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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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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28회 작성일 13-03-2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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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12)
註 00; 刀山劍水- 월도산 과검수(越刀山 過劍水/도산을 넘고 검수를 건너)의 의미로 칼(도와 검/날이 한쪽뿐인 도와 양날을 지닌 검을 아울러 이르는 말)들을 심어 놓은 것 같은 산과 강물이라는 뜻으로, 몹시 험악하고 위험한 지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또는 가혹한 형벌. 이 글에서는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이 관(정부)의 추적을 피하여 다니는 험난한 생활을 의미한다.
註 00; 宋景仁- 天道敎百年略史 上卷에서는, 宋景仁은 이미 체포한 李致敬 형제와 함께 京兵 40-50명을 이끌로(고)로, 本校歷史 通卷 53號(PP. 9-1l)에서는 ‘6日 曉에 宋敬仁(侍天敎宗繹史에도 宋敬仁이라고 함. 天道敎創建史부터 宋景仁으로 기술함) 率兵士고 猝人神師家야’ 기술하고 있고 다른 기록들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京兵 40-50명을 이끌로(고)의 京兵 40-50명 인원은 이 기록에만 보인다. 그리고 天道敎百年略史 上卷에는 해월신사가 체포된 날이 ‘4月 4日 밤에는 神師께서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寂然히 홀로 앉아 있었다. 다음날 4月 5日 낮 12시경에 宋景仁은 이미 체포한 李致敬 형제와 함께 京兵 40-50명을 이끌로(고 의 誤字) 海月神師가 계시는 송골 元鎭汝의 집을 급습하고 끝내 신사를 체포하였다. ’라여, 다른 기록인 天道敎創建史에는 海月神師는 布德 39(1898)년 4月 6日 새벽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 되었다. 다른 모든 기록에도 布德 39(1898)년 4月 6日 새벽에 체포된 것으로 되어 있다.
註 00; 京城監獄; 天道敎百年略史 上卷에 의하면 해월신사의 체포과정과 순도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PP. 311-312)
‘4月 4日 밤에는 神師께서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寂然히 홀로 앉아 있었다.
다음날 4月 5日 낮 12시경에 宋景仁은 이미 체포한 李致敬 형제와 함께 京兵 40-50명을 이끌로(고 의 誤字) 海月神師가 계시는 송골 元鎭汝의 집을 급습하고 끝내 신사를 체포하였다. 이 때 林淳灝도 함께 체포되었다. -중략- 이 해 5月 11日에-중략- 審問을 하였으나 神師께서 病勢가 危重하여 많은 答辯을 하지 않고 다만 『나 죽은 10年 후에는 呪文 읽는 소리가 長安에 진동하리라.』고 하였다. 神師의 病이 더욱 위중해지자 정부에서는 더 審問을 계속하지 않고 이달 末日에 左道亂正律로 死刑을 宣告한 후 漢城監獄(鐘路 團成社 附近)에 移監하였다. 神師께서는 이틀 후인 6月 2日(陰曆) 下午2時에 絞刑을 받아 殉道하였으니 享年 72세였다.’ 라고 기술했지만, 天道敎創建史 第二編 海月神師 PP.84-85.에서는 ‘이날밤에 神師밤이맛도록 잠을이루지못하더니 새벽에 宋景仁이京兵을거느리고 神師를逮捕하엿다.’라고 기술되어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天道敎創建史에는 海月神師는 布德 39(1898)년 4月 6日 새벽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 되었다. 이런 기록은 天道敎書 第二編 海月神師 P.78 에도 ‘4月 6日 曉에’로 기록되어 있고, 天道敎史 附 叢書(PP. 80-82)에는 체포과정과 심문 그리고 絞刑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만 天道敎百年略史 上卷의 漢城監獄을 제외하고는 모든 기록이 京城監獄으로 기술되어 있다. 東學史(PP. 192-193)에서는 체포과정과 심문은 매우 간략하게 기술했고 漢城,京城이란 구분 없이 다만 감옥이라 하였으며 그리고 絞刑을 死刑에處하고말았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本校歷史 通卷 53號(PP. 9-1l)에서는 ‘6日 曉에 宋敬仁(侍天敎宗繹史에도 宋敬仁이라고 함. 天道敎創建史부터 宋景仁으로 기술함) 率兵士고 猝人神師家야 -중략-6月 2日에 神師 l 授命于絞刑이라.’ 라고 기술하고 있다. 侍天敎宗繹史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天道敎創建史 第二編 海月神師 P. 85.에서 ‘이에 李鐘勳 金俊植兩人이 乘夜冒雨하고 光熙門밖에서 屍體를 收하야’ -하략- 하고 있듯이 侍天敎宗繹史에는 ‘始乃棄遺體于光熙門外李鐘玉等乘夜冒雨僅得咸襚權厝廣州地(필자의 풀이/’아침에 광희문 밖에 버린 해월신사의 시신을, 이종옥 등이 밤을 이용하여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간신히 수의를 입혀 수습하여 경기도 광주 땅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侍天敎宗繹史에는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李鐘勳 金俊植兩人’이 아니고 ‘李鐘玉等’으로 되어 있다.
