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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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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2-12-30 06:19 조회 4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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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4)
註 00;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년 4월 14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1975년 10월 22일에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요크에서 생을 마친 영국의 역사가이다. 역사철학을 확립한 저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는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조카로서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공부했다(1911). 아테네에 있는 영국학교에서도 잠시 공부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문명쇠퇴에 관한 철학을 전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12년 베일리얼 칼리지의 고대사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15년부터 영국 외무부 정보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의 영국대표를 지낸 뒤 런던대학 비잔틴과 근대 그리스 교수로 임명되었다. 1921~22년 그리스-투르크 전쟁 동안 〈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신문의 통신원으로 일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그리스와 투르크의 서부 문제 The Western Question in Greece and Turkey〉(1922)를 썼다. 1925년 런던 경제학교의 국제사 연구교수 및 런던에 있는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연구책임자가 되었다.
1922년 그는 불가리아 농민이 여우가죽 모자를 쓴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역사의 연구〉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머리쓰개로 묘사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저서는 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질, 즉 그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 그 형태에 대한 시각, 엄청난 학식, 예리한 관찰 등을 특색 있게 보여주었다. 〈역사의 연구〉에서 토인비는 인간역사 과정에서 26개 문명의 등장과 쇠퇴를 검토하고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결론지었다. 문명은 그 지도자들이 창조적으로 대응하기를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 슈펭글러가〈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에서 분석했던 것과는 달리 토인비는 문명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연속되는 도전에 계속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도 달리 역사가 경제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역사의 연구〉를 쓰는 동안에도 토인비는 수많은 저서를 썼고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해외연구 책임자(1939~43)로, 외무부 연구담당 부서의 책임자(1943~46)로 일했으며 은퇴할 때까지 영국경제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많은 책을 저술했던 그는 1950, 1960년대에 세계종교·서구문명·고전역사·세계여행 등에 관한 책들도 계속 출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토인비는 그가 중점을 두는 역사의 주인공을 문명에서 고등종교의 탁월성으로 바꾸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시련의 문명 Civilization on Trial〉(1948)·〈동방에서 서방으로: 세계여행 East to West : A Journey Round the World〉(1958)·〈헬레니즘: 문명의 역사 Hellenism : The History of a Civilization〉(1959) 등이 있다. 토인비는 다른 역사가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비판은 그가 실제자료와 필적하는 가치로 신화와 은유를 사용한 것과 문명의 등장과 몰락에서 그 재생력으로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에 집중되었다 (→ 색인 : 헬레니즘). 많은 비평가들은 토인비가 도달한 결론이 역사가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도덕가의 것이라고 불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현대 역사연구의 전문화 경향에 대한 고무적인 해답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註 00; 아놀드 토인비 명언 모음.
1.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 The history of mankind is a history of challenge and response.
2. 우리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하나님이나 자연에게 맡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 We humans have the freedom of choice. And we make it our responsibility to God or nature, refuse to leave. We must fulfill our responsibility. It is up to us.
3. 전쟁은 모든 문명을 파괴시키는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The fact that all the main cause to destroy civilization wars.
4. 윤리와 도덕의식을 갖지 못한 민족은 멸망한다. / Ethics and moral consciousness did not perish nation.
5. 현대인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 다만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 Modern man knows everything, no matter what. Just do not know it yourself.
토인비의 종교관은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일반적인 개념정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나 인간의 삶에서 고통스러움에서 위로를 받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참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에서는 일부의 종족이 아닌, 일부의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 즉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다 같이 공유하고 있는 고통스러움에서 위로를 받고자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토인비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는, 교의(敎義)나 의식이 아닌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정신을 말하고 있다. 토인비는 언제나 열심히 노력해 오지 않았더라면 또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 않는다면 자신은 부자가 되었을 리가 없다고 전제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하나의 기본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그것입니다.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이외의 생물인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인 것이 어려운 점은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뛰어난 특징입니다. -중략- 인간인 이상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같은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앞서 가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고뇌는 인생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여기에서 구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종교를 갖는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습니다. 내가 말하는 종교란 교의(敎義)나 의식이 아닙니다. 타인에의 사랑이나 타인의 행복에 대한 보살핌의 뜻입니다. 즉 자기를 넘어선 무엇인가를 구하도록 이끄는데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정신을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와 마찬가지로 사는 목적으로서의, 또는 믿는 대상으로서의 종교(내가 말하는 뜻의)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동시에 사회정의를 위해 살고 사회정의를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도 또 그 때문에 살고 그것을 믿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사회정의는 부자에게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그것은 부자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왜야하면 부정하게 특권을 누리는 것은 정신적으로 받아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략- 내가 받아드리는 교훈은 모든 인간. 가난한 사람, 지난날에 가난했던 사람, 풍족한 사람, 지난날에는 풍족했던 사람의 누구나가 ‘무엇인가’ 때문에 살고 또 그것을 믿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엇인가’란 타인의 희생으로 자기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 자기의 힘을 끝까지 이용하는 것 같은 행동을 자발적으로 삼가는 무엇인가입니다. 따라서 결론으로 내가 이미 말한 논점에 되돌아갑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주는 어떤 종교를 위해서 살고 또 그것을 믿지 않는 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도 또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도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 토인비역사전집 2권; 토인비와 당신의 대화 PP. 110-112.
