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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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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작성일 17-06-17 06:35 조회 15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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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之人生觀 註解書(14-7)


註 00 ; 기독교의 천당과 지옥 - 천당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원래 유태교 히브리 사상에는 없던 것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은 하나님만 영원하시고, 인간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로 보았다, 희랍의 이원론과 영혼불멸사상, 그리고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천당과 지옥의 개념이 나중에 도입이 되었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개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참된 종교의 가르침처럼, 진정한 천당과 지옥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무엇을 만드는가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음은 종교의 선각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수많은 국가와 사회세력이 서로 대립하며 각기 ‘평화’와 ‘진보’를 내세우지만,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단만을 배부르게 하겠다는 이러한 태도 자체가 다른 사람들을 바로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종교의 차이를 넘어, 우리 모두는 혹시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 다른 사람들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항상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천당도 지옥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당신의 일생을 결정할 것이다.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 재정리함
註 00 ; 惡투쟁 - 만사를 선악으로 나누어서 본 이분법 입장에서의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힘써 싸움./ 鬪爭은 어떤 단체나 개인 등이 어떤 목적을 이루거나 상대편을 극복하기 위하여 힘쓰거나 싸움을 의미한다. 유의어는 ‘싸우다’이다. /필자가 어학 사전을 바탕으로 문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이 기술함.
註 00 ; 所爲 - 이미 하고 있거나 해 놓은 일. 또는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이나 짓. 類義語는 所行.
註 00 ; 兆朕 - 나중 일이 벌어지는 양상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그 이전 단계의 움직임이나 변화나 상서로운 조짐./ 유의어 조상(兆祥), 증후(證候,) 전조(前兆).
人乃天의 長生은 現世와 來世를 구배해 보지 않는다. 어제의 연장변화가 오늘이요, 오늘의 연장변화가 내일이다. 今日은 어제에 비하여 다소 변천된 점은 있다. 그러나 自我生存이라는 生存本質에 대하여는 변화가 없다. 어제의 惡衣惡食(더러운 옷과 거칠고 맛없는 음식-오암)이 오늘의 錦衣玉食(비단처럼 아름다운 옷과 맛있는 음식-오암)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自我의 生存本質은 同一한 효과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擴充되어 今年, 明年, 明年又明年, 十年又十年의 靑壯老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自我生存의 本質은 변치 않은다.(‘않는다’ 의 잘못-오암). 그리하여 自我生存 本質에서 死라는 고비를 넘어 他界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의 생존에는 오늘과 어제의 관계와 흡사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명심하고 기억할 문제는 定在와 如在의 관계이다. 自我의 生存本質이 無限不變하게 進展하는 것을 定在라 하고, 또 老死, 成敗, 盛衰의 변화를 如在라 한다. 定在와 如在는 하나의 體요 하나는 用이다. 體가 없으면 用이 없고 用이 없으면 體는 空이다. 如何한 것이든지 用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如在를 用에 比하는 것은 知一不知二(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오암)의 유감스러운 일이다. 如在는 用인 동시에 부분 부분의 현상을 이름이다. 生 老 死의 부분적 其者와 부분적 用의 변화는 생존본질에 대한 如在이다. 그리하여 自我는 定在와 如在의 合致에서 생존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 경우에 自我의 본질이 靑年的 如在와 合할 때는 靑年 그것이 自我요, 老年的 如在로 나타날 때는 老年 그것이 自我이며, 死後에 靈的인 어떤 如在로 나타날 때는 어떤 如在 그것이 自我이다. 그러므로 現在와 來生은 同一하다는 것이다. 如在가 다르다고 해여 自我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六十年前의 李敦化와 六十年후의 李敦化가 李敦化의 如在 狀態는 전연 달라졌다고는 하나 李敦化 自我는 李敦化 自我 그대로이다. 生前死後도 또한 이와 같다. 生前과 死後가 달라지는 것은 如在의 변천 뿐이요 自我는 依然히 自我이다. 依然한 自我는 長生이며 不死이다. 宗敎家들이 死後 善惡을 말하는 것도 如在의 善惡을 말하는 것이다. 如在의 관계로 因하여 천당 지옥의 상징적 차이를 設한 것은 그럴듯한 일이며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生理學上으로 보면 七年前의 육체 세포는 七年 後면 一點도 없이 全然히 교체된다고 한다. 그러나 七年 前의 自我와 七年후의 自我는 依然히 自我임과 같이 現生 生理와 靈的 本質의 生理가 교체된다 할지라도 自我 其 者는 依然히 自我이다. 그러므로 自我는 神的 존재인 동시에 개성적 존재이다. 神이 개성적으로 自我 중에 들어 있는 自我가 神的으로 영원히 존재한 것이다. 自我의 定在와 自我의 表象인 如在는 동일하다. 如在의 변화로서 自我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如在善惡의 관계로 自我表象, 禍福苦樂의 관계가 달라지는 原因은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神의 至善을 본뜨는 신앙이 있어야 하고 그 신앙에서 時代性의 正信(올바른 믿음-오암)이 있어야 한다. PP.196-198.
