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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흥
댓글 0건 조회 103회 작성일 12-11-27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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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생주의 뜻

‘동학론(논학문)’의 핵심은 ‘장생주의 뜻’을 논한 글입니다. 논한 글의 줄잡은 의미는 ‘글머리’와 ‘글맺음’에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글머리’를 보면 “묻기를 ‘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曰呪文之意何也). 대답하시기를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므로 주문이라 이르는 것이니, 지금 글에도 있고 옛 글에도 있습니다.(曰 至爲天主之字故 以呪言之 今文有古文有)”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금글’이나 ‘옛글’이나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라고 하셨는데 ‘지금글’과 ‘옛글’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 최동희 교수는 ‘새로 쓰는 동학’ 237쪽에서 ‘今文有 古文有’를 “지금의 주문(呪文)이 있고 옛 주문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옛 주문>을 <선생주문>일 거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필자는 ‘선생주문’은 경신년 4월 5일 앞나절에 <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음을 밝히었습니다. 따라서 ‘古文有(옛주문)’를 ‘초학주문’으로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수운선생으로부터 받은 글도 제자주문인 ‘초학주문· 장생주(21자주)’이므로 이에 대한 질문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금문유(今文有)’는 최동희교수도 ‘장생주’로 봤으며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그럼 ‘지금글(장생주)’이나 ‘옛글(초학주문)’이나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라 하셨는데 한울님을 위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한울님을 위하는 것’은 몸속지기한울님에 관심을 갖고 ‘사유· 기화’하는 것입니다. ‘사유’는 ‘장생주’의 주어인 ‘지기의 속성’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기’의 첫 속성은 ‘무극·무한’이었습니다. ‘무한’에는 ‘무한대·무한소’가 있었으며, ‘무한소 지기’는 물질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한소 지기’는 만유 속에 사람 속에 있는 것이어서 ‘몸속에 있는 지기’였습니다. 또한 이 같은 ‘지기’에 관심을 갖고 사유하다 보면 ‘지기의 속성’인 ‘무극(무한)·허령(맑음)·일기(밝음)·지성(거룩)···’을 알게 되고 이것이 ‘한울님의 성품’이 됨을 알고, 한울님의 성품이 곧 한울님임을 알게 되어 동학의 한울님은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이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한울님이 계신 곳을 사유해가고, 한울님의 성품을 사유해가는 것이 한울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부모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효도의 시작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기화’는 ‘지기에 몸맘이 화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한울님의 성품인 ‘지기의 속성’에 화합(기화)하는 것이므로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기의 속성’을 ‘사유· 기화’해 가는 것이 바르게 한울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장생주 ‘글맺음’에 ‘지화지기(至化至氣 지기에 지극히 화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역시 ‘기화’를 바라는 글입니다. ‘기화’를 바라는 것은 ‘지기의 속성’인 ‘무한·맑음··밝음·거룩’에 몸맘이 화하는 거였으며, 그렇게 몸맘이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거룩해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지기의 속성’에 화하여 닮아가는 것은 한울님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글머리· 글맺음’은 한울님의 성품인 ‘지기의 속성’을 ‘사유·기화’하는 것으로써 한울님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생주의 뜻’도 ‘지기의 속성’을 염두에 두고 풀어가야 동학이 될 것입니다.
그럼 ‘장생주’에 번호를 부여하고, ‘지기의 속성’으로써 풀어가보도록 합니다.
(1)至氣 (2)今至 (3)願爲大降 (4)侍天主 (5)造化定 (6)永世不忘 (7)萬事知

1)지기(至氣)