註 00; 京城- 경도(京都)·경조(京兆)라고도 한다. 경성의 옛 이름은 한양(漢陽)으로, 한수북(漢水北/한강 이북)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北方이 陽이므로 한양이라 한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고대 국가의 쟁취의 대상지역이 되었다. 한양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충렬왕대에 양주(楊州)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이곳을 한양부로 고침으로써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4년(태조 3)에 왕과 관료들이 국가의 기강 확립과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다음해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수도를 한양에 정하고 한성부를 설치함으로써 조선의 정치·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한성부는 1399년(정종 1) 왕자의 난으로 개경으로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성부로 환도하여 한말까지 계속되었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성립되었을 당시에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세종 때 도성과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의 지역으로 설정되었다. 대개 동계는 송계원(松溪院)과 대현(大峴), 서계는 양화도(楊花渡)와 고양 덕수원(德水院), 남계는 한강, 북계는 북한산이었다. 한말인 1895년(고종 32) 8도제를, 23부 336군으로 개혁하는 조치로 한성부는 한성군(漢城郡)으로 격하되었으며, 인근의 양주·광주 등 11군을 관할했다. 다음해에 13도제로 개편하면서 한성부로 복구되었고, 1910년(융희 4) 조선의 멸망과 함께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예속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해방 후 1945년에 지금의 '서울'로 다시 바뀌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수도가 되었다.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말로,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고유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 즉 '한국의 서울(수도)은 서울(지명)'인 것이다. 서울은 한국의 도시 이름 중 유일하게 순수한 우리말로 이루어진 지명이며, 영문으로는 'Seoul'로 표기한다. 한자 표기의 관례가 없는 가운데 일본 측에서 가끔 경성(京城), 중국 측에서는 한성(漢城)이라고 쓰고 있으나, 그것은 과거의 일시적인 지명일 뿐이다. 중국과의 국교수립 이후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한자 표기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서울'의 음과 훈을 제대로 나타낼 적절한 한자 표기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일제 식민지배의 행정 중심지로서 경성부로 불리게 되었고,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해월신사께서 환원하신 것은 한일합방이전이므로 경성감옥이 아니고 한성감옥(漢城監獄)이라고 기술해야 하며, 이때에 한성감옥은 종로 3가 사거리에서 돈화문 방향으로 오른 편에 있었던 영화관이었던 단성사(團成社)에서 돈화문 쪽으로 바로 옆에 있는 소방서 자리가 한성감옥이었다.
한성감옥(漢城監獄)은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서울에 있던 감옥으로, 한일합방 이후에 한성감옥(漢城監獄)은, 경성감옥(京城監獄)이 되어 일제 강점기에 운영되었다. 경성감옥은 1908년부터 1912년 사이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감옥인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1912년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으며,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부터 1987년 옥사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그러나 1912년부터 1923년 사이에는 서울 마포구에 있던 감옥인 마포형무소를 경성감옥이라 하였다./ 브리태니커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종합정리함.
註 00; 光熙門-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2동에 있으며, 서소문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으로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것으로,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 1719년(숙종 45)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이란 현판을 걸었다. 그후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복원 시, 홍예석축(虹霓石築)을 해체해 남쪽으로 15m 옮기고, 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 하였다. / 브리태니커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종합정리함.
註 00; 권조(權厝)- 좋은 산소 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임시로 장사를 지냄. 또는 그 장사.
註 00; 逼留- 핍박(逼迫)과 유사한 말로, 핍박은 바싹 죄어서 몹시 괴롭게 굴거나 쫓는 것 또는 형세가 매우 절박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핍류는, 관의 가혹한 핍박으로 인하여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註 00; 孫秉熙- 1861년 4월 8일에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22년 5월 19일에 환원하였다. 천도교의 제 3세 교조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本貫)은 밀양(密陽). 초명(初名)은 응구(應九) 또는 규동(圭東).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가명(假名)을 이상헌(李祥憲)으로 하게 된 이유를 밝힌 내용의 기록은 義菴孫秉熙先生傳記 PP. 161-162
註 00; 旣成社會- 기성세대를 이미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나이가 든 세대(世代) 또는 그 사회의 중심으로서 자리 잡고 있는 세대를 가리키는 말로 비유적으로 낡은 세대, 나이 든 세대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므로 기성사회는 기성세대가 중심이 된 사회로, 생동감이 없는 낡은 사회를를 의미한다.
註 00; 百折不屈- 수없이 많이 꺾여도 굴하지 않고 이겨 나감을 뜻하는 말로, 의지 따위가 흔들리지 않고 굽힘이 없음 또는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굽힘이 없다는 뜻을 가진 불요불굴(不撓不屈)과 같이 쓰인다.
註 00; 終始一貫-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마음과 행동이 변함이 없다는 뜻을 가진 말로, 지금은 시종일관(始終一貫)이 많이 쓰인다. 유의어로 수미일관(首尾一貫), 시종여일(始終如一), 종시여일(終始如一)이 있다.
