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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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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2-12-30 06:23 조회 5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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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1)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알림 1; 2012년 1월 3일부로 2G 서비스의 중단으로 인하여, 본인의 손전화 번호가 010 - 6251 - 3240 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립니다.
알림 2; 연구소 방문은, 필자의 카페주소인 여기를(http://cafe.daum.net/oamdonghak/오암 동학사상 연구소)를 클릭하여 ‘김 용천 자료실’을 찾으시면, 회원이 아니시더라도, 방문객은 누구나 자료들을 검색하여 읽으실 수 있습니다.
포덕 153(2012)년 12월 30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유의사항
1. 이 글은 초고로, 여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과 문명사 분야를 연구하여 저서를 출간한 국내의 여러 학자들이 인류의 문명사(文明史)를 보고 이해한 종교와 문명사관(文明史觀)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종교의 출연 여부와 미래종교가 담당해야 할 역할(役割)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그들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살펴 본 글입니다. 이 글은 다양한 분야의 기초 지식이 없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난해(難解)한 글일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제인 '技術, 科學文明과 未來宗敎'의 설명에 꼭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지 않고, 전후관계를 고려하여 많은 양의 분량을 인용하였습니다.
2. 이 글의 기초적인 자료로 사용한 글들은, 대 부분 20세기 중엽에 저술된 것으로 미래에 대한 예견이 매우 추상적(抽象的)인 것이라 생각되는 점이 많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2012년에 직면하고 있는 技術, 科學文明과 宗敎의 현실에 대하여 폭넓은 문명사관(文明史觀)으로 보지 않고, 단지 현재의 시각(視覺)과 관점(觀點)에서만 이해하여 평가한다면 그 이해의 폭(幅)은 매우 좁아질 것입니다. 또한 난해(難解)한 설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중심적(中心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아놀드 토인비의 한 역사가로서의 종교적 접근들은 대개 60-70년대 전후로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미래세대에 대한 설명이 매우 단순(單純)하고 부족(不足)한 것 같이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사의 한 과정의 단면(斷面)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보면 한계(限界)를 벗어났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가능한 보완적(補完的) 성격을 지닌 자료들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아래의 연구자들의 글을 참고로 하였습니다.
J. G. 드 뷰스(J. G. de Beus)- "西洋의 未來(The future of the west)”
슈펭글러(Oswald Spengler)-西歐의 沒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시펭글러; 世界思想大全集 20. 大洋書籍. 1971.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토인비 歷史全集 全10卷 : 공덕룡 외, 대중서관, 1982 / 대한서적공사. 1985재판.
윌리엄 맥닐(William H(ardy). McNeill)- 西歐의 發興/ The Rise of the West.
존 호트(John F. Haught)- 科學과 宗敎, 相生의 길을 가다(Science and religion) 구자현 역. 도서출판 들녘. 2003.
존 호트(John F. Haught)- 다윈 안의 神./Deeper than Darwin 김윤성 역, 지식의 숲, 2005.
로마 클럽(Club of Rome / Roma Club )- “成長의 限界”(The Limits to Growth/국내에서는 "人類의 危機”란 제목으로 번역 간행/ 김승한 역. 삼성문고 15. 1972.
