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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기성세대가 정말 저주받아야 할 세대인가(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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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62회 작성일 12-11-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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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가 정말 저주받아야 할 세대인가(12-1)
/ 버림받고 있는 부모세대들이 울부짖는다.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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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3(2012)년 11월 27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유의사항
1. 관련자료. 이 글은 초고(草稿)로, 이 글에 사용된 자료들은 國語辭典, 英韓辭典, 韓漢辭典, 故事成語, 國史辭典, 哲學辭典,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리고 각종 대백과사전, 時事用語辭典, 관련 분야별 사전과 저서 및 연구논문들과 신문과 방송보도자료, 포털 사이트인 다움과 네이버의 지식사전 등등으로,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요약 정리하였다. 참고문헌 자료 목록은 생략함.
2. 저주(詛呪; Curse, imprecation, malediction)/명사;
저주(咀呪)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거나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을 말하며. 이런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목적하는 바를 방해하는 일종의 푸닥거리 행위를 말한다. 또는 주술적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무고(巫蠱)라고도 불렸으며, 흑주술(黑呪術)에 해당한다. “한서석의(漢書釋義)”에 의하면 무고의 무(巫)는 여자가 무형(無形)을 섬기고 춤추어 신(神)을 내리는 것이며, 고(蠱)는 좌도(左道)로서 정치가 어지러울 때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이나 한국의 왕실에서는 정치적 분쟁이 있을 때 많이 나타났으며, 민간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왕권(王權)의 계승을 둘러싼 암투(暗鬪)나 비빈(妃嬪) 사이의 갈등 과정에 많이 동원되었다. 무고나 저주에는 대개 무녀(巫女)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조선 인종 때는 소위 작서(灼鼠)의 옥(獄)이라 해서 동궁(東宮) 근처에 쥐를 볶아서 저주했다는 혐의로 숙의 박씨(淑儀 朴氏)와 그 아들이 사약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또 효종 때는 소원 조씨(昭媛 趙氏)가 안으로는 여종들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중들과 사귀면서 임금의 처소를 저주하며 몸을 해치려고 모략했다는 장계(狀啓)가 올라와 이를 조사한 사건이 있었다. 이 조사 과정에서 소원의 시비를 문초할 때 저주의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흔히 쓰이는 저주의 방법으로는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 손발, 치아, 손톱, 머리카락 등과 벼락 맞은 나무, 무덤 위의 나무, 시체의 살, 말린 닭, 개, 고양이, 쥐 등을 몰래 왕의 처소에 가지고 들어가거나 방으로 통하는 길에 묻는 것 등이 있다. 민간에서도 노복(奴僕)이나 첩 등이 원한을 품고 조수(鳥獸)나 죽은 사람의 뼈 등을 담장에 묻거나 염병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기 위해 시체를 옮겨놓는 경우 등이 있었다. 한국의 경우 저주를 주로 하는 전문가가 따로 없었으나 무당이 저주의 시행자 겸 해결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저주의 방법은 매우 은밀하게 전승되며 그 효력을 믿었던 민간신앙의 하나로 존재해왔다. 이런 류(類)의 사례는 많이 있다. 오늘날에는 욕설에 저주가 개입되기도 한다. '육실할' 또는 '급살 맞을' 등의 욕설은 저주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 저주에는 활동, 언어, 정물(靜物)이란 측면이 있고, 그것들의 어느 하나를 행하면 목적하는 효과가 있다는 인간의 욕구나 정서가 있고, 신명이나 정령과 같은 초인간적, 초자연적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다른 것에 강제하는 자력(自力)에 의지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무고(誣告)는 법률용어로 남에게 형사 처분 또는 징계 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경찰서나 검찰청 등의 관공서에 고발하는 해위를 말한다. / 위키와 브리태니커와 분야별 사전 정리.
