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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윤영 작성일 13-01-31 00:42 조회 1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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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뉴스
데스크 칼럼



김지하는 가톨릭도 동학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김지하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다. 그러나 김지하는 지난 1월 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때 가톨릭”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집안은 동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상 동학을 믿기 때문에, 우주변화가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큰 위기에 부딪힌 시대적 상황에서 공산주의로는 안 되고, 여성, 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자신처럼 고통을 많이 받았던 여성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더구나 박근혜 인수위원회 대변인으로 인선된 윤창중을 변호하는 가운데, 문재인을 지지하는 48%의 국민은 공산화 세력을 좇아가니까, 마찬가지로 공산화 세력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이 말은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던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을 김지하가 ‘빨갱이’로 몰아붙인 셈이다. 오호 통재라. 이것은 자기분열이다.
▲ 박근혜 당선인이 작년 12월13일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났다 (사진제공 / 민중의 소리)
아름다운 저항시인, 김지하
김지하가 1970년대 ‘고난 받는’ 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사제들과 신자들은 그의 고난의 행군에 늘 함께 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지하가 이 모든 이들을 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돌리고 있음을 어찌 자기분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지하는 1970년 4월 <사상계>에 “오적(五賊)”이라는 시를 발표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며, 보석으로 석방된 뒤에 1972년 3월 19일 <가톨릭시보>에 ‘신춘수상 경칩’을 게재해 문제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그해에 교회 기관지였던 <창조> 5월호에 ‘비어(蜚語)’가 실렸다. 한편 김지하는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발표하자 1973년 11월 5일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민주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1974년 7월 13일 비상 군법 회의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당국은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김지하를 일시 석방하였으나 <동아일보>에 기고한 인혁당 사건을 다룬 ‘고행... 1974년’의 내용과 옥중메모 장일담 때문에 재투옥 되었다.
당시 그가 남긴 옥중메모 가운데 기도문은 장엄했다.
“몇 달이 계속되는 똑같은 기구를 하느님이시여 실현 시켜 주소서. 내 마음의 칼을 예리하게 하여 주소서. 통곡 속에 가슴이 찢어질망정 끊고 아득히 싸움터로 나가게 하소서. 고통만인 외로운 피투성이의 싸움의 길, 헐벗은 민주혁명으로서의 독한 삶의 길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만이 나의 시는 핏빛을 얻고 통곡과 해방에서 진실 된 절규가 되나니 부디 나를 그 고통의 길로 가게 하소서. 애착을 끊어 버리게 도와주소서. 일그러지고 병든 육신이 되어 어느 거리에선가 쓰러지리라.
그러나 내 가슴엔 한 편의 맑은 시를 품게 하소서. 내가 찾아 헤매는 것은 안락이 아니며 행복이 아닙니다. 진리의 불기둥이며, 산맥을 뒤엎는 폭풍이며, 파도입니다. 그로부터 태어날 ‘대지의 시’ 한편 내 육신을 제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나의 생은 성공입니다. 밑바닥에서만 저는 행복합니다. 고통 속에서만이 저는 평화롭습니다. 외로움 속에서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향한 손길이 뻗어 가고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만이 참된 자비의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옥중에서 그는 “나를 저 소시민적인 안락의 작은 꽃 무덤 속으로, 마취 속으로 끌어들이는 유혹으로부터 끊어 버리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예수냐 마르크스냐? 시인과 운명을 함께 나누었던 가톨릭교회
이렇게 아름다웠던 저항시인을 위해 먼저 나선 것은 가톨릭교회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으로 결성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논란의 중심에 있던 화두가 인혁당 사건으로 일시에 처형된 사람들처럼 ‘김지하가 공산주의자인가?’ 여부였다. 이때 천주교 인천교구 최기복 신부는 “예수냐, 마르크스냐”라는 글을 통해 김지하를 변호했다. 최 신부는 “재판정은 마치 천주교 포교론장과 같다”고 말하며, 그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칭송했다.
김지하는 법정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가톨릭의 ‘해방신학’의 입장에서 학대받는 자들의 해방을 원한데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김지하의 사형을 막기 위해 신앙보증운동에 나섰다.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는 그의 신학적 감정을 예수회 상지대학 신학교수 니콜라스 신부 등에 의뢰하고, 구명운동에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메츠와 몰트만도 가담했다.
