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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호성
댓글 0건 조회 118회 작성일 19-02-2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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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을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종교이다. 보국안민이란 백성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이다. 포덕천하란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진리를 세상에 널리 펴서 세상사람 모두가 사람을 한울님처럼 공경하며 살게 하라는 뜻이다. 광제창생이란 세상 사람들이 시천주신앙을 통해서 도성덕립(道成德立)을 이루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라는 뜻이다. 지상천국건설이란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울사람이 되게 하여 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말엽 천도교가 창도될 당시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라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백성들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관리들의 횡포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해낼 새로운 도(道)를 찾아서 고심하던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께서 깨달은 진리가 바로 시천주(侍天主) 진리였다. 수운선생은 사람들이 ‘자신이 바로 한울’이란 시천주 진리를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천주 진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보국안민을 할 생각을 하게 되고, 포덕천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며, 광제창생을 해서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천주 진리야말로 각박해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도라 생각하고 동학(東學)이란 이름으로 천도(天道)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동학이 오늘날 천도교(天道敎)이다. 즉 천도를 가르치는 학문이 동학이라면 천도를 가르치는 종교는 천도교인 것이다.
이처럼 천도교인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란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하는 일에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왔다.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東學革命)이 그러했고, 1919년 기미년에 일어났던 3.1운동이 그러했다. 동학혁명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근대적 민주의식을 당시 봉건제도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일깨워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고,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의 가슴속에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의 밑바탕에는 항상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도교인들은 시천주 사상에 위배되는 억압에 대해서는 언제나 힘을 합쳐서 당당하게 저항해 왔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 정신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선생은 아침조회에서 “내가 앞으로 10년 안에 일본으로부터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고 말했다. 1911년 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은 의암성사를 찾아와 우이동 골짜기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해 8월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의암성사의 명으로 우이동 골짜기에 임야와 전답을 3만평 정도 사들였다. 그해 11월부터 수련도장을 짓기 시작해서 1912년 6월 19일 수련도장인 봉황각(鳳凰閣)을 준공했다. 의암성사는 이곳에서 전국의 천도교 두목 483명을 선발해서 1912년 4월부터 1914년 6월까지 3년에 걸쳐서 7차로 나누어 49일씩 이신환성(以身換性) 특별수련을 시켰다. 이신환성이란 육신관념에서 탈피해서 한울님 성령을 주체로 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데 마음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생사(生死)를 초월하게 된다. 이렇게 양성한 지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구에 돌아가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면 우리민족 모두가 천도교를 믿어야 한다고 열심히 포덕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천도교단은 1918년 말경에는 이미 300만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 종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의암성사는 국제정세를 살피러 떠났던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1906년 1월에 귀국한 이후로 항상 일본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면서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국제정세를 살펴볼 때 1919년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기에 매우 적합한 때라고 판단한 의암성사는 1918년 12월 24일 인일기념식에 참석차 상경한 교단 간부들을 상춘원(常春園)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우리의 무위무능으로 간과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내 이미 계획한 바 있으니 제군들은 내 지시에 따르라.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1919)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49일 특별기도에 달려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최측근 제자인 권동진, 오세창, 최린 세 사람을 불러서 우리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의암성사의 명을 받은 세 사람은 기밀유지를 위해서 최린이 실무대표로 외부 인사들과 접촉한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함께 논의하기로 했다. 최린은 중앙학교 기숙사로 찾아가서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과 만나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고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민족대표로 적합한 저명인사들을 물색한 후에 이들과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거절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종교계 인사들과 접촉해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 때 거론된 사람이 기독교 장로이면서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이승훈이었다. 