鄭載植- “宗敎와 社會變動”
張炳日- “技術文明과 宗敎;
강성위- ‘現代哲學에 있어서의 神의 問題'
공지사항;
포덕 154(2013)년으로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가 개설된 지 10년이 되는 해로, 천도교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심도(深度) 있고 분석적(分析的)인 논문을 5-6편을 발표하는 것으로 본 연구소의 제 1차 사업을 완료합니다. 본 연구소가 반세기를 넘게 걸쳐 수집(蒐集)하고 분류(分類)하고 비교(比較)하고 분석(分析)하는 가운데 필요한 글들을 10여 년 동안에 4-50편의 글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사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제 2차 사업으로 포덕 155(2014)년부터 포덕 161(2020)년까지 7 년간에 걸친 사업이 완료되면, 본 연구소의 역할은 끝나게 됩니다. 양차(兩次) 사업의 결과물들은 단행본(單行本)과 전집류(全集類)로 출간되어, 제 2차 사업이 완료되는 시기에 출발할 東學, 天道敎 歷史博物館의 개소(開所)에 따라 역사박물관에 보관 전시(展示)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 연구소는 역사박물관(歷史博物館) 부설(附設) 연구소(硏究所)로 이관(移管)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재정사항도 어렵지만 보다 힘든 것은, 이 저서들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교단이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아 자금(資金)이 순환(循環)되지 않으므로 재투자(再投資)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1930년대를 전후하여 교도 300여만 명을 이끌고 있던 교단은, 교단이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를 매월 100 여만 부를 소화하고(현재 남북한 인구를 산술적으로 고려하면 약 350 여만 부로 추정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뿐 만 아니라, 시중(市中)과 교단의 신서(新書) 출간(出刊)을 수용하여 각 분야 연구와 응용(應用)에 있어 타 교단에 비해 미흡(未洽)한 점이 많이 있고, 논리적(論理的) 체계화(體系化)와 천도교라는 독특한 종교이론과 융합(融合)하여 연구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학과 천도교는 뜨거운 가슴(感性)보다는 차가운 머리(理性)가 필요한 종교라고 정의를 할 수 있다면, 논리적(論理的) 사고가 필수적(必須的)이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미래를 예측(豫測)할 수 있는 거시적(巨視的) 안목(眼目)과 새로운 종교적 교의(敎義)의 제시(提示)가 없게 되는 참혹(慘酷)한 현실을 바라다만 보게 됩니다. 도약(跳躍)할 수 있는 대안(代案)의 제시가 필요한 때이지만, 논의(論議)를 하는 사람도 없고 같이 모여 논의하여 준비하자고 제안(提案)을 하는 사람도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간에 본 연구소를 이용하거나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또 한 해를 보내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내년에도 올해에 못 다 이룬 꿈과 새해에 기획하고 있는 것들이 한울님의 간섭으로 다 이루어지시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심고를 드립니다.
/ 오암 김용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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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앙자들은 가끔 미래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종교는 어떤 것이며, 인류의 오랜 역사를 이끌고 온 기성종교들은 어떻게 될 것이며, 거의 기복신앙에 매달려 있는 한국의 신앙자들은 그들의 기도들에 대한 결과에 충족하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각 교단의 신앙자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점점 종교에서 이탈하거나 반 종교 사상에 매료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현실세계의 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과학사상이 모든 사상을 함몰(陷沒)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미래종교를 알아보기 위하여 과학과 종교는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작이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화이트 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종교와 과학에 대하여 1925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인류에게 종교가 무엇이며 과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미래의 역사의 방향이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우리 세대가 내리는 판단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여기에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하고 일반적인 두 가지 힘이 있다. 그것들은 서러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 힘이란 종교적 제도의 힘과 정확한 관찰과 논리적 연역에 대한 충동의 힘이다.' /존 호트(John F. Haught)-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 P. 7. 원 저서인 화이트 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1967" 에서는 PP.181-2.
존 호트는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견해를 전제로 하고, 종교와 과학에 대한 현실적일 수 있는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과학과 종교"라는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존 호트가 제시한 그 질문이란 다음과 같다.
'과학은 종교를 지적으로 용인할 수 없게 만드는가? 과학은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배척하는가? 가련 진화는 신의 섭리라는 개념 전체를 믿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최신 생물학은 생명과 마음을 화학으로 환원할 수 있음을 보여 영혼과 정신의 개념을 망상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혹은 진정으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우리가 여기에 있도록 의도했는가? 자연의 모든 복잡한 양상들은 단지 맹목적 우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솔직히 우주의 어떤 방향성이나 목적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더구나 종교는 생태위기에 책임이 있지 않은가?' 등이다. / 과학과 종교 P. 9
일반적으로, 종교는 유신론적 신앙을 바탕으로 이해하려 하고 있고 과학은 무신론적 방식으로 종교를 이해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입장에서 주장되어 왔다. 상호간의 자신의 입장에서 논의되고 설명되어 왔기 때문에 합의점의 도출(導出)은 매우 어려웠다. 존 호트는 종교와 과학의 논점의 관계에서 몇 가지 핵심적(核心的)인 쟁점(爭點)을 제시하고 있다.
갈등/conflict ; 과학과 종교가 근본적으로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확신.
분리/contrast ; 과학과 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에 응답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갈등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
접촉/contact ;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화, 상호작용, 가능한 '공명' 특히 과학이 종교적, 신학적 이해를 형성하는 방식들을 찾는 접근법.
지지/confirmation; 매우 심오한 수준에서 종교가 전체 과학의 노력을 지원하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방법들을 강조하는 다소 조용하지만 극히 중요한 관점.