와까이즈미교수(약칭으로 W교수)는 미래 종교에 대한 질문으로 21C의 특징을 전제로 설명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W교수; 이제부터 21C까지는 아마도 과학기술의 시대가 계속하리라고 봅니다만,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경우에 인간은 정신적 충족감을 종교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무릇 연적존재(靈的存在)로서의 인간은 신앙 없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가 있는 것일까요. 현대인의 내면적 요청에 충분히 응답하려면 기성종교는 현상 그대로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동일적인 세계종교가 요청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토인비; 나는 이미 과학과 기술이 오래된 고등종교의 전통적인 교의의 일부의 신용을 떨어뜨리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내가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기술의 비인간적 효과에 대한 해독제가 되는가, 인간은 종교없이 살 수가 있는가, 어떤가. 종교의 기성(旣成)의 형식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가 어떤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과학과 기술은 종교의 대역(代役)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즉 과학과 기술은 고등한 것이거나 낮은 차원의 것이거나 모든 종교가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W교수;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교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고 계시는 ‘고등종교’와 ‘하급종교’라는 말의 뜻을 좀 상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토인비; 내가 말하는 ‘고등종교’란 개개의 인간을 궁극의 정신적 실재와 직접 교류시키려 하는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급종교’란 그 어떤 중간적 매개(媒介)- 비인간적 자연 혹은 집단적인 인간 권력-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우리를 정신적 실재와 교류시키려 하는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어떠한 인간도 종교 없이 살아왔다고는 생각지 않으며, 또 살아 갈 수 있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종교를 느끼고 있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종교에 눈뜨고, 종교가 무엇인가를 알고, 종교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것입니다. 게다가 개인적인 위기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즉사(卽死)가 아닌 죽음이라는 최후의 위기를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즉사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또 가령 그 생애가 아무리 짧더라도 죽기 전에 아무런 위기 없이 생애를 마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성종교의 교의는 꾀 오랜 옛날 우리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문화적, 지적, 기술적 조건 밑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종교적 신조는 과학 용어로는 답할 수 없는 의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종교의 교의는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시나 신화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중략- 다행이도 우리는 시나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나 신화의 표현은 우리가 계승한 낡은 종교의 표현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낡은 종교가 세력을 잃어 온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말로 이러한 영원의 진리나 교의를 고풍(古風)의 표현을 취한 감정적인 형식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영원의 진리나 교의를 현대적인 형식으로 고쳐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현대적 형식도 장래엔 반드시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이 되어 또 후배의 손으로 다시 고쳐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겠지요.
다음엔 통일된 세계종교에 대해섭니다. 모든 고등종교의 영원한 본질은 같다 -그렇게 나에겐 보입니다만-고 하는 의미로는 통일된 세계종교란 항시 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발언은 매우 논의가 분분한 쟁점(爭點)일 것이요, 어떤 고등종교의 신자도 그 대부분은 이 일을 단호히 부정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고등종교와 철학의 윤리적 교의는 실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종교의 시적이고 신화적인 표현이 표준화되는 것은 확실히 슬픈 일입니다. 나는 표현을 현대적으로 개정(改正)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똑같은 것으로 표준화 해주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기질은 한결같지 않을뿐더러 기질의 각 타이프 하나하나에 대해서 똑같은 진리와 교의라 할지라도 다른 표현형식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표현의 다양성은 반드시 인종, 국적의 상이(相異)와 합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인간의 기질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타이프의 인간 기질 각자에 대해서 종교와 종교의 표현은 어프로우치(approach/접근방식 또는 형식)가 다르지 않아선 안 됩니다(달라야 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등종교가 하급종교에 의해서 대치(代置)될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내가 말하는 하급종교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하급종교란 자기의 중심성(中心性)을 극복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는 점에서는 고등종교와 보조(步調)를 맞추고 있지만 우리의 동포 전부를 사랑하고 우주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가르치는 점에 대해서는 고등종교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급종교는 자기네 종족의 권력을 넘어서는 것은 어떠한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나에게는 사악(邪惡)한 종교 형태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유태교, 회교의 말로 하면은 이것은 우상숭배의 한 형식입니다./ 토인비 역사전집 2권 “미래에 살다.”의 종교에 대한 대화 PP.69-71.
