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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불멸의 천도교인6.7,김흥렬.백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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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윤영
댓글 0건 조회 85회 작성일 13-02-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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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94주년을 맞이하여 일제만행의 상징이었던 제암.고주리 사건을 회상하면서, 불멸의 천도교인, '김흥렬.백낙렬' 선생에 대한 언론보도를 올려봅니다. 구국의 영웅인 두 분 선생님의 삶을 조명하고 불멸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 우리들의 소원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는데 본 자료는 천도교인의 교훈으로서 큰 이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송암심고.
제암리 학살로 순국한 고결한 희생, 김흥렬
관리자 11-02-22 19:04 스크랩 0 조회 1274
김흥렬 선생은 남양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수촌리 백낙렬과 힘을 합해 향남․팔탄면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고주리와 제암리 교인들과 함께 상투를 자르고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로서 사랑방을 전교실로 개조하여 고주리․제암리 주위의 교인들을 시일마다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인근의 유학자이자 발안장터 만세운동에서 순국한 이정근과도 자주 만나 교유하였다. 일제강점기 수원지역의 천도교는 교세가 매우 강했는데, 수원교구 산하의 남양교구가 성미 실적 전국 제1위를 할 때에도 김흥렬은 백낙렬과 함께 성미를 당나귀에 싣고 중앙총부에 상납할 정도로 충실한 신자였다.

김흥렬은 김창식과 함께 1914년에 제7회로 105일간 연성수련을 했다. 김흥렬에겐 외동딸 김철화가 있었는데, 이 딸을 천도교 제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의 며느리로 출가시킬 정도로 천도교의 핵심세력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동생 김성열을 시켜 고주리․제암리 주위 부락 젊은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조직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한 인물이었다. 1918년 천도교에서 대교당 건축성금을 모금할 때 김흥렬은 자신의 논 3천평과 밭 3천평을 팔아 중앙총부에 헌납하였고, 인근 부락 교인들에게도 헌납을 권유하여 모금한 후 총부로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김흥렬은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백낙렬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수원지역 3․1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고주리․제암리․가재리 등의 만세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하였고, 발안장터에서도 이정근․안정옥 등과 함께 군중들을 지휘하여 항일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계획적이면서 조직적으로 일어나 일제 식민지배의 말단 행정기구였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공격하여 갖은 악행을 일삼던 일제의 주구 일본순사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일제는 가옥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보복적 행동을 감행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수색한다는 핑계로 살인과 방화, 구타 등을 벌이며 ‘제암리 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은 후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4월 3일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토벌작전은 더욱 더 거칠어졌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시위주동자인 김교철과 백낙렬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야간에 수촌리 마을에 들이닥쳐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수촌리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혔다.

또한 일제는 만세운동이 벌어진 상황이 내란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3․1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진압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지 않아 아리타는 제암리에 대대적인 진압을 시작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과 사사카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의 주동자로 인정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인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불러 모았다. 그런 다음 그들 모두를 교회에 가둬 놓고 불을 질러 3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리타는 제암리 촌락의 대부분을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향남면 제암리는 발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으로 모두 33호의 농가가 있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종교적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포교가 많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감리교가 전파되어 초가집의 교당이 제암리에 있었고, 인근 지역을 합하여 15호의 신자 집이 있었다.

제암리 여러 희생자들과 함께 김흥렬은 고주리에서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가족과 함께 학살되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3․1운동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갔던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일제 보복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1년 애국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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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장안면의 만세운동을 이끈 천도교지도자,백낙렬
관리자 11-02-22 18:59 스크랩 0 조회 1091
백낙렬은 1865년 남양군 장안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다. 1885년 남양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자 동학에 입도하여 포교와 수도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29세의 나이로 이 지역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의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 당시에는 솔선수범하여 상투를 자르고 이 지역의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2월 7일 백낙렬은 천도교 남양교구 금융원으로 일하면서 남양교구 제 446 강습소를 열어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이 지역의 교인들을 위해 수촌리 전교실에 강습소를 열고 교세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8년 중앙대교당 건축 성금을 모금할 때에도 남양교구 순회교사로 교인 가정을 방문하여 많은 금액을 모금하였고, 중앙총부로 올려 보내 3․1운동의 거사자금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했다.

