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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흥 작성일 12-11-23 06:33 조회 8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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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1860년 4월 5일. 인시(새벽4시앞뒤)에 기도식을 올릴 때에도 계곡물에서 세수하고, 상투 틀어 올리고, 흰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부시 쳐 불을 초심지에 댕기고, 향 피우고, 가랑가랑한 정안수를 향로 앞에 올려놓고, 세 번 절하고, 꽈앉아, ‘한울님의 뜻에 합하는 삶을 살고자 하오니 가르침을 내려주옵소서’란 기도를 간절히 드립니다. 그러고 배호흡을 하며 호흡의 느낌에 의식을 모으고 무위를 넘어 무한소 무한의 무극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이 날은 장조카 세조의 생일이라 식구들은 모두 하구리 조카네 집에 갔습니다. 수운은 ‘불출산외’ 하기로 맘먹었고, 또 나이 많은 사촌형들을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혼자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방문이 열리며 울산이 깨끗한 갓과 옷 보따리를 내밀며 “세조 어른이 갔다 드리고 모셔 오라고 해서요.”라고 합니다. 가지 않으면 세조를 무시하는 꼴이 되고 심부름 온 울산 체면도 깎는 꼴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곡마을에 이르니 큰 덩치의 세조가 바깥마당에서 서성거리는 품이 보입니다. 그를 보자 자기를 무시했던 사촌 형들을 꺼리던 감정이 아직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건 재가녀 자식으로 겪여야 했던 멸시당한 감정의 앙금입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친척들을 만나지만 그때마다 멸시당할지 모른다는 떨리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수련에 방해가 되어 오래전에 풀치어버려서 이제는 사라졌나 했는데 여전히 마음 밑에 앙금으로 남았던 겁니다. 거기다 방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걸 비웃적거릴 친척들의 눈총이 부담됩니다.
그는 세조의 안내로 안방에 차려진 교자상 앞에 앉으며, 이미 와서 버티고 앉은 사촌 형들에게 목례를 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20세나 많아 오래전에 노인 틀이 잡힌 사촌 형들의 눈길을 받습니다. 그 눈길은 수운을 은근히 괄시하고 제사지낼 때마다 뒤에 쳐져 지내게 하던 지체 높은 형들의 눈빛입니다. 그 눈빛엔 ‘그래 반년 넘게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수행하드니 도통이라도 했느냐.’ 하는 비아냥거림이 쏜살이 되어 날러 오는 것 같아 마음이 멈칫합니다. 그렇게 수운을 무시하는 것을 세조는 잘 알아서 무시당하지 않게 의관을 갖춰 보낸 것임을 수운은 압니다. 그리고 장손으로서의 세조의 권위는 서 있어서 그의 말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세조가 권하는 대로 어른들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그렇게 의젓한 자세로 젓가락을 모잡아 음식을 집습니다. 그런데 문뜩 “여기는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야”라는 몸안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젓가락을 슬며시 내려놓고 마루로 나옵니다.

마루 속 이슥한 곳에서도 또한, ‘여기는 네가 섰을 곳이 아니야’라고 밀치어버리는 듯해서 얼른 마루 밑으로 내려가 짚신을 신고 용담을 향해 발 바꿔 갑니다. 속불이 달아오른 몸은 땅을 밟고 걷는 느낌을 차츰차츰 잃어갑니다. 마치 몸이 너울위로 밀려 오른 배처럼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이 들어서 흡사 허공을 꿈속에 밟아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연이 바람에 밀려 멀리멀리 밀려가듯이 신기한 기운에 감싸여 붕붕 떠밀려서 용담정 마루에 오릅니다. 그는 꽈앉기 하고 배호흡을 하며 몸속 무한소 무한으로 의식을 보내 달아오른 감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립니다.