3. 유기(遺棄; 내다 버림/ abandonment; dereliction. desertion)/명사; 사람이 다른 사람 이나 사회 등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관계가 끊기어 배척을 당하거나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버림을 받는 것(be abandoned, be left behind, be forsaken)을 의미한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청장년과 신세대로부터 버림받은 세대(Forsaken generation, left behind generation, abandoned generation)가 되어가고 있다. 고려장처럼 사회에 버려지고 있는 사건이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
註 01;
세대(世代)/명사;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과 가치를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들을 말한다. 한 세대는 일반적으로 30년을 기준으로 하여 부모가 속한 시대와 자녀가 속한 시대의 차이로 구분한다.
구세대(舊世代)/명사; 현 세대의 이전의 세대인 전 세대(前世代). 또는 낡은 세대를 말한다.
기성세대(旣成世代)/명사; 현재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세대. 젊은이들은 전세대의 잘못을 비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좋은 전통을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전후 세대(戰後世代)/명사; 전쟁이 끝난 뒤의 세대. 특히 제이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세대를 말한다.
세대 차이(世代差異)/명사;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차이를 말한다.
4. 유기죄(遺棄罪; abandonment).
노유(老幼; 늙은이와 어린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질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 및 기타 사유로 인해 부조(扶助)가 필요한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자가, 이를 보호하지 않고 내버림으로써 성립되는 범죄 행위를 말한다. 유기죄는 형법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구성요건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법은 물론 게르만법에서도 유기죄는 범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유기죄가 독립된 범죄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 교회법의 영향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에 근거하여 중세 교회법에서는 어머니가 자식을 버렸을 경우 그 아이가 사망하면 살인죄로 벌했고, 죽지 않았을 때도 처벌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16세기에 독일에서 입법화되었다.
한국에서 현행 형법상 유기죄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다. 즉 단순유기죄(제271조 1항)를 기본적 구성요건으로 하며, 존속유기죄(제271조 2항)는 신분관계로 인한 책임가중의 구성요건이고, 영아유기죄(嬰兒遺棄罪; 제272조)는 책임감경적(責任減輕的) 구성요건이다. 또한 중유기죄(重遺棄罪; 제271조 3·4항)와 유기 치사상죄(致死傷罪; 제275조)는 불법이 가중된 결과적 가중범(加重犯)이다. 유기죄의 보호법적 의미는 피 유기자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으로 이것이 위험해졌을 때 유기자는, 위험범(危險犯)이 된다. 구체적 위험범인가 추상적 위험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누어지나, 유기죄는 보호가 필요한 자를 보호가 없는 상태에 두어 생명이나 신체의 위험에 빠지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으므로, 추상적 위험범이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단순유기죄의 기본적 구성요건은 다음과 같다. 유기죄의 주체는 보호의무자, 즉 부조가 필요한 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자이므로 신분범(身分犯)이다. 행위의 객체는 노유, 질병이나 기타의 사정으로 인해 부조(扶助)가 필요한 자이다. 또한 이런 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구성요건으로 고의(故意)가 있어야 한다. 즉 자기가 보호의무자이며 부조가 필요한 자를 유기한다는 인식과 의사가 있어야 한다. 현행 형법은 유기죄 이외에도 독립된 구성요건으로서 학대죄(虐待罪)와 존속(尊屬) 학대죄(제273조) 및 아동 혹사죄(酷使罪; 제274조)를 두고 있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들을 종합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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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1. 기성세대와 조상들이 배운 교육의 내용들.
가. 서당(書堂)과 향교(鄕校) 그리고 서원(書院)의 교육목적과 특징.
나. 천자문(千字文), 격몽요결(擊蒙要訣), 동몽선습(童蒙先習)의 교육내용
다. 논어(論語) 12 顔淵篇七. 足食, 足兵, 民信의 意味.
라. 삼강오륜(三綱五倫).
마. 화랑(花郞)의 세속오계(世俗五戒).
바. 사자소학(四字小學) 제 1장 효도(孝道).
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아. 명심보감(明心寶監) 효행편(孝行篇).
