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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윤영
댓글 0건 조회 51회 작성일 12-09-1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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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암과 용담성지 연혁(수정본)
Ⅰ. 글 시작
오늘은 동학, 천도교 발상지며 포덕원년(1860) 4월 5일(음력)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 천도교를 창건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이하 대신사)의 제 1 성지인 용담성지의 대신사 득도 장소에 대해 사료와 문헌에 의한 역사정립을 시도해볼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용담성지에 대한 주요연표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보충함으로서 대신사 제 1 성지인 득도 장소를 조명하고자 한다.
현재 천도교의 공식 역사출판물인 천도교백년약사와 천도교약사의 책에도 대신사 득도 장소를 단순히 ‘용담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각종 동학관련 역사서에서도 거의 대신사 득도 장소를 용담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용담정 즉 용담성지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고 용담정과 와룡암, 용담서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역사는 역사의 사실을 말해야지 현재 잘못된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역사로 기정사실화한다면 그런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역사왜곡이 되고 만다.
동학, 천도교 제 1 성지가 현재 용담정위치가 아니라 대신사 당시 ‘와룡암자리의 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천도교 역사는 다시 써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 생길 것이다. 다행히 현 시대에 많은 정보에 의한 출판물이 나왔고 과거 역사를 공부했던 분들보다 많은 참고문헌을 인용할 수 있어서 정확한 역사정립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보다 폭넓은 연구와 함께 사실적인 동학, 천도교 역사정립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본 글을 시작해본다.
Ⅱ. 용담성지 주요연표
* 근암공 최옥 선생께서 집필한 근암집<용담이십육영 병서(幷序)>의 내용으로 중심을 삼고, 이후 천도교(동학)출판물에서 전해오는 용담성지 역사내용으로 연표를 작성해본다.
1. 1778년 : 복령(福齡)스님이 와룡담(용담의 못) 북쪽 언덕에 암자를 짓고 원적암(圓寂庵)이라 하였다. 약 2년 후 불공드리는 사람들이 적어 스님들 흩어졌고 암자는 버려졌다.
2. 1780년 : 봄에 처사공(최종하-대신사 할아버지)은 암자와 그에 달린 몇 묘의 산과 밭을 사들였다. 처사공은 근암공(최옥-대신사 아버지)이 젊은 사람들이 책 읽고 재주를 익히는 곳으로 삼으라고 일러주셨다. 어느 날, 근암공의 스승인 이상원을 초청하였다. 산세를 둘러본 그는 와룡암(臥龍庵)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경주부사 김공 상집(尙集)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자 “와룡암 석자는 천년을 내리 사람들의 눈을 깨우치게 하리라.”고 하였다.
3. 1815년 : 근암공은 가을에 와룡암(못 위쪽에 5칸짜리 집)을 중건하고, 몇 명의 납자(衲子, 중)를 데려다 관리하게 하셨다. 뒤쪽 골짜기 안에 터를 새로 닦아 4칸 짜리 서당을 지었다. 4칸짜리(용담서사) 집에는 근암공이 거처하였다. <용담이십육영 병서>에는 와룡암 현판을 달고자 했으나 최익지(崔翊之)가 천룡산 밑에 암자를 짓고 와룡암이라 하여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용담서사(龍潭書社)’라 이름을 바꾸셨다.
4. 1840년 : 근암공이 25년 간 거처하던 용담서사는 79세에 세상을 뜨시자 돌보는 이가 없어 얼마 안가서 무너졌다.
5. 1843(~4)년 : 20세에 대신사께서 용담의 와룡암자리 집으로 오셔서 살으셨다. 이 해에 가정리 집에 불이나 전소되었다. 그래서 와룡암집을 보수하여 가족과 함께 살으셨다. 31세(1854년) 되던 가을에 울산 여시바윗골로 이사 가기 전까지 11년을 살으셨다.
