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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여시바윗골 성지수호와 을묘천서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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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윤영
댓글 0건 조회 83회 작성일 12-09-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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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바윗골 성지수호와 을묘천서 공부하기




Ⅰ. 문제점과 해결책은 없는가.
요즘 동학을 연구하는 분들과 천도교인들에게 수운 최제우 대신사(이하 대신사) 성지이며 동학, 천도교 사적지중 하나인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즉 대신사께서 을묘천서 받으신 유허성지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대신사 유허성지 바로앞산 가까운 곳으로, 옥동~농소간 4차선 왕복도로가 개설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유허지 피해논란이 거의 없는 거리에 설계가 되었으나, 예산문제의 핑계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도로계획설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유허성지 보존지구 훼손이(자동차 소음 내연, 자연경관 파괴 등) 불을 보듯 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울산시청 관계자들의 주장에는 시민들의 편리한 도로이용과 예산부족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울산광역시청측과 유허지 보존회, 천도교단과의 밀고 당기는 마찰이 있어왔고, 최종적으로 ‘계획도로 변경불가’의 행정절차통보가 와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야 한다. 바로 대신사 유허지 보존지구가 울산광역시 소유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청관계자들의 땅인 것처럼, 천도교는 구경만 하고 떡이나 얻어먹으라는 변함없는 태도에 대한민국 공부원의 자질을 느낄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소유의 산에 소나무 한그루도 함부로 베어내지 못한다. 또한 타인의 묘를 조금이라도 훼손한다면 법의 심판을 받는다.
도로 개설의 명분을 떠나 *현재 시도기념물 제 12호(수운 최제우 유허지-1997년 10월 9일 지정)로 국가의 문화유산이요, 민족의 교육장소로서 그 가치가 무시할 수 없는 유적지이고, 이 땅 이 겨레를 지키기 위해 수십만 명이 희생당한 동학, 천도교 성지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치 떨리는 분노를 애써 감추며 필자는 왜 대신사 을묘천서 유허성지가 중요하며 역사문화에 대한 가치, 또한 그 일대가 보존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천도교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울산광역시와 시민들에게도 필요한 역사 공부요,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자세로 글을 시작해본다.

Ⅱ. 여시바윗골 을묘천서 성지중요성
현재 천도교에서는 대신사 성지를 10개 지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대신사 탄신에 이어 순도(순교)의 과정에 따라[생가터, 여시바윗골, 적멸굴, 용담정, 은적암, 경주회곡(회리마을), 흥해매곡동, 문경조령, 대구장대, 태묘] 규정한 모양이다. 교계와 학계에서는 주로 5대성지와 3대성지를 거론한다. 5대성지는[생가터(대신사 출생지), 여시바윗골(을묘천서 받으신 곳), 용담정(득도지-와룡암터), 은적암(논학문-동학론등 경전 집필하신 곳), 대구장대(순도-순교 하신 곳)이다. 3대성지는(용담정, 여시바윗골, 은적암)으로 압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신사 성지를 거론할 때 단 한 번도 여시바윗골을 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대신사 역사를 거론할 때, 을묘천서의 중요함을 볼 수 있다. 사실 동학, 천도교 기념행사시 여시바윗골의 중요성이 그동안 부각되지 못했다는 것은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보존회에서 정기적인 행사를 하는지?) 앞으로 동학, 천도교 탄생의 모태지라 부르는 여시바윗골의 대신사 을묘천서 성지를 중요 성지로 인식하고 1년에 한 번 즘은 기념행사(을묘천서 받으신 날, 3월 3일)를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의 제안을 해본다. 학계와 교내의 의견을 모아 적절한 날을 선택하여 가까운 지역의 교인들이 동참하는 기념행사를 가졌으면 한다.