자.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언해-孝行篇.
차. 주자십회(朱子十悔).
카. 구래공 육회명(寇萊公六悔銘).
타.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2. 기성세대들의 시대적 상황.
가.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angry young man의 세대. 또는 敗北의 世代).
나. 로스트 제네레이션(Lost Generation; 갈 길을 잃은 세대 또는 喪失의 世代).
3. 청장년 세대와 신세대들의 시대적 상황과 특징.
신세대의 세대구분과 특징
나가는 말.
참고문헌 자료 목록은 생략.
들어가는 말.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한 없이 넓은 지구의 북동쪽에 위치한 동방(東方)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마한 나라가 나의 조국(祖國)이고 모국(母國)이라는 것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과 더 할 나위없는 감동에 젖어 있다. 내가 만약 1950년 6. 25동란으로 인하여 월남(越南)하지 못하고, 북한에서 내 나이 70이 훨씬 넘은 나의 인생을 살았더라면, 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과 더 할 나위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란 물음에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고 단호하고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월남이라는 훌륭한 선택에, 조국과 부모님이 생각이 날 때마다 그 깊고 넓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일제의 침략 40여년(을사늑약부터)과 해방공간에서의 기아(飢餓)와 헐벗음에 대한 고통과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그 시대를 이끌고 온 수 많은 나의 동포들에게 한없는 감사와 축복을 드리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과 민족문화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겨레와 내가 공존공영(共存共榮)하려는 의지와 노력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렇게 내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과 민족문화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겨레로 만들어 준,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그 시대 시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충실하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 그 시대를 이끌어 온 주역들에게도 비록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 잘못들은 지워버리고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다. 왜냐하면 1930년대 말에 태어나 지금까지 같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그 시대의 어려움을 같이 했고 시대마다 어두웠던 굴곡(屈曲)과 특수한 상황들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성시대들의 곤혹(困惑)스러운 삶과 노력으로 얻어진 풍요롭게 살게 된 현실에서, 기성세대처럼 살지 않고 어느 정도의 여유로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기성세대들을 제외한 전 세대(중견세대와 신세대)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으려는, 그들의 지금의 잣대로는 평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과 시대정신을 기성세대들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과 민족문화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겨레로 만들어 준, 역사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던 대 다수의 주역들에게는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그 수를 헤아릴 수는 없는, 이 나라의 여러 분야에서 여러 가지로 사회의 문제를 야기(惹起)시키고 있는, 일부의 여론 주도층(主導層)에 의해 형성된 반정부, 반사회적인 무리들이, 지난 세월의 상당부분을 부정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로 인하여 이 나라와 후손(後孫)들의 미래가 암담(暗澹)해지고 삶이 험난(險難)해지지 않을까 하고 깊은 우려(憂慮)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을 피폐(疲弊)하고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만들어 버린 그들로 인하여 기성세대인 전세대(前世代)와 기성세대를 이어 이 나라와 이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후손세대가 불신과 배척으로 양극화되어 가고, 가정에서는 분가(分家)로 인한 심각한 가족해체를 불러온 불행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어 사회의 문제가 국가 안위의 문제로 까지 확대되어가는 매우 위험스러운 지경에 이르고 있음에 후손들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
우리가 지금 지향(指向)하고 있는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또는 어우러져 같이 살아가는 사회로, 나와 너와 우리가 있어야 하는 데, 나만 있고 너와 우리는 없다. 남에게 못되게 굴면 못살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바른 이치인데 못되게 구는 사람이, 너무나 착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보다 더 잘되고 잘사는 세상이 되었다면, 누가 천벌(天罰)을 내릴 것인가? 천벌이 없다고 믿으니 세상은 막사는 망나니들의 살판이 되어 가는 것이다. 정의(正義)나 신뢰(信賴)나 예의(禮儀)는 말이나 구호에서 있을 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없어진 지가 오래된 것 같다.