문득 몸맘이 선뜩 하드니 몸이 떨리어옵니다. 그는 수심정기(守心正氣) 하고 배호흡으로 심신을 차분히 가라앉히는데 느닷없이 또 심신이 선뜩하더니 무한히 큰 물방울 속 같은 맑은 공간에 의식만 들어와 맑음을 봅니다. 마치 몸에서 벗어난 의식만이 투명하고 맑은 공간속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는 이처럼 맑음 속에서 금강산에서 신선을 만났고, 천서를 받은 경험이 있었고, 숙부께서 돌아가시는 품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의식을 일반 의식과 분리해 ‘속의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신비체험을 한 속의식 상태의 둔중한 맑음 속에 들어왔음을 의식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기다립니다. 문뜩 맑은울에 선명한 글씨가 띄었는데 ‘至氣今至四月來(지기금지사월래)’입니다. 그건 ‘지기가 이제 이르러 4월에 왔네’란 의미라고 여기는데 사라지고 슬며시, ‘侍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시천주령아장생무궁무궁만사지)’란 글씨가 맑은울에 떠오릅니다. 그건 ‘몸속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이 나로 하여금 장생케 하며 무궁히 만사를 알게 하네’란 뜻이라 여깁니다.
그의 속의식은 ‘지기금지사월래 시천주영아장생무궁무궁만사지’를 음미하는데 또 몸이 환해지며 선뜩하더니 지극히 고적한 곳, 자기 안속 더 깊고 깊은 곳, 바닥끝까지 잠수한듯한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 속의식마저 옥죄여듭니다. 마침내 자신의 속의식은 무극에, 무한소 무한의 바닥없는 무극에 이른 거라 여겨집니다. 우주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적멸감이, 무한소 무한에 이르러 존재의 질이 다른 무한을 본다는 의식이 듭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공공적적(空空寂寂)한 곳, 너무나 장엄해서 ‘말로 터득할 수 없고 형상하기 어려운 것(言不得難狀)’에 동공이 얼어 붙박인 듯싶습니다. 눈여겨보니 <무한하고, 맑고, 밝고, 거룩하고, 간섭하는 기운>이란 속어림, 무극의 무형한 생김새라 여겨져, 속의식은 찬찬히 살피어갑니다. 아득하고 무한한 지평이 보이자 ‘이것이 무극(無極)이다’라는 의식이 들고, ‘맑음’이 보이자 ‘이것이 허령(虛靈)이다.’라는 의식이 들고, ‘밝음’이 보이자 ‘이것이 일기(一氣)다’라는 의식이 들고, 거룩이 보이자 ‘이것이 지성(至聖)이다’라는 의식이 들고, ‘간섭(干涉)’을 느끼자 ‘이것이 무사불섭 무사불명(無事不涉無事不命)인 섭명(涉命)이다’라는 의식이 들고, 무극에 이를 때 ‘선뜩’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은 지기에 화한 기화이다.’라는 의식이 듭니다. 그의 순수한 속의식은 무극에 이르러 보고 겪은 ‘무한· 맑음· 밝음· 거룩· 간섭· 지기에 화함’을 ‘무극· 허령· 일기· 지성· 섭명· 기화’란 기존에 알던 언어로 이해한 겁니다. 즉 만물의 본질을 의미하는 기존의 개념어들로 이해한 겁니다. 이것이 앞서 받은 주문의 첫 자인 <지기(至氣)의 속성이다!>라는 의식이 듭니다. 그러고 이제껏 만유의 시원이라고 여겨온 ‘영기(허령·일기)’가 지기(至氣)의 핵심 속성이었다는 의식이 들고, 지기(至氣)야말로 만유의 씨눈의 씨눈인 ‘체·용’이 된다는 의식이 듭니다. 이처럼 초월의식인 속의식이 지기의 새로운 사실을 인식해 가면서 속의식은 서서히 겉의식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는 ‘무극’이란 개념을 실제로 보는 ‘절대지(絶對知)’를 체득한 겁니다. 그건 진상(眞相)을 체득한 명징한 앎으로서, 바뀌고, 변하고, 옮기지 않는 것(不移者)입니다. 그는 드디어 만사만물의 무한소 무한인 한울을 보고 알았다는, 견천(見天)했다는 환희감에 휩싸입니다.