前略 - 왜냐하면 문명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여러 문명이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만난다. 그리고 이 조우(遭遇)로부터 다른 종(種)의 사회 즉 여러 가지 고등종교가 이 세계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인 탐구의 종국(終局)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등종교라면 어느 것이나 이 세계라는 관계만으로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고등종교가 나타나는 이 현세(現世)에 있어서의 역사는 천국의 생명에 대한 하나의 양식이며, 이 세계는 그 나라의 일개의 주(州)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는 신학으로 옮아간다. -이하생략./토인비 역사전집 5권 ‘試練에 처한 文明(Civilization on Trial)의 序文에서
'앞으로 20세기 후반기가 당면할 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해볼 때 누구나가 모두 암담한 위기만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그 위기를 운운하면서 어째서 그 방지책을 구체적으로 꾸며내지 않으려 하는 지 그것이 더욱 위기적인 현상이라 하고 싶습니다. 본인이 보는 바로서는 장래의 위기란 원자전을 수반하는 새로운 대전(大戰)이 아닙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자무기는 전투원이나 비 전투원이나를 막론하고 무차별하게 살해해버립니다. 확실히 전쟁의 기성관념에 혁명적인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인류의 자멸(自滅)을 혹시 막아버리고 영영 전쟁을 근멸(根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가정할 때에 새로운 사태(事態)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보건대 전쟁은 늘 문명의 부침(浮沈)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보면 전쟁의 근멸이란 인류의 장래의 행복을 줄 것 같은 희망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전쟁이 근멸된다고 해서 긴장과 투쟁과 분규(紛糾)마저 영영 근멸되리라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중략-
우리 인간이 타고 난 것으로 세 가지의 화근(禍根)이 있습니다. 전쟁(戰爭), 질병(疾病), 기근(饑饉)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쟁과 질병을 없애버리는 대가(代價)로 기근에 떨어야 할 것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행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과학인 수단으로 세계 식량을 증산해 왔건만 아직도 사망률과 출산률의 조절을 그르치면 중대한 문제를 야기(惹起)시킬 실정에 있습니다. -중략- 공안(公安)과 사회정의는 누구나 갈망하는 중요한 생필(生必) 조건입니다만 오늘날 크나큰 두통거리는, 그러면 이런 의미와 정의와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덜하고 더하기에 따라 인간생활에는 크나큰 영향이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경향은 자꾸만 공안의 편으로 기울어져 가는 모양이니 그것은 공안에 비하면 자유란 하나의 사치품이요, 또는 너무나 자유에 치중한 즉 위험하다는 데에서 오는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생활이란 어느 분야에 있어서 자유가 확보되지 않으면 해나아 갈 수 없는 법이어서 이것이 기계적인 제한을 받는 경우에는 반드시 공안에 대결해서라도 일종의 반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동의 발판은 다시 말할 것 없이 종교이며, 그렇게 되면 문제는 한 고비 더 우울한 모습을 띠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현대인은 영(靈)의 무료(無聊)를 무엇으로 충족시켜야 하겠습니까? ‘영의 무료’는 과학에서 왔습니다. 과학은 종교를 변모했습니다. 그 자신 일종의 자기 충족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듯싶은 이 새로운 인간의 무기는, 인간 이외의 물질은 물론 인간의 육신에 이르기까지 지배를 해버린 것입니다. -중략- 오늘의 인류를 쉬운 말로 표현해 본다면 성년(成年)의 지각에 도달하지 못한 처지로 무기만은 성년의 무기를 들고 있는 미성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기술문명과 수준이 같은 만한 정신적인 성숙을 보기 전에는 인간의 행동은 자타(自他)에 대하여 흔히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기가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성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 즉 머지않은 장래에 20세기 이후 새로운 종교가 나타날 것을 믿는 바입니다. 종래의 종교에 비하면 외관(外觀)에 있어서 퍽이나 기이(奇異)한 종교일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든지 나타나고야 말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우리들의 괴로움을 풀어주는 데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들 앞에서 뼈아픈 시련을 강요할 것으로 보이는 우리들의 여러 고통스러운 문제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종교의 능력을 다루는 시금석(試金石)이라 하겠습니다.' / 토인비 역사전집 5권 雜錄의 ‘時代의 挑戰(Challenge of Era)’ PP.7-9.에서