제 부모를 살해하거나 제 부모를 개패 듯이 때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게 하고, 상해(傷害)를 입혀 겁에 질려 있는 멍한 부모들의 이야기를 신문과 방송이 보도(報道)하는 기사(記事)들을 접(接)한 지가 벌써 수십 년 전부터 들어 온 터라, 오천 년의 고유한 문화가 찬란히 빛나고,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이 나라에서 부도덕(不道德)한 일들이 밤낮없이 횡행(橫行)하는 매우 위험한 사회라는 말과 패륜아(悖倫兒)란 말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게 되었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기성세대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학생의 인권이, 교사들의 인권위에 서서 군림(君臨)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체벌(體罰)은 죄악(罪惡)이 되어 이제는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들을 패고, 고소(告訴)하고, 흥정하고 있는 현실은 다반사(茶飯事)가 되어 가고 있다. 이게 어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인가? 이런 세상에서 옳은 것이 무엇이고 그른 것이 무엇이면 어떻다는 것인가? 권위(權威)와 위엄(威嚴)과 인륜(人倫)과 정의(正義)의 가치가 사라진 시대, 인간다움이 사라진 시대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없다는, 인간의 양심과 인간성이 야수성(野獸性)으로 타락한 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왜곡(歪曲)되고 있는 부분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사라져 버리고 권리(權利)와 평등(平等)과 인권(人權)만이 존재하게 된 현상이다. 인권이 최상위(最上位) 개념(槪念)으로 존재하게 됨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들이 권리와 평등(平等)과 인권 속에 매몰(埋沒)되어 다른 가치의 존재(存在)와 존립(存立)이 있을 수 없게 된 비극적인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권리(權利)와 평등(平等)과 인권(人權)은 조직의 상하관계(上下關係)인 위계질서(位階秩序)를 완전히 무너뜨려 원활(圓滑)한 소통(疏通)이 되지 않고 있으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상사와 부하의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구성된 상하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평등하거나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 상위에 있게 되어, 가르치는 자를 능멸(凌蔑)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는 처참한 실상(實相)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패륜아(悖倫兒)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고, 군위신강(君爲臣綱)과 부자유친(父子有親)과 장유유서(長幼有序)는 간 곳이 없게 되었다.
기성세대가 고난(苦難)의 역경(逆境)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살만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세계 10위의 자리에 접어든 이 나라에서, 오늘에 들어나고 있는 부조리(不條理)의 책임을 기성세대의 과오(過誤)로 평가받아 사라져야할 저주(詛呪)의 대상이 되었고, 물색(物色)없이 인간의 도리(道理)를 말하여 귀찮은 대상으로 배척되고 있고, 신세대인 젊은 세대들에게는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역사에 대하여, 부모에 대한 공경(恭敬)에 대하여 자신들의 인식(認識)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認定)하거나 고백(告白)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모든 책임을 져 주어야 자신들의 주장이 올바른 주장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고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고백하고 인정하게 되면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듣기 싫거나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에 거슬리는 것은 들을 필요가 없어 들으려고 하지 않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합리화(合理化)하기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쓴다. 가관(可觀)인 것은,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확률을 가진 경외수(境外數)도 필요하면 그런 논리로 억지를 부린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 대화를 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소통을 말한다(疏通不在/non-communication).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에 들어난 모든 불합리(不合理)하고 불리(不利)한 여건들의 현상에 대한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덮어씌우려 하고 단죄하려 한다. 자신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이 비난하고 단죄하려는 사회의 여러 분야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성장한 지가 10년에서 20년에 이르고 있으면서 그 긴긴 시간에 무엇을 하였 길래, 자신들의 잘못은 없고, 모든 것을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지워 단죄(斷罪)하려 하는가? 한 시대의 역사적(歷史的)인 공과(功過)와 책임(責任)과 영광(榮光)은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과 그 시대의 모든 영역에서 각각의 역할(役割)을 담당했던 참여자들의 몫인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기성세대에겐 과오와 책임이 있고 신세대에겐 공적(功績)과 영광(榮光)이 있다는 주장과 논리는 너무나 편중(偏重)되고 편협(偏狹)하며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의 정당하지 못한 야비(野卑)한 평가이며 언행(言行)인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고 기성세대를 몰아세워 책임을 지워, 역사의 죄인을 만들려는 그들의 논리와 주장이 무섭다. 차세대(次世代)는 그들의 세상이니까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삶의 족쇄(足鎖)가 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왔다.’ 는 것이 역사의 교훈(敎訓)인 것이다.