이같은 수운의 체험은 허상의 신비체험이 아니라 진실의 신비체험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생리심리학’과 ‘형이상학’이 밝힌 것으로 알아봐야 합니다. (아래주석참고)3)

수운께서는 ‘속의식’으로써 무극의 진상을 보고 옴으로써 한울의 실체를 ‘지기(至氣)’라고 굳믿습니다. 그는 ‘지기의 속성’을 헤아려봅니다. 그러고 ‘무한·맑음·밝음·거룩’을 체(體)로 보고, ‘섭명·기화’를 용(用)으로 봅니다. 이 같은 ‘지기’의 ‘체’와 ‘용’으로써 만사만물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지기’의 덕이 크고 환함을 느끼게 되어, 한울로부터 받은 주문인 ‘지기금지사월래 시천주영아장생 무궁무궁만사지(至氣今至四月來 侍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를 감격하여 외웁니다. 이때 그는 그 동안 간절히 바라던 놀라운 한울님의 가르침을 두근거리며 듣게 되는데 수운이 지은 ‘동경대전’의 ‘포덕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홀연 마음이 선뜩 하더니 몸이 떨리는데 어떤 신선스러운 말씀이 빤짝 귓속으로 들어오는 듯해서 놀래어 “어쩐 일입니까?”라고 얼결에 물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래서 벅차오르는 감격과 두려움을 잠재우며 ‘상제라 이른다면···. 그럼 한울님이란 말인가?’ 다시 말씀이 들려옵니다.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無功)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수운께서는 얼을 가다듬고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라고 여쭈니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과 궁궁이니(曰不然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受我此符 濟人疾病), 나의 주문을 받아서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한 즉(受我呪文 敎人爲我則), 너 또한 장생하며 천하에 덕을 펴게 되리라(汝亦長生 布德天下矣)” 하셨습니다.
마침내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심정이 든 수운은 벅차오르는 감격·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이 흘립니다. 그 동안 옹이화한 마음의 상처와, 이루지 못한 한들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내립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멍하니 앉아 흘리다가 바른 의식이 들어, 한울님의 가르침을 살핍니다.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구하고”라고 하셨는데 그 영부는 어떤 것일까. 또 “나의 주문을 받아서 사람들을 가르쳐 나를 위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 역시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받은 주문의 뜻을 보면 ‘지기가 이제 이르러 사월에 왔네. 모시고 있는 한울님은 나로 하여금 장생케 하며 무궁히 만사를 알게 하네’처럼 <나로 하여금>이란 말에서 보듯이 자기가 외울 주문이지 남을 가르칠 주문이 아니어섭니다. 그래서 그는 한울님이 <사람들을 가르칠> 주문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지기금지사월래, 시천주령아장생 무궁무궁만사지’ 주문을 외웠습니다.

뒤낮이 넘어서도 주문을 계속 외웠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몸이 몹시 고요히 진동(身多戰寒)’하기시작 했는데 이 뒤의 상황을 수운은 ‘동경대전’의 ‘동학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겉(몸)4)은 접령의 기운이 있고(外有接靈之氣) 속(몸속)은 강화의 가르침이 있는데(內有降話之敎) 보였으나 보이지 않고, 들렸으나 들리지 않아서 마음이 괴이하고 의아해져서(視之不見 廳之不聞 心尙怪訝)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고 묻기를(修心正氣而 問曰)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吾心卽汝心).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요. 천지를 알면서 귀신을 모르니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知天地而 無知鬼神 鬼神者吾也). 너는 무궁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
이처럼 그는 뒤낮에 ‘강화(降話)’ 겪음에서 한울님 말씀이 몸속에서 울려오는 것을 겪고 이를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라고 적었습니다. 종이 울리듯이 한울님 말씀이 몸속에서 울려 나와서 몸속한울님5)을 느끼고 의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곧 이어 몸맘이 신비롭고 성스러워지면서 한울님화하는 것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겪게 한 것은 서학이나 유학이나 신화처럼 한울님이 파란 하늘 꼭대기나 공중에 계시지 아니함을 일깨우기 위한 한울님의 배려라는 심중이 듭니다.