Ⅲ. 여시바윗골 천도교성지(대신사님편)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곡동 여시바윗골은 대신사께서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은 곳이다.-
여시바윗골은 포덕전 6년(1854) 10월에 10여년 동안의 주유천하를 마치고 정착하여 수련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처가와 울산읍내의 여사(旅舍)에 머무시던 대신사는 멀지 않은 이곳 여시바윗골에 3칸 초가를 짓고 명상을 계속하시던 중 포덕전 5(을묘,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이인(異人)으로부터 천서(天書)를 받는다. 이 책을 「을묘천서」라고 한다. 이곳 여시바윗골은 포덕138년(1997) 부터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에 들어가, 포덕139년(1998) 3월에 유허비가 건립 되었고, 포덕145년(2004) 5월에 울산광역시 중구청의 협조로 수운대신사 유허지 초당.초가가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을묘천서를 받다 -
포덕전 6년(철종5년,1854)10월 대신사 나이 31세에 출가구도의 고된 역정을 일단 마치고 정착 수련 하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울산 처가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동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의 구조상 장기간 동거할 수 없어 며칠후 읍에 나아가 여사(旅舍)에서 머물게 되었다. 대신사께서는 그 후 처가에서 멀지 않은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3칸 초옥을 짓고 논밭을 마련하여 여기서 계속 사색에 잠겨 우주 자연의 무왕불복(無往不復)하는 이치와 인간사회의 성쇠소장(盛衰消長)하는 상도(常道)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근근불태(勤勤不怠)하고 성성불매(惺惺不昧)하였다.
대신사의 나이 32세 때 포덕전 5년 을묘 3월 3일의 일이다. 천지가 고요하고 뜰 아래 살구꽃이 만발한 속에서 대신사께서 홀로 책에 심취하고 있을 때 문득 눈을 들어 본즉 한 이인(異人-승려)이 앞에 서 있음을 보았다. 이인은 합장 배례하고 대신사에게 고하기를『소생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기도를 하옵더니 공부를 마치는 날 자리 앞에 책 한권이 놓여 있으므로 읽어 본즉 천하의 이상한 글이라 도저히 글뜻을 알 길이 없어 이 글을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되 아직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 선생을 뵈오매 마음에 크게 감동한 바 있어 이 책을 드리오니 원컨대 선생은 깊이 연구하소서, 3일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하고는 물러가는 것이었다.
대신사께서 3일을 두고 연구한 결과 처음으로 글뜻을 알게 되었다. 3일후에 이인이 다시 나타나 글뜻을 묻는지라 대신사께서 『알았습니다』라고 하니 이인이 말하기를 『선생은 참으로 하늘이 내신 훌륭하신 분입니다』하고 계하(階下)에 내려서자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대신사는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더욱 수련에 게으름이 없이 도(道)닦기에 힘썼다. 대신사께서 보니 그 글 가운데「지극한 정성으로 한울님께 기도(49일)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이대로 실천하기로 작정하였다.
* 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의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다. 첫째 여시바윗골 성역화사업이 울산광역시중구청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둘째는 대신사의 적멸굴 49일기도, 셋째는 용담성지에서의 무극대도인 ‘천도동학’을 받으신, ‘득도’로 연결되는 그 시작이 바로 여시바윗골 을묘천서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번 도로개설에 있어 울산광역시와 중구청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나, 성역화를 했으면 성지(유허지)로서 적합한 환경을 보존 유지시켜야 하고, 유허지 피해사항이 없는지 최소한 시민공청회와 문화유적전문가는 물론 천도교단과의 긴밀한 상의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개발독재식으로 나간다면 명분도 없고 훗날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Ⅳ. 도로(고속도로형)개설에 대한 부당성
천도교와 유허지보존회 등 동학관련단체에서 울산광역시도로개설에 대한 반대가 심한 것을 어쩜 울산시는 이해 못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이는 대신사께서 왜 그곳에 정착하시며 명상과 수련을 하였고, 천서를 받으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일반상식으로 말하자면 당시 주위 자연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오만년 무극대도 동학천도 출현과 연관시켜 보면, 천운의 비밀스런 역학적 신비가 존재하는 운수관으로도 볼 수 있다.
*다음은 유허지 이해를 돕기위해 동학역사연구 대가로 인정받았던, 삼암(표영삼)선생의 기록을 살펴본다. [(상략), 천서를 받았던 곳인 울산시 유곡동 여시바윗골은 야산 줄기에 감싸여 있는 아담한 골짜기다. 울산시(일반버스터미널)에서 북서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 길을 약 1키로정도 가게 되면 등성이에 마을이 있다. 여기는 박시 사모님의 친정이었던 유곡동이다. 이 동리에서 다시 넘어가면 길다란 골짜기가 나온다. 양쪽에 산맥이 길게 뻗어 있고 좁지 않은 골짜기는 논으로 꽉 차 있다.