지금의 차세대인 신세대도, 3, 40년이 흐른 뒤에는 지금의 버림받고 있는 기성세대처럼, 기성세대가 될 것이며, 그들에게 던져지는 그들의 차세대인 신세대에게 그 나름에 대우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眞理)이며 역사의 순환(循環)인 것이다. 그때에 신세대들은 앞선 세대인 기성세대에게 지금보다 더한 가혹(苛酷)한 저주(詛呪)와 황량(荒凉)한 들판에 유기견(遺棄犬; 버려진 개. 또는 버린 개)처럼 내 버리듯이 버려질 수도 있고, 더 잘 어울러져 더불어 살아 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推測)과 예언(豫言)을 그 누구도 이 시점(時點)에서는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의 세대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고, 그들의 차세대인 신세대들이 자신들의 삶의 욕구를 위해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우러져 살거나 버려지느냐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차세대인 신세대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기견(遺棄犬)이 갖는 의미는 현대판 고려장(高麗葬)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개라는 동물은 자타가 공인하는 반려동물(伴侶動物)이며 가족의 일원의 위치에까지 오른 개다운 개가 아니라 인간다운 개가 됐다. 그러는 사이에 이 사회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개처럼 살 수밖에 없는 사회로 변했으며 그 사회 안에 사는 사람 중에 일부는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 갔다. 반려동물의 의식주는 비용(費用)면에서 웬만한 중산층 수준의 의식주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이라 할 수 있다. 70억 인구 중에서 기아와 가난으로 일 년에 수억 명의 사람이 죽어가는 데 한국에서의 반려동물들은 죽어가는 인류보다 더 잘 살고 있다. 이것이 상식 있는 사회인가 라고 묻고 싶다. 한국에서의 개는 ‘개 팔자가 상팔자인 것이다.’ 개가 누리는 호사(豪奢)스러운 삶에 드는 비용을 기아와 가난으로 헤매는 인류를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정이고 도리가 아니겠는가? 한 달에 3만원이면 살아갈 수 있다는 인류를 도와주는 것이 인류의 고귀한 양심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면 ‘반려동물이 먹는 식량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상식이며 정의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반려동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런저런 이유로 유기견이 되어버리는 개의 운명을 애석해하거나 반인륜적이라 하지 않고 그런 것이러니 하고 담담하게 받아드리는 중후(重厚)하고 대범(大凡)한 사람들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무슨 현상이라 할 것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필자는 단호하게 이 현상은, 우리민족의 문화 속에 깊이 내재(內在)되어 있는 부끄러운 현대판 고려장이며, 거추장스럽거나 필요하지 않거나 자신의 삶에 방해가 된다면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가차(假借)없이 버려버리는 냉정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평가하고 싶다. ‘우리사회가 정이 넘치는 사회’라는 얼굴 뒤에는 냉정하고 비정한 비인간적인 실제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사회가 무섭다는 것이다. 부모도 개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기견이 된 개의 처지를 되짚어 보면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유기견 들처럼 버려지고 있다는 것은 공지(共知)의 사실이 아닌가?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너무나 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에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해내었으며 동방예의지국이었던 나라와 민족이 짐승으로 추락해가는 앞과 뒤가 다른 또는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의 모습인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내재되어 있는(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런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의 방법은,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차세대인 신세대들의 삶의 방식(方式)과 욕구(慾求)가 충족(充足)되도록 어떤 희생이라도 다하고 빨리 재산을 상속해 준한다면, 버려지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실제로는 상속을 하거나 가진 돈을 다 주면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조손(祖孫)이나 부모와 자식이 한 집안에서 어우러져 산다는 것은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註 02; 2012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A 2면 상단에 게재된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내 희생, 자식이 알아줄 거란 막연한 기대… 당장 버려라"의 기사내용 중에서 일부.