그러나 곧 의아심이 났습니다. 그럼 참된 한울님은 몸속 무한소 무한의 ‘지기한울’인가? 아니면 몸속에서 들려온 한울님 말씀인가? 아니면 심신을 한울님화한 한울님인가? 하는 의아심입니다. 그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음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그건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니라.’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무렵의 몸맘은 심히 신령해져 한울님화하여 한울님처럼 여겨진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심신이 한울님화한 것은 신령한 ‘지기에 심신이 화합’해서라고 여겼고, 이를 ‘기화(氣化)’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헤아려보면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기화하여 천인합일한 한울님화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몸맘이 한울님화한 상태는 잠깐뿐이었습니다.
다음에 한울님이 “귀신도 나(한울님)”라고 하시어서 느낀 당혹감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헤아려보니 화생론에 의하면 만사만물도, 사람의 마음도 다 지기한울님의 화생입니다. 따라서 천지는 물론인요 귀신이나 상상인 상제마저도 한울님의 화생이므로 귀신도 한울님이 됩니다. 이처럼 온통 지기한울님의 화생이므로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귀신도 나(한울님)’라고 하신 것이구나 여겨집니다. 그런데 ‘귀신도 나’라고 한 ‘귀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지 않느냐는 맘이 듭니다.
그래서 한울님의 말씀을 헤알아보니6) ‘귀신도 나’라고 한 말씀이나, 앞에서 ‘내마음이 네마음이니라’’는 말씀이나, 앞낮에 하신 말씀이나 모두 틀림없이 조선말로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이 같은 조선말은 자기의 조선어에 화해서 나타난 말씀이므로 이 같은 말씀의 한울님은 잠시 나타난 한울님입니다. 마찬가지로 기화한 한울님도 잠시 자기 몸맘을 통해 나타난 한울님입니다. 이처럼 잠깐 나타난 한울님은 옮기고 변화하는 한울님이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의식이 듭니다. 그렇다면 오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한울님은 필요에 의해 잠깐 나타난 한울님이 아니라 그 본바탕인 무시무종한 영원하고 불변하는 몸속 무한소 무한의 지기한울님뿐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는 ‘지기한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화생하고 기화로써 한울님화한 한울님은 어떤 필요에 의해 잠깐 화생한 한울님으로 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지속으로 믿고 위해야 할 한울님은 오직 만유의 본질인 ‘지기한울님’뿐이라 봅니다.
다음에 ‘너는 무궁 무궁의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라고 하셨는데 <그 글은 어떤 글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닦고 단련하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미 자기에게 내려주신 ‘지기금지사월래 시천주영아장생무궁무궁만사지’라는 주문으로써 닦아 깊이 터득한 다음에 글(주문)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란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즉 네가 견천(見天)해서 무궁의 도에 이르렀으니 이제 받은 주문으로써 수도를 더 하고 스스로 겪어서 깨알은7) 다음에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뜻으로 여긴 겁니다. 그런데 앞나절엔 ‘사람들을 가르쳐 나(한울님)를 위하게 하라(敎人爲我)’ 하셨으므로 먼저 한울님을 위하는 주문을 지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벼루에 물을 따르고 먹을 갑니다. 그러고 백지를 펴고 자기가 외울 주문인 ‘至氣今至四月來. 侍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를 적었습니다. 주문을 다시 보니 ‘지기’로 시작해서 ‘만사지’로 끝납니다. 이는 지기로써 ‘만사지’ 하라는 한울님의 뜻이다 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기의 용(用)인 <섭명· 기화>가 만사를 설명하는 원리가 되리라는 심중입니다. 그럼 지기가 ‘섭명’해서 만사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계심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섭명의 앎’입니다. 반면에 ‘지기에 심신이 화합’해 선뜩 한 뒤에 주문을 받고, 무극에 이르고, 한울님 말씀을 듣고,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신령해지고 거룩해지면서 한울님화하는 것을 겪었는데 이는 ‘기화의 앎’입니다. 이 같은 ‘섭명의 앎’과 ‘기화의 앎’으로써 ‘만사를 알고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굳믿음이 생깁니다. 홀연 만사가 지기의 한 줄에 꿰이는 통달감, 캄캄한 방에 불이 켜진 것처럼 온 누리의 이치가 환하게 드러나는 듯합니다. 이때 그는 자기가 아닌 딴 무엇이 환희를 느끼는 것 같아, 살펴보니 그건 자기 몸에 모시고 계신 한울님이 기뻐하심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신한울님이 기뻐하시는 걸 보니, ‘지기한울님이 사람으로 화생한 까닭은 섭명 ·기화로써 ‘만사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구나’ 하는 미립8)을 얻은 의식이 듭니다. 이때 그는 가사체의 성스러운 한울님 말씀을 듣습니다.