위와 같이 존 호트가 제시하는 이 네 가지의 핵심적인 쟁점은, 이언 바버(Ian Barbour)가 그의 책 "과학시대에 있어서의 종교/Religion in an age of Science-1990"에서 제시하고 있는 네 가지 유형과는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바버가 나의 갈등과 분리의 입장에 명쾌함을 더한 것은 인정하지만 대화와 통합 사이에서 충분히 명쾌한 논리적인 구분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바버가 대화의 통합이라 부르는 것을 더 넓은 제 3의 범주(호트는 접촉이라 했다)에 집어넣고 제 4범주로서 지지를 더 했다.이는 종교와 신학이 원리적으로 전체 과ㅣ학의 노력을 묶어서 키워내는 심오한 방법들을 내놓는 신하적 연구들이 점점 많아 지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바버도 이 점을 참작하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유형의 다른 측면들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 과학과 종교 P. 42의 註 1의 요약.
존 호트가 그의 저서 "과학과 종교"에서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 것을 요약하면 '옮긴이의 말' 속에 담겨져 있다.
'저자는 과학과 종교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네 가지 입장 즉 갈등, 분리, 접촉, 지지입장으로 정리하여 각 입장이 주요한 아홉 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하도록 했다. 갈등 입장은 과학과 종교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것을 주로 종교에 대한 과학적 회의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 입장은 유명한 과학 저술가인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년-1996년)이나 스티븐 혹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 )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년-2002년)의 유물론적 과학주의로 대변되는 것으로 오늘날 종교에 대한 과학계의 강력한 공격을 포함한다. 분리 입장은 갈등 입장이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과학에 다른 신념 체계인 과학주의, 유물론, 환원주의를 융합시킴으로 종교와의 대립을 유발했다고 주장한다. 분리 입장은 과학과 종교가 다른 게임을 하고 있기에 충돌이나 대립은 있을 수 없으며 겉보기에 충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과학과 다른 신념 체계를 융합시킨 것을 과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접촉 입장은 분리 입장이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분명하게 갈라줌으로써 중요한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과학과 종교가 우주론이라는 공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분리 입장의 소극적 태도를 떠나서 과학의 발전으로 새롭게 제시되는 개념들을 신학이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새로운 신학적 함축을 찾아냄으로써 신학이 실제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인 지지 입장은 과학의 진리 추구의 열정의 발로가 근본적으로 종교의 동기와 다르지 않은 점이나 과학의 방법이나 개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었거나 유사한 특성을 가진 점을 들어 과학 활동 자체가 종교에 의해 지지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서양 근대 과학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사회 속에서 형성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보며, 과학에 대한 종교의 승인과 지지가 얼마나 다각적이었던가를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하는 이 저서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존 호트는 "과학과 종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라거나 인간이 천상(天上)의 다른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근거가 있는가? 자연에 있는 모든 복잡한 체계는 과연 존재하는가? 20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확고한 진리의 제공자로 자리를 굳히면서 종교를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시키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학과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정리된 생각을 갖지 못함으로써 많은 혼돈을 겪고 있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네 가지 입장, 즉 갈등. 분리. 접촉. 지지 입장으로 정리하여 각 입장이 주요한 9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하도록 했다. 특히 저자의 신학과 과학 양쪽에 걸친 깊은 이해가 과학과 종교에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을 정돈시켜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번영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다윈 이후의 신"에서는 나는 다윈주의가 종교에 대한 이해에 나름의 빛을 던져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과연 진화생물학이 원칙적으로 종교와 생명 자체에 더 할 나위 없이 깊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나는 다윈이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상당히 심화시켰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이제 이보다 더 깊이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 고 존 호트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언제나 서로 적대적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과학자와 종교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둘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숙적(宿敵)으로 여긴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이런 통념(通念)을 벗어날 길은 없는 걸까? 저명한 신학자이자 조지타운 대학교 석좌교수인 존 호트는 신간 『다윈 안의 신/Deeper than Darwin』에서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을 들려준다. 그는 다양한 과학 분야 중에서 다윈주의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진화학[진화론]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과 종교가 또는 다윈과 신이 서로 적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호트는 고백적, 신학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의 균형을 유지하는 접근방법으로 다윈주의가 생명에 관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학이 자연과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현대에는 과학이 비과학적 신념으로까지 발전하여 오히려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종교와의 상호보완적인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진화의 신학’이라는 인식의 열린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각 저서들의 서평을 요약함.
