)되고 편협(偏狹)하며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의 정당하지 못한 야비(野卑)한 평가이며 언행(言行)인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고 기성세대를 몰아세워 책임을 지워, 역사의 죄인을 만들려는 그들의 논리와 주장이 무섭다. 차세대(次世代)는 그들의 세상이니까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삶의 족쇄(足鎖)가 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왔다.’ 는 것이 역사의 교훈(敎訓)인 것이다.
지금의 차세대인 신세대도, 3, 40년이 흐른 뒤에는 지금의 버림받고 있는 기성세대처럼, 기성세대가 될 것이며, 그들에게 던져지는 그들의 차세대인 신세대에게 그 나름에 대우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眞理)이며 역사의 순환(循環)인 것이다. 그때에 신세대들은 앞선 세대인 기성세대에게 지금보다 더한 가혹(苛酷)한 저주(詛呪)와 황량(荒凉)한 들판에 유기견(遺棄犬; 버려진 개. 또는 버린 개)처럼 내 버리듯이 버려질 수도 있고, 더 잘 어울러져 더불어 살아 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推測)과 예언(豫言)을 그 누구도 이 시점(時點)에서는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의 세대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고, 그들의 차세대인 신세대들이 자신들의 삶의 욕구를 위해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우러져 살거나 버려지느냐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차세대인 신세대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기견(遺棄犬)이 갖는 의미는 현대판 고려장(高麗葬)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개라는 동물은 자타가 공인하는 반려동물(伴侶動物)이며 가족의 일원의 위치에까지 오른 개다운 개가 아니라 인간다운 개가 됐다. 그러는 사이에 이 사회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개처럼 살 수밖에 없는 사회로 변했으며 그 사회 안에 사는 사람 중에 일부는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 갔다. 반려동물의 의식주는 비용(費用)면에서 웬만한 중산층 수준의 의식주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다. 70억 인구 중에서 기아와 가난으로 일 년에 수억 명의 사람이 죽어가는 데 한국에서의 반려동물들은 죽어가는 인류보다 더 잘 살고 있다. 이것이 상식 있는 사회인가 라고 묻고 싶다. 한국에서의 개는 ‘개 팔자가 상팔자인 것이다.’ 개가 누리는 호사(豪奢)스러운 삶에 드는 비용을 기아와 가난으로 헤매는 인류를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정이고 도리가 아니겠는가? 한 달에 3만원이면 살아갈 수 있다는 인류를 도와주는 것이 인류의 고귀한 양심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면 ‘반려동물이 먹는 식량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상식이며 정의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반려동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런저런 이유로 유기견이 되어버리는 개의 운명을 애석해하거나 반인륜적이라 하지 않고 그런 것이러니 하고 담담하게 받아드리는 중후(重厚)하고 대범(大凡)한 사람들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무슨 현상이라 할 것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필자는 단호하게 이 현상은, 우리민족의 문화 속에 깊이 내재(內在)되어 있는 부끄러운 현대판 고려장이며, 거추장스럽거나 필요하지 않거나 자신의 삶에 방해가 된다면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가차(假借)없이 버려버리는 냉정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평가하고 싶다. ‘우리사회가 정이 넘치는 사회’라는 얼굴 뒤에는 냉정하고 비정한 비인간적인 실제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사회가 무섭다는 것이다. 부모도 개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기견이 된 개의 처지를 되짚어 보면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유기견 들처럼 버려지고 있다는 것은 공지(共知)의 사실이 아닌가?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너무나 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에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해내었으며 동방예의지국이었던 나라와 민족이 짐승으로 추락해가는 앞과 뒤가 다른 또는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의 모습인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내재되어 있는(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런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의 방법은,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차세대인 신세대들의 삶의 방식(方式)과 욕구(慾求)가 충족(充足)되도록 어떤 희생이라도 다하고 빨리 재산을 상속해 준한다면, 버려지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실제로는 상속을 하거나 가진 돈을 다 주면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조손(祖孫)이나 부모와 자식이 한 집안에서 어우러져 산다는 것은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세대(新世代)들의 일부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個性)을 추구(追究)한다 하면서 유행(流行)을 쫒는 것은 개개인의 개성(個性)이 아닌 몰개성적(沒個性的)이며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것이다. 그들은 자가당착(自家撞着), 이율배반(二律背反), 모순(矛盾) 등을 아무런 갈등(葛藤)없이 수용(受容)하는 복잡한 감성(感性)을 가진 세대로, 그들의 삶을 자기 나름의 삶을 살려고 배타적(排他的)이 되거나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집단사회(集團社會)가 추구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또는 어우러져 같이 살아가는 사회로, 집단 구성원들의 공공(公共)의 공동목표(共同目標)를 실현(實現)하기 위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해야 하는 사회인데, 배타적(排他的)이고 극단적(極端的)인 개인주의의 추구(追求)는 매우 비논리적(非論理的)이고 비정상적(非正常的)이며 반사회적(反社會的)인 이탈행위(離脫行爲)인 것이다.