김도태를 통해 전달을 받은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최남선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송진우와 현상윤을 만나 셋이서 계동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과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천도교 측 운동에 기독교 측의 참가의향을 물었더니 이승훈은 이에 적극 찬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로 서울을 출발하여 2월 12일 선천에 도착한 이승훈은 사경회에 참석한 장로교 목사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등 동지를 만나 서울의 운동계획을 설명하자 일동은 모두가 이에 찬성했다. 다시 14일 평양으로 나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기독병원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와 신홍식을 만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2월 17일 재차 상경하여 최남선을 만나려 하였으나 연락할 방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만나 기독교 측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가 분분하다는 말을 듣고 2월 20일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교 목사 오영화, 정춘수, 북감리교 감리사 오기선, 신홍식 등 여러 사람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방략을 서로 협의한 결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할 것과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초 함태영의 집에서도 이와 별도로 이갑성, 안세환, 오상식, 현준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하였으나 의견이 구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2월 21일 최남선은 소격동 이승훈의 숙소로 찾아가 그동안 왜경의 주목 때문에 상봉치 못한 이유를 말하고 같이 재동 최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훈은 그동안의 경위를 말하고 전날 박희도의 집과 함태영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사업인 만큼 절대로 통합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도 이승훈도 동의하면서 내일 기독교 측과 다시 상의하여 대답하겠다고 하면서 어제 회의에서 운동자금 조달문제가 가장 난제로 거론되었다고 하면서 천도교에서 5천원을 융통해 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3천원만이라도 변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최린은 천도교에서도 은행에 예금하였던 돈을 일전에 왜경에게 전부 압수당하여 곤란 중에 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주선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저녁 최린은 상춘원에 가서 성사님을 뵙고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운동자금에 대해 말씀드리자 성사께서는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5천원을 융통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춘암에게 말할 터이니 돈을 받으면 곧 기독교 측에 보내시오.”라고 승낙하였다. 다음날 2월 22일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이 5천원을 최린의 집으로 가져왔다. 최린은 즉시 이승훈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5천원을 직접 교부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22일 밤 이갑성의 집에서 이승훈, 박희도, 함태영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한 끝에 천도교 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한 후 합동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 교섭을 함태영, 이승훈 양인에게 일임하였다. 다음날 저녁 함태영과 이승훈이 재동 최린 댁을 방문하여 전날 기독교 측의 회의결과를 설명하고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에 최린은 우리의 자주적 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야 옳다고 주장하자 두 사람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동지들과 상의 후에 회답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은 함태영의 집에서 오기선, 박희도, 안세환 등 여러 사람과 숙의한 결과 천도교 측과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함태영, 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정하여 제반 교섭을 일임하였다. 2월 24일 이들 두 사람이 최린 댁을 방문, 기독교 대표자격으로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동이 공식으로 성립되었다.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의암성사는 양대 종교단체의 합류는 이번 민족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2월 22일에 1월 5일부터 시작한 49일 기도회가 끝난 후 보고 차 상경한 교구장들과 우이동 봉황각 기도회에 참석했던 중앙총부 간부들에게 의암성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거사에는 기독교, 불교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운동의 성격과 운동추진에 따른 제반 사항 등을 설명하고 추후 독립선언서의 발송 등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갈 것이니 각 교구에 내려가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종교 이외의 단체는 모조리 해산시켰기 때문에 일반 사회단체를 포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단체 중에서 불교와 유교의 참가 없이는 일원화된 통일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2월 24일 밤 최린은 평소부터 친교가 있었던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계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경과를 밝혔더니 즉석에서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한용운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나 유림측의 참여가 없음을 못내 섭섭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 측 동지들과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한용운, 백용성 두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만 유교 측을 참여시키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유교 측은 원래 조직체계가 분명치 못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인물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왜경의 경계가 삼엄하고 더 이상 조직을 확대하다가는 계획이 누설되면 대사를 그르칠 염려가 있어서 세 교단이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상이 세 종단이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과정이다.