註 00; 존 호트(John F. Haught); 1942년에 태어나 세인트 메리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메리카 가톨릭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지타운대학교 토머스 힐리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조지타운 과학. 종교연구센터의 소장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다윈 이후의 신>,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등이 있다 그동안 The Promise of Nature: Ecology and Cosmic Purpose, Mystery and Promise: A Theology of Revelation 등을 써왔다.
"과학과 종교"의 목차
1. 종교는 과학과 대립하는가?2. 과학은 인격적인 신을 부인하는가?3. 진화는 신의 존재를 배제하는가?4. 생명은 화학으로 환원 가능한가?5. 우주는 창조되었는가?6. 우리는 우주에 속해 있는가?7. 왜 자연에는 복잡성이 존재하는가?8. 우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9. 생태 위기에 종교가 책임이 있는가?결론 :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향하여
"다윈 이후의 신/ 김윤성 역, 지식의 숲, 2005."의 목차
머리말 | 서론1 다윈의 진리와 종교2 독법의 문제3 자연의 깊이4 절망보다 더 깊이5 진화의 이면6 도킨스보다 더 깊이7 설계보다 더 깊이8 깊은 다윈주의와 종교9 다윈 이후의 진리10 다윈과 신들11 죽음보다 더 깊이12 더 깊은 신학13 다윈, 신, 그리고 외계 지능체 탐사옮긴이의 말 | 주(註) | 찾아보기
註 00;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년 2월 15일에 잉글랜드 켄트 새넛 램즈게이트에서 태어나 1947.년 12월 30일에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서 죽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B. 러셀과 공동으로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1910~13"를 집필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하버드대학교에서 가르치며 광범위한 형이상학이론을 발전시켰다.
할아버지인 토머스 화이트헤드는 지금의 채텀 하우스 아카데미로 알려진 남학교를 설립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앨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영국국교회 목사로서 할아버지와 교대로 이 학교를 이끌어 나갔고 뒤에 새넛의 성베드로 대성당 신부가 되었다. 결혼 전 이름이 마리아 세어러 버크매스터인 어머니는 부유한 군대 재봉사의 딸이었다. 그들은 화이트헤드가 학교생활이나 활발한 운동을 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서 14세까지 집에서 가르쳤다. 14세가 되자 영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 중의 하나였던 도싯의 셔본 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고전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1880년에 화이트헤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수학강의에만 참석했고, 문학, 종교, 철학, 정치학에 대한 흥미는 대화를 통해서 충족시켰다. 1884년 5월에 그는 사도(Apostles)라는 지성인 토론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다. 화이트헤드는 1883~84년 수학우등졸업시험을 우수하게 치러 트리니티 장학금을 받았고, 트리니티 칼리지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J. C. 맥스웰의 전자기론(그의 동료의 학위논문 주제)에 대한 관심을 수학적 기호체계와 개념에 대한 정밀조사 쪽으로 확장시켜나갔다. 현대 대수학의 개척적인 연구에 힘입어 그는 일반 대수학과 관련된 기호논리체계들을 자세히 비교·연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1891년 1월이 되어서야 〈종합적 대수학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Universal Algebra〉(1898)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혼 직전, 오랫동안 간직했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그의 종교적 배경은 영국국교회와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은 사제였고 형 헨리도 사제로서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추기경 뉴먼의 영향을 받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약 8년 동안 많은 신학서적을 읽고 나서 그는 신학장서를 처분하고 종교를 포기했다. 이러한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사라졌지만 그는 어느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화이트헤드는 1898~1903년 〈종합대수 Universal Algebra〉 제2권을 집필하던 중 러셀과 공동으로 방대한 연구를 하게 되면서 〈종합대수〉 제2권의 집필을 중단했다. 그는 러셀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입학 장학금 시험을 볼 때 이미 젊은 러셀의 탁월함을 간파했는데, 1890년 러셀은 수학을 공부하는 신입생이었고 화이트헤드는 그의 교수였다. 1903년 트리니티 칼리지는 화이트헤드를 10년간 수석강사로 임명했고, 수학과 교수진의 수석교수로 선출했으며, 학교 규칙이 정한 최고 25년을 넘어 강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비록 런던에 그를 위한 직위가 없었으나 만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1910년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의 첫해에 화이트헤드는 대중을 위한 그의 첫 번째 책인 〈수학의 소개 An Introduction to Mathematics〉(1911)를 썼는데, 이 책은 현재까지도 같은 그런 종류의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의 하나로 꼽힌다. 1911년 런던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고 1914년 과학기술 임피리얼 칼리지의 응용수학교수가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화이트헤드는 또한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를 세우고 있었다. 