잘못되어가는 사회는, 자가당착, 이율배반, 모순, 양두구육(羊頭狗肉), 견강부회(牽强附會), 견백동이(堅白同異), 아전인수(我田引水), 부화뇌동(附和雷同), 조삼모사(朝三暮四), 곡학아세(曲學阿世),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승자박(自繩自縛) 등등의 비논리적이고 이중적(二重的)인 사고가 사회의 중심(中心) 또는 핵심적(核心的)인 가치로, 만사(萬事)에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는 미래가 없다. 이런 편중(偏重)된 사고(思考)와 가치(價値)와 인식(認識)이 사회전반에 횡행(橫行)하고 수용(受容)될 때, 그 사회는 서서히 해체(解體)되어 갈 것이며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삶이 고달파지고, 황폐(荒廢)해 질 것이다. 과거 ‘잃어버린 10년’이란 정치현실이 그랬고, 지금 그들이 선거에서 선택했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대통령 선거에 불참하여 외면했던 정부를 무책임하게 부정하고 있는 정부의 5년도 ‘국민들의 삶이 더 고달파지고, 황폐(荒廢)해졌다.’고 일부에서는 극단적인 평가도 서슴지 않고 있다. 흔히 2040이라 불리는 계층의 세대들 중에서 일부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 판단과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부정하고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그 정권을 누가 탄생시켰으며 현 정부의 대통령 선거에 왜 불참했는지, 그리고 그 때에 정치적 현실에 불참했으면 그런 상태와 사고로 무관심하게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정치를 외면(外面)하는 것이 순리(順理)이고 일관(一貫)된 신념일터인 데, 무슨 자격으로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선출하지도 않음으로써 신성한 국민의 참정권(參政權)의 권리를 저버렸던 그들이 만들지도 않은 정권을 정권교체를 하겠다고 외치는지, 정상인으로서 일부의 세대들의 언행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때 신성한 국민의 참정권의 권리를 버렸으면, 애당초 원하지 않았던 정부였으므로 버린 채로 그대로 두면 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며, 선출하지도 않은, 국민으로서의 참정권의 권리를 포기한 자가 어떤 정부를 상대로 해서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는 지, 그들의 사고와 논리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 언행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익이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고, 손해는 절대로 참을 수 없어 그 피해의 책임은 전적(全的)으로 타인에게 있지 나에게는 없다고 하는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변(抗辯)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俗性)인 것이다.