6. 1859년 : 대신사 36세 되던 10월초에 울산에서 다시 와룡암터 집으로 들어오셨다. 철점경영을 실패하게 되어 땅과 집은 채권자들에게 넘어가 빈손이 되었다. 갈 곳이 없었던 대신사는 용담으로 돌아오셨다. 10월 중순에 다시 구도의 결의를 다졌다. 자(字)와 이름(名)과 호(號)까지 고쳤다. ‘도언(道彦)’이란 자를 ‘성묵(性默)’으로, ‘제선(濟宣)’이란 이름을 ‘제우(濟愚)’로, 이때 호도‘수운(水雲)’이라 하셨다.
7. 1860년(포덕원년) : 경신년 4월 5일(음력) 와룡암 자리 집에서 대신사는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득도(得道)를 이루셨다. 위에서부터 연표를 살펴보면 대신사 득도를 이룰 당시, 용담서사(현 용담정자리)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후에 대신사 순도 후 해월 최시형 신사(이하 해월신사)께서 차도주 강수선생에게 명하여 1879년 집필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용담정이라는 정호이름이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용담성지일대를 용담정이라고도 불리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8. 1911년 : 천도교에서 분파(의암 손병희 성사에게 쫓겨난 세력)한 시천교에서 현재의 용담정건물인 용담서자자리 뒤편 바위에 ‘용담정’이라 새겼다. 이에 대한 사료는'시천교조유적도지'에 '신해년(1911년)에 '용담정'이라 바위에 새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 1914년 : 용담서사를 복원시키고자 처음 시도했던 분은 해주 오응선(吳膺善)이었다. 그는 1914년 10월에 이계하(李啓夏)와 같이 기와를 올리고 방 3개(칸)의 집을 지었다. 김기전은 1928년에 “오랫동안 빈터로 있었는데..해주 오응선 씨가.. 3칸 정자를 세워 스승님의 옛일을 사모하는 지정(至情)을 표했다. 그러나.. 돌보는 이 없으매 거의 쓰러지게 된 것을, 몇 해 전에 김구암(구암, 김연국)께서 이 집을 약간 바로잡고 그 북쪽에 다시 두 칸의 함석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11. 1922년 : 용담서사 자리에 7월경 시천교에서 마루 두 칸, 온돌 한 칸 모두 세 칸의 기와집을 지었으나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12. 1927년 : 해월신사의 따님 되시는 금년 64세(1879년생)의 수도부인(崔潤氏) 한 분이 외로이 이 쓰러져 가는 집(용담서사자리)을 지키고 계셨는데, 그 후 폐허가 되었다.
13. 1960년 : 용담서사 자리에다 월남한 권태화ㆍ양이제 두 분과 천도교여성회에서 3칸짜리 집을 짓고 수도원이라 하였다.
14. 1974~5년 : 1974년 용담성지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고, 1975년 10월에 교인성금으로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당시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용담수도원’이라는 편호를 달았다.
15. 1978년 : 10월 28일(대신사 탄신 154주년) 용담성지 관리사무소와 현 '용담수도원'을 새로짓고 용담수도원장에 이군오(李君五)를 임명하였다. 이군오 원장은, 현재의 용담정(용담서사자리)에 ‘용담수도원’이라는 편호를 떼어내고 사각정에 걸었던 ‘용담정’ 편호로 바꿔 달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명진(金明珍) 종법사가 부당하다고 지적했으나 현재까지 그대로 ‘용담정’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현 용담정 건물에 현판되었던 '용담수도원'은 아마 현재의 새로운 용담수도원이 준공되었으므로 바꿔달은듯 하다.(1975년이 준공된 현 용담정의 용담수도원 현판과 1978년 준공되었던 현 용담수도원의 역사는 3년의 차이가 난다.)>
Ⅲ. 와룡암과 용담성지 연혁에 대한 설명
1. 대신사께서는 경신년(1860) 4월 5일(음), 가족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득도를 하신다. 이는 분명 가족과 함께 생활하시던 와룡암자리 집이었다는 것은 사실로서 인정해야 한다. 대신사 득도 당시 용담서사집이 있었는냐, 없었느냐의 문제보다는 대신사 득도 장소가 와룡암집이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강수선생이 1879년 집필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용담정’이라는 정호 이름을 거론한 것은 당시 일반사람들이나 동학교단차원에서 용담성지 일대를 ‘용담정’이라고도 불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2. 그래서 시천교에서도 1911년‘용담서사’자리 바위에 ‘용담정’이라 새겼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1927년 7월 17~18일 소춘 김기전 선생께서, 81세 되시는 대신사 수양따님이신 주씨(朱氏)와 인터뷰한 내용(신인간 통권 15호, 1927년 8월호-경주성지 배관실기)을 보면, 와룡암이나 용담서사에 대한 질문은 없고, 주로 ‘용담정. 용담정허’에 대한 질문이었다.