註 00 ; 定在와 如在 - 定在란, 본질적 존재에 대립하고 의식과도 독립적인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존재.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라 하여 인간의 현실적 실존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類義語는 다자인(Dasein), 정유(定有), 현존(現存). 如在는 현재 살아 있는 존재로 문장의 내용상으로는 본질적인 존재와 현재 살아있는 현실적인 존재의 삶(老死, 成敗, 盛衰의 변화)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필자가 어학 사전을 바탕으로 문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이 기술함.
註 00 ; 體用, 體와 用 - 사물의 본체와 그 작용 또는 어떤 원리와 그 응용함을 말한다. 체(體)라는 것은 사물의 골자(本體)가 되며 쉽게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용(用)이라는 것은 항상 변화하면서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는 범위를 가리킨다. 체(體)가 건물 뼈대라면 용(用)은 건물 장식(인테리어)이다. 사물을 판단하는 과정은 체(體)의 영역에서의 암시를 용(用)의 영역과 만났을 때 만들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보는 것이다. 체(體)는 용(用)으로 변화하지만 용(用)은 결코 체(體)로 변할 수가 없다. 체(體)는 형체가 있으며 이미 만들어진 것, 일정한 범위가 정해진 것,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것을 말하며, 용(用)은 형체가 없으며 차후에 만들어진 것, 활동력이 왕성하고 위치가 없으며 일정한 범위가 없고 자유롭게 변형 가능한 것을 말한다.
■ 體用論 - 사물을 체와 용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그 각각의 의미와 상호 연관성 속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체는 사물의 본체, 근본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용이란 사물의 작용 또는 현상, 파생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체용론의 연원은 멀리 漢代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 鄭玄은『禮記』 序에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을 체라 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을 용이라 한다."고 하여 체용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체용론적인 사고방식이 제대로 정립된 것은 삼국시대 魏나라의 何晏과 王弼 등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비록 체용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사용한 本末의 개념은 체용론의 중국적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도가의 無와 有에 관한 설명을 본말론으로 체계화하여, 변화가 무궁한 천지만물에 대해 그 본체인 '무'는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다고 하며, 본체가 있어야만 개개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러한 본말론이 뒤에 불교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체용론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서당불교(書堂佛敎)에서 인도 불교를 중국 불교화할 때 그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으나, 송나라 유학자들이 이를 유가 철학에서 이론적이며 조직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체용의 사상은 이미 『中庸』에서 ‘비은(費隱)’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에서 체용의 논리는 인과의 논리와 대비되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바람과 파도의 관계로 비유된다면, 체와 용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이다. 따라서 인과론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체용론에서는 체와 용이 서로 다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송대에 성립된 성리학은 이 불교적 체용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데 사용했다. 특히 주희는 이 체용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자신의 이론체계를 수립했는데, 그는 "形而上인 것으로부터 말한다면 아득한 것(沖漠者)이 체가 되며, 그것이 사물 사이에서 발현하는 것이 용이 된다. 송대의 성리학자들이 이 체용 개념을 사용해 우주론과 인성론을 설명함으로써 체용은 철학적 용어로 확정되었다. 이를테면, 주돈이(周敦頤)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형이상자로서 천지만물이 생성되기 전의 본체로 보았고, 그 본체에서 동정(動靜)·음양(陰陽)·오행(五行)이 나오고 다시 교감상태(交感狀態)에서 천지만물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동정·음양은 그 본체의 작용으로 생각한 것이다.
정이(程頤)에 이르면 본체론을 구체화하여 理氣를 설명한다. 그는 『周易』 계사전(繫辭傳)의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에서의 형이상자로서의 도와 형이하자로서의 기를 理와 氣로 바꾸어 표현했는데, 이를 관념상의 존재로서 ‘道’·‘太虛’·‘無形’ 등으로 표현했고, 기를 질료적인 존재로서 ‘氣’·‘陰陽’·‘有形’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영구불변의 본체적 존재로서 체라 하고, 기를 변화하고 작용하는 존재로서 용이라 하였다.
주희(朱熹)는 주돈이· 장재(張載)· 정이의 본체론을 총정리해 理와 氣로 설명한다. 주희는 理를 천지만물의 본체(體)로서의 형상(形相)으로 보았고, 氣는 그 형상인 체를 구체화하는 작용(用)적 자료로 보았다. 理氣二元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해명한 것을 살펴보면, 정이는 人性을 의리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었는데 성(性)을 이(理), 정(情)을 기(氣)로 보고, 성은 착하지 않음이 없으나 정은 기의 淸濁으로 말미암아 善과 不善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심(心)의 주체를 성이라 하고, 심의 작용을 정이라 함으로써 성정을 체용으로 설명하였다. 주희의 성론은 정이의 性卽理說과 장재의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의 설을 이어받고, 거기에 太極은 곧 理요 음양은 氣라는 사상을 결부시킨 본체 우주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性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나누었고 다시 性情 문제로서의 맹자의 사단(四端 :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과 칠정(七情 : 喜·怒·哀·懼·愛·惡·欲)을 사단은 본연지성으로서 理· 體로 보았고, 칠정은 기질지성으로서 氣· 用으로 보았다.