일부의 청장년(중년)세대와 신세대의 탐욕적이고 부도덕성은, 두견이와 뻐꾸기(부엉이의 본능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가 자기의 알을 자신의 노력으로 부화하여 키우지 않고 약자인 작은 휘파람새의 둥지에 몰래 낳아 남의 손에 자신의 후손을 위탁해서 키우는 것과 같다. 일부의 청장년(중년)세대와 신세대들은 부모세대인 기성세대가 겪고 살아온 역사적인 상황을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으로 이해 평가하지 않고, 지금의 가치와 시각으로 평가하고 배척하며 마치 역사적인 죄인인 것처럼 범죄자로 몰아붙이고 있으면서 대화마저 거절하고 부모세대와 부모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부모세대인 기성세대가 겪어야 했던 기험(崎險/기구)한 삶의 도정(道程)과 시대적 역경(逆境)과 험난(險難)을 겪으면서 이루어 놓은 재산을, 단지 법이 정하는 바의 상속자인 후손이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속을 당연시하거나 태연하고 당당하게 받으려고 하고 받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파렴치(破廉恥)한 행위인 것이다. 부모세대인 기성세대가 바람직한 역사를 만들지 못한 죄인이라면, 그런 죄인들이 모은 모든 재산은 부당한 축재(蓄財)이므로 범죄자의 재산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부의 청장년(중년)세대와 신세대들이 주장하는 가치와 평가가 맞으려면, 당당하게 그런 부정한 재산을 상속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宣言)하고 사회로 환원(還元)시켜 그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가난하게 살아온 축재자들의 희생자인 그들에게, 그들이 무능하고 게을렀다고 하지 말고 정말 참되고 정직하고 지혜롭게 살아오셨다고 칭찬과 위로를 하면서 그들이 배불리 먹고 넉넉하게 살도록 분배해야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합당(合當)한 것이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두견이와 뻐꾸기의 탐욕적이고 부도덕한 야바위 짓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또는 어우러져 같이 살아가는 사회의 집단 구성원들의 바람직한 삶의 기준이 되는 도덕성과 그들이 수용하여 실천해야 할 사회규범의 기초는, 사회의 구성요소로서 존재하는 상하좌우와의 인간적인 관계(Human relations(connection)과 네트워크;network)에서 출발한다. 상하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등관계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면 평등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전제적인 요건이 될 수 없다. 상하관계(上下關係)가 존재해야 된다는 전제는, 상하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회구성원 중의 누구나 상하관계의 틀 속에 매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상하관계에서 상(上)이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풍요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질 수 있는 처지라면, 상의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과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인 것이다. 상을 얻기 위한 노력과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평등이란 조건은 무의미한 것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평등의 추구란 약자가 강자의 독식(獨食)을 막으려는 하나의 방편(方便)이고, 약자를 구제(救濟)하기 위한 법에 의한 사회에서 분출(噴出)하는 불평(不平)과 분란(紛亂)에 대한 안전망(安全網)을 구축(構築)하려는 강제적인 분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의 위치에 있는 강자에게는 평등이란 불편한 사회의 법이요 규범이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대부분인 70세를 전후로 한 노인들은, 1940년대 전후(前後)에 출생한 사람들로 60-80년대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주역들이었지만, 국가와 사회는 그들에게 보답을 하고 있지 못하다. 보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니 보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청장년 세대들의 일부가 기성세대들의 국가관과 인생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공동체에서 유기(遺棄)시켜버리려고 하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은 절대로 바람직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유, 소년기에 일제의 침략이란 참담한 현실에서 살았고, 광복으로 인한 자주독립 국가건설에 대한 국민의 기쁨을 알았고, 6.25동란을 통하여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인간의 처참함을 몸소 체험했고, 5.16군사혁명과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주체이면서 현대사의 산 증인으로서, 세계인류 중에서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역사적 현실에 깊이 관여하고 살아 온 매우 다양하고 중요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독특한 세대인 것이다. 만약 신세대들이 기성세대가 경험하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이룩한 산지식을 배우지 않고 외면하고 비난하고 저버린다면, 그들은 기성세대들이 겪었던 그런 시련의 역사를 자초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상당수의 국내외의 학자들은, 한국이 근, 현대사에서 세계의 어떤 민족보다 남다른 시련과 경험을 통한 문제 해결로 세계의 10대 국가 안에 진입한 경험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앞으로 한국이 세계 인류의 갈등과 인류문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미래를 창조할 줄 아는 훌륭한 민족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만, 멸망하는 민족은 민족의 굴곡(屈曲)많은 민족의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비난(非難)하고 단죄(斷罪)하려 하며, 지워버리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교훈을 올바로 수용하고, 전 세계 인류에게 사죄(謝罪)하는 독일 국민의 정의로움과 올바른 역사 인식에 비하여, 역사적 전쟁범죄(戰爭犯罪)를 정당화하려 하고, 책임을 전가(轉嫁)하고, 피해를 당한 이웃 국가를 무시하는 일본은, 언제인가는 전 세계 인류로부터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며 그것이 역사(歷史)의 진리(眞理)이며 징벌(懲罰)인 것이다.