이 물리학의 철학적 기초는 그의 연구의 시작에 불과했다. 화이트헤드는 이 3가지 개념(공간·시간·운동)이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지각의 일반적인 특징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1919년 그는 〈자연과학지식 원리에 관한 조사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를 출판했다. 이것은 탐구적이고 발전적이었으나 너무 철학적이고 복잡해서 물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화이트헤드는 1915년 철학자들과 함께 과학지식에 관한 인식의 토대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고, 비수학적 저서인 〈자연의 개념 The Concept of Nature〉(1920)을 출판했다. 그는 지각할 수 있는 인간정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관념론적 견해를 거부했지만 러셀과 G.`E. 무어가 이끄는 물리적 실재론 학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1920 년대 초 화이트헤드는 영어로 과학저서를 쓰는 가장 뛰어난 철학자였다. 1924년 초 하버드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그의 친구인 역사학자 H. O. 테일러가 화이트헤드의 보증인이 되어 하버드대학교에 5년간 철학교수 임용을 제안 받았다. 당시 그의 63세였고 임피리얼 칼리지에서는 길어야 2년 더 일할 수 있었다. 철학을 가르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었고 그의 아내 또한 하버드대학교로 옮기는 데 진심으로 동의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단순한 과학 철학자가 아닌 대석학을 얻었음이 곧 드러났는데, 그는 G. 라이프니츠와 G. 헤겔에 비교할 수 있는 형이상학자였던 것이다. 1925년 초에 보스턴에서 8개의 강좌를 열었고, 같은 해에 그의 신에 대한 초기 저작물을 덧붙여서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온 '과학적 유물론'(예를 들면 자연은 움직이는 물체, 즉 순전히 물질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견해)의 대두·승리·영향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
1926년 그의 〈발달중인 종교/ Religion in the Making〉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종교를 인간의 고독에서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했다. 즉 사회 현상으로서가 아닌 우주를 향한 개인의 마음가짐으로서 종교를 설명했다. 특히 화이트헤드는 데이비드 흄에 반대하여 적절한 철학이론은 '실천'(practice)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에 의해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기퍼드 강의는 화이트헤드의 변색적인 가설, 즉 우주는 생성되어가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와 신(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영구적 공급원)이 제공하는 것(실재)의 무한성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과정이라는 가설을 반영했다. 화이트헤드가 새롭고 어려운 전문용어를 쓰면서 이 가설을 1928년 6월 강의에서 소개했을 때 청중들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강의 내용은 총 25장에 달하는〈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1929〉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서구 형이상학의 가장 훌륭한 저서의 하나가 되었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이해 가능성에 확고한 신념과 과거 이원론을 극복할 만큼 폭넓게 전반적인 생각의 틀을 구성할 수 있는 우수한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무한성을 이해하는 데는 그 이전의 접근법을 취하는 것보다 더 좋은 체계가 없음을 알았다. 그는 오랫동안 확고했던 뉴턴 물리학체계의 붕괴를 보아왔고 그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철학, 과학, 신학에서 독단적 신념은 그의 적이었다. 〈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1933〉은 화이트헤드의 마지막 대 철학저서이며 일반 독자에게 가장 가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서구문명화 과정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인간성과 신, 그리고 우주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과 야만적인 힘이 한 역할을 통찰력 있고 조화롭게 반영했다. 화이트헤드는 새로움으로 향하는 삶의 충동과,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모험을 만들기에 충분히 안정된 사회가 절대로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 책에서 자신의 형이상학을 요약했고, 이것을 이용해 아름다움·진실·예술·모험·평화의 본질을 설명했다. '평화'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는 아름다움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종교적 입장을 취했다.