그는 "자산 운용가 입장에서 볼 때 정답은 당연히 '노후를 다 보낸 뒤 남는 재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부모들은 이런 '정답'을 알면서도 '내가 이렇게 희생하면 자녀들이 어떻게든 도와주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유산을 미리 나눠주는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리어왕(King Lear)'을 예로 들었다. "자녀들에게 미리 왕위와 재산을 물려줬다가는 왕(王)도 평생 후회하며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김 사장은 자녀들도 '막연히' 부모가 도와주겠지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부모가 고생해서 공부까지 다 시켰는데 집까지 마련해 주길 바라는 것은 건강한 생각이 아니다"고 했다. 은퇴 후 연금으로 긴 세월을 근근이 버텨야 하는 부모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안겨줘선 안 된다는 의식이 젊은이들 사이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또 이 날 자의 A 2면의 중앙부분에 게재된 기사 "내 결혼 때문에 부모님 힘들었다."는 자녀 35%뿐에서
집집마다 다 큰 자식 결혼 비용 대느라 허리가 휘는 부모가 많다. 하지만 정작 자식들은 부모가 그 정도로 괴로워하는 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취재팀이 만난 혼주 대다수가 "우리 때는 맨몸으로 단칸방에서 출발하는 게 당연하고 부모가 뭔가 도와주면 그게 도리어 예외적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정반대"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자랐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건 부모에게 지원받는 걸 당연하게 자라다 보니 부모가 느끼는 어려움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지가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함께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의뢰해 부모 세대·미혼남녀·신혼부부 등 3개 집단을 각각 220명씩 조사해 보니, 이런 심리가 생생하게 드러났다. 부모 세대의 절반은 자식 혼사 치르는 스트레스가 치통(齒痛)이나 산통보다 고통스럽다고 답했다. 하지만 자식 중에서 "부모님이 나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사람은 3명 중 1명에 불과했다. 또한 부모 세대는 10명 중 6명이 "더 많이 지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응답한 반면, 자녀 세대는 과반수가 "남들은 나보다 더 지원 받는다."고 했다.-중략-
자녀 세대는 부모가 혼수 마련해주는 걸 당연하게 알고, 고마운 줄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왜 이런 심리가 나타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요인을 꼽았다.
첫째는 지금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취업난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세대라는 점이다. 그런 판국에 소형 주택 전세금은 계속 뛰어서, 선배들처럼 자기 힘으로 벌어서 출발하는 게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어차피 내 힘으론 안 된다'고 포기하고 부모에게 기대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또 보육, 교육,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자식을 돌보는 일이 거의 전적으로 '엄마의 몫'이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자력으로 해결하기보다 "엄마!"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도 부모 세대의 관심과 간섭은 거추장스러워한다. 부모에게 지원받는 만큼, 부모에게 되갚을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결혼한 뒤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리고 있다"는 신혼부부는 10명 중 2명에 그쳤다. 이런 태도에 대해 조윤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젊은이들이 결혼식 올릴 때까지는 '나는 가족의 일부니까 부모의 지원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결혼식 올린 뒤에는 '나는 부모로부터 독립된 개인'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이하 생략.
