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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지난 10년을 돌아보며(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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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3-01-25 21:32 조회 6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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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을 돌아보며(7-3)
다음은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의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에 게재된 공지사항입니다. 이용안내를 숙지하시고 많은 이용을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는 것은, 상담을 통하여 교단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논쟁을 벌려 상호간에 불신과 배척을 하는 것은 우리 천도교의 갈 길도 아니며, 수운의 정신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 하드라도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선 모든 동덕들이 서로 참고 위로하면서 모두 끌어안고 교단중흥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아야 할, 매우 중대한 시기입니다. / 이하 생략.
활성화를 위한 기본전략 /2004.08.05. 천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식이 아닌 것이 상식이 되고 정상이 아닌 것이 정상이 될 때의 당혹감을 이해할 쯤에 천도교가 이해되기 시작한다면 아무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도교의 현실은 이런 것입니다. 불연 기연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셨다면, 꾹 참고 천도교의 깊은 사상만을 믿고 굳건한 믿음으로 생활에 몰두한다면 반전(反轉)할 전환기를 만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도 천도교의 현실에 실망한 지 30여 년이 됐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곧 그 준비의 결과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동학, 천도교의 사상이 진리라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우리는 좀 더 기다려야 하고 새롭게 발전을 하기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신사님 생전에도 천리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소망의 결과를 바라는 도인들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탄 도유심급이란 글을 지어 타이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에 위로가 될 것이고 느긋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폐쇄보다는 활성화해야 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선 다음 몇 가지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교리의 기본적 해석이외엔 논쟁하지 말 것. 2. 동학, 천도교의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게재할 것. 3. 교리, 교사, 수도와 신앙에 대한 상담사를 두어 운영할 것. 4. 교단 밖의 세상의 변화를 천도교의 시각으로 분석, 대안을 제시할 것. 5. 교인들의 <친교를 위한 모임>을 운영할 것. 6. 신앙 수행담을 발표할 수 있는 난을 신설할 것. 7. 기타 다양한 현실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신앙심 제고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선별하 여 게재할 것. 이상의 것을 기본으로 하여 운영한다면 참여자가 많아 질 것입니다. 참고하여 운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천도교 선교회와 같은 난이 적은 현실에 없어진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심고 드립니다.
***이 글은 포덕 144년 6월 12일에 천도교 선교회 <카페란을 폐쇄한다면> 에 대한 의견을 달라는 공지사항에 대한 대안으로 동년 6월 12일에 게시했던 글로, 모든 천도교 관련 홈, 또는 카페 운영에 참고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이 글을 게재합니다.
남북통일만이 지상과제가 아니다./ 2003,7.23.
88올림픽이후 냉전시대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상황아래 남북통일이 최우선의 지상과제인 것처럼 된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진정 <우리에게 최우선의 지상과제일까>하는 반문을 해 본다. 우리에겐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분법에 의한 집단들 간의 극단적인 갈등,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집단의 괴이한 이론제기와 집단행동, 그리고 많은 민생의 문제가 산적해 있어 전후좌우를 돌아 볼 여력이 없다.
수입(收入)의 주체가 아닌, 수입의 주체로부터 돈을 타 소비하는 계층이, 사회의 중심이 되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 해결자로 자처(自處)하는 정신 나간 계층에 의해 끌려 다니는 세계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한심(寒心)한 사회이며, 소비의 주체가 된 웃지 못 할 우리 사회가 아닌가. 서른 살 전후에 벌써 부모 형제의 도움아래 막대한 그들의 재산으로 4, 50대에도 이루지 못할 부(富)를 갖고 시집 장가를 가, 시작부터 어려움을 모르고 삶을 시작하는 계층, 그들은 당연하고 행복할런 지는 몰라도 부모형제는 그늘이 진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우리 보다 못 살고 문화가 뒤떨어진 나라에서도 신랑 신부가 자신의 노력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의 분수에 맞게 결혼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3, 40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고 부모의 집에 기생(寄生)하고 있으며, 결혼 후에도 한도 끝도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비의 중심에 서 있다면 소도 개도 웃을 일이다. 생계(生計)를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해도 두려울 게 없겠지만, 하루하루를 긴장하면서 실수(失手) 없이 살아가도 이 험난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통일은 사치이다. 통일이 된다고 지금의 생활이 나아 질 수 있다는 확신이 설 수 있을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마냥 즐겁고 복에 겨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료해서 통일이나 한번 해볼까. 북한 땅이나 헤집고 다니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자본주의의 장, 단점을 잘 모르고, 빠른 시일 내에 적응할 수도 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게거품을 물고 자랑이나 한번 해보겠다는 뱃심이 아닌 다음에야, 이 고달픈 현실을 외면하고 잠 고대를 하자는 것인가. 2, 30대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걱정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고 금융신용 불량자 300여만 명, 생계보호 대상자가 200여만 명에 이르러 내부문제로 확산되어, 사회의 기틀마저 흔들려 사회와 경제가 혼란해질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삶의 방향이 오리무중인 현실에서 통일이 우리에게 무슨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매우 자명한 것이다.