“개벽후 오만년에 네가또한 첨이로다.
나도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만나 성공하니 나도성공 너도득의
너희집안 운수로다.” (용담가)9)
‘너를만나 성공하니’란 한울님 말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습니다. 자기를 만나 성공한 것이 무엇인가? 그건 자기처럼 ‘지기로써 만사지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 아닌가. ‘만사지 한 사람’이란, 지기의 ‘섭명·기화’로써 만사를 안 사람, 몸속한울님을 느끼고 의식한 사람, 천입합일 한 사람, 시천주 한 사람인 한울님을 모신 ‘모신사람’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지기로써 만사지 한 모신사람>이 되는 것이 한울님의 성공입니다. 비로소 한울님의 뜻이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지기한울님이 사람으로,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은 지기로써 만사지한 ‘모신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이건 ‘모신사람’을 통해 공존하고 싶었던 것이요, 위함을 받고 싶었던 것이요, 한울님이 되고 싶었던 것이요, 한울누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기한울님은 모신사람이 된 자기를 통해 모심을 받고. 만사지하고, 한울님화함으로써 자기실현을 했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하신 것이요 기뻐하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고 나니 ‘너도 득의’라 하신 말씀도 또렷이 이해가 됩니다. 자신 역시 기화를 통해서 무극태극인 지기한울님이 사람으로 화생하고 마음으로 화생한 까닭을 알게 되었으므로 ‘왜 태어났나’와 같은 자신의 오랜 숙원의 뜻을 이룬 것임을 알 수 있어섭니다. 그러고 보니 20여 년 동안 알고자 했던 한울님의 뜻을 오늘에서야 터득했다는 깊은 감회에 젖습니다. 그는 한울님이 사람으로 화생한 뜻에 합하는 삶이 참된 삶이요, 그에 합하는 삶이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요, 그런 삶을 살려 했음을 돌이켜 봅니다. 마땅히 자기는 앞으로 한울님을 위하는 삶, 지기로써 만사지 한 ‘모신사람’의 삶, 한울누리를 이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고 보니 ‘기화’가 중요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기화’야말로 한울님과 사람이 뜻을 이루는 성공의 길이어섭니다. 기화가 되어야 강화가 되고, 영부를 받고, 강령이 되고, 대강이 되어 몸맘이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해져 한울님을 모신 ‘모신사람’이 되어섭니다. 이처럼 기화의 중요성을 알게 되자 수도의 길이 환히 트이면서 심신이 다시 기화하여 맑고 밝아지더니 몸속에 신령한 기화지신(氣化之神)이 밝아집니다. 이 기화지신이 기화한울님이요, 몸속의 신령한 한울님이란 의식이 듭니다.
그는 기화한울님에 이끌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갑니다. 모시 적삼 속의 속살이 내비치는 것처럼, 물체 속 기화신(氣化神)10)이 내비쳐, 온 누리가 신선해 보입니다. 겨울의 눈바람을 견딘 테를 몸통에 두르고 아름드리나무로 자란 거목, 그 속에 지기가 거목에 섭명해 화생한 기화신이 있고, 땅에 뿌리를 박고 서있는 바위, 그 속에도 지기가 바위에 섭명해 화생한 기화신이 있고, 나무마다 바위마다 자신 속에 제 형체를 닮은 기화신을 품고 있었습니다. 수운께서는 신명이 나서 마루에 서더니 눈을 반쯤 감고 산천초목의 기화신과 어울려 풍류도의 춤을 춥니다.