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1919년 1월 하순 최린, 최남선, 현상윤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논의할 때 선언서 작성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작성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최남선이 “나는 내 생애를 통하여 학자생활로 일관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서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형이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린은 그의 문장력을 인정해온 터라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다만 의암 손병희선생께서 부탁한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을 반드시 선언서에 반영하도록 부탁하고 선언서의 골자는 최린이 말하는 취지와 최남선의 생각을 서로 논의해서 기초하였다. 그 후 최남선은 일본정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와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각국 위원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기로 하고 우선 2월 15일 독립선언서를 작성 완료하여 최린에게 수교하였다. 최린은 초고를 읽어본 후 오세창, 권동진에게 보내어 검토한 후 기독교 측에도 보내어 동의를 얻었다. 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를 작성케 함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은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으나 최린은 이를 거절하였다.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조판한 후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에게 넘겨져 사원과 직공들이 퇴근한 후 신임할 수 있는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 직공 신영구, 그리고 기초자인 최남선 입회하에 2월 20일부터 인쇄에 들어가 25일까지 1차로 25,000매를 인쇄하여 신축 중인 천도교대교당으로 운반하여 은닉하고 미리 정한대로 암호인 청색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안상덕이 3,000매를 수령하여 강원도와 함경남북도 방면으로 출발하였고, 이경섭은 1,000매를 가지고 황해도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김상설은 3,000매를 인수하여 평양교구에 1,500매를 넘겨 평남지역에 배포한 후 나머지 1,500매를 평북지역에 배포하였다. 인종익은 3,000매를 인수하여 전라남북도를 거처 충청도지역에 배포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김창준이 3,000매를 수령하여 평양과 선천지방에 배포했고, 이갑성도 2,000여매를 인수하여 서울시내와 경상도 지방에 배포했다.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이 3,000매를 인수하여 주로 경상도 지방과 서울 일원에 배포했다.
2월 27일 밤 부족한 선언서를 추가 인쇄하기 위하여 이종일은 야간에 등불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공장 내 창문을 모두 가리고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창 인쇄가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인쇄한 선언문을 치우려 하였으나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라는 고함이 빗발쳤다. 모든 것을 각오한 이종일은 큰 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신승희였다. 그는 독사처럼 음흉하고 생쥐처럼 날센 종로서의 한인 형사였다. 수없이 많은 애국동포가 그의 손에 검거되어 무참히 고문을 당하게 한 악명 높은 민완 형사였다. 이종일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날 터이니 오늘 하루만 눈감아 주십시오.” 두 손으로 빌며 읍소하였다. 관내를 순시하던 그자는 보성고보의 뒷담 골목을 지날 때 인쇄소 안에서 여느 때와는 달리 창문을 굳게 가리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들긴 것이다. 실내를 돌아보고 사정을 알아차린 그는 가만히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소매를 붙들고 사정하였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평소에 자주 들려 농담도 곧잘 하던 그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옷소매를 끌며 “우리 성사님한테 같이 갑시다.” 하였더니 뜻밖에도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했다. 이종일은 곧 밖으로 나와 성사 댁으로 달려가 위급상황을 보고 하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성사께서 좀 기다리라면서 안방으로 들어간 후 잠시 있다가 종이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걸 가져다주시오.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잘 무마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인쇄소로 돌아온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종이뭉치를 꺼내 주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곧 사라졌다. 이종일과 김홍규는 일시에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쪼록 저자가 배신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작업을 계속하였다. 10시가 넘어 일만 매의 독립선언서가 추가로 인쇄되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리어카에 실어 경운동 신축교당 창고에 갔다 숨겨놓고 성사에게 가서 무사히 인쇄를 마치고 운반해 두었다고 보고하였다.

종로서 한인형사 신승희는 성사로부터 5천원의 거금을 받고 3·1운동이 발발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5월 초순에 종로서 사법주임과 함께 만주 봉천에 출장 갔다가 5월 14일 귀환하였는데 서울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자 그날 밤 준비했던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출장 중 직무유기와 뇌물수수 혐의가 탄로된 것이다. 갖가지 악행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했던 그가 40세를 일기로 마지막에 민족적 양심에 따라 애국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종일은 재판에서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밤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아침 오세창의 지시대로 7, 8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종일선생 논설집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에서 25일까지 25,000매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3월 1일 만세시위를 시작한 서울을 비롯해서 개성,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원산 등 10여 곳에서 동시에 봉기한 것을 보면 독립선언서는 2월 25일에 25,000매를 인쇄하여 먼 곳부터 배포하고 부족분 10,000매를 27일 인쇄한 것이 분명하다.