국가경영을 위해서 시대적 상황과는 거리가 좀 있다손 치더라도 미래를 위한 장기계획으로 논의해 보든가, 정당의 미래지향적 목적을 위하여 통일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 - 가족의 생계와 사회 각 영역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기만 하면 우리 사회가 빨리 안정되고 복지사회가 되어 살 맛 나는 삶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사람들.- 내부의 결속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힘든 현실을 먼저 극복해야 할 중차대한 이 시점이다. 그런데 남북의 통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여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반 통일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더 나아가 단일민족의식이 부족하고 뜨거운 동포애도 없는 매정한 인간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있을 수 없다. 북한이 생지옥이라 북한 땅을 탈출하는 북한 주민이 수만, 수십만 명에 달하는 현실과 구금, 투옥, 처형하는 북한의 인권은 외면한 채 북한을 찬양하는 그들은, 취사선택하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라는 기괴한 잣대를 가지고 남북문제를 농단(弄斷)하고 있다. 이런 중심 없는 시대에 천도교인들은 이런 경향에 덩달아 놀아나지 말고 좀 더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대처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북의 분단으로 전체 교인의 7, 80%가 북한에 있어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었지만, 북한 사회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 종교활동이 위축이 아니라 중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러 종국엔 천도교 청우당으로 북한 노동당의 우당으로 명맥을 이을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수용해야 했다. 이 뼈아픈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는 좀 더 역사가 흘러 가 재평가되는 시대를 기다려야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25 사변 무렵 북한에 우리 교인이 380-420만 명이 되었다는 데 1990년대 초, 통일원에서 북한자료를 조사한 결과 1만 5천명으로 풍비박산(風飛雹散; 風地雹散)이 되었다니 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역사의 현실인가. 이 인원도 남, 북간 사회단체의 대화를 위한 것으로 사실 여부도 확인 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6, 25 사변 후 50 여 년 간의 북한에서의 천도교 종교 활동과 청우당의 정치활동을 우리의 독자적인 정보수집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대외 자료마저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남북문제 논의는 최우선이 될 수 없다. 사회적 시각인 반통일 세력, 단일 민족애가 없는 인간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실을 도외시하는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해방 후 북한 정권과 맞서 싸운 3.1 재현운동과 영우회(靈友會)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선배 교인들이 투옥, 사형을 당하면서, 천도교를 지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는 3.1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으로 희생된 선배 교인들과 통일은 반드시 해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북한에 침투하여 활동하다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천도교인 북파 공작원들의 명예를 찾아 주어야 하고, 잘못된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몰락한 천도교 신앙 활동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 6,25와 월남 파병으로 조국을 위하여 희생된 호국영령들, 우리 천도교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고마움을, 때가 되면 한 마디씩 너나없이 하지만 평생을 그들의 죽음과 희생의 대가로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현재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희생이고, 나는 나다. 라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겠는가? 우리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라도 연명(延命)하고 있음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우리가 선배 교인들의 희생을 본받고 고귀한 희생이 되게 하기 위해, 선배 교인들의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들 정책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천도교의 이런 몰락(沒落)이 없이 남북통일이 되었다면, 우리는 대 도약을 할 수 있는 3, 400 만 명의 교인들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 근, 현대 100 년 역사를 이끌어 찬연히 빛나게 했던 동학군의 자랑스런 명예를 되찾을 뿐더러 21세기 새 역사창조에 선봉이 될 수 있는 자신감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뿌듯하게 담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역사여!.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다. 불행한 우리 민족은 과거 100년 역사가 우리의 희망대로 되지 못하고 세계역사의 도도(滔滔)한 흐름에 묻혀 외세에 번번히 농락당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였으니까.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자주(自主), 자결(自決), 자립(自立)으로 현대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있다고 믿는다면, 매우 낭만적이고 근시안적인 역사관을 가진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상당 부분을 세계의 흐름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제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몸부림이야 쳐야겠지만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할 수는 없다는 것이 비참하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의 역사 현실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자주, 자립, 자결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준비를 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또한 우리 전체 교인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분의 교령님이 자진 월북하여 자의적(恣意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대남 적화통일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아픔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부적으로 정리된 다음에 통일논의를 해도 늦지 않는다. 통일된 뒤의 우리의 원대한 교단 중흥사업을 준비하지도 않으면서 환상에 젖어 통일을 외친다는 것은, 오라고 하지도 않은 남의 집 잔치에 가, 푼수 없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정성을 모아 힘들여 차린 성대한 잔치 마당에서 많은 구경꾼을 모아 놓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 / 2003,7.23. 홈 게재
이 글을 전후해서 다음과 같은 글들이 각 게시판에 게재되었다.