註 00; 공안(公安)/ public Security)과 반동(反動/ reaction) - 일반적으로는 중국에서, ‘경찰(警察)’을 이르는 말로 이해하고 있지만, 공안(public peace (and order); public safety/security)이란 공공의 안녕과 질서가 평안히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동(反動)의 원래의 의미는, 물리학에서 어떤 작용이나 물체의 움직임에 대하여 일어나는 반작용적 움직임을 말한다. 또 실용과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관창(灌窓)에서 나오는 물의 가속에 의해 발생하는 반작용에 의한 충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정치 사회분야에서는 반동(反動)이란 진보, 개혁, 혁신 등에 대한 반대개념이다. 개혁, 혁신은 역사의 흐름을 저지하는 것이므로 일체의 사회적 변혁을 부정하고 구체제의 부활을 지향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토인비는 정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조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종교에 대한 정의를 기독교적인 교의를 바탕으로 하고는 있지만, 역사학자로서의 입장은 조금 다른 면을 제시하고 있다.
토인비 역사전집 7권 回顧錄(원제는 experience/경험 또는 체험) 중의 종교-내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PP. 154-198.에서 토인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의 의미와 실재에 대한 인간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의 종교란 우리들 각자가 의식에 눈뜨는 장(場)인 우주 현상의 배후 내지 그것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의미한다./P.154.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우주는 외관(外觀)이나 경험과는 거꾸로 근본적, 궁극적으로는 합리적이며 좋은 것이며, 또한 자기는 죄 많기는 하지만 구제될 수 있는 존재라는 보증을 얻고자 절망(絶望)한다. 역사적인 고등종교는 자기 바로 이와 같은 보증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이 보증을 성의를 가지고 그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제공하며, 또 종교가 만물에 관해서 행하는 설명은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의문의 여지없이 진실인 발견 혹은 계시라고 마음속에서 믿으며 권위를 갖고 말한다. 인간에 있어서 극히 중대하다고 간주되는 지식이 이와 같이 제공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필요 중에서 가장 강하게 통감되어 있는 것의 하나를 채워주는 듯이 생각된다. 게다가 종교가 알려주는 것은 다만 하나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행동을 위한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서 우주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놓여져 있는 상황 속에서 구제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구제를 구하는 요구는 진리를 구하는 요구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인간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고등종교의 장악력이 이토록 일반적으로 확대되고 그리고 이토록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상의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 장악력은 하나의 조건을 채우느냐 채우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즉 인간이 종교를 받들려고 하면 그 종교의 교의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고등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의도 그 종교의 견지에서 보면 근본적인 것이나 나에게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중략- 왜냐하면 나는 이들 교의를 우주의 본질에 대해서 내가 마음에 그리는 것과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자연의 균일성에 대한, 나의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신념과 그 교의를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PP. 160-161. 라고 하여
토인비는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을 믿으려 했고, 교의(敎義)의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이며 비과학적인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신념과 그 교의의 부조화(不調和)에 대하여 종교에 대한 주, 객관성이라든가 정통적인 신념과 교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의문, 신(神)의 사랑과 전능(全能), 우주와 인간, 그리고 인간의 자기중심성(自己 中心性) 등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설명함으로서 기독교적인 종교 정의를 뛰어 넘으려 했다.