<주석>
3) 1924년에 독일 정신과 의사 한스 벨거는 최초로 뇌파 검증으로써 뇌파가 마음과 관계있음을 발견했다. 요새 뇌파와 마음의 관계를 밝힌 것이 있어 옮긴다.

세타파(θ) 4~7Hz 잔 파도형 얕은 잠. 램 수면
알파파 (α) 8~13Hz 불규칙형 이완상태. 눈을 감았을 때
베타파(β) 18~30Hz 속 파 눈을 떴을 때
감마파(γ) 30Hz이상 톱니형 긴장했을 때 델타파(δ) 0.5~3Hz 긴 파도형 깊은 잠. 런램 수면

*Hz; 파동이 1초 동안에 같은 위상이 돌아오는 회수.
소리도 파동이요, 마음도 파동이요, 물질도 파동임을 요새 사람들은 안다. 파동이 물질이어서 물질을 이뤄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물질인 뇌파가 비물질인 마음을 이뤄냈다는 것은 연속성을 벗어난 것이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즉 물질이 마음으로 화생한 사실을 밝힐 수 없다.
이를 풀려면 현재로선 형이상학으로 갈 수밖에 없다. 위에서 뇌파 중에서도 깊은 잠에 이를수록 뇌파가 느려지는 현상을 본다. 그러다 뇌파가 멈추면 즉 0이 되면 죽었다고 한다. 의식이 사라진 것인데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멈춤의 세계가 무극의 세계이므로 마음은 무극의 세계로 돌아간 것, 즉 무극의 허령으로 환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역으로 보면 허령이 뇌파의 꼭지점 멈춤에서 섭명해서 마음으로 화생(창발)한 거라 볼 수 있다.
이같은 마음은 말초신경에서 감각이, 뇌간에서 본능이, 변연계의 편도체에서 감정이, 신피질에서 의식이 나와 이뤄진 거다. 그런데 이같은 마음의 ‘감각· 본능· 감정· 의식’은 의식화하여 감각의식· 본능의식· 감정의식· 의식의 의식 등의 다양한 의식으로 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의식을 ‘일반의식’ 혹은 ‘겉의식’이라고 한다. 반면 수련 중에 나타나는 내면의식을 ‘속의식’이라 한다. 이 ‘속의식’은 수련 중에는 세타파(얕은 잠. 꿈을 꾼다)에 이르거나, 델타파(깊은 잠)에 이르거나 간에, 어떤 경우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수련자들의 뇌파 검증으로써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이는 허령이 마음화한 것 중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 ‘속의식’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 허령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수운의 속의식은 ‘델타파’처럼 콤마이하(0.5Hz)의 미세한 파에 이르러서도 잠들지 않고 마침내 제로(0)에 가까운 파로써 무극에까지 이르러 무극의 참품인 지기의 실상을 보고 올 수 있었던 거다. 속의식은 무극의 허령을 많이 닮았기 때문에 무한소 무한에 이르러 무극의 참품인 실상(實相)을 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거다.
4)접령의 기운이 있음을 느낀 것은 ‘몸’이다. ‘몸’엔 ‘겉’과 ‘속’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외(外)는 ‘겉에는·몸에는’이란 의미이다. ‘사과 겉은 빨갛고 속은 희다’라고 하지 ‘사과 밖은 빨갛고···’라고 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5) 氣化之神=기화한울님=몸한울님=몸속한울님=몸속에 계신 한울님
6) 헤쳐서 알아보니.
7) 깨달은 것을 살피어 알아가다.
8) 경험으로 얻은 묘한 이치.
9) 수운의 가사체를 모은 ‘용담유사’의 첫 편인 ‘용담가’의 한 구절
10) 지기의 섭명에 의해서 물체의 내부에 이뤄진 신(神)· 혼(魂). 모든 물체는 자기를 닮은 기화신을 갖추고 있다. 이 ‘氣化神’이 ‘氣化之願也’에 의해 이뤄진 신이 ‘氣化之神(기화한울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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