2004.08.05. 지기일원론
2004.08.05. 스승님의 존칭을 바로 쓰자
2004.09.18. 갑진 개화 운동의 숭고한 순교정신을 계승하자
2009.09.26. 동덕(同德)이란 무엇인가?
누가 사계명을 지키는가? / 2004. 9. 11.
대신사님이 지으신 <도덕가>의 마지막 단락에 다음과 같은 경계의 말씀이 있다.
어질다 제군들은 이런말씀 본을 받아 아니잊자 맹세해서 일심으로 지켜내면 도성덕립 되려니와
번복지심 두게되면 이는 역시 역리자요, 물욕교폐 되게되면 이는 역시 비루자요, 헛말로 유인하면 이는 역시 혹세자요, 안으로 불량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이는 역시 기천자라.
뉘라서 분간하리 이같이 아니말면 경외지심 고사하고 경천순리 하단말가
위 말씀 중, 중간 부분 4행을, 4대 계명(四誡命)으로 정하여 교단에서는 정심(正心)으로 수도하는 교인들에게 신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실천덕목으로 권장하고 있다. 60년대 말, 최 덕신 교령이 취임하여 교단중흥을 위하여 온 교회와 교인의 힘을 합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독실한 신앙생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상생활에서 사계명을 지켜 존경받고 타인에 모범이 되는 천도교인이 되자는 취지에서 사계명을 액자로 만들어 사무실과 교당 전면에 게시하여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실천에 힘쓰도록 했다. 그 후 일부 교구에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강화하기 위하여 시일식순에 넣어 시일식 참석 교인들이 모두 입을 모아 병창하게 되었다.
(사계명의 실험적인 의역) 매사에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쫓아 자신만의 이익을 얻으려고
변덕스런 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천리를 거스르며 사는 사람이고,
세속적 욕망(재물과 명예 등등)에 싸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과 행동을
고상하게 하지 못하여 품위가 없는 천박(淺薄)한 사람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온갖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교묘히 속여, 해치는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천리를 속이는 사람이고,
안으로는 한없이 불량하면서 겉으로는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꾸며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한울님을 속이는 사람이다.
사계명이 담긴 <도덕가> 전편(全篇)에 담겨 있는 수운의 정신은, 이 세상 사람들은 천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연이치인데,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경천순리(敬天順理)를 잊고 살아 세상이 어지러워졌음을 개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도인들은 지난 세월의 사람들이 천리를 거스르며(逆天理) 살아, 세상이 황폐해진 이치를 깨달아 잘못된 생각과 행실을 버리고 올바른 생각과 실천을 통하여 성현에 가까운 군자 즉 품위가 있고 도덕적이며 인간다운 인간, 바로 한울의 성품을 갖고 태어나 그 성품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한울 사람이 되자는 것에 있다. 이 시점에서 사계명을 준수하는 과정에서 혹시 우리들 중에 남에게는 당당하게 천도교인이라고 큰소리치면서, 돌아앉아서는 흔해빠진 타락하고 천한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웃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만약 있다면, 그를 어떻게 동덕이라 부르며 우리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가? 거짓된 삶을 살면서 참된 삶을 사는 척 교묘하게 꾸며대는 그런 사람이 진정 신인간인가? 선천으로 돌아가 살기를 원하는 타락한 사람인가? 내가 본받고 싶은 올바른 삶과, 남을 감동시킬 언행일치가 그립다.