무한자 ‘지기’에 대해서는 이미 ‘지기의 속성’ 난을 통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여기서는 반드시 익혀야 할 부분을 뭉뚱그려보고 그 가치를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수운께서 풀이한 것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묻기를(曰) “강령의 글은 어찌하여 그렇게 됩니까(降靈之文 何爲其然也)”
대답하시기를(曰} “<지>라는 것은 무극을 지라고 한 것이요(至者 極焉之爲至)
<기>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의 한 기운입니다.(氣者 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
이를 요약한 것이 ‘極焉之爲至=무극(무한), 虛靈蒼蒼=허령(맑음), 無事不涉 無事不命=섭명, 是亦渾元之一氣也=일기(밝음)’이었습니다. 여기에 맺는말의 ‘至化至氣’에서 ‘기화’를, ‘至於至聖’에서 ‘지성(거룩)’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기의 속성’은 ‘무극(무한)· 허령(맑음)· 섭명· 일기(밝음)· 기화· 지성(거룩)’이 된 것이요, 이를 ‘체·용’으로 정리한 것이 <무극(무한)·허령(맑음)·일기(밝음)·지성(거룩)>요, <섭명·기화>였습니다.

이같은 ‘지기의 속성’의 가치를 좀더 알아보려 합니다. 가치가 없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체’에 해당하는 ‘무한· 맑음· 밝음· 거룩’이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알아보려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춘기에 이르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생물학에 의해 동물의 하나로 치부하고 ‘동물성’을 자기의 정체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자기도 모르게 동물을 닮아가 동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좀더 나은 ‘인간’을 ‘정체’로 삼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마음·경험·이념’도 불완전한 것이어서 어느 것을 자기의 정체로 삼아도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걸 보게 됩니다. 생물학적 몸이나, 정신분석학적 마음이나, 부끄러운 경험들을 정체로 삼으면 도리어 더 불안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비틀리기 쉬운 이념을 자기의 정체로 삼은 경우는 더 큰 폐단이 되는 경우를 봅니다. 세계의 지성이며 실존주의의 초상이라고 일컬어지던 사르트르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6·25전쟁을 왜곡하고, ‘생의 한 가운데’를 써서 세계인이 된 루이즈린자가 김일성을 만나 포옹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이제는 내재적 접근법을 내세운 이의 제자들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북한인권법’을 상정 못하게 하는 것이 ‘조걸위학(助傑爲虐)’1)이 됨을 아지 못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래서 비틀리지 않고 불이(不移)한 자기 몸속에 있는 ‘지기의 속성’으로써 자기의 정체를 삼아야 합니다. ‘지기의 속성’을 정체로 삼고 헤아리면 자연히 ‘지기의 속성’을 닮아가 몸맘이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해져서 승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심신이 승화되면 희열이 차올라 가장 화평한 나가 됩니다. 나아가 심신이 거룩해져서 한울님화하면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를 다했다는 성취감이 듭니다. 이처럼 승화하면 자연히 악을 돕는 짓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와 남에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처럼 ‘지기의 속성’을 자기의 정체로 삼으면 모두에게 유용해서 가치가 있습니다.

2) 금지(今至)

“今至者 於斯入道 知其氣接者也(‘금지’라는 것은 동학에 입도해서 몸속 무한소 무한의 지기에 접한 것을 앎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知其氣接者也’입니다.
‘知其氣接者也’의 ‘기기(其氣)’는 ‘몸속 무한소 무한의 지기(至氣)’를 의미하므로 “몸속 무한소 무한의 지기에 접한 것을 앎이요”라고 푼 것입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풀어야 읽는 사람이 몸속 무한자 지기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정립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지기의 속성이 자연히 나의 정체가 되어갑니다. 또한 심고할 때도, 몸속에 접해 있는 지기한울님에게 하게 되므로 감응이 잘됩니다. 또한 수련할 때도 ‘몸속 무한소 무한에 접한 ’지기의 속성’을 사유하면 기화가 잘 이뤄져 몸맘이 무한해지고,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거룩해져 갑니다. 또한 심신이 불안정할 때도, 괴로울 때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심심할 때도 ‘몸속 무한소 지기에 접한 것’을 사유하면 몸맘이 정화되어 갑니다. 바로 해 보면 이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안 되면 이는 아직 뇌신경의 시냅스에 ‘몸속 지기에 접해 있다’는 회로가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속 무한소 무한의 지기에 접해 있음.’을 사유해서 뇌회로를 작성해 두는 것은 유용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대상지향성>이 있어 밖을 지향해온 관계로 ‘지기에 접해 있다’는 글을 보거나 들으면 몸 밖에 있는 지기에 접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게 됩니다. 또한 <접하다>가 주로 밖의 무엇과 접하다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쓰이어서 오인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습관대로 몸 밖에 지기한울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서 몸 밖 지기한울님에게 기원하니까 감응도 기화도 되지 않아 마음만 애타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 지기는 물질화 마음화를 통해서만이 밖에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무한한 지기’가 우주에서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방식은 ‘물질 속· 공간 속’의 ‘무한소 무한’이 있을 뿐입니다. 무한소 무한자 지기는 안쪽 원인이어서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안쪽 원인자는 결과를 이루고 결과 속에 있지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금지’를 ‘몸속 무한소 무한인 지기에 접해 있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푼 것입니다. 이처럼 지기를 구체적으로 익혀서 신경회로(기억)2)를 확보해야 ‘원위대강’이 잘됩니다.