『中庸』의 中和章에서도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성으로서 체라 보고, 발하여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이 화인데 이것은 정의 발로인 용이라고 보았다. 『中庸章句』에서의 人心· 道心에 관해서도 인심은 人欲이 있으므로 위태롭고, 도심은 천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정미(精微)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天理自然의 마음인 도심은 인간의 총체가 되고, 인욕과 물욕이 혼탁한 인심은 용이 된다고 보아 인심·도심을 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희 이후 동양 철학의 전반적인 문제를 체용의 개념으로 이론화, 체계화하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다음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재정리함.
■ 주희(朱熹) - 성리학(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킨 인물이다. 형이하인 것으로서 말한다면 사물이 또 체가 되고 그 사물의 이치가 발현하는 것이 용이 된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형이상을 도의 체라 하고, 천하의 달도인 5가지를 道의 用이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이황은 이를 해석하여 "체와 용이라는 것은 2가지가 있는데, 도리에 대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아득하여 조짐이 없으나 만상(萬象)이 빠짐없이 갖추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요, 사물에 나아가 말한 것이 있으니 배는 물에 다닐 수 있고, 수레는 육지에 다닐 수 있다는 것과 실제 배와 수레가 물과 육지에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주희의 체용론은 어떤 대상을 고정적으로 체와 용에 분속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상으로는 분리될 수 있으나 실제는 분리될 수 없는 모든 합일적 존재를 설명하는 추상적 범주였다. 주희가 이 체용론의 범주로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 대표적인 분야는 심성론이다. 그는 심을 체와 용으로 구분하여, 발(發)하기 전을 심의 체로, 이미 발한 때를 心의 用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심의 미발(未發)을 가리키는 性과 心의 이발(已發)을 가리키는 情 역시 體와 用의 관계로 설명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체용론은 중요한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 체용론을 이용해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한 대표적 인물은 李滉이다. 이황은 奇大升과 四端七情論爭을 벌이면서 사단은 理의 발(發)로, 칠정은 氣의 發로 설명하는 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心性論에서의 理發說은 그의 사상체계에서 우주론에서의 理動說, 인식론에서의 理自到說과 함께 성리학의 理氣論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다음백과에서 재정리
■ 이황(李滉) - 원래 성리학에서는 動靜하는 것은 氣이며, 이는 그 동정의 소이(所以)일 뿐 그 자체가 動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는 情意와 造作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황의 理發說· 理動說· 이자도설(理自到說/理氣互發說)은 분명히 성리학의 理에 대한 설명과는 배치되었다. 이때 이황이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체용론이다. 그는 理를 體로, 理가 상(象)으로 드러난 것을 용으로 파악하는 주희의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자체를 체와 용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대개 정의가 없다고 운운한 것은 본연의 체요, 발하고 생(生)할 수 있는 것은 지묘(至妙)한 용이다"라고 하여 이에 정의와 조작이 없다는 것은 이의 체를 말하는 것이며, 이가 발동하고 생한다는 것은 理의 用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철학에서 중요한 범주로 사용되던 체용론은 19세기 이후 서양세력의 침략을 받으면서 그들 기술문명의 우월성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중국의 中體西用論이나 우리나라의 東道西器論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음백과에서 재정리
註 00 ; 生理學上으로 보면 七年前의 육체 세포는 七年 後면 一點도 없이 全然히 교체된다고 한다.
인간의 세포 수명에 대한 현대 의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사람을 구성하는 각부의 세포가 일정한 한계수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 수명 즉 교체기간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는 일반적으로 약 60조 개, 많은 사람은 100조 개에 달하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세포 교체(분열)기간은 전체적인 분열의 주기는 2 - 4년이라고 한다. 피부세포는 4주, 위장 세포는 2-3일, 장점막 세포는 5일, 췌장 세포는 1년, 뼈는 20년, 골세포는 10일 등등이다. 장기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매 순간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나이는 항상 7-10세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세포는 분열과 사멸을 반복한다. 인체를 이루고 있는 각종 세포들도 예외가 아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새로운 세포로 교체가 이뤄진다. 세포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본다면 피부에서 손톱, 발톱, 그리고 오장육부에 이르기까지 태어났을 때 지니고 있던 그것과 지금의 그것은 전혀 다른 세포들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의 몸은 어제와 같을까, 아니 내일도 같을까? 세포는 분열 횟수에 한계가 있으며 결국에는 죽는다. /생물학 해설 중에서 발췌하여 재 정리함.
註解 ; ③ 德業 長生 ; 德業이란 한 인간이 살아 생전에 어질고 착하게 하는 행실이나 사업으로 쌓은 실적을 의미하고, 장생이란 육체적으로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에서의 의미는 심정적 또는 정신적으로 오래 사는 삶으로 장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문장의 흐름에 따라 새로이 기술함.