독립선언서에 대한 민족대표의 서명은 2월 27일 밤 재동 최린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대표해서 이승훈, 이필주, 함태영이 그리고 불교 측 대표로 한용운이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대표들이 김상규의 집에 모여 도장을 모아 최린에게 보내왔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청원서 등에 기명날인하려 하였으나 선언서 외의 여타 문서가 미비되어 별지에 서명하고 그 밑에 날인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서명자의 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연령순이나 가나다순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세 교단 중에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천도교 측을 대표한 최린은 이를 그대로 찬성할 수 없었다. 가나다순이나 연령순으로 서명하게 되면 선생보다 제자가 먼저 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천도교의 체제상 곤란하다고 완곡히 설명하였으나 양측 주장이 맞서서 쉽게 타협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최린은 “그러면 이 순간까지 서로 노력해온 일은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때 최남선은 “인물로 보아서나 거사의 동기로 보아서도 손병희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첫 번째로 서명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고 기독교 측에 양보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이승훈의 제의에 따라 두 번째는 장로교를 대표해서 길선주 목사가 서명하고, 세 번째는 감리교를 대표해서 이필주 목사를, 그리고 네 번째는 불교를 대표해서 백용성이 서명한 후 그 다음은 가나다 이름순으로 서명하기로 의견이 일치되어 기명날인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탑동공원으로 결정하고 2월 28일 밤 가회동 성사님 댁에서 대표자 전원이 회동하여 거사를 위한 마지막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28일 오후 5시 가회동 성사님 댁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의암 손병희선생은 간단하게 인사말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다수의 학생이 동원되어 모일 것이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논의 결과 탑동공원에 많은 학생과 군중이 모이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고 이로 인해 일본군경에게 악독한 탄압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그 근처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장소를 변경하기로 했다.
3월 1일, 민족적 거사가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왜경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일본 학자들도 이것은 당시 왜경의 정보력으로 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최린은 이날 아침에 대문 안에 독립선언서 두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서울시내에 배포되었음을 확인한 후 서둘러 성사 댁으로 가서 시중의 동향을 보고하고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성사를 모시고 12시경 인력거로 약속장소인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도착했다. 최린은 주인 안순환에게 30여명분의 점심을 부탁하고 별실에 일동은 자리를 잡았다. 민족대표들은 오후 1시가 넘자 대부분 모였다. 탁자 위에는 나용환이 가져온 100여 매의 독립선언서가 놓여 있었다. 일동은 감격에 떨리는 손으로 각기 선언서를 들고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1시 반이 넘어서자 민족대표 33인중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이 불참하고 전원이 모였다. 이에 성사께서 이종일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해서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고 지시하여 이종일은 인쇄된 독립선언서의 오자를 고치고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의암성사는 최린에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지시하고 일동에게 민족대표로서 당당히 행동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뒤늦게 알고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등 10여 명이 태화관으로 달려와 민족대표에게 장소변경을 항의하고 탑골공원으로 갈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권동진과 최린이 장소변경의 사유를 말하고 간곡히 타일러 돌려보냈다. 식탁이 열리자 한용운은 자진해서 일어나 일장 연설을 하였다. 국제정세의 추위는 바야흐로 조선민족에게 독립을 허용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동안 우리 민족은 간악한 일제의 쇠사슬을 풀고 자유천지를 향해 궐기하기 위한 힘을 구축하였다는 점, 따라서 우리들의 이 모임은 민족독립의 성사를 뒷받침 하는 의미 깊은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요지였다. 일동은 기립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탑동공원에 모인 군중의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들려왔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정복경찰 7~80명이 몰려와 태화관을 포위하고 일인 경부가 최린을 불러 경시총감부로 연행한다고 하자 차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30분 후에 차 한 대가 도착해서 첫 차에 의암성사를 비롯해서 한차에 세 분씩 연행하였다. 5시가 지나서야 최종으로 최린과 한용운이 연행되었는데, 그때 시내는 일본군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한편 전부터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중등 이상 각 학교 학생들은 전날의 지시에 따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1시쯤부터는 속속 탑동공원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2시쯤에 이르러서는 이들 학생의 수는 4, 5천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때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선언서가 낭독되자 흥분과 감격에 상기된 군중들은 일시에 숙연해졌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날 무렵 감격에 넘친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탑동공원에서 학생들과 합류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어느덧 서울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으로 돌변하였다.