원론적이고 솔직한 심정으로 말한다면, 모든 종교에 있어서 제시하고 있는 계명준수(誡命遵守)를 말한다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그 모든 계명을 완벽하게 준수할 수는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계명은 어디까지나 상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야 할 덕목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오래된 종교일수록 고대사회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 가치에 상반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있는 현실사회에 있어서 계명의 준수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사계명도 이런 기본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후천개벽에 앞장설 천도교인은 계명 준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철저한 실천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가 될 수 있다.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농경사회에 있어서 모든 것을 천리에 따라 살아가던 시대에선 사계명의 준수는 가능한 부분이 많지만, 오늘과 같은 복잡하고 다원화된 기술, 산업사회에선 사계명의 준수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사계명의 준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담이 되어 신앙에서 멀어지고, 심한 경우 종교를 떠나 편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찾는다. 그러나 거짓되고 교활하며, 매사에 의도적으로 남을 기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면서 준수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도 못 지키느냐"고 비아냥거리며 나만이 진정한 교인이라고 큰 소리쳐 남을 부끄럽게 한다. 사계명을 어디서나 언제나 끝도 없이 어기면서도 탁명교인(托名敎人)이 아닌 척 꾸며대는 사람들의 의도가 천도교 발전을 위한 대안인지, 진정 그들이 가고자 하는 세상이 지상천국인지 묻고 싶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자리에 시천주(侍天主)가 있고, 오심 즉 여심(吾心卽汝心)의 마음으로 인내천의 참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시시 때때로 자신에게 편리하고 유리한 대로 수도 없이 사계명을 어기며 살면서, 자신도 기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거짓된 것이라고 비웃기까지 하면서 독실한 천도교 교인 척하는(아주 교활한 탁명교인) 거짓된 삶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천부적(天賦的)으로 타고 난 본성대로 살아갈 수 없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다 같이 각자 자신들을 돌아보고 반성해 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사계명을 지킬 생각이 있어야 하며, 사계명을 온 정성을 다하여 몸소 실천궁행하겠다는 것을 다짐해야 한다. 사계명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매사에 말과 행동을 한결같이(言行一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언행일치가 되었다는 것은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군자 사람(道人 또는 독실한 천도교인)의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며 한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리석게도 사계명의 참 뜻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남 앞에 서서, 가장 독실한 신앙자이며 교단의 지도자라고 허풍을 떠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애당초 사계명을 지킬 생각도 없으면서 천도교는 이런 종교이며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천도교인이라고 떠벌리는 사람을, 우리는 눈여겨보고 경계해야 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직접 그런 사람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하나하나 사계명 준수여부(遵守與否)를 꼼꼼히 살펴 스승님의 이름으로 거짓되고 꾸며진 삶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다시는 독실한 신앙자이며 지도자란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다시는 교단과 교인들 앞에 서서 잘못된 교인이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들 속에 아주 교활한 탁명교인과 지도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교단은 날로 황폐해지고, 역사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살아 질 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포덕 145(2004)년부터 포덕 150(2009)년 초까지 게재된 글들.
2004.08.15. 자기 이름에 자부심을 갖자(1-2)
2004.11.28.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2004.12.25. 동학, 천도교의 중흥을 위하여
2005.01.06. 동학, 천도교 중흥을 위한 대안-(1)
2005.02.11. 동학, 천도교중흥을 위한 대안-(2)
2005.02.22. 동학, 생명사상에 대한 연구자료 문헌목록.
2006.01.06 종교학, 종교철학 등 관련자료 문헌 목록.
2006.04.29. 천도교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과 제안들(상).-총 11편.
2006.04.29. 천도교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과 제안들.(하)
2006.04.29. 천도교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과 제안들.(추가분)
2006.04.29. 무위당 장일순은 누구인가.
2006.05.14. 청오 차상찬과 종합잡지 개벽.
2007.12.01. 무체법경이 게재된 각종 교서 비교분석연구.
2007.12.08. 무체법경의 비교분석연구 2.
2007.12.15. 무체법경의 비교분석연구 3.
2007.12.22. 무체법경의 비교분석연구 4.