야뢰는 二 長生不死/ P.190.에서 ‘長生이 理에 대하여는 이 책 전부를 長生觀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하겠다. 長生은 종교적 來世觀이 그의 중심인 것은 물론이나 수운선생의 長生觀은 이를 세 가지로 말씀 하셨다. 一曰 肉的 長生 二曰 靈的 長生 三曰 德業長生이 그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지만, 肉的 長生과 靈的 長生의 설명만 있고 德業 長生의 설명이 없다. 누락되었거나 원문에서 아예 다루지 않았다고 推理해 본다.
三 萬事如意; P.198.
人間이라는「間」字는 關係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父子間, 兄弟間, 朋友間, 君臣間 등이 있고 기타 自然과 인간 사이에도 人間과 宇宙間, 人間과 禽獸間, 人間과 草木間, 등 百千億 無量數의 「間」이 있게 된다. 「間」은 相對이며, 相對의 對象이 생기면 事理의 관계가 생긴다. 그런데 事理의 法則은 대개 矛盾의 법칙에 의하여 생긴다. 金克木, 木克土, 水克火, 土克水, 火克金이라는 相克相生의 원리는 東洋 哲學의 本源인데 이것이 矛盾對立으로 일어나는 現象的 存在이다. 인간은 그것을 反對一致의 超越原理에서 보지 못하는고로 그것이 苦의 원인이 되어 번뇌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萬事는 塞翁之馬의 原理(興亡盛衰 또는 禍福苦樂이 갈아드는 원리-오암)를 가지게 된다.
인간은 그의 自由意志에서 과분한 慾을 품게 되고 여기서 不如意, 不滿足이 생기게 된다. 이 不如意, 不滿足은 一念在玆의 理에 依하여 不如意를 如意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수운선생은 가르쳐 말씀하시되 「一念在玆 萬事如意」라 하였다. 一念의 一은 다수 가운데의 一이 아니라 絶對의 一이며 超越的 一이다. 그러므로 一念은 神靈性의 至上命令에 合一된 一이다. 칸트의 理性의 至上命令과 彷佛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칸트의 理性은 理解의 의미가 포함되었고 神靈性의 至上命令은 直觀의 意味가 있는 것이다. 在玆는 卽地의 意義이다. 知識的 料量을 不許하는 卽覺的 卽地로써이다. 眞理 把持의 端的 卽地이다. 如意의 意는 天命的 意味를 포함한 天命化한 意志이다.
註 00 ; 相克相生 - 일반적으로는 相生相剋으로 기술한다. 相生相克은 중국식 표기로, 오행(五行)이 운행함에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일과 서로 충돌하는 일이나 사물 사이에 서로 연계되고 제약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주와 우주의 만물은 五行으로 구성되어 순환 변화한다. 그런데 오행은 실제 변화를 할 때 서로 영향을 주게 된다. 서로 싸우는 관계를 상극(相克)이라고 하고 서로 돕는 관계를 상생(相生)이라고 한다./ 成語와 어학사전에서 재정리.
■ 五行相生說 - 이것은 한대(漢代)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발전에 따라 성립된 학설로서, 오행상극설(五行相克說)·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과 함께 오행의 순환관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학설이다. 오행이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를 가리키는데,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오행상생」에 의하면, 이것들은 각각 동(東)·남(南)·중앙(中央)·서(西)·북(北)의 방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동중서는 동방을 뜻하는 목은 화를 낳고, 남방은 뜻하는 토를 낳고, 중앙을 뜻하는 토는 금을 낳고, 서방을 뜻하는 수는 다시 목을 낳는다고 하여,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길(蕭吉)의 『오행대의(五行大義)』에서는 현실의 나무[木]·불[火]·흙[土]·쇠[金]·물[水] 등의 구체적 손환관계로써 이것을 실증하려고 하였으며, 또 음양(陰陽)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한서(漢書)』「교사지찬(郊祀志贊)」에서는 이것을 역사적 인물과 결부시켜, 순환론적 사관을 전개시키기도 하였다. 즉 이러한 역사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한(漢)나라는 화덕(火德)을 받아 천통(天統)을 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을 신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한왕조(漢王朝)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자 한 것이다.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정리.
■ 陰陽五行說 - 음양사(陰陽師)는 모든 물질이 음과 양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고대 중국의 음양론(陰陽論)과 화 수 목 금 토(火水木金土)의 5개의 성질이 상생상극(相生相克)을 반복하면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오행설(五行說)을 합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연구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오행, 즉 火와 木은 陰에, 金과 水는 陽에 속해 있으며 나머지인 土는 중간에 속하며 하늘의 움직임, 천문에 의해 십간(十干)이 되고 땅에 의해 십이지(十二支)가 되어 시간과 점술에 작용되었다. 이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원리를 응용하여 자연과 인간 만사의 길흉을 설명해주는 것이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원래의 의미이다.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들에서 정리.