당시 수원군 우정․장안면 3․1운동은 3․1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항쟁지 중 하나이다. 우정․장안면 3․1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가 백낙렬이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 모두가 참여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정치와 경제적 예속관계는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자 했고,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대항하여 우정․장안면의 모든 주민들은 백낙렬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백낙렬과 김흥렬의 주도 아래 천도교 전교사들을 중심으로 사전 조직되고 모의되었다. 천도교 전교실은 우정․장안면의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교도들과 주민들을 동원하기가 매우 좋았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남양교구의 순회교사로 장안면 수촌리 출신인 백낙렬과 김성열, 안종후 등은 서울에 올라가 3월 1일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고향 수촌리로 돌아와 비밀리에 활동을 하면서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벌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백낙렬은 수촌리 구장(오늘날 이장)이면서 이 지역 천도교 책임자였다. 그는 천도교 전교실을 통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하고, 각 전교실의 책임자들을 만나 3․1운동에 대해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에 거주하는 김흥렬, 팔탄면 가재리의 이정근과도 거사를 논의하였고, 백낙렬과 뜻을 같이한 김흥렬은 다시 제암리의 안종환, 안정옥, 안종후 등과 상의하였다. 백낙렬은 독립운동 자금이 모자라면 빚을 얻어서라도 3․1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심하고, 김흥렬은 향남․팔탄면을 책임지고, 백낙렬은 우정․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하고 3․1운동을 실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사전 준비 끝에 우정․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서울보다 한달 늦은 4월 1일 밤 7시에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약 2백여명이 모여 그동안 말단 식민행정을 행사했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쌍봉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군중들은 수촌리 천도교 전교실에서 만든 태극기와 깃발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식민지 백성으로 억울하게 살아왔던 것에 대한 분노와 독립에 대한 의지는 활활 불타올랐다. 쌍봉산에는 약 1여천명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오후 3시경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자신들을 괴롭혔던 서류와 집기류들을 파손하고 불에 태워 버렸다.

의기에 찬 만세 군중들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장안면장을 다시 앞세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의 선두에 세운 뒤,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후 4시경에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이때 놀라 도망치는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군중 1명이 넘어져 숨지자 이에 격분한 군중은 가와바다 순사를 추격하였으며, 가와바다 순사가 도망가며 쏘아댄 총에 3명이 더 쓰러졌다. 도망가던 가와바다 순사는 곧 수십 명의 군중에 포위되었고, 차희식, 장소진, 이봉구 등이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는 1917년 장안면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자 부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혹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위생검사 등을 시행하여 모욕을 주고, 주민들이 모여 있으면 풍속단속을 핑계로 도박죄를 뒤집어 씌워 끌고 가 모진 태형을 받게 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젊은 나이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뺨을 때리며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많이 하였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사전에 계획된 만세운동으로 백낙렬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세력과 수촌리의 기독교 세력, 유교적 토착 세력, 천주교 세력 등이 합심한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2천 5백명의 모든 지역 주민이 동참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를 처단한 대표적인 3․1운동의 항쟁지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54세였던 백낙렬은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와 장안면 구장회장직과 함께 수촌리 구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백낙렬은 우정․장안면에서의 3․1운동을 이끈 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3년간 충청도 계룡산에 피신해 있었다. 그후 10년 동안을 고주리 천덕산 수도암에 은신해 있으면서 교인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신병을 얻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백낙렬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살다가 1936년 11월 20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쓸쓸히 눈을 감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2002년 건국포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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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천도교인6.7,김흥렬.백낙렬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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