*근암문집이 목판본으로 보존해오다가 1976년에 최초로 간행된 근암유고필사영인본이 나왔고, 1998년에 증간된 근암집목판전집영인본이 인쇄되어 나왔으므로, 소춘선생은 근암문집의 내용(와룡암과 용담서사)을 모랐을 것이다. 당시 대신사 수양녀 주씨는 귀가 어둡고 말소리도 정확하지 않았았으며 글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3. 위 연보자료에서 용담정이라는 정호 명칭은 용담성지 일대나 와룡암, 용담서사를 ‘용담정’으로 불렀다는 잠작이 간다. 예를 들어, 의암 손병희 성사의 성지 ‘봉황각’을 통칭 의창수도원이라 부르고, 전북 부안에 있는 호암수도원 내 ‘봉황대’가 원래 수도원 이름이듯이 용담정이라는 성지 명칭도 혼합되어 부르게 된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경신년 사월초오일 대신사 득도 장소는 ‘와룡암자리의 집’이라는 것을 이제 밝히고 새로운 동학, 천도교 역사정립을 하여야 할 것이다.
4. 또한 천도교에서 현 용담정 건물에, 1975년에 있었던 정식 현판의 명칭은 ‘용담수도원’이었다. 용담정은 사각정에 편액(현판)한 역사가 분명 이었다. 그러나 3년후 1978년 용담성지 관리사무소와 현 '용담수도원'이 준공되어 현 용담정에 현판되었던 '용담수도원'편호를 떼어내고 사각정의 '용담정'편호로 교체했다. 이를 교단차원에서 했는지, 수도원장 개인이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현 용담정 건물에, '용담수도원'의 현판이 있었고 사각정에 '용담정'의 현판이 있었다.
Ⅳ. 글 마무리
이제 우리가 인정할 것은 바로, 대신사 득도 장소가 ‘와룡암자리의 집’이었다는 사실이다. 현 용담정 유래를 정확히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용담정 자리인 ‘용담서사’가 대신사 득도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신사 득도 장소인 와룡암 자리에 ‘대신사 득도의 집’을 복원을 해야 한다. 현재는 와룡암 유허지 표지판도 없다. 동학, 천도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 1 성지인 대신사 득도의 집을 역사 속에 묻어버리고 천도교가 잘되기를 염원한다면 과연 한울님, 스승님의 감응이 있겠는가.
동학 종단인 천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동학-천도교 역사를 논할 때, 현 용담정 위치가 대신사의 득도 장소라는 것으로 사실처럼 되어있다, 각종 사전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이는 바로 천도교에서 역사를 왜곡한 결과라고 본다.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치면, 현재 알았으면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끝으로, 춘암 박인호 상사의 명언으로 마칠까 한다.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포덕 153년(2012) 9월 13일
동학혁명기념관장 이윤영 심고.

-참고문헌-
* 근암집(최옥지음, 최동희 옮김-창커뮤니케이션)
<용담이십육영 병서(幷序)>
* 최선생문집도원기서(강수 차도주 동학역사기록서)
* 시천교조유적도지(시천교-국립중앙도서관)
* 소춘 김기전선생 문집(국학자료원)
* 동학농민운동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 천도교백년약사, 천도교약사(천도교총부, 교서편찬위원회)
* 동학(표영삼-통나무)
* 와룡암과 용담서사 이야기(표영삼-신인간 144년 11월호)
*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윤석산-모시는사람들)
* 용담에 관한 몇 생각(윤석산-신인간 153년 8~9월호)
* 개벽, 신인간(천도교중앙총부)


근암문집(국역)에 있는 와룡암터 사진
와룡암과 용담성지 연혁(수정)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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