註 00 ; 萬事如意 - 주로 축복하는 말로,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萬事如意는 주로 중국어에서 萬事如意亨通과 같이 축하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 용어로, 如意(루이, ruyi)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變遷되어왔다고 한다. 인도의 梵語 아누어뤼(阿娜律)가 어원이라고 한다. 뼈, 뿔, 대나무, 나무, 옥, 돌, 동, 철 등으로 제작하며 최초의 如意는 사람의 손가락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후에 이것이 변천되어 구름, 영지, 心자 형태 등으로 발전했다. 고궁박물관 사료에 따르면 如意의 기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일컫는 효자손(등긁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다.
최초의 如意는 한 쪽 끝이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던 것으로서, 손이 닿지 않은 곳이 가려울 때 그것으로 긁으니 마음이 원하던 것을 해결해준다고 하여 如意라고 하였다. 反對語러 萬事休矣가 있다./성어와 어학사전을 바탕으로 재정리.
註 00 ; 칸트의 理性의 至上命令 -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을 자연적 최후 목적으로 삼고, “선(善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 존재의 질서를 보존하라. 너의 의무를 다하라, 너의 존재의 목적에 도달하라.”는 등의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 설명된다. 우리 인간이 반드시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한다면,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 본성이 있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은 칸트의 자유의지론을 수용할 수 있으며, 자유가 없다면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이라는 것을 물을 수 없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회한(悔恨)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라 하며 이 자유로부터 유래하는 도덕법칙은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서 무엇을 위한 수단 가치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萬事如意에 있어서 두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기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萬事如意요 하나는 道成德立으로 생각할 수 있는 萬事如意이다.
수운선생은 당시 徒弟의 修道的 効果(効와 效는 同字이지만 效果가 일반화 되어 있음.効果는 일본어 표기임 -오암)를 讚頌하여 曰 「美哉 吾道之行 投筆成字 人亦疑王羲之迹 開口唱韻 孰不服樵夫之前 懺咎斯人 慾不及石氏之貲 極誠其兒 更不羨師曠之聰 容貌之幻態 意仙風之吹臨 宿病之自效 忘盧醫之良名」(修德文/원문대조-오암)이라고 하였다. 修誠의 神力(성심을 다한 수도의 신통력의 결과를-오암)은 도처에 表現된다. 一字無識한 사람이 名筆도 되고 名句도 부른다. 容貌의 化氣는 仙風이 부는듯 하니 醜貌도 美貌 이상으로 德氣와 靈光이 나타나고, 宿病이 勿藥自効(勿藥自效의 잘못, 東經大全 原本 通文(현 天道敎 經典에는 없음)에 ‘當初敎人之意 病人勿藥自效’로 기술되어 있음.-오암)하니 神醫 扁鵲도 놀랠만 하며, 物慾을 끊는 道心은 石崇의 富도 浮雲과 같이 보고, 極誠한 사람은 師曠의 총명이 자연히 化出한다. 이것은 기적적 萬事如意다. 神靈性의 至上命令이 一念의 뜻하는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요 현재 그러한 사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찬양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으로 修道의 극치라 아니하시고 그 이상의 道成德立의 階段에 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道成德立이 되는 길은 在誠在人에 있다고 하였다. 誠은 自力的 誠行의 이름이요 人은 善知識을 이름이다. 아무리 정성있는 修行人이라도 善知識(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오암)을 만나지 못하면 誤人(올바른 지식을 몰라 언행이 바르지 못한 사람-오암)에 빠지기 쉽다. 아무리 기적적 神行이 있을지라도 誤人의 邪行에 빠지면 안되며 이를 경계한 후 道成德立으로서 萬事如意에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려면 善知識을 택하여 正信을 얻어야 한다. 正信을 얻은 뒤에는 不信曰信인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신앙으로서 道成德立이 되면 그는 敬天命 順天理하여 一動一靜 一成一敗를 오로지 付之於天命하게 된다. 動之天命 靜之天命 成之天命 敗之天命 成敗利害에 맡기는 것이니 그것은 오직 天命만이 있을 뿐이오 成敗利害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註 00 ; 不信曰信 - 善知識을 택하여 正信을 얻은 뒤에는 誤人의 말에 빠지지 않는 것 즉 誤人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修德文의 「大抵此道 心信爲誠 以信爲幻 人而言之 言之其中 曰可曰否 取可退否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 如斯修之 乃成其誠/(필자의 실험적닌 풀이) - 무릇 우리 도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정성이 된다. 믿을 신자를 풀어 보면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니 사람의 말 가운데는 올바른 말과 이치에 맞지 않는 그릇된 말이 있다, 그 중에서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버리어 거듭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굳게 정하라. 한번 마음을 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니 이와 같이 닦아야 마침내 그 정성을 이룰 수 있다.」에서 온 말이다.
註 00 ; 一動一靜 一盛一敗를 오로지 付之於天命하게 된다. - 布德文의「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一盛 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天理者也」/(필자의 실험적닌 풀이) - 삼황오제 이후부터 성인이 태어나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밝혀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가 천명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인간은, 이러한 천도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다(敬天命 順天理).)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러나 一盛一敗를 一成一敗로 다르게 사용하였다. 일의 성공과 실패를 의미할 때에는 成敗로 쓰고, 만물이 태어나 무성하게 자라고 사라짐을 의미할 때에는 盛敗로 사용한다.