이 골짜기를 계속 들어가면 바른쪽 산기슭에 집이 세 채 모여 있다. 이 집을 거쳐 뒷등성이로 넘어가면 여시바윗골이다. 여시바윗골은 유곡동 큰 골짜기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외지고 독립된 골자기다. 울산시로부터 약 2.5키로미터의 거리로서 30분만 걸으면 된다. 자그마한 골짜기 안쪽은 해발 200미터 정도의 봉우리가 솟아 있고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 내려오면 산맥은 골짜기를 감싸주고 있다. 마치 양쪽 팔로 감싸주듯 한 묘한 지형이다.
특히 앞쪽에는 자그마한 봉우리가 앉아 있어 밖에선 골짜기를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등 넘어 집에 살고 있는 이순덕(62세)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15살 때 시집을 와서 이곳에 왔는데 소나무가 어찌나 울창한지 대낮에도 어두워 무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사님이 천서를 받았던 집은 6 ․25 후까지 있었는데 불이 나서 그 곳에 살고 있던 김씨라는 사람은 서울로 올라갔고 현재 문씨 문중에서 이 땅을 관할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울창한 나무도 없고 맑았던 물줄기도 희미하게 흐르고 집터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다. 다만 감나무(약 50년생) 한그루가 옛집 마당가에 서 있어 표지물이 되고 있을 뿐이다. 집터 잡초 속에는 아직도 구들장과 굴뚝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검게 그을은 돌들이 있다. 이 골짜기에 집을 지을만한 곳은 이 곳 뿐이다.]<신인간 통권 351호, 포덕118년(1977) 11월호>
* 위 글에서도 여시바윗골의 환경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신사께서 을묘천서 받으신 곳에서는 무언가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풍수학적 의미에서 명당중에 명당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여시바윗골 유허지 성역화는 위와 같은 분위기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성역화는 물론 주위 개발사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유허지 편리도로와 전혀 관련없는 울산시 차원의 대형4차선 왕복도로를 만들어 소음과 공해, 방음벽과 둑을 쌓아 보호한다는 것은, 원래 여시바윗골 유허성지를 망치고자 하는 사업들이다. 부디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왜 그곳을 선택하였는지의 근원적 질문에 벗어나는 도로개발 사업들은 멈춰주기 바란다.

Ⅴ. 천도교의 현실과 동학의 미래
현재는 초라하다. 성역화 내용도 만족하지 못하고 천도교도 솔직히 초라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세계5대종교로서 우뚝 설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만 하더라도 동학, 천도교는 한국 제 1의 교세였다. 천도교의 역사를 보면 개인 신앙을 위한 희생의 순교를 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수십만 희생의 피로서 순국에 앞장섰다. 이는 종파를 초월해 민족의 큰 영광이요, 세계역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기미3.1운동을 기억하라.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과 연합하여 전민족의 폭발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주도하였으며, 특히 자금은 전부 천도교에서 감당하였다.
오늘 날 우리가 초라하다고 해서 아주 죽은 것은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기독교 박해가 그랬고 불교의 천대도 그랬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님 유적문화시설도 중국문화혁명 때 얼마나 많은 무시와 천대 그리고 피해를 보았는가. 그러나 오늘 날 공자는 다시 살아나 많은 중국인들을 문화종교 유적관광 사업으로 먹여 살리고 있다. 결국 공자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인대성으로 세계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수운 대신사께서도 그리 멀지 않은 날에, 붓다-공자-예수-마호메트처럼 세계5대종교, 성인으로서 아니 그보다 더 큰 인류의 스승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당신들의 정신문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가장 정확한 답변이 아마 동학, 천도교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패배주의는 개인과 나라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도 선거 때 표가 적다하여 정치행정가들에게 무시당한다면 이게 바로 곧 망국의 지름길이다. 혼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이다. 천도교인들이여, 울산광역시민들이여, 이념과 종파를 초월해 울산시의 세계적인 종교문화유적지인 여시바윗골의 대신사 을묘천서 성지를 수호하는데 함께하여 주시길 바란다.
포덕 153년(2012) 9월 25일
동학혁명기념관장 이윤영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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