기성세대들 중의 상당수는 부모로부터, 조상으로부터, 가문을 통하여, 교육을 통하여, 또는 사회적 학습을 통하여 등등으로 성장(成長)의 다양한 과정 속에서 사람이 사랍답게 살게 하려는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인간성의 도야(陶冶)와 함양(涵養)을 함으로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을 지나면서 이념적인 갈등과 삶의 고달픔과 갈등 속에서 조금 씩 조금 씩 사람다움이 사라져 드디어 우리사회도 인간성(人間性)의 상실(喪失)이라는 비운(悲運)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기성세대와 우리들의 조상이 배웠던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려는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인간성의 도야(陶冶)와 함양(涵養)을 시키려는 교육과 교육의 내용이 부정당하기 시작하면서 유소년 시절부터 학습을 했던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 평가도 해보지도 못한 채 과거로 묻혀버렸다. 지금에 와서 그 시절에 교육내용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가 되었고, 그런 교육과 가치의 필요성을 말하면, 시대정신을 모르는 고루(固陋)하고 시대의 낙오자로 따돌림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면 그 비판자들은 그 시절의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 강한 부정과 배척을 하는지 알고 싶다. 필자가 미루어 생각하기에는 그 시절에 배웠던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다 살펴보고 이해하여 혹평(酷評)과 배척(排斥)을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반대와 배척의 이유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 시절의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내용을 보고도 반대와 배척을 한다면, 스스로 사람다운 사람되기를 버리고 금수에 가까운 짐승이 되기로 작정한 무지(無知)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소년 시절부터 탄탄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과 사람다운 언행과 정신을 익힘으로서 인성교육(人性敎育)을 통하여 사회규범(社會規範)을 쉽게 수용하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9. 나가는 말.
2010년대의 현 시점에서의 천도교의 현주소는 매우 비극적이다. 북한에 대한 통일논의에 앞서 적전분열(敵前分裂) 상태로 계속해온지 수십 년이 되었고, 교단 내외의 협력을 받을 여건이 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활용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마저도 배척(排斥)하여 패거리 운영을 함으로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단 한 번도 교단의 현실과 장래를 실질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전문인들을 모아, 논의 합의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모임이란 교단에서 교령 등 주요직책을 맡아 온 과거 인사들을(그들의 대 부분은, 지금의 천도교로 퇴락(頹落)시킨 장본인(張本人)들이다.) 모아놓고, 대내외적으로 공개할 만한 합의된 대안도 없이 헤어지는 노변한담(路邊閑談)의 회식(會食)자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천도교가 현실적으로 교단문제의 전반적인 논의(論議)와 합의(合議)가 없고 계획된 모든 사업을 운영하기에는 대내외적 여건도 불리(不利)하고 협력(協力)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적(人的) 물적(物的) 자원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정황(情況)이 아니라는 점을 신앙자들을 슬프게 한다. 지금의 교단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이미 여러 논문에서 지적된 교단의 현실적 문제와 3-40년 전에 교단 사업보고서와 2010년대의 사업보고서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관계 자료를 제시하면서 3-40년이 지나고도 사업보고서에 변화가 없을뿐더러, 사업보고서를 만들어 낸 집행부도 극소수란 점을 신앙자들은 어떻게 이해(理解)해햐 할 것인가에 답이 없다. 더욱이나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의 상황에서 조금의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북한과의 협력이란, 대낮에 꾸는 잠꼬대 같은 망상인 것이 자명(自明)한 일이다.