一成一敗 萬事를 다못 天命에 맡긴다면 成도 天命, 敗도 天命이 되어 「信仰=天命」「天命=成敗」라는 方程式이 된다. 고로 만사는 如意가 된다. 왜그러냐 하면 信仰者의 意志는 곧 天命이기 때문이다.「(信仰者의 意志=天命)=(信仰者의 成敗=天命)∴信仰者의 萬事=如意」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신앙자가 가져야 할「慧」가 있어야 한다. 「慧」가 없는 신앙자는 盲目的 신앙이 되며 그러한 天命的 萬事如意는 맹목적 만사여의가 된다. 이것은 無能無爲의 放任的 自棄(自暴自棄의 준 말.-오암) 의 幣 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이를 바르게 하는 이 點이 信者의 선천적 根氣와 聰慧問題(총명한가 지혜로운가에 대한 문제-오암)도 되는 동시에 平常的 念의 修行도 된다.
道德的 萬事如意에 대한 平常的 念의 修行이라는 것은 意志的 根氣와 解脫的 慧明을 가져야 한다. 意志的 根氣라는 것은 修人事 待天命이라는 修人事的 根氣인데 거기에는 忍辱的 修行이 무엇보다도 無限價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佛의 十大 弟子중에 富樓那라고 하는 善知識이 있었다. 그 당시 그 지방 北方에 있는 未開한 土人들이 修行者에 대하여 난폭한 행위를 가할 뿐 아니라 殺傷의 참변까지 있었다. 석가는 이 소식을 듣고 어느 善知識을 택하여 그들 蠻民에게 佛說을 믿도록 하려고 생각 하던 중, 스승의 意中을 살핀 富樓那는 自請하여 蠻地에 가기를 원하였다. 석가는 그 말을 듣고 묻되「좋다. 그러나 네가 그 사람들이 너의 말을 듣고 욕설을 하고 모멸을 하면 어찌하겠는가?」그는 대답하되「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사람을 구타할 수도 있거늘 辱說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하겠나이다」「구타하면 어찌하겠는가?」「사람을 칼로 찌를 수도 있거늘 구타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하겠나이다」「萬一 칼로 찌르면 어찌하겠는가?」「사람을 죽일 수도 있거늘 찌르기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하겠나이다」「만일 죽으면 어찌하겠는가?」「죽으면 涅槃으로 갑니다」석가는 장하다고 칭찬하고 蠻地로 보내었더니 三個月이 못되어서 五百人의 信者를 얻었다. 그는 數年間 큰 공적을 세웠으나 필경 蠻人의 손에 희생되었다. 지금도 그 지방에는 富樓那의 塔이 하늘 높이 솟아 있어 그의 無量功績을 기념하고 있다. 이것이 忍辱의 修行이다. 이것이 修人事 待天命하는 修行의 첫조건이다. 이러한 修行을 가진 사람은 萬事如意를 無能無爲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忍辱 又 忍辱의 念德 분투노력을 계속하다가 成敗 결과는 天命에 맡기고 마는 것이다. 天命이나는 終末一語가 곧 萬事如意로 되어지는 것이다. P.198-204.
註 00 ; 석가와 부르나의 대화 - 부루나경(富樓那經)에 실려 있는 대화로, 야뢰가 인용한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원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존자 부루나가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위해 설법하여 주소서. 저는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 앉아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하면서 방일하지 않게 지내고, ……(내지)……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부루나(富樓那)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네가 능히 여래에게 그와 같은 이치를 묻는구나.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너를 위하여 설명하리라. 만일 비구가 사랑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며 생각할 만하고 마음에 들어 탐욕을 길러 자라게 하는 빛깔을 눈으로 보고, 그것을 본 뒤에 기뻐하고 찬탄하고 얽매여 집착한다면, 기뻐하고 찬탄하고 얽매여 집착하고 나면 환희하고, 환희하고 나서는 좋아하며 집착하고, 좋아하며 집착한 뒤에는 탐하여 사랑하고, 탐하여 사랑한 뒤에는 막히고 걸리게 된다. 환희하고 좋아하며 집착하고 탐하여 사랑하고 막히고 걸리기 때문에 그는 열반에서 멀어지게 되느니라. 귀․ 코․ 혀․ 몸․ 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부루나야, 만일 비구가 사랑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며 생각할 만하고 마음에 들어 탐욕을 길러 자라게 하는 빛깔을 눈으로 보고, 그것을 본 뒤에 기뻐하지 않고 찬탄하지 않으며 얽매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기뻐하지 않고 찬탄하지 않으며 얽매여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환희하지 않고, 환희하지 않기 때문에 매우 좋아하지 않으며, 매우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탐하여 사랑하지 않고, 탐하여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막히거나 걸리지 않게 된다. 환희하지 않고 매우 좋아하지 않으며 탐하여 사랑하지 않고 막히거나 걸리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점점 열반에 가까워지느니라. 귀․ 코․ 혀․ 몸․ 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는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간략히 법의 가르침을 말하였다. 