正文; 八. 殉道精神이니 過去의 모든 先覺者 革命家들이 받은 苦難과 迫害와 犧牲을 崔 水雲, 崔 海月, 孫 義菴 세 분 先生도 꼭 같이 받으셨다. 水雲先生은 異端의 指目으로 當時 政府에 잡히어 「左道亂正」이란 罪名으로 大邱 將台(將臺)에서 斬刑을 當하였고, 海月先生은 秘密結社인 東學黨을 指導하기 凡 三十五 年間에 刀山劍水의 갖은 苦難과 迫害를 받다가 마침내 政府에 잡히어 또한 「左道亂正」의 罪名으로 京城監獄에서 絞刑을 當하였으며, 義菴先生은 그 初年에 海月先生을 좇아서 구들돌이 검을 새 없이, 돗자리가 더울 새 없이 各地로 轉轉하면서 온갖 苦難과 迫害를 받은 것은 莫論하고라도 東學黨을 單獨 指導하게 된 後에도 到底히 國內에서는 藏身할 道理가 없기 때문에 不得已 姓名까지 變하고 外國으로 亡命하여 或은 上海로, 혹은 東京, 大阪 等地로 逼留하면서 別別苦難을 다 겪었으며 마침내는 三一運動의 領首로서 刑期 中에 還元하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세분 先生이 이 道法 이 主義를 實現하기 爲하여 旣成社會의 모든 勢力의 迫害와 싸우면서 百折不屈의 初志를 終始一貫해 나아가다가 畢竟은 生命을 버리고 主義를 살린 그 精神 그 氣魄은 眞實로 天道敎의 革命思想을 雄辯으로 立證한 것.
原文; 九. 後天開闢의 原理이니 元來宇宙生成의 原理가 統一에서 分裂에로 分裂에서 다시統一에로 그 進展하는 過程을 밟는것과 같이 人間社會의 進化變遷도 亦是 이原理에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로써 보면 先天開闢은 統一에서 分裂에로 나아가는 過程을 이름이요, 後天開闢은 分裂에서 統一에로 다시 回復되는 路程을 이름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說明한다면 여기에 한개의 복숭아나무가 最初에는 복숭아씨라고하는 한개의 統一體에서 地下에는 뿌리로 地上에는 줄기로 分裂이 생겨가지고는 거기에서 또다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千枝萬葉의 分裂을 거듭하다가 最終에는 果實에 와서 다시 統一이 되게되나니. 이한個의 原理는 宇宙의 全體進化에도 適用되고 社會發展에도 適用하게 된다.
修 2; 九. 後天開闢
元來 宇宙生成의 原理가 統一에서 分裂에로, 分裂에서 다시 統一에로 進展하는 過程을 밟는 것과 같이 人間社會의 進化變遷도 亦是 이 原理에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로써 보면 先天開闢은 統一에서 分裂에로 나아가는 過程을 이름이요, 後天開闢은 分裂에서 統一에로 다시 回復되는 路程을 이름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說明한다면 여기에 한 개의 복숭아나무가 最初에는 복숭아씨라고 하는 한 개의 統一體에서 地下에는 뿌리로 地上에는 줄기로 分裂이 생겨 가지고는 거기에서 또 다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千枝萬葉의 分裂을 거듭하다가 最終에는 果實에 와서 다시 統一이 되게 되나니 이 한 個의 原理는 宇宙의 全體進化에도 適用되고 社會發展에도 適用하게 된다.
修 1; 九. 後天開闢. 元來 宇宙生成의 원리가 統一에서 分裂에로 분열에서 다시 통일에로 진전하는 과정을 밟는 것과 같이 人間社會의 진화변천도 역시 이 원리에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로써 보면 先天開闢은 통일에서 분열에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름이요, 後天開闢은 분열에서 통일에로 다시 회복되는 노정을 이름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여기에 한 개의 복숭아 나무가 최초에는 복숭아씨라고 하는 한 개의 통일체에서 地下에는 뿌리로 地上에는 줄기로 분열이 생겨가지고는 거기에서 또다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여러 개의 가지와 많은 잎으로 분열을 거듭하다가 최종에는 과실에 와서 다시 통일이 되게 되나니 이 한 개의 원리는 우주의 전체 進化에도 적용되고 사회발전에도 적용하게 된다.