토인비 역사전집 7권 回顧錄(원제는 experience/경험 또는 체험) 중의 종교에 있어서의 변화의 기미. PP. 344-354.에서는
인간의 심령의 특이한 특색은 의식과 선택 능력인데 종교는 여기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는 부수물이라고 이제야 나는 믿게 되었다. 나의 신념으로는 개인이나 사회가 의식하고 있건 없건 모든 인간은 자기 개인의 종교를 갖고 있으며, 그리고 모든 인간사회는 집단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내가 믿는 바로 우리들 각자는 설렁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지라도, 그리고 진정으로 그렇게 믿으면서 부정할지라도 확실히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물리적 자연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자연도 진공(眞空)을 싫어한다. 만일 우리가 이어받은 종교를 부인하는데 성공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과 대체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용품은 이전의 그것보다 더욱 나쁘고 더욱 낡은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중략- 왜냐하면 거기에는 여전히 종교가 없는 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대용품으로서 과학을 인간에 준다는 것은 떡을 달라는 아들에게 돌을 주는 것과 똑같이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인 것이다. 근대 서구인과 그 여행의 동반자인 비 서구인은 불가불 조상 전래의 종교를 무엇이든 다른 종교와 대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영혼 속의 정신적 진공을 채운 의심할 여지없는 종교는 광신의 온도가 비등점(沸騰點)에 달하여 그것을 넘은 시기의 그리스도교보다도 확실히 나쁜 것이었다. / PP. 345-346.
우리의 조상이 자연환경의 지배를 향하여 연약하고 소극적인 제 1보를 내디딤으로서 사람이 된 순간 이래 인간의 꿈은 언제까지나 비인간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배하는 일이었다. 그 후 백 만년에 걸친 노력은 달성된 결과에 비하여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략- 인간은 자연환경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인위적 환경을 자신의 주위에 만들어 냄으로써 자연환경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 인위적 환경은 근대인의 기술의 소산(所産)인데 그 기술은 과거 몇 세기 동안에 그 때까지 인간 역사의 전 기간보다도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으며 또한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생시에는 그 때까지의 250년보다도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기술로서 결정적으로 자연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것은 기술이지 인간 자신은 아니다. 그리고 새 주인 쪽이 먼저 주인보다도 횡포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환경의 노예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은 원래 자연이 부여했었던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전에는 자연이 채찍으로 인간을 징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의 기술이 채찍으로 인간을 징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현재의 곤경은 그저 아이러니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이다. 기술에 대한 인간의 예속과 이 예속에 대한 인간의 공허한 반항은 예견할 수 없는 가공할 클라이막스를 향하여 움직였으며 1945년 이후로 그 움직임이 점차로 가속되고 있다.
인간이 전후(戰後)의 시기에 저질러온 그리고 입어온 일체의 악업(惡業)속에서 역사적 종교가 우리의 시야 속에 다시 출현하였다는 것은 고무적인 유일한 사건이다. 이것은 인류를 놀라게 한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들 묵은 종교가 마침이 중대한 시기에 뜻밖에도 되살아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묵은 종교는 이데올로기와 기술이 약점이었던 바로 그 점에서 항상 우월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종교는 충분한 인도와 도움을 주어 왔다. 인생의 길이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이라는 상태는 인식을 가지며 그리고 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그것과도 비길 만한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처럼 이 세상에 삶을 얻고 죽을 운명에 있는 생물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시련인 것이다. -중략- 실제로 역사적 종교의 재등장에 희망을 걸어도 거기에는 그럴싸한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종교는 그 운명의 밑바닥에 있을 때 정신을 바꿈으로써 역경에 대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고등종교는 그 악한 특성 때문에 그 밖의 점에서는 자기보다 유치한 선행종교보다도 한층 열악한 것이 되었다. 이 특성이란 고등종교의 빼버릴 수 없는 당파성과 방임해버린 증오이며, 고등종교는 이와 같은 정신으로서 서로 싸웠다. 각 종교의 신자는 서로 다른 종교의 신자와 싸우고, 다른 종파의 신자와 한층 더 격렬하게 싸웠다. -중략- 이제 역사적 종교는 상호적인 자비의 정신으로서 우리의 시야 안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 회심은 예부터 장애물을 제거했다. 이들 종교가 인간에 대해 정신적인 봉사를 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중략- 인간의 개성에 대한 현재의 위협은 우리의 조상이 인간이 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인류가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위험이다. 인류의 육체적 존속에 대한 위협은 이 정신적 위기의 부수적 결과임에 불과하다. 존재의 근원이며 구제의 원천인 궁극적인 정신적 실재와의 접촉을 되찾는 것을 도와줌으로서 인류가 스스로 구하는 데 힘을 빌리는 것은 고등종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PP. 349-351