너는 어디에 머무르고자 하느냐?"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서방 수로나(輸盧那)로 가서 세상에서 유행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서방의 수로나 사람들은 거칠고 모질며 가볍고 성급하며 못되고 사나우며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부루나야, 네가 만일 그들의 거칠고 모질며 가볍고 성급하며 못되고 사나우며 비난하기를 좋아하며 헐뜯고 욕하는 말을 듣는다면 마땅히 어떻게 하겠느냐?"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저 서방(西方)의 수로나 사람들이 면전에서 거칠고 모질며 심한 말로 비난하고 헐뜯고 욕한다면, 저는 '저 서방의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하며 지혜롭다. 비록 내 앞에서 거칠고 모질며 못되고 사나우며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나를 헐뜯고 욕하지만, 그래도 손이나 돌로 나를 때리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저 서방의 수로나 사람들이 거칠고 모질며 가볍고 성급하며 못되고 사나워서 너를 비난하고 욕하기만 한다면 너는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다시 손이나 돌로 때린다면 마땅히 어떻게 하겠느냐?"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서방의 수로나 사람들이 만일 손이나 돌로 저를 때린다면, 저는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하며 지혜롭다. 비록 손이나 돌로 나를 때리지만 칼이나 몽둥이를 쓰지는 않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혹 칼이나 몽둥이로 너에게 해를 입힌다면 너는 다시 어떻게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그 사람들이 혹 칼이나 몽둥이로 저에게 해를 입힌다면, 저는 '저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하며 지혜롭다. 비록 칼이나 몽둥이로 내게 해를 입혔지만 죽이지는 않는구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그 사람들이 혹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루나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서방의 수로나 사람들이 혹 저를 죽인다면, 저는 '모든 세존의 제자들은 몸을 싫어하여 혹 칼로 자살하기도 하고 독약(毒藥)을 먹기도 하며 노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기도 하고 깊은 구덩이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저 서방 수로나 사람들은 어질고 착하며 지혜롭다. 썩어 무너질 나의 몸을 조그마한 방편으로써 곧 해탈하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부루나야, 너는 인욕(忍辱)을 잘 배웠구나. 너는 이제 수로나 사람들 틈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제 떠나 건지지 못한 사람을 건네주고, 편안하게 하지 못한 사람을 편안하게 하며, 열반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열반을 얻게 하라."
그 때 존자 부루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그 때 존자 부루나는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사위성으로 들어가 걸식하였다. 밥을 다 먹고는 다시 나와 침구를 다른 이에게 물려준 뒤에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떠나 서방 수로나에 이르러 인간 세상을 유행(遊行)하였다. 거기 이르러서는 여름 안거를 지내며 5백 우바새를 위하여 설법하였고, 5백 승가람(僧伽藍)을 세워 평상과 요와 공양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다 갖추어 만족하였다. 3개월이 지난 뒤에는 3명(明)을 두루 갖추었고, 그곳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었다./ [출처] 311. 부루나경(富樓那經) 善哉 富樓那 汝善學忍辱
原文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尊者富樓那來詣佛所。稽首禮足。退住一面。白佛言。善哉。世尊。為我說法。我坐獨一靜處。專精思惟。不放逸住。乃至自知不受後有
佛告富樓那。善哉。善哉。能問如來如是之義。諦聽。善思。當為汝說。若有比丘。眼見可愛.可樂.可念.可意。長養欲之色。見已欣悅.讚歎.繫著。欣悅.讚歎.繫著已歡喜。歡喜已樂著。樂著已貪愛。貪愛已阨礙。歡喜.樂著.貪愛.阨礙故。去涅槃遠。耳.鼻.舌.身.意亦如是說
富樓那。若比丘。眼見可愛.樂.可念.可意。長養欲之色。見已不欣悅.不讚歎.不繫著。不欣悅.不讚歎.不繫著故不歡喜。不歡喜故不深樂。不深樂故不貪愛。不貪愛故不阨礙。不歡喜.不深樂.不貪愛.不阨礙故。漸近涅槃。耳.鼻.舌.身.意亦如是說
佛告富樓那。我已略說法教。汝欲何所住
富樓那白佛言。世尊。我已蒙世尊略說教誡。我欲於西方輸盧那人間遊行
佛告富樓那。西方輸盧那人兇惡.輕躁.弊暴.好罵。富樓那。汝若聞彼兇惡.輕躁.弊暴.好罵.毀辱者。當如之何
富樓那白佛言。世尊。若彼西方輸盧那國人。面前兇惡.訶罵.毀辱者。我作是念。彼西方輸盧那人賢善智慧。雖於我前兇惡.弊暴.罵.毀辱我。猶尚不以手.石而見打擲
佛告富樓那。彼西方輸盧那人但兇惡.輕躁.弊暴.罵辱。於汝則可脫。復當以手.石打擲者。當如之何
富樓那白佛言。世尊。西方輸盧那人脫以手.石加於我者。我當念言。輸盧那人賢善智慧。雖以手.石加我。而不用刀杖
佛告富樓那。若當彼人脫以刀杖而加汝者。復當云何