解說; 여덟 번째는 후천개벽이다. 원래 우주의 생성원리가 통일에서 분열에로, 분열에서 다시 통일에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 것과 같이, 인간사회의 진화변천도 역시 이 원리에 벗어나지 못한다. 이로써 보면 선천개벽(先天開闢)은 통일에서 분열에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름이요, 후천개벽(後天開闢)은 분열에서 통일에로 다시 회복되는 길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여기에 한 개의 복숭아나무가 최초에는 복숭아씨라고 하는 한 개의 통일체에서 지하에는 뿌리로, 지상에는 줄기로 분열이 생겨가지고는 거기에서 또다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수많은 가지와 많은 잎으로 분열을 거듭하다가 최종에는 과실에 와서 다시 통일이 되게 되니, 이 한 개의 원리는 우주의 전체 진화에도 적용되고 사회발전에도 적용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註 00; 우주의 생성원리- 국내 연구진 우주 생성원리 새롭게 규명
우주가 1차원의 끈에서 시작됐다는 새로운 가설을 국내 연구진이 제시해 주목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화여자대학교 조용승·홍순태 교수가 끈(string) 이론으로 우주의 생성원리를 새롭게 규명했다고 1일 밝혔다. 대폭발로 우주가 생성됐다는 '빅뱅 이론'에 끈 이론을 적용한 이번 연구는 기존 호킹-펜로즈의 입자(particle)이론보다 진일보한 이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연구진은 세상의 기본 단위가 0차원의 점(입자)이 아닌 1차원의 끈으로 이뤄졌다는 '끈 이론(string theory)'으로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했다. 빅뱅이론을 뒷받침하는 기존 호킹-펜로즈 이론은 우주가 생성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회전값을 '0'으로 가정해 천제와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물질들의 회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또 대폭발 이후 빛과 같이 질량이 없는 입자들이 먼저 출현하고 뒤이어 질량이 있는 입자가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또 다른 수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홍 이론'은 이런 가정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수식이나 순차적인 상태 전환 없이 우주원리를 설명해 냈다. 조 교수는 "끈 이론으로 호킹-펜로즈 이론보다 더 자연스럽게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며 "이 이론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암흑 에너지, 암흑 물질에 대한 추가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결과는 미국물리학회가 발행하는 '피지컬 리뷰' 5월 20일자 온라인 판에 실렸다. /pado@fnnews.com 허현아 기자/파이낸셜 뉴스./기사입력 2011-06-01 19:08 기사수정 2011-06-01 19:08
우주의 생성원리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 중에 있으며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다른 원리 즉 M81은하 외곽 구성성단의 발견, 중성미자의 발견 등등을 제시하고 있는 연구도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이 글에서 ‘원래 우주의 생성원리가 통일에서 분열에로, 분열에서 다시 통일에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 것과 같이’라는 정의는, 천도교의 교의에 따라 철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각종 신문기사 종합정리.
註 00; 先天과 後天- 중국의 유명한 도학자 소옹(邵雍)(시호 邵康節)의 ‘皇極經世書’에서 설명한 것인데, 신기하게도 물리학 법칙과 딱 들어맞는다. 은하 1년이 12만9600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은하계 끝에 붙은 태양계가 은하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은하 1년을 반으로 나누면 봄과 여름이 6만5000년, 가을과 겨울이 6만5000년이다. 봄여름을 선천(先天)이라 하고 가을겨울을 후천(後天)이라 한다. 선, 후천개벽이라기보다는 우주의 사계절이 바뀌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황극경세서’는 중국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의 저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수리(數理)로써 천지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관찰하고 설명한 것이다. 모두 12권이다. 觀物外篇 上之二에 의하면 일(日)은 1 에서 시작하고 월(月)은 2 에서 시작하고 성(星)은 3 에서 시작하고 신(辰)은 4 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확대하면 양수(陽數)는 늘 6 이고 음수(陰數)는 늘 2 인데 대운(大運)과 소운(小運)이 다하게 된다.
360 이 변하여 129,600 이 되고 129,600 이 변하여 167 억 9,616 만 이 된다. 167 억 9,616 만이 변하여 28,211 조 990 만 7,456 억이 된다. 360 은 시(가 되고 129,600 은 일日이 되고 167 억 9,616 만은 월이 되고 28,211 조 990 만 7,456 억은 년이 되는데 그리하여 대운과 소운의 수가 이루어진다. 28,211 조 990 만 7,456 억을 12 로 나누면 앞의 6 은 장(長)이 되고 뒤의 6 은 소(消)가 되는데 이것은 1 년 12 월의 수, 그리고 360 일 진퇴와 같다. 167 억 8,616 만을 10 으로 나누면 1 월 10 일의 수와 같다. 대운의 소장(消長)을 따라 60 일 진퇴가 있다. 129,600 을 12 로 나누면 1 일 12 시의 수, 그리고 6 일 진퇴와 같다.
360 은 1 시와 수와 맞먹고 소운의 올림과 버림을 따르면 주야의 때와 같다. 16 변(變)의 수는 교수(交數)를 버리고 용수(用數)를 취하여 28,211 조 991 만 7,456 억을 얻는다. 이 28,211 조 991 만 7,456 억을 12 한(限)으로 나누면 앞의 6 한은 장이 되고 뒤의 6 한은 소가 된다. 각 한마다 20 억 9,968 만의 167 억 9,616 만을 얻으며, 매 167 억 9,616 만 년을 1 분分씩 벼르면 60 일 올림이 된다. 6 한에 6 분分씩 벼르면 360 일 올림이 되어 오히려 나머지 1 이 있게 되며, 7 분씩 벼르면 366 일 올림이 된다. 그 퇴(退)도 이와 같다. 129,600 에서 3 을 뺀 것이 교수이고 7 을 취한 것이 용수이다. 용수는 3 이고 6 에서 이루어지는데 나머지를 보탬으로써 7 이 된다. 7 은 90,720 년을 얻는데 반은 45,360 년이니 6 일이 올라간다. 일日에는 주야가 있고 수에는 초하루와 그믐이 있어 12 일을 얻는다. 매 3,600 년에 1 일이 올라가고 4,320 년에 12 일이 올라가게 되며 나머지 2,160 년에 나머지 6 이 올라가 교수의 2,190 년과 합하는데 모두 12 분分씩 올라가 윤(閏)이 된다. 그러므로 소운의 변은 무릇 60 하고도 366 일에서 이루어진다.