우리는 미래의 세계를 내다 볼 때 오늘날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종교공동체 중의 어떤 특정의 것이 장래 어떤 특정의 종교공동체와 결합하게 될 것인지 어떤지 예견할 수 없다. 또한 어떤 특정의 교의(敎義)가 현재의 형태로 유지될 것인지 아니면 수정될 것인지 그리고 만일 수정된다면 그 수정의 방향과 정도는 어떠한 것이 될 것인지 하는 것도 예견할 수 없다.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것은 변화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제도와 신학의 교의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불가지론자뿐 만은 아니다. 이러한 것이 인간을 초월한 혹은 인간 위에 있는 것 즉 유신론자(有神論者)의 말을 빌면 신적인 것을 인간이 형태로 나타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될 것이다.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인간이 나타낸 것은 인간이 한 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특정한 때와 장소에 있어 유용한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는 생명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는 그 걸음을 빨리하고 있는 기술 진보의 가차 없는 힘에 밀려 인간 생활의 변화는 점점 빨라져 가고 있다. 유위전변(有爲轉變)이라는 가차 없는 사실이 제시하는 문제는 언제 어떤 곳에서나 교회의 당국자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모든 인간사상의 변화가가 미증유의 속도를 가지고 있는 시대에는 특히 절실한 것이 된다. -중략- 역사적인 종교의 각각이 어떻게 변화하려 하고 있는지 혹은 이들 종교 상호간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려고하고 있는지 우리는 예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호간의 존중심을 표시하고 서로를 올바르게 평가한다는 이들 종교에 공통된 새로운 정신은 영속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는데 만일 이 신념이 옳은 것이라면 이들 종교의 각각이 다른 종교의 신자에게 있어서 이때까지 볼 수 없었을 만큼 친근한 것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가 있다. 그리고 궁극적인 정신적인 실재를 진정으로 탐구하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혜택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혜택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 각각이 도달하려고 하고 있는 동일한 목표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기회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발에 맞는 길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 PP. 352-353.
최근의 기술의 놀랄만한 진보에 따른 소위 ‘거리(距離)의 말살(抹殺)’ 이전의 과거에는 개인이 마침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태어나 자랐다는 우연에 의하여 그 사람의 종교는 그에게 실질적으로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서 정해져 있었다. 그는 조상의 종교를 자동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무지와 그 무지가 빚어내는 편견으로 그에게는 다른 종교를 믿게 될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구 세계에 있어서는 오늘날 약 100 년에 걸쳐 신교도로 태어났거나 가톨릭교도로 태어난 서구 그리스도교는 각각 상대되는 형태의 서구 그리스도교를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성숙하는 연령에 도달하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형태의 그리스도교를 지켜나갈 것인지 아니면 또 한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교를 채택할 것인지의 선택이 가능했던 것이다. 제 3의 선택으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버리고 불가지론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발을 들여놓으려 하고 있는 시대는 선택의 범위가 조금 넓고,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 더욱 빈번해질 시대이다. 개인의 종교가 그 사람이 이어받는 것이 아니고 성년에 도달했을 때 스스로 선택한 종교(그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난 종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인 것이 보통인 그러한 시대. 인류의 종교사(宗敎史)에 있어서의 그와 같은 장래의 시대를 우리는 기대할 수가 있다. 이것은 미래의 인류에게 하나의 정신적 이익인데 이 이익은 우리의 시대에 온갖 역사적 종교의 신자들을 갑자기 사로잡는 회심에 의하여 이미 눈에 보이는 데까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 PP. 353-354.
토인비 역사전집 9권. 現代의 挑戰(원제;Change and Habit/ 變化와 慣習; The challenge of our time) 중에서 제 3부 自由를 위한 宗敎에 의연히 남아 있는 餘地. PP. 165-197.에서
세계종교가 지금까지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세계국가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지적했다. 세계국가나 세계종교는 어느 쪽이나 다 인류의 상당부분에 걸쳐서 그러나 장기간 통합하는 일에 성공은 했지만 인류전체를 통합하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현재 세 개의 세계종교- 불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회교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세계국가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인간은 분열적인 작용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세계국가가 복수로 존재했었다는 것, 그들 세계국가의 대부분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국가 건설에 있어서 초기의 반동이 매우 컸다는 등에 나타나 있다. 이 반대는 앞서 본 바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 나중에 가서는 이해와 충성으로 바뀌어졌는데, 이것은 초근 5천년 동안 진행되어온 통일운동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있어서 고등종교의 초기에 있어서의 신자 간의 마음과 지성의 일치는 대부분의 경우는 중도에서 분열을 초래했다. 모든 고등종교에는 단일한 민족의 공동체, 또는 단일한 문명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던 것들도, 예를 들자면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 또는 힌두교에 있어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세계의 전도적인 고등종교에 있어서의 분열은 보다 격렬하였고 그 가운데 유대교에 기원을 가진 두 개의 전도종교인 그리스도교와 회교의 경우가 가장 격심했다.