2007.12.25. 무체법경의 필자에 대한 논의.
2007.12.28. 십삼관법에 대한 연구.
2008.06.15. 총부는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 /부제; 끝없이 추락하는 천도교와 방조자들.
2009.01.22. 진실, 정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2009.01.22.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
2009.01.22.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하)
2009.01.22.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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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2006.04.29. 포덕 146년은 현도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러나 후천 오만 년을 전해야할 인류구원의 동학사상과 무한한 발전의 터전이 되어야할, 중 차대(重且大)한 시점에, 교단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계속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교단발전을 위한 말과 대안을 제시해왔지만, 더 이상의 침묵은 천도교를 끝없이 몰락하게 한 주범들을 두둔하는 공범자라 생각되어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급변하는 현대사조와 세계 정치 상황을 폭넓게 이해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동서남북을 가늠하지 못해, 방황과 혼돈(混沌)에 휩싸여 작은 것에 대하여도 갑론을박함으로써 근간에 적지 않은 동덕들을 천도교 홈에서 내쫓아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이철기 교령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교단이 매우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령에 출마한 사람들이 대내외적으로 교단의 얼굴로 적합한지, 그들이 한 평생 살아온 삶을 신중하게 평가하여 교령으로 추대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를 수차에 걸친 불행과 혼란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여러 번 너무도 쉽게 불행을 자초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항상 새로운 지도부의 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렇게 교단 발전에 대해 대안을 주장했던 분들 중에, 현 집행부가 교단발전을 해낼 수 있는 훌륭한 집행부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교단 지도자들의 모임이라고 확신을 주는 말을 한 분이 아직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만족할 만한 지도부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령에 출마한 인물의 살아온 과정을 세심하게 살펴, 교단을 위해 온 몸을 다해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선출했어야 했는데, 자신들의 이해(利害)와 교단에 처한 입장에 따라 무책임하게 교단의 장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잘못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보다 잘못을 쉽게 저질을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단 밖에서 살아온 여러 분야의 지도자를 교령으로 모셔, 그분들이 잘못을 저지름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고, 그 후유증으로 교단이 침체하게 된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못 선택한 교령의, 크고 작은 잘못된 행태(行態)를 바로 잡으려다 큰 것을 너무 많이 잃게 된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교인 상호간의 불신이고, 교단과 교단 지도자들에 대한 평신도의 신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단 지도부를 제대로 뽑지 못하는 허술한 교단임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가톨릭의 교황선출과정을 예를 들어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교령선출은 너무 신중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광복이후 교단의 격동기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교단을 망친 인물들이 대부분 교단에서 원 주직에 봉직하면서, 교단의 교인들이 성심을 다해 낸, 년, 월성의 피나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불성실한 교단의 지도자란 분들이 많았었음을 자타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런 무리들이 들끓고 있다고 하니, 귀신도 못하는 생사를 넘나들어 끝까지 살아남는 놀라운 그 재주에 감탄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스승님의 말씀에 하나도 없는 행위이고 정말 뻔뻔한 탁명교인들의 집단이라고 단죄(斷罪)해야 합니다. 더욱이나 가관(可觀)인 것은 교단에서 이런 저런 교직을 가지고 몇 푼의 돈을 받고 교인 행세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탁견(卓見)과 해결할 능력을 두루 갖춘 지도자자라고 자처하면서, 아무나 보고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끝없이 훈계하고 있으며, 제 처지는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신실(信實)한 교인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하라고 면박(面駁)을 주면서 그 것도 대안이라고 총부 밖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장문의 글을 공개하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고, 심혈(心血)을 기우려 만들어낸 대안을 비웃거나 모른척하며 애써 무시하는 한심한 지도자나, 천도교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의 말의 진의를 알지도 못하거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안 들으려 하거나 대안을 위한 고민도 하지 않고 대안도 없이 무조건 반대하는 맹목적인 교단 지도자와, 교단 원, 주직이란 위치에 있는 