또 다른 先天과 後天은 우리의 고대사회라고 하는 마고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으나, 파미르고원의 성곽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일정한 규율을 만들어 모두가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이러한 자유자재(自由自在)의 법을 이어 시행한 사람이 바로 마고였던 것이다. 자유자재의 법은 천부(天符)이다. 천부란 하늘의 뜻에 맞다는 말로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물론 홍익제물(弘益濟物)의 뜻도 함께 가지는 홍익인세(弘益人世)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이므로 일정한 계율이나 율법이 있었던 것이다.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천부(天符)에 따른 자재율(自在律)과 수찰법(守察法)이 있었던 것이다. 자재율은 자유자재의 법이며, 수찰법은 이러한 자재율을 지키도록 하는 법이다. 물론 마고 이전에도 천부(天符)는 존재하였다. 즉 마고시대 이전에도 천부가 행해지던 시대가 이미 존재하였던 것이다. 마고시대를 현시대인 중천(中天) 시대라 한다면 그 이전은 선천(先天) 시대가 되는 것이다.
육십갑자(六十甲子)로 칠 때 계해년(癸亥年)에 해당하는 서기전 70378년,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자리잡고 있던 성곽의 도시에 삼베옷(麻衣)을 입은 신선(神仙) 같은 여성이 출현하여, 일단의 무리들을 다스리기 시작하니, 그 여성의 이름은 마고(麻姑)였다. 마고는 파미르고원의 성곽도시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나, 그 선조들은 저 멀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이었다. 즉 서기전 8만년경 이전에 지금의 동부아프리카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북쪽으로 동쪽으로 차츰 이동하여 마침내 살기에 적합한 파미르고원을 찾아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파미르고원에 있던 성곽을 마고가 살면서 다스렸다 하여 마고성(麻姑城)이라 한다. 마고성 안의 기후는 온화하여 사람이 살기에 아무 곤란함이 없었다. 그냥 지상천국, 지상낙원이었다. 이렇게 마고가 파미르고원의 성곽도시를 다스리기가 43,200년 남짓 되었다. 마고가 다스리던 시대를 중천(中天) 시대, 황궁씨가 화백으로 다스리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후천(後天)시대, 마고 이전의 시대를 선천(先天) 시대라고, 부도지(符都誌)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 皇極經世書와 각종 역사서에서 발췌 종합정리.
註 00; 후천개벽(後天開闢)- 후천개벽의 원래 의미는, 우주적 시간을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현재 이전의 시대를 선천의 시대로, 이후의 시대를 후천의 시대로 구분하여 우주 및 인간사에 전면적인 대변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 시간을 각각 약 오만 년으로 계산하고 있다. 선천 오만 년(先天五萬年)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개벽(開闢)이라 하고 그 새로운 세상을 후천 오만 년(後天五萬年)의 후천 개벽(後天開闢)의 시대라 한다. 이때 새 세상이 창조되어 진화한다는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이신 최제우(崔濟愚)의 신념에서 나온 말이다. 동학, 천도교에서는 선천과 후천의 기점(起點)을 대신사의 득도일(得道日)인 1860년 4월 5일로 보고 있다.
특히 개벽이라는 말은 우주가 새로이 열리는 것 즉 온 세상이 새로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거나, 천(天), 지(地), 인(人)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기존의 일체 삼라만상을 갈아 뒤엎고 새로운 세상으로 새 출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천의 시대의 도래(到來)는 결정론(決定論)이나 숙명적(宿命的)인 것이 아니라, 수운의 ‘다시 개벽’의 심법(心法)을 이어 받은 새 시대를 열, 새사람(새인간) 또는 신인간(新人間)이 삼대(三大) 개벽(開闢) 즉 정신개벽, 민족개벽, 사회개벽을 통하여 인류가 사람답게 살아 갈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인간의 힘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바로 인류가 한울님처럼 대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에 수운이 응답(應答)한 것이 후천개벽사상으로, 조선시대 유교적 정통사상에 비하여 반사회적·혁명적인 성격을 띤 최령자(最靈者)인 인간지상(人間至上) 또는 인간 중심적(中心的)이며 주체적(主體的)이고 주도적(主導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성 종교에서는 주로 내세적(來世的) 천국을 말하는 데 비하여, 이 후천개벽사상은 현세적(現世的) 천국인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두고 있다.