신세대(新世代)들의 일부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個性)을 추구(追究)한다 하면서 유행(流行)을 쫒는 것은 개개인의 개성(個性)이 아닌 몰개성적(沒個性的)이며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것이다. 그들은 자가당착(自家撞着), 이율배반(二律背反), 모순(矛盾) 등을 아무런 갈등(葛藤)없이 수용(受容)하는 복잡한 감성(感性)을 가진 세대로, 그들의 삶을 자기 나름의 삶을 살려고 배타적(排他的)이 되거나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집단사회(集團社會)가 추구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또는 어우러져 같이 살아가는 사회로, 집단 구성원들의 공공(公共)의 공동목표(共同目標)를 실현(實現)하기 위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해야 하는 사회인데, 배타적(排他的)이고 극단적(極端的)인 개인주의의 추구(追求)는 매우 비논리적(非論理的)이고 비정상적(非正常的)이며 반사회적(反社會的)인 이탈행위(離脫行爲)인 것이다.
잘못되어가는 사회는, 자가당착, 이율배반, 모순, 양두구육(羊頭狗肉), 견강부회(牽强附會), 견백동이(堅白同異), 아전인수(我田引水), 부화뇌동(附和雷同), 조삼모사(朝三暮四), 곡학아세(曲學阿世),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승자박(自繩自縛) 등등의 비논리적이고 이중적(二重的)인 사고가 사회의 중심(中心) 또는 핵심적(核心的)인 가치로, 만사(萬事)에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는 미래가 없다. 이런 편중(偏重)된 사고(思考)와 가치(價値)와 인식(認識)이 사회전반에 횡행(橫行)하고 수용(受容)될 때, 그 사회는 서서히 해체(解體)되어 갈 것이며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삶이 고달파지고, 황폐(荒廢)해 질 것이다. 과거 ‘잃어버린 10년’이란 정치현실이 그랬고, 지금 그들이 선거에서 선택했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대통령 선거에 불참하여 외면했던 정부를 무책임하게 부정하고 있는 정부의 5년도 ‘국민들의 삶이 더 고달파지고, 황폐(荒廢)해졌다.’고 일부에서는 극단적인 평가도 서슴지 않고 있다. 흔히 2040이라 불리는 계층의 세대들 중에서 일부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 판단과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부정하고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그 정권을 누가 탄생시켰으며 현 정부의 대통령 선거에 왜 불참했는지, 그리고 그 때에 정치적 현실에 불참했으면 그런 상태와 사고로 무관심하게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정치를 외면(外面)하는 것이 순리(順理)이고 일관(一貫)된 신념일터인 데, 무슨 자격으로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선출하지도 않음으로써 신성한 국민의 참정권(參政權)의 권리를 저버렸던 그들이 만들지도 않은 정권을 정권교체를 하겠다고 외치는지, 정상인으로서 일부의 세대들의 언행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때 신성한 국민의 참정권의 권리를 버렸으면, 애당초 원하지 않았던 정부였으므로 버린 채로 그대로 두면 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며, 선출하지도 않은, 국민으로서의 참정권의 권리를 포기한 자가 어떤 정부를 상대로 해서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는 지, 그들의 사고와 논리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 언행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익이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고, 손해는 절대로 참을 수 없어 그 피해의 책임은 전적(全的)으로 타인에게 있지 나에게는 없다고 하는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변(抗辯)하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俗性)인 것이다.
註 03; 사자성어(四字成語)와 고사성어(故事成語)- 사자성어는 넉자로 이루어진 단어인 사성어(四成語)를 말하고, 고사성어는 용어에 대한 역사적 사건 또는 특정 인물이나 그 인물이 겪었던 일에서 유래한 교훈이나 의미 있는 한자어로 표현을 한 글귀'로서 이자성어, 삼자성어, 사자성어, 심지어는 10개 글자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사자 성어는 우리 글자의 어순(語順)대로 해석해도 되지만, 고사 성어는 글자로는 해석이 안 되고 어떤 일로 인하여 생겨난 글이므로 그 유래를 이해해야 알 수 있다. 대체로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사자성어와 고사성어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잘못된 상식으로 엄밀히만 말하자면 고사성어가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註 04; 자가당착(自家撞着)-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 모순됨 /出典; 선림유취(禪林類聚), 간경문(看經門) / 남당정(南堂靜)의 詩에 나오는 말.