3) 원위 대강
‘원위대강(願爲大降)’을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원하는 것’이란 청하여 비는 뜻이요, ‘크게 내리는 것’이란 지기에 화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푸셨습니다.
<원하는 것>은 ‘청하여 비는 뜻’이라 하셨으므로 ‘장생주’는 ‘청하여 비(請祝)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요컨대 ‘장생주’는 지기한울님께 비(빌주=呪)는 글이지 다짐하는 글이 아닙니다.
다음 <크게 내리는 것[大降]>이란 기화지원야(氣化之願也)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화’를 ‘지기의 속성’ 마지막 절에서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익히는 차원에서 약술하기로 합니다.
‘기화’에는 ‘자연기화’와 ‘인지기화’가 있었습니다. ‘자연기화’는 물질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인지기화’는 ‘지기에 심신이 화합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이 같은 ‘인지기화’는 기화현상이 몸맘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인지할 수 있어 ‘인지기화’라 한 것이었습니다.
‘인지기화’에는 ‘강령․대강․강화․영부’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대강’은 ‘정적기화’에 속하는 것으로 몸맘이 지기를 닮아가는 기화여서 최상의 기화가 됩니다. 즉 나의 본체인 ‘무한(고요)· 맑음· 밝음· 거룩’을 나의 개체인 몸맘이 닮아가기 때문에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맘이 정화되고 신령해지고 거룩해지면 몸속한울님을 느낄 적도 있고, 한울님화할 적도 있고, 기화를 거듭하다 보면 ‘몸속 무한소 무한’에 이르러 무극을 보기도 하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대강’은 심신이 정화될 뿐 아니라, 몸속 한울님을 느끼는 ‘시천주’ 겪음도 할 수 있고, 한울님화하는 ‘인내천’ 겪음도 할 수 있고, 나아가 견천도 할 수 있으므로 가장 유용한 기화입니다.

그래서 ‘원위 대강’은 ‘바라옵나니, 몸속 지기에 화하게 하옵소서’라고 ‘몸속 지기’에 화하기를 바라는 기원식으로 해야 합니다. 이처럼 해서 기화한 것을 시천주라고 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화가 모심인 것입니다.
<주석>
1) 하(夏나라 BC2192~1751)의 마지막 임금 ‘걸’은 쇠갈구리를 펴는 장사. 고기는 산만큼 술은 호수만큼 저장하고 탐확(貪虐). 이 같은 걸을 돕는 것은 탐학을 위함이란 뜻. 은나라 탕왕에게 망함.‘교훈가’에 나옴.
2) 기억; 뇌신경세포는 1000억개 정도이며 하나의 신경세포는 1000개의 신경회로를 이룰 수 있는데 그 신경회로의 파동의 꼭지점에서 섭명이 이뤄져 기억으로 화출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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