하버드대학교는 1937년까지 그를 은퇴시키지 않았다. 미국에서 처음 몇 년 동안 화이트헤드는 강사로서 동부와 중서부의 많은 대학들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인들을 좋아했지만 항상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1903년 이래로 왕립학회 회원인 그는 1931년 영국학술원에 선출되었고 1945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죽은 뒤 그의 몸은 화장되었고 장례식은 없었다. 출판되지 않았던 원고와 편지들은 그가 원하던 대로 아내가 없앴다. / 브리태니커
종교학에서 종교의 기원과 초기 종교의 일반적인 현상에 대한 견해는 일반화되어 있어 특기할 만한 논의는 없다는 것이 통설이다. 일반적으로 자연계에서 변화무쌍(變化無雙)하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기이(奇異)한 현상들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감(神秘感),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무서움이 원시인(原始人)으로 하여금 초월적(超越的) 능력자 즉 초자연적(超自然的) 존재에 대한 신앙과 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이유로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미 원시시대인, 채집시대, 수렵시대에서 채집과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벽화(壁畵)나 장법(葬法;장례의식)에서도 영혼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기원설의 자료가 된 것은, 지금도 원시적 생활을 계속하는 미개인의 종교에서 상당 부분이 원시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종교론”에서 인간이 왜 종교가 필요한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宗敎)는 무용지물이다. 과학(科學)l 종교에 대치될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 이미 대치되었다고 현대의 학자들은 단정했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어떤 인간사회도, 이성(理性)을 구비한 어떤 개개의 인간도(나는 감히 이성을 구비한 인간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성에 눈뜨지 않은 인간은 동물과 같아서 종교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종교 없이는 절대로 살지 못했고 또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이성에 눈뜬 사람은 종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교만이 이성에 눈뜬 인간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다음에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필요불가결의 지도를 주기 때문이다. 이성에 눈뜬 인간은 종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이 인간의 본성(本性)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宗敎論 國民敎育論/서문문고 107; 톨스토이. 김학수 역. 서문당. 1975. PP. 12-13.
톨스토이는 그의 문학작품의 대부분이 기독교에 대한 설명에 집착(執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종교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겠지만, 인류의 역사가 현대에 이르는 동안, ‘종교인들이 이성에 눈뜬 인간’이라는 그의 독특한 강변(强辯)은 대중으로부터 온당한 정의라고 평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하는 사람들, 무종교(無宗敎)를 선택한 사람들, 반 종교(反宗敎)운동가들이 몰지각(沒知覺)한, 즉 이성에 눈뜨지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매우 무지(無地)한 사람의 말장난이라고 냉소적(冷笑的)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이성에 대하여 올바르게 눈뜬 인간으로 올바른 이성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맥스 뮬러(M, Müller)가 말하고 있는 종교의 기원에 대한 견해. 즉 ‘종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만큼 오래전부터 있었다.’ 와 같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람들은 돌로 생활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석기(石器)를 통하여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이런 시기를 석기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석기시대 중에 후기인 신석기 시대에 종교의식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측되는 신상(神像)과 제사에 사용된 기구(器具), 호신부(護身符) 등이 발굴되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종교의 기원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 이어진 토기시대는 더 많은 종교적인 기구의 흔적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이런 견해와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스코트랜드 출신의 철학자인 플린트(R. Flint.)는 '인간은 아직 제일 낮은 발달단계에 있어서도 종교적 지각(知覺), 정서(情緖)를 자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우주도, 인간도, 인간의 마음도, 다 그렇게 지음을 받았다.’고 말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초기의 삶인, 채집(採集)과 수렵(狩獵)시대에서 부터 신화적인 색채가 다양하고 종교적인 의식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註 01. 다양한 종교의식에 대한 ‘학술적인 분류는, 통상의식(通常儀式; rites of passage)과 특별의식(特別儀式; rites of intensification)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통상의식은 개인생활에 중요한 변화가 있을 때 이를테면 출생, 사춘기, 결혼, 사망 같은 때에 올리는 것이고, 특별의식은 전염병, 폭풍우, 흉년 등 그 사회 전체의 위기에 처해서 사람과 靈界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기 위해서 올리는 의식이었다.’ 라고 린컨 바네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종교의 기원을 ‘자연현상과 生과 死의 神秘에 외포(畏怖)를 느낀 인간은 초월적 능력자에 대한 신앙과 정신계를 찬양(讚揚)하는 의식에서 발전시켰다. 고 말하고 있다. / 思想界論文集(3)-思想界論文集刊行會. 1998. PP. 295-296.
