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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기사
댓글 0건 조회 102회 작성일 17-11-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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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구 교인께서 해월신사법설 ‘수도’편에 언급된 이두황(李斗璜)이란 인물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이두황(李斗璜)과의 연관관계에 대하여 질의하신 건에 대한 답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同名異人입니다.
애석하지만 법설에서 언급된 이두황이란 인물의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법설에서 이두황과 함께 언급되는 라용환을 통하여 이두황이란 인물이 동명이인임을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두황은 1858년(철종14)한양출생으로 24세가 되는 1882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해 3월에 초토영군에 임명되어 동학혁명군 토벌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을미사변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입니다.
라용환선생은 1863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하였으며, 23세인 1886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혁명에 참가하였고, 성사의 뜻에 따라 3.1독립운동 33인에 동참하신 독립운동가입니다.
해월신사님과 ‘수도’에 대하여 질의응답한 시기를 라용환선생이 입도한 23세로 소급하여 가정하면, 친일 이두황은 라용환선생 보다 5세 위로 28세가 됩니다.
친일 이두황은 24세에 무과 급제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로 체포령이 떨어져 1896년 일본으로 도피할 때 까지, 1883년(25세)친군좌영 초관, 1884년(26세)수문장, 1886년(28세)훈련원 참관, 1887년(29세)훈련원첨정, 1889년(31세)흥해군수, 흥양감목관, 1891년(33세)나주감목관, 1894년(36세)죽산부사, 1895년(37세)양주목사, 훈련대 제1대대장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고, 일본으로 도피하여 10여년을 살다 1907년8월에 귀국하여 이토히로부미의 특사로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10월에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고 1908년1월에 전라북도 관찰사 겸 전라북도 재판소 판사로 전임하여 의병 진압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이와 같이 친일 이두황은 24세에 등과 하여 1916년3월9일 58세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일본을 등에 업고 평생을 주요관직을 거치며 영화를 누렸던 인물로서 법설상의 이두황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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