수미산은 높디높아 봉우리도 보이지 않고(須彌山高不見嶺)
바닷물은 깊고 깊어 바닥을 볼 수가 없네(大海水深不見底)
흙을 뒤집고 먼지를 털어도 찾을 수 없으니(硽土揚塵處尋)
머리 돌려 부딪치니 그 아래 내가 있구나(回頭撞着自家底)
註 05; 이율배반(二律背反;antinomy); 철학에서는 똑같이 정당하게 보이는 2개의 원리나 결론 사이에 실제로든 겉으로든 존재하는 모순을 가리키는 말로. 역설(paradox)이라는 용어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비판철학의 아버지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이 무제약자(無制約者)를 파악하려고 함으로써 모순을 낳는다는 주장을 펴 이율배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를 통해 순수이성이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칸트는 우주가 시간적으로 시초를 가지며 공간적으로 한계를 가진다는 명제(정립)와 그 반대 명제(반정립) 모두에 대한 논증을 제시했다. 같은 방식으로 칸트는 다음과 같은 3개의 명제에 대해서도 지지 논증과 반대 논증을 제시했다. ① 모든 복합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② 모든 현상이 충분한 '자연적' 원인을 갖는 것은 아니다(즉 우주에는 자유가 존재함). ③ 우주 안이나 우주 밖, 둘 중의 하나에 필연적 존재가 있다. 칸트는 앞의 2가지 이율배반을 사용하여 시간과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정신이 부여한 틀이라고 추론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란 인식자가 사물의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인식자의 둘레를 돈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상(감각에 알려지거나 경험된 대로의 사물)과 본체 (물자체)를 구분함으로써 4가지 이율배반을 해결했다. 칸트는 인간은 현상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본체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 들어 이율배반을 해결하기 위한 더욱 특수한 제안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한 해결책들은 그 철학적 의미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칸트의 이율배반 이론은 여전히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주 06; 모순(矛盾); 모순의 유래는 창과 방패를 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창은 어떤 것이라도 뚫을 수 있다.라고 말했고 이 방패는 어떤 것이라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때 누군가가 그러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어 보라고 했다.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은 자기주장을 자기 말로 뒤집는 잘못에 빠진 것이다.
註 07; 견강부회(牽强附會); 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춤 또는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자기주장에 유리하게 이치나 조건에 맞도록 함을 비유하는 한자어로. 전혀 가당치도 않은 말이나 주장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건이나 이치에 맞추려고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도리나 이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합당하다고 우기는 꼴이니,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킬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에는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있는데, 제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한다는 말이다. 또 '수석침류(漱石枕流)'는 돌로 양치질을 하고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는다는 뜻이니, 가당치도 않게 억지를 부린다는 말이요, '추주어륙(推舟於陸)'은 배를 밀어 육지에 댄다는 뜻이니, 역시 되지 않을 일에 억지를 쓴다는 말이다.
그밖에 영서연설(郢書燕說)이란 말이 있는데,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도리에 맞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으로서,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교묘하게 이치에 꿰맞추는 것을 비유한다.
이 용어는 한비자(韓非子)의 외저설좌(外儲說左) 상(上)에 나오는 말로,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의 초(楚)나라의 도읍인 영(郢)에서 온 편지에 대하여 연(燕)나라 측에서 잘못 해석한 것을 뜻한다. 이는 영 땅의 사람이 쓴 편지를 연나라 사람이 잘못 해석하고, 자신이 해석한 내용대로 연나라를 다스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에 '채반이 용수가 되게 우긴다.'는 속담이 있으니, 가당치도 않은 의견을 끝까지 주장한다는 말이요, '홍두깨로 소를 몬다.'는 속담 역시 무리한 일을 억지로 한다는 뜻으로, '견강부회'와 통한다.
/ 기성세대가 정말 저주받아야 할 세대인가(12-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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