예수회 이한택 신부는 <‘옥중메모’에 관한 감정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해 “해방신학이란 '현재의 불의를 타파하고 하나의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여 지금 탄압받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 운명의 주인공이 되게 하려는 신학의 한 조류”라며 “김지하의 신학적 배경이 이러한 해방신학에 두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김지하의 모든 메모 또는 행위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발언했다. 이어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과 비판방법을 채용하고 있지만, “무신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가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김지하 이야기기 모음 <밥>, 분도출판사, 1984.
1978년 3월에는 ‘김지하 구출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에서 특별미사와 기도회가 이어졌다. 이 미사에서 안승길 신부는 “진정한 민주투쟁의 불꽃 속에 살고 있는 그는 비록 감옥에 있지만 그의 영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가 버림받고 억눌린 이웃을 위해 투신했던 모습은 본연의 크리스천의 자세이며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인권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현대의 순교자이다. 또한 그의 투철하고 강인한 복음 정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불러오고 있다”고 전했다.
당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김지하를 감옥에 가둔 채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주의 새 정부를 세우기에 분주해야 한다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며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비판했다. 그런데 김지하는 30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계승한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지학순 주교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이유만으로 지지할 뿐 아니라, 이제 와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48%의 국민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나섰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암묵적으로 문재인을 지지한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으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대선 후보들에 대한 정책질의서를 분석하고, 문재인의 정책이 가톨릭사회교리에 근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당선인은 후보시절 정의평화위원회의 질의서에 아예 답변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김지하가 ‘지금은 가톨릭이 아니’라는 말은 사실이다.
동학과 상관없는 김지하의 여성대통령론
더 큰 문제는 그가 ‘동학’도 아니라는 점이다. 김지하는 ‘태생이 동학’ 운운하며 시운(時運)을 읽어내 ‘여성시대’를 선포했지만, 그가 <남녘땅 뱃노래>나 <밥>을 쓰면서 설파한 후천개벽 사상에서 그가 짚어낸 것은 ‘여성대통령’이라는 이데올로기뿐이다.
그는 <밥>에서 우주적 생명운동을 선언하면서 이 큰 굿을 벌일 광대로 “뿌리 뽑힌 민중, 별 볼일 없는 민중, 살아 있어도 죽어 있고, 죽음 속에서도 다시 부활하는 숱한 살아있는 중음신인 민중”이라고 지목했다. 그들 역시 동학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늘님을 모신 사람들’(侍天主)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특히 여성은 “생명의 직접적인 출산자요 양육자요 보호자”이며, “변함없이 맨 밑바닥에서 별 볼일 없이 시들어가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운동의 “가장 강력한 전위적 활동가요 희생적인 중생의 광대요 후천개벽에서 주체 중의 주체”라고 말했다.
김지하가 설파했던 동학이나 강증산의 사상은 ‘생물학적 의미의 여성’만을 논한 적이 없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억눌리고 소외된 중음신 같은 여성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이지만, 청와대에서 최고 권력의 측근에 있었으며, 부모의 죽음으로 심리적 고난이야 많았겠지만 유복하게 살다가 유력한 정당에서 콧김을 날리던 이를 ‘여성시대’를 여는 메시야로 등극시키는 김지하는 동학의 진수를 다 잃어버리고 그 옷깃만 잡고 있는 정신적 공황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동학의 진수를 깨닫고 몸으로 살았던 이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동학을 나누어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복음 정신이 그대로 여성과 아이들을 변호하는 까닭이다. 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찬한 해월 최시형과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는 세상의 약자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개신교 신자였던 권정생이 <한티재 하늘>이란 소설에서 전한 것도 ‘동학’이었고, ‘생명사상’과 관련한 김지하의 스승이었던 장일순도 천주교 신앙과 동학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심지어 안동교구의 정호경 신부는 농민교리서인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집필하면서 동학의 생명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점에서 가톨릭신앙과 동학 모두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를 2012년, 2013년에 내뱉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신앙과 사상을 배신한 김지하는 1969년 <시인>이라는 잡지에 ‘서울길’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김영일이라는 본명 대신에 ‘김지하’(金芝河)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김지하, 향기로운 이름이다. 그 이름이 이제 말년에 컴컴한 지하도(地下道)를 걷고 있다. 스스로 음울한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자기 자신을 파묻고 있다. 그의 귀에는 철탑 위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그가 목숨처럼 붙잡고 있던 생명, 그 생명들이 4대강에서 죽어가고, 제주 강정에서 콘크리트에 질식당하고 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그 생명들에게서 떠난 지 오래인 듯하다. 말만 남고 정신은 죽었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김지하는 가톨릭도 동학도 아니다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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