지도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총부 안에 봉직하는 상임 근무자들을 향해 양심선언을 하라고 대 놓고 하거나,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하자고 선동하는 한심하고 파렴치한 지도자의 일부와, 교단 지도자 들 중에 불의에 대해 자신의 이익에 반(反할)까 두려워하면서 침묵으로 등 돌리고 있는 지도자들, <침묵하는 것이 원로의 자세이고 원만한 인품을 가진 도성입덕의 군자>로 대접받는 원로와 지도자가 있는 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고매(高邁)한 인격을 갖춘 지도자와 원로의 자세라고 주장하고 살아가는 일부 교단지도자들과 같은 이중적(二重的) 인간들이 있는 한, 또 그들이 독실(篤實)하고 본받을 천도교인이며 개혁론자로 대우받고 천도교 마당에서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한, 천도교는 영원히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교단발전에 대한 의견이나 현재 당면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먼저 소속된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대안을 내놓아야 하고, 그런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을 때에는 교단밖에 계신 덕망 있는 원로나 전문가와 논의하여 중론(衆論)을 교단의 정식기구에 내어야 하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밖에서 패거리를 모아 이런 저런 논의로 교단을 공박(攻駁)하는 교단 지도자를 볼 때, 왜 저런 부류가 교단의 지도자로 간여하고 있는지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일반 교인들은 교단 내에서 무슨 일을 논의하고 진행하는지도 모르는데 떠들어대는 것이 교단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나 이견(異見)이 있어 논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교인들을 불안하게 하고, 깊은 신앙심과 교단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사사건건 교단 일에 불평하고 있는 일부 지도자들의 행태는 누구를 위한 반대이고 주장입니까? 그렇게 불만이 있다면 물러나서, 자신의 의견이 전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새로운 집행부를 뽑는데 여론을 모아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잘못을 60 년간을 지속하고도 훌륭한 교단이 될 수 있다면, 아무나 신흥교단을 만들어 교인들이 정성을 다해서 내는 피 같은 성금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평생을 끼리끼리 나눠 먹고사는 코미디 같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정말 이런 이중적인 인간들 마음속에 스승님의 참다운 말씀과 선배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 육성(育成)하려던 교단의 미래를 위한 순교자의 정신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정말 평교인보다 신실(信實)된 신앙심이 없고 잘못에 대한 책임감과 뉘우침이 없기 때문에 근간(近間) 일련(一連)의 사태(事態)가 계속 야기(惹起)되고 있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과 신뢰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살아온 잘못된 삶에서 출발되고 노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여정부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와 일관성(一貫性) 없는 극렬(極烈)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 국보법 폐지, 호주제 폐지, 교령의 재선거, 친일청산과 반성, 여성합창단에 대한 수준이하의 평가와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는 무책임한 발언 등등,(교회 마당 안에서 수시로 논의되는 것까지 나열한다면 헤아릴 수 없으므로 생략함)의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천도교가 21세기를 이끌고 갈 수운대신사님의 사상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가진 종단인가 묻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 발짝 물러서, 수운대신사님의 불택선악(不擇善惡)에서 나온 무선무악(無善無惡)사상과, 개전일체(個全一體)사상과, 반대일치(反對一致)사상과, 무극대도(無極大道)라 간파(看破)하신 스승님의 사상을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수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 세상사(世上事)에 대해 찬반(贊反)에 목숨을 거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덧없는 일이며, 지금과 같이 교단의 힘이 매우 미약하여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잠 고대 같은 소리를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입니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생사를 걸었던 세상사를 돌아보면 얼마나 성급했었는가? 를 반성하게 될 것입니다. 무극대도를 믿으면서 너무 세사에 얽매였던 것입니다. 본래는 이런 세사를 초연히 벗어나 각지불이(各知不移)의 단단한 마음으로, 스승님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했었습니다. 그게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필자가 수차 <나의 이름에 대해 자부심을 갖자.> <사계명을 누가 지키는가?> <동학, 천도교 중흥을 위한 대안>등 여러 곳에서 지금까지 모든 논란과 의견의 찬반과, 불평을 접어두고, 오직 천도교의 발전만을 생각하고 힘을 합해서 노력하자고 당부를 드렸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교단의 여러분들에게 당장 논쟁은 접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귀담아 줄 때까지 교단 중흥을 위하여 모든 힘을 모을 것을 부탁드립니다. 잘못은 할 수 있으나 반성이 없고 새로운 생각과 행동이 없는 사람이나 집단은, 찬연한 미래가 있을 수 없음을 뼈아프게 명심합시다. / 각 게시판에 2005. 11. 14일에 게재.
/ 지난 10년을 돌아보며(7-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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