세계종교에 있어서 분열은 그들 종교의 원칙에 대한 배신이며, 목적의 포기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만든 제도에 선천적으로 붙어 다니는 불완전성의 결과요, 표식이다. 그러나 고등종교가 많은 역경과 싸우면서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역사 및 인간의 역사상 가장 중대하고 혁명적인 새로운 출발이다. 고등종교는 인간을 인간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폐쇄사회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이다. 원시시대의 인간이 인간 이전의 그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생활양식은 처음부터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하나였다. 그 종교생활은 사회생활 전체의 일부였다. 이 단계에서는 생활의 종교적인 면과 세속적인 면과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구별지울 수조차 없었다. 인간의 모든 생활이 동시에 종교적이며,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예술적이었다. 예를 들면 농경(農耕)은 먼저 경제적인 활동이었고 이에 못지않게 종교적인 활동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농경이 시대적으로 새로운 발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략- PP. 165-166.에서
여러 고등종교는 인간을 궁극의 영적 실재와 직접 개인적으로 접속시킴으로써 인간이 우연히 어느 때, 어느 곳에서 태어난 결과 말려들어가게 된 사회에서 인간을 정신적으로 독립시켰다. 고등종교에 의해서 계시를 받고 영감을 받은 인간은 하나의 독립된 윤리적인 힘으로서 사회와 대치(對峙)하는 정신적인 힘을 받고 있다. 이런 인간은 그가 속해있는 사회를 밖으로부터 볼 수가 있으며, 사회 자체보다도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에서 판단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정신적 해방은 개인에게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가 시키는 일이 그가 인정하게 된 보다 고차원적인 윤리 기준에 어긋난다고 판단했을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서는 몸을 내던져라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런 중대한 선택에 직면했을 경우, 윤리적으로 자유스럽다는 것은 인간 끼리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따르도록 윤리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 반항함으로써 개인은 말할 것도 없이 순교의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회가 그를 순교자로 만든다면, 사회는 순교자가 그로 인해서 목숨을 던진 여러 가지 원리에 의해 패배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 순교(殉敎)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 정신적 자유란 이미 지적한 바와 다른 모든 영역-정치적, 경제적, 심미적 영역-에서의 자유의 원천이다. 인간이 최초로 개인의 자유를 획득한 것은 종교의 영역이고 각 고등종교는 그 최초의 매개체였던 것이다. 이 인간을 해방하는 종교혁명은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한 번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 P. 167.
인간은 그 최초의 모습, 사회에의 예속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고등종교는 아주 큰 은혜를 인류에게 베풀었다. 그러나 이 은혜는 다른 은혜들처럼 그 가치에 알맞은 대상(代償)을 요구했다. 고등종교의 각 창시자나 인간에게 준 복음과 삶에 대한 교훈은 얼떨떨할 만큼 신기(新奇)하고 자애로운 것이었다. 역사에 남은 고등종교의 창시자들은 확실히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타났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다. / P. 168.
토인비는 기술과 과학이 발달하게 됨으로서 세계종교라 할 수 있는 고등종교들이 서로간의 탄생의 배경과 교의의 차이에 의한 배척 등에 의해서 서로간의 갈등과 분열을 자초하게 되었지만, 각 고등종교의 융합(融合)은 필요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상호간의 협력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무엇을 협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구체적이지 않다. 뿐만 아니라 토인비의 주장의 단점은, 문명이 몰락(沒落)하는 와중(渦中)에도 희망을 주는 것으로, 나아가서 새로운 문명의 발생을 위해, 세계종교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종교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浮刻)시키고 있고 단점인 폐단을 적시(摘示)하지 않았다. 종교의 갈등(葛藤)과 분열(分裂)로 인하여 세계 역사상 수많은 종교전쟁에서의 희생된 희생자가 종교전쟁을 제외한 여타(餘他)의 전쟁에서 희생된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는 점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종교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희생자가 수도 없이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했다.
/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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