그러면 북한의 청우당이 처해있는 상황은 어떠한가? 위에서 살펴본 국정원 하나포스의 자료에 의하면, ‘1946년 2월 1일에 소련군정의 인가를 받아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49년 잠적했다가 1974년 2월 출현했다. 노동당의 우당인 천도교 청우당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종교시설은 갖고 있지 않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천도교나 청우당의 명칭을 가진 조직은 없고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駐韓 美 대사관 [자료]2010년도(7~12월) 국제 종교 자유보고서: 北韓 부분에 의하면 ‘전통 종교에 기원을 둔 천도교 청우당이 정부 승인 하에 약 15,000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다.’ 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그 후 북한체제 내에서 명맥만 유지되던 북조선 청우당은 1950년 6.25동란을 이용하여 「남조선 청우당」을 흡수·통합, 「조선 천도교 청우당」으로 개칭됐다. 당시 위원장은 김달현이, 부위원장은 남조선 청우당 당수인 김병제을 비롯해 박윤길, 이용규 등이 맡았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치르는 동안 고위 당직자들은 북한 당국에 적극 협조했으나 일반 당원이나 신도들은 반공대열에 앞장서 궐기함으로써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 와중에서 김달현이 1958년 말 「조국전선 간첩사건」으로 숙청되고, 1959년에는 시·군 이하의 당 조직이, 1960년에는 도당 조직이 해체됨으로써 사실상 조선 천도교 청우당은 완전히 해체됐다.
그러다가 북한은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전술적 필요에 따라 「천도교 청우당」을 다시 내세워 대남선전에 이용했는데 특히 1980년대 이후 보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양상을 띠었다. 예컨대 반한 정치 망명자인 최덕신(崔德新; 전 천도교 중앙 총부 교령)을 포섭, 그를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으로 임명(1989. 3. 16)해 대남선전에 이용한 것을 비롯해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지지,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및 주한미군 철수 주장, 한국의 북방정책 모략, 비방 등 북한 통일방안 지지 및 반한·미 선전에 이 정당을 적극 활용해 온 것 등을 들 수 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과 무슨 협력을 할 수 있으며 천도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망상(妄想)이나 몽상(夢想)을 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신적 경제적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외부(外部) 자료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수집(收集) 정리(整理) 활용(活用)이 안 되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필요한 정보를 자체적(自體的)으로 수집 정리 운영할 인적(人的) 물적(物的)의 전문적(專門的) 자원(資源)이 전무(全無)하고, 역량(力量)마저 부실(不實)한 가운데 남, 북한의 현실적 정황(政況)속에서 천도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역량(力量)이 있었다면, 과거에 천도교가 가졌던 교단의 저력(底力)에 비견(比肩)할만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지만, 지금의 교단처럼 무기력(無氣力)한 신앙집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결과들이 천도교가 교단 내외(內外)에서 처참(悽慘)한 현실에 처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있어, 선결(先決)되어야 할 것은, 천도교의 역할을 찾기 전에, 남, 북한의 정황(政況)에 대한 정확한 자료의 수집(收集) 정리(整理) 활용(活用)과 인식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도교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우리만의 확고한 입장이 필요하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우리의 입장은, 교도는 물론 모든 국민이 충분히 납득(納得)하고 신선(新鮮)한 대안(代案)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들 선배들이 그랬듯이 8.15 해방공간에서 우리가 설자리와 나아갈 바를 밝히기 위해 『天道敎政治理念』이란 정강정책(政綱政策)을 마련했듯이, 이 시점에서는『天道敎政治理念』을 넘어서는 천도교의 정강정책이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1947년에 신탁통치의 찬반과 입법의원 선출에 관련하여 좌우진영(左右陣營)에 휩싸이지 않고, 교의(敎義)를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각 종 성명서를 내어 우리의 입장의 선명성(鮮明性)을 보여주었던 그때의 천도교(또는 청우당)에 비하여 지금의 천도교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초라하기까지 하다. 남, 북한이 처해있는 현실적 정황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집단으로 추락했다. 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지금 누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인가? 우리들 중에서도 듣지 않는 신앙자와 전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한들 응답이 있을 것인가?