正文; 九. 後天開闢의 原理이니 元來 宇宙生成의 原理가 統一에서 分裂에로, 分裂에서 다시 統一에로 進展하는 過程을 밟는 것과 같이 人間社會의 進化變遷도 亦是 이 原理에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로써 보면 先天開闢은 統一에서 分裂에로 나아가는 過程을 이름이요, 後天開闢은 分裂에서 統一에로 다시 回復되는 路程을 이름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說明한다면 여기에 한 개의 복숭아나무가 最初에는 복숭아씨라고 하는 한 개의 統一體에서 地下에는 뿌리로 地上에는 줄기로 分裂이 생겨 가지고는 거기에서 또 다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千枝萬葉의 分裂을 거듭하다가 最終에는 果實에 와서 다시 統一이 되게 되나니 이 한 個의 原理는 宇宙의 全體進化에도 適用되고 社會發展에도 適用하게 된다.
原文; 우리人類社會의 發展過程을 歷史的으로 回顧한다면 原始共産社會는 한個의 統一體였었다. 그統一體가 一轉하여 奴隸制度가 생기게 되므로부터 分裂이始作되었다. 그리하여 本來는平等無差別하던 人間群이 奴隸와 自由民으로 分裂되고, 貴族과 平民으로 分裂되고, 領主와 農奴로 分裂되고, 地主와 小作人으로 分裂되고, 資本家와 勞働者로 分裂되고, 有産階級과 無産階級으로 分裂되어 왔다. 생각건대 現代의 有産無産의 階級的分裂은 分裂의 最後段階인同時에 階級解放運動은 分裂에서 再統一되는 最初의 運動이라 할수있다. 이것은 階級的過程에서만 아니라 宗敎, 政治, 經濟, 文化等 모든 것이 다 같이 過去에는 統一로부터 分裂되어 오다가 只今에는 分裂에서 다시 統一을 向하여 나가는 中間過程에 있다고 할것이다. 天道敎의 開闢運動은 이原理에 則하여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統一向上을 圖하자는것.
修 2; 우리 人類社會의 發展過程을 歷史的으로 回顧한다면 原始共産社會는 한 個의 統一體였었다. 그 統一體가 一轉하여 奴隸制度가 생기게 됨으로부터 分裂이 始作되었다. 그리하여 本來는 平等無差別하던 人間群이 奴隸와 自由民으로 分裂되고, 貴族과 平民으로 分裂되고, 領主와 農奴로 分裂되고, 地主와 小作人으로 分裂되고, 資本家와 勞動者로 分裂되고, 有産階級과 無産階級으로 分裂되어 왔다. 생각컨대 現代의 有産 無産의 階級的 分裂은 分裂의 最後段階인 同時에 階級解放運動은 分裂에서 再統一되는 最初의 運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階級的 過程에서만 아니라 宗敎, 政治, 經濟, 文化 等 모든 것이 다 같이 過去에는 統一로부터 分裂되어 오다가 只今에는 分裂에서 다시 統一을 向하여 나가는 中間過程에 있다고 할 것이다. 天道敎의 開闢運動은 이 原理에 則하여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統一向上을 圖하자는 것.
修 1; 우리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회고한다면 原始(共産)社會는 한 개의 통일체였다. 그 통일체가 발전(一轉)하여 노예제도가 생기게 됨으로부터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본래는 평등 무차별하던 人間群이 노예와 자유민으로, 그리고 귀족과 평민으로, 領主와 農奴, 地主와 소작인, 자본가와 노동자,/ 아래의 문장은 원본의 ‘로 分裂되고, 有産階級과 無産階級으로 分裂되어 왔다. 생각건대 現代의 有産無産의 階級的分裂은 分裂의 最後段階인同時에 階級解放運動은 分裂에서 再統一되는 最初의 運動이라 할수있다. 이것은 階級的過程에서만 아니라 宗敎, 政治, 經濟, 文化等 모든 것이 다 같이 過去에는 統一로부터 分裂되어 오다가 只今에는 分裂에서 다시 統一을 向하여 나가는 中間過程에 있다고 할것이다. 天道敎의 開闢運動은 이原理에 則하여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統一向上을 圖하자는것.’을 생략하고 임의로 서술하고 있어 천도교의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실종시켰다.
임의로 표현한 글; 資本家와 勞働者에 이어 ‘독재와 자유, 그리하여 사상적인 극단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分裂에서 다시 統一을 指向하게 될 것이다. 統一의 方案은 物質 편중으로만도 될 수 없고 精神 편중만으로도 될 수 없다. 오직 人乃天主義的 철학적 바탕으로 실천주의적 天道敎 理論인 事人如天으로 同歸一體 吾心卽汝心의 계급과 분열을 초월한 새로운 理想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라고 임의로 수정하였다.
解說; 우리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되돌아본다면, 원시(공산)사회는 한 개의 통일체였다. 그 통일체가 발전(一轉)하여 노예제도가 생기게 됨으로부터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본래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던 사람들이 노예와 자유민으로, 그리고 귀족과 평민으로,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지주와 소작인,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열되고, 유산계급(有産階級)과 무산계급(無産階級)으로 분열되어 왔다. 생각해보면, 현대의 유산, 무산의 계급적 분열은, 분열의 최후의 단계인 동시에 계급의 해방운동은 분열에서 다시 통일되는 최초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계급적 분열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다 같이 과거에는 통일로부터 분열되어 오다가 지금에는 분열에서 다시 통일을 향하여 나가는 중간과정에 있다고 할 것이다. 천도교의 개벽운동은 이 원리를 근거로 하여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통일향상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註 00; 領主(proprietor of a manor)와 農奴(Villein 또는 serf)- 영주는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영지(領地)나 장원(莊園)을 소유하며 그 영역을 지배하던 사람. 농민과 수공업 장인들에게 부역과 공납을 과하고 재판권과 경찰권을 행사하며, 영지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농노는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에서, 농민이 봉건지주에게 예속되어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부역(賦役)과 생산물 지대(生産物地代)를 내는 의무를 지녔던 봉건적 신분 및 사회 제도인 에 따라 자유를 제한당하고 영주에게 지배를 받던 농민 계층을 말한다. 유럽에 있던 제도이고 한국에는 없는 제도이다. / 위키와 브리태니커 그리고 관련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함.