富樓那白佛言。世尊。若當彼人脫以刀杖。而加我者。當作是念。彼輸盧那人賢善智慧。雖以刀杖而加於我。而不見殺
佛告富樓那。假使彼人脫殺汝者。當如之何
富樓那白佛言。世尊。若西方輸盧那人脫殺我者。當作是念。有諸世尊弟子。當厭患身。或以刀自殺。或服毒藥。或以繩自繫。或投深坑。彼西方輸盧那人賢善智慧。於我朽敗之身。以少作方便。便得解脫
佛言。善哉。富樓那。汝善學忍辱。汝今堪能於輸盧那人間住止。汝今宜去度於未度。安於未安。未涅槃者令得涅槃
爾時。富樓那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爾時。尊者富樓那夜過晨朝。著衣持鉢。入舍衛城乞食。食已還出。付囑臥具。持衣鉢去。至西方輸盧那人間遊行。到已。夏安居。為五百優婆塞說法。建立五百僧伽藍。繩床.臥褥.供養眾具悉皆備足。三月過已。具足三明。即於彼處入無餘涅槃/[출처] 311. 부루나경(富樓那經) 善哉 富樓那 汝善學忍辱
註 00 ; 釋迦의 十大第子 - 十大第子란,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가리킨다. 경전에 따라 누가 10명에 들어가느냐는 달라지나, 유마경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순서 또한 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다.
① 사리불(舍利弗 Śāriputra):경전에서 흔히 부처의 설법 상대로서 '사리자'(舍利子)로 호칭되며 별명은 지혜제일이다. 갖가지 지식에 해박하고 통찰력도 빼어나서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간주된다./수제자라 일컫는다. 지혜제일 (智慧第一).
② 목건련(目建連 Maudgalyayāna):'목련'이라고도 불리며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대목건련이라 불린다. 신통력이 뛰어났다 하여 얻은 별명이 신족(神足) 제일이다. 사리불과 함께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불도에 귀의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귀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신통한 눈으로 보고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양을 드려 구출했다는 설화로 유명하다. 신통제일 (神通第一).
③ 가섭(迦葉 Kāśyapa):대가섭·마하가섭이라 불러 다른 인물과 구분한다. 욕심이 적고 족한 줄을 알아 항상 규율을 엄격히 지켰다 하여 행법(行法) 제일 또는 두타(頭陀) 제일이라 했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라는 일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며 첫번째 결집(結集)을 주도했다. 석가모니 사후 교단을 통솔하여, 오백 아라한과 석가모니의 법률을 편집(제1결집)하여 부법장(付法藏)의 1조(祖)가 되었다. 불립문자의 전통을 세운 선종에서는 조사의 계보를 인도로부터 따질 때 그를 초대 조사로 간주한다.두타제일 (頭陀第一).
④ 수보리(須菩提 Subhūti): 대승불교의 반야경에서는 항상 그가 공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공(空)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공(空)에 대한 설법을 잘 하여 해공제일 (解空第一) 이라 불렸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⑤ 부루나(富樓那 Pūrna):교화하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하여 설법제일이라 했다. 설법제일 (說法第一).
⑥ 가전연(迦旃延 Kātyāyana):마하가전연이라고도 불린다. 교의에 대해 논하는 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여 논의제일 (論議第一)이라 했다.
⑦ 아나율(阿那律 Aniruddha):심원한 통찰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여 천안(天眼)제일이라 했다. 아난과 함께 출가했다. 석가모니의 앞에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잠들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눈을 잃게 되었으나, 대신 진리의 눈을 얻었다. 천안제일 (天眼第一).
⑧ 우바리(優波離 Upāli):이발사라는 비천한 신분 출신이며, 교단의 규율에 정통하고 계율을 지키는 데 엄격했다 하여 지율(持律)제일이라 했다. 첫번째 결집에서 계율에 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하여 후대의 율장을 성립시켰다. 지계제일(持戒第一).
⑨ 라훌라(羅睺羅 Rāhula):석가모니의 아들로서 출가의 장애가 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교단 최초의 사미라고 하며,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은밀히 잘 실행했다 하여 밀행(密行) 제일이라 했다.
⑩ 아난(阿難 Ānanda):석가모니의 사촌 형제이며 '아난다'로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할 때까지 25년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첫 번 째 결집에서 석가모니가 직접 설한 가르침을 모두 암송해냄으로써 후대의 경장(經藏)을 성립시켰다. 가장 많은 말씀을 직접 들었으므로 다문제일 (多聞第一)이라 했다. /위키 백과사전과 다움백과에서 발췌하여 재정리함.
----------------------------------------------東學之人生觀 註解書 14-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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