이에 앞서 남, 북의 현 정황(政況)에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바를 밝힌 필자의 ‘통일이 최우선의 지상과제가 아니다.’를 전재(全載)하오니 다시 한 번 더 읽어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통일이 최우선의 지상과제가 아니다.(2003, 7, 23.)
88올림픽이후 냉전시대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상황아래 남북통일이 최우선의 지상과제인 것처럼 된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진정 <우리에게 최우선의 지상과제일까>하는 반문을 해 본다. 우리에겐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분법에 의한 집단들간의 극단적인 갈등,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집단의 괴이한 이론제기와 집단행동, 그리고 많은 민생의 문제가 산적해 있어 전후좌우를 돌아 볼 여력이 없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수입의 주체로부터 돈을 타 소비하는 계층이, 사회의 중심이 되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 해결자로 자처하는 정신 나간 계층에 의해 끌려 다니는 세계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한심한 사회이며, 소비의 주체가 된 웃지도 못할 우리 사회가 아닌가. 서른 살 전후 부모 형제의 도움아래 막대한 부모의 재산으로 4, 50대에도 이루지 못할 부를 갖고 시집 장가가 시작부터 어려움을 모르고 삶을 시작하는 계층, 그들은 당연하고 행복할런 지는 몰라도 부모형제는 그늘이 진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우리 보다 못 살고 문화가 뒤떨어진 나라에서도 신랑 신부가 자신의 노력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의 분수에 맞게 결혼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3, 40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고 부모의 집에 기생하고 있으며, 결혼 후에도 한도 끝도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비의 중심에 서 있다면 소도 개도 웃을 일이다.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해도 두려울 게 없겠지만 하루하루를 긴장하면서 실수 없이 살아가도 이 험난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통일은 사치이다. 통일이 된다고 지금의 생활이 나아 질 수 있다는 확신이 설 수 있을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마냥 즐겁고 복에 겨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료해서 통일이나 한번 해볼까. 북한 땅이나 헤집고 다니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자본주의의 장, 단점을 잘 모르고, 빠른 시일 내에 적응할 수도 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게거품을 물고 자랑이나 한번 해보겠다는 뱃심이 아닌 다음에야, 이 고달픈 현실을 외면하고 잠 고대를 하자는 것인가. 2, 30대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걱정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고 금융신용 불량자 300여만 명, 생계보호 대상자가 200여만 명에 이르러 내부문제로 확산되어, 사회의 기틀마저 흔들려 사회와 경제가 혼란해질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삶의 방향이 오리무중인 현실에서 통일이 우리에게 무슨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매우 자명한 것이다.
국가경영을 위해서 시대적 상황과는 거리가 좀 있다손 치더라도 미래를 위한 장기계획으로 논의해 보든가, 정당의 미래지향적 목적을 위하여 통일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 - 가족의 생계와 사회 각 영역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기만 하면 우리 사회가 빨리 안정되고 복지사회가 되어 살 맛 나는 삶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사람들.- 내부의 결속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힘든 현실을 먼저 극복해야 할 매우 중대(重大)한 이 시점이다. 그런데 남북의 통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여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반 통일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더 나아가 단일민족의식이 부족하고 뜨거운 동포애도 없는 매정한 인간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있을 수 없다. 북한이 생지옥이라 북한 땅을 탈출하는 북한 주민이 수만, 수십만 명에 달하는 현실과 구금, 투옥, 처형하는 북한의 인권은 외면한 채 북한을 찬양하는 그들은, 취사선택하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기괴한 잣대를 가지고 남북문제를 농단하고 있다..