종교의 기원을 계시(啓示)를 바탕으로 한, 신화적인 설명을 하려 하지 않고, 종교를 인류의 역사적 문화적인 소산(所産)으로 보고 그 기원을 객관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이러한 견해와 태도는 8 세기경의 그리스의 시민사회에서 개화(開花)된 근대적인 종교론의 중요부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의 세계관을 직접 다룬다는 것과 이것이 원시문화 전 부분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가졌다. 18, 9세기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종교기원설이 나왔다. 예를 들면, 18세기에는 드 브로스((C. de Brosse)의 민족학적인 주술숭배(呪術崇拜)기원론, 헤겔(G. W. F. Hegel)의 민족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 기원론이 있었고, 19세기에 들어서는 뮐러(F. M. Müller)는 비교종교학의 시조로서 인간 언어의 병(病)에 의한 자연신화 성립에 의한 기원론, 맥레난(J. F. McLennan)은 토테미즘 기원설, 스펜서(H. Spencer)는 사령숭배(死靈崇拜)를 바탕으로 한 조상숭배(祖上崇拜) 기원설 등이 등장하였으나 타일러(F. B. Tylor)의 애니미즘 기원설이 모든 기원설을 제압하여 정설화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학에서는 종교의 기원을, 크게 종교의 의식의 발현이라는 측면과 종교의 심리적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유물론(唯物論)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기원설이 나왔으나, 뒤르케임(E. Durkheim). 레비 브률(L. Lévy-Bruhl), 프로이드(Preud) 등의 관념적인 종교철학이나 주정주의적인 심리학 또는 형식 사회학과 더불어 호교적(護敎的)인 영향을 가져오고 특히 일신관설(一神觀說)이 유일 최고신의 숭배가 종교의 기원이라는 설을 민족학적 자료와 문화권설(文化圈說)을 응용하여 강조하고, 문화인류학은 그 기원을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맡김으로써 유물사관에 의한 기원론이 붕괴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인류의 삶의 전 영역에서 괄목(刮目)할만한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20세기를 전후한 기술문명의 시작과 발전은 사상을 초월하여 지금은 IT시대가 사회의 전 영역을 관통하고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잘 관찰하여 보면, 만물과 만사는 조금씩 변하다가 그 속에서 잉태(孕胎)된 새로운 문명의 씨앗(萌芽;맹아)이 자라 기존(旣存)의 문명이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개선(改善) 변형(變形)되다가 소멸(消滅)되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배우게 된다. 20세기를 지나서도 기술문명(技術文明)은 기술혁신(技術革新/ technical innovation) 또는 기술혁명(技術革命/ The evolution of technology)으로 인한 급속한 변동으로 인하여 사회의 기준이 되는 핵심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사회전반에서 인류문명의 종말(終末)을 고(告)할 수도 있는 수많은 가치충돌(價値衝突)과 갈등(葛藤)을 초래하여 계층간(階層間)의 충돌과 배척(排斥)을 통하여 한 사회가 해체(解體)의 수순(手順)을 밟고 있는 것 같은 매우 위험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장병일(張炳日)은 그의 저서 “技術文明과 宗敎;” /대한기독교서회. 1968.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질서의 오묘한 비밀을 드러내자는 것이 기술문명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인간 전체에게 비애와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여기에서 기술문명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잇따라 나오게 마련이다.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 그리고 신앙과 초월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기술과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주객의 문제들을 외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중략-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전자 시대라는 전제하에서 모든 것이 실용적이고 즉흥적이며 전문화된 것을 즐겨한다. -중략-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콧대 앞에서 인간은 점차적으로 소외당하고 비인간화 내지는 비인격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지탱했던 인간의 존엄성, 그것마저도 ’기계‘라는 거창한 괴물 앞에 뿌연 안개처럼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일을 기계가 할 수 있다는 데서 인간은 기계를 섬기게 되었고 심지어는 기계를 하나의 우상처럼 추앙하게끔 되었다. 이제는 기계적이라는 말과 과학적이라는 말은 동의어로 씌어지게 되었고 인간이 만든 기계이면서도, 그 인간은 지금 기계의 노예로 움츠리고 있다는 실정이다. / “技術文明과 宗敎;” 대한기독교서회. 1968. PP.11-12.
주(註) 00; 萌芽(맹아)- 식물의 새싹이나 눈 또는 새순. 그리고 사물의 시초가 되는 것을 맹아라고 하고 그러한 시기를 맹아기(萌芽期)라 한다.
주(註) 00; 기술혁신(技術革新)과 기술혁명(技術革命) - 기술혁신은 기술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일이나 낡은 기술, 설비, 방법 따위를 버리고 새롭고 선진적인 기술과 공정을 도입하여 기술적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기술혁명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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