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수십만 군중의 시위행진은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온 시가는 철시하고 시위군중의 대열이 물결치는 가운데 일제는 전 경찰력과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요소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위대열의 수에 압도당한 일제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듯하였으나 해질 무렵부터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적수공권으로 독립을 외치는 시위행렬은 점차 일제의 저지선에 부딪쳐 주모자급이 속속 구속되었으나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시내로 번져가면서 밤에는 횃불이 등장하고 태극기가 곳곳에 꽂혀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갔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개성, 수원,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대구, 부산, 원산, 홍원 등 11개 시·군에서 서울의 거사와 때를 같이 했다. 다음날에는 해주, 연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에서 일어났으며, 5일까지는 경기 이북지역에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5일에는 군산, 벽동, 맹산, 영변에서 10일에는 철원, 광주에서 궐기하였고, 점차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회조직이 있는 곳부터 터져 나온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은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우리나라 최남단인 제주에서는 3월 20일에, 최북단인 은성에서는 4월 4일에 각기 봉기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3월 6일에는 서간도에서 7,200여명이 시위하였고, 13일에는 용정에서도 독립선언대회가 개최되었다. 비폭력 군중의 평화적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전투태세를 갖춘 2개 사단의 정규군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헌병 2만 명, 이밖에도 경찰과 한인 헌병보조원 수만 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일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 군중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는 물론 이들을 집단학살한 사례가 허다하였으며, 특히 평북의 정주, 평남의 맹산, 양덕, 황해도 수안, 그리고 수원 제암리 등지에서는 수십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또한 구속된 시위자에 대한 고문 역시 잔인무도하였다. 수많은 시위자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거나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집계된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그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집회건수 1,542회, 집회인원 2,02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 소실된 교회 47동, 소실된 학교 2동, 소실된 민가 715동.
이러한 희생의 대부분은 천도교인들과 천도교당이었음은 당시의 교세로 볼 때 분명하다. 기독교와 불교는 당시에 각각 30만 교도에 불과했었다. 이와 같이 기미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학살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독립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일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게 함으로써 그 후 일제가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바꾸어 소위 문화정치라는 통치방법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상이 천도교에서 기독교, 불교와 함께 전개했던 3.1독립운동의 전말이다. 이러한 세계역사에 길이 남을 3.1독립만세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천도교에서 의암 손병희선생의 지도 아래 10년 가까이 정신무장에서 독립운동자금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준비해온 덕택이었다. 천도교에서는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서 300만 교도에게 한 가구당 10원 이상씩 중앙대교당 건축성금을 걷었는데 그 금액이 무려 500만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5,000억 원에 상당하는 금액)에 가까웠다. 이 돈의 상당부분은 왜경에 의해서 압수되었지만 나머지 돈은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공급되었다. 김구선생이 임정요원들과 함께 광복 후 귀국해서 맨 처음 찾은 곳이 서울 우이동 봉황각 경내에 있는 의암 손병희선생 묘소였다. 그리고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린 김구선생의 귀국보고대회에서 김구선생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3.1운동과 관련한 천도교의 역할을 웅변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임시정부가 없었고, 의암이 없었으면 3.1운동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임시정부가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3.1운동과 관련하여 천도교와 의암성사의 공적은 가장 큰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 진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대한민국 역사학계나 정치계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오늘날 정부에서 주관하는 3.1절 기념식에서 손병희선생이나 천도교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지만 다른 인사들의 이름은 거론되고, 국가에서 건립한 ‘백범김구선생기념관’은 있는데 국가에서 건립한 ‘의암손병희선생기념관’은 아직도 없다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19. 2. 21. 화암(和菴) 김호성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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