이런 중심 없는 시대에 천도교인들은 이런 경향에 덩달아 놀아나지 말고 좀 더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대처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북의 분단으로 전체 교인의 7, 80%가 북한에 있어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었지만, 북한 사회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 종교활동이 위축이 아니라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러 종국엔 천도교 청우당으로 북한 노동당의 우당으로 명맥을 이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수용해야 했다. 이 뼈아픈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는 좀 더 역사가 흘러 가 재평가되는 시대를 기다려야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25 사변 무렵 북한에 우리 교인이 280-320만 명(일부에서는 380-420만 명이 되었다는 데 1990년대 초, 통일원에서 북한자료를 조사한 결과 1만 5천명으로 풍비박산(風飛雹散; 바람에 날려 우박이 흩어진다는 뜻으로,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날아가거나 흩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風地雹散)되었다니 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역사의 현실인가. 이 인원도 남, 북간 사회단체의 대화를 위한 것으로 사실 여부도 확인 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6, 25 사변 후 50 여 년 간의 북한에서의 천도교 종교 활동과 청우당의 정치활동을 우리의 독자적인 정보수집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대외 자료마저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남북문제 논의는 최우선이 될 수 없다. 사회적 시각인 반 통일 세력, 단일 민족애가 없는 인간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도외시하는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해방 후, 북한 정권과 맞서 싸운 3.1 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선배 교인들이 투옥, 사형을 당하면서, 천도교를 지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잊어 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는 3.1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으로 희생된 선배 교인들과 통일은 반드시 해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북한에 침투하여 활동하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천도교인 북파 공작원들의 명예를 찾아 주어야 하고, 잘못된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몰락한 천도교 신앙 활동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일제시대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 선열, 6,25와 월남 파병으로 조국을 위하여 희생된 호국영령들, 우리 천도교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고마움을 때가 되면 한 마디씩 너나없이 하지만 평생을 그들의 죽음과 희생의 대가로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현재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희생이고, 나는 나다. 라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겠는가? 우리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라도 연명하고 있음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우리가 선배 교인들의 희생을 본받고 고귀한 희생이 되게 하기 위해, 선배 교인들의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들 정책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이런 몰락이 없이 남북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대 도약을 할 수 있는 3, 400 만 명의 교인들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 근, 현대 100 년의 역사를 이끌어 찬연히 빛나게 했던 동학군의 자랑스러운 명예를 되찾을 뿐더러 21세기 새 역사창조에 선봉이 될 수 있는 자신감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뿌듯하게 담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역사여!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다.
불행한 우리 민족은 과거 100년 역사가 우리의 희망대로 되지 못하고 세계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묻혀 외세에 번번이 농락당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였으니까.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자주, 자결, 자립으로 현대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있다고 믿는다면, 매우 낭만적이고 근시안적인 역사관을 가진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상당 부분을 세계의 흐름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제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몸부림이야 쳐야겠지만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할 수는 없다는 것이 비참하지만 현재 우리의 역사 현실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자주, 자립, 자결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준비를 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또한 우리 전체 교인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분의 교령님이 자진 월북하여 자의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대남 적화통일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아픔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부적으로 정리된 다음에 통일논의를 해도 늦지 않는다. 통일된 뒤의 우리의 원대한 교단 중흥사업을 준비하지도 않으면서 환상에 젖어 통일을 외친다는 것은, 오라고 하지도 않은 남의 집 잔치에 가, 푼수 없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정성을 모아 힘들여 차린 성대한 잔치 마당에서 많은 구경꾼을 모아 놓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
/ 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7)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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