註 00; 地主(landowner)와 小作人(sharecrop farmer)- 지주란 봉건사회 및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남에게 빌려주고 그로부터 지대(地代)를 받아 생활기반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토지 소유자를 뜻하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 토지대여를 통하여 지대(地代)를 받아드리는 사람 가리킨다. 지주에게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전호(佃戶)라는 소작인이 있었는데, 이러한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서양 봉건사회의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사이에 맺어지는 생산관계에 비견된다. 지주는 봉건사회에서 사적 토지소유를 더욱 확대시켜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주계급을 형성했으며,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을 경제적, 정치적, 신분적으로 예속(隸屬)시켰다. 이에 대해 소작농은 점차 경제적, 신분적 해방을 위해 끊임없는 소작에 대한 쟁의(爭議)를 일으켜왔다. 또한 지주 및 지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그 실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였다.
소작인이란, 지주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지어, 소득의 일부를 지주에게 바치는 농민을 말한다. 소작농이라고도 한다. 소작인은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존재했는데, 이들은 지주들에게 소득의 대부분을 도조명목으로 갈취당하는 가혹한 착취를 당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대 소작농들이 내는 소득의 일부 즉, 도조의 비율을 줄여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을 하였고, 미군정의 토지개혁으로 소작농은 정부에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서 농사짓는 자작농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1948년에 북한과 남한의 토지개혁으로 소작문제가 전체 또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에서 진행한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특징상 혜택을 받은 농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진행된 북한에 비해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계급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하여 한국전쟁당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 않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 위키와 브리태니커 그리고 관련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함.
註 00; 有産階級(bourgeoisie)과 無産階級(proletariat)- 유산계급(부르주아지)는, 상인, 기업가를 비롯해 상공업에 종사하는 도시 사람들로 구성되는 사회적·경제적 계급을 일컫는 경제용어이다.
원래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에서 중세 성곽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세에 예술과 수공업을 주요생계수단으로 삼았던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장원의 영주와 농노의 중간쯤에 해당되었다. 도시공업에 기계가 도입되고 공장체제가 성장함에 따라 중세의 장인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두 계급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계급의식의 성장으로 부르주아지의 개념을 고용주에 한정하는 경향이 생겼으며, 이에 따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별을 강조하는 사회적·경제적 분류체계가 성립되었다.
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에 기초해 사회·정치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한정된 기초 위에 포괄적인 역사·정치 철학을 세우려는 시도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학파 간의 계속되는 논쟁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카를 카우츠키와 레닌으로부터 요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시초프 등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후계자들은 근대의 산업과 정치생활을 점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웠던 사회계급 구분체계의 단순성 역시 근대사회와 정치의 불가해한 복잡성을 차츰 인식하게 되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회적·정치적인 계급구분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생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체계는 상·중·하층의 구분을 강조하고 질서가 잡힌 국가에서 중간계급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주요계급들의 구조가 매우 복잡해져 특별히 부르주아지로 분류할 만한 계급이 없어졌다.
최근에는 부르주아지라는 용어가 주로 교양과 양식을 논하는 데 실질적인 유용성을 지니게 되면서 물질적인 이익, 사회적 체면에 대한 관심, 평범해지려는 성향 등을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부르주아지라는 말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서구사회에서는 강연이나 논문에서 거의 사라졌다.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나 빈농처럼 재산이 없어 자기의 노동력만으로 생활하는 하층 계급 또는 산업노동자 계급으로, 넓은 의미로는 자본을 소유하지 않아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농업노동자도 포함된다. 고대 로마 시대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자유민을 뜻했던 라틴어 'proletari'에서 유래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고난과 투쟁에 의해 단련되어 자본가와는 다른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궁극적으로 모든 경제적 계급을 폐지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한다./ 브리태니커와 관련 자료 종합 정리.
正文; 우리 人類社會의 發展過程을 歷史的으로 回顧한다면 原始共産社會는 한 個의 統一體였었다. 그 統一體가 一轉하여 奴隸制度가 생기게 됨으로부터 分裂이 始作되었다. 그리하여 本來는 平等 無差別하던 人間群이 奴隸와 自由民으로 分裂되고, 貴族과 平民으로 分裂되고, 領主와 農奴로 分裂되고, 地主와 小作人으로 分裂되고, 資本家와 勞動者로 分裂되고, 有産階級과 無産階級으로 分裂되어 왔다. 생각건대 現代의 有産 無産의 階級的 分裂은 分裂의 最後段階인 同時에 階級解放運動은 分裂에서 再統一되는 最初의 運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階級的 過程에서만 아니라 宗敎, 政治, 經濟, 文化 等 모든 것이 다 같이 過去에는 統一로부터 分裂되어 오다가 只今에는 分裂에서 다시 統一을 向하여 나가는 中間過程에 있다고 할 것이다. 天道敎의 開闢運動은 이 原理에 則하여 政治的 經濟的 文化的 統一向上을 圖하자는 것.
原文; 十. 사람性自然史觀이니 이는過去의 唯心史觀이나 唯物史觀을 止揚統一한 天道敎獨特의 歷史觀이다. 위에서말한 『統一에서 分裂로 分裂에서 統一되는』 開闢原理는 社會進化의 階級的法則을 가르침이요 사람性自然史觀은 社會進化의 主動的(的 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法則을 가르침이니 이는 社會進化의 主動力을 사람自然의 時代的進化에서 찾는것이다. 宇宙가 至氣의 表現인것과같이 사람性自然도 至氣의 表現인바 至氣란것은 物도아니요 心도아니며 또物의根이요, 心의源이라 사람性自然은 物과心이 互相連絡되면서 互相背馳되며 互相牽制 되면서 互相繼起되며 互相肯定하면서 互相否定되며 互相均衡을 要求하면서 均衡을 破壞하며 調和를 얻으려고하면서 矛盾되는 反對一致의 結果를 나타내는것이다.
修 2; 十. 사람性 自然史觀.
이는 過去의 唯心史觀이나 唯物史觀을 止揚統一한 天道敎 獨特의 歷史觀이다. 위에서 말한 ‘統一에서 分裂로 分裂에서 統一되는’ 開闢原理는 社會進化의 階級的 法則을 가르침이요 사람性 自然史觀은 社會進化의 主動的 法則을 가르침이니 이는 社會進化의 主動力을 사람 自然의 時代的 進化에서 찾는 것이다. 宇宙가 至氣의 表現인 것과 같이 사람性 自然도 至氣의 表現인바 至氣란 것은 物도 아니요 心도 아니며 또 物의 根이요, 心의 源이라 사람性 自然은 物과 心이 互相連絡되면서 互相背馳되며 互相牽制되면서 互相繼起되며 互相肯定하면서 互相否定되며 互相均衡을 要求하면서 均衡을 破壞하며 調和를 얻으려고 하면서 矛盾되는 反對一致의 結果를 나타내는 것이다.
修 1; 十. 사람性 自然史觀. 이는 過去의 唯心史觀이나 唯物史觀을 (止揚)통일한 天道敎 독특의 歷史觀이다. 위에서 말한 「統一에서 分裂로 分裂에서 統一되는」 開闢원리는 사회 진화의 계단(급)적 법측(칙)을 가르침이요 사람性 自然史觀은 社會進化의 主動적 법칙을 가르침이니 이는 사회진화의 주동력을 사람 自然의 시대적 進化에서 찾는 것이다.
宇宙가 至氣의 표현인 것과 같이 사람性 自然도 至氣의 표현인바 至氣란 것은 物도 아니오 心도 아니나(며) 그것은 物과 心의 根源이니(또 物의 根이요, 心의 源이라) 사람性 自然은 物과 心이 상호 연락되여(면)서 상호 배치되며 상호견제 되어(면)서 相互 繼起되고(며) 상호 부정하면서 긍정되어(互相肯定하면서 互相否定되며) 상호 균형을 원(요구)하면서 균형을 파괴하며 調和를 얻으려고 하면서 矛盾되는 反對一致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解說; 열 번째는 사람성 자연사관이다. 이는 과거의 유심사관이나 유물사관에 대한 시비의 논쟁을 멈추고, 두 사관을 통일한 천도교 교의를 바탕으로 특별하고 뛰어난 역사관이다. 위에서 말한 ‘통일에서 분열로 분열에서 통일되는’ 다시 개벽의 기본원리는, 사회가 진화함에 있어 계급적 법칙을 말하는 것이요, 사람성 자연사관은 사회가 진화함에 있어 주동적 법칙을 가르침이니 이는 사회진화의 주된 동력을 사람성 자연의 시대적 진화에서 찾는 것이다. 우주가 지기의 표현인 것과 같이 사람성 자연도 지기의 표현인바, 지기란 것은 물질도 아니요 정신도 아니지만, 물질의 근원이고, 정신의 근원이 된다. 사람성 자연은 물질과 정신이 상호 연락되면서 상호간에 반대가 되거나 어긋나며, 억누르고 서로 일어나게 하며, 서로 긍정하고 부정하면서 상호간의 균형이 잡히기를 바라면서 균형을 파괴하며 조화를 얻으려고 하여 모순되는 반대일치(反對一致)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돈화의 신인철학과 동학지인생관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주장이다. ‘사람性 自然史觀은 社會進化’는 新人哲學의 PP. 103-118.을, ‘反對一致의 眞理’는 東學之人生觀에서 PP. 19-23.을 참조요망.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1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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