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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제암리~수도암~수촌리 (158.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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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명림
댓글 0건 조회 333회 작성일 17-03-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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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suwon-chondo/Umj/620?svc=cafeapp&sns=talk

답사일시 158.3.28
조사지역 화성시 제암리~수촌리
참여자. 이길원, 최명림, 황문식, 이광호, 심국보

최명림 수원교구장
- 제암리에만 집중된 화성시의 삼일운동 기념사업은 시정되어야
- 고주리의 기념탑 건립과 생가 복원이 필요
- 제암리~고주리~수촌리 등 화성지역의 삼일운동 사적지를 연결하는 화성삼일운동 순례길 만들어야

수원지역에 동학이 들어간 것은 동학혁명 이전.
水雲 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 1862년 12월 흥해에서 接을 조직하고 接主를 임명, 金周瑞를 대구·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접주로 임명. 이 무렵 경기도 지역에까지 동학이 전파. 수원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이보다 20여 년 후인 1880년경.
수원지역에 동학을 전래한 주요인물은 徐仁周와 安敎善이다.
안교선은 호남 출신으로 1883년 최시형이 경주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 윤상오와 같이 有司로 참여하였다. 그는 1884년 2월경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安承寬과 金鼎鉉(金乃鉉)이 그에게 입도하였다. 이들은 수원지역 동학 포교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880년 徐丙學·張晩秀·李圭植·金永根·羅天綱·申奎植이 六任으로, 안승관은 京湖大接主, 金鼎鉉은 京湖大接司로, 林炳昇·白蘭洙·羅天綱·申龍九·羅正完·李敏道는 각각 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으로 수원지역의 동학교인은 수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이로써 수원지역의 동학은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대접주, 대접사, 접주, 육임 등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수원지역의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敎祖伸寃運動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893년 3월 10일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斥倭洋倡義運動을 전개하자
신용구와 이민도의 주선으로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관변측 기록인 「聚語」에는 수원과 용인의 동학교인 3백여 명, 수원접이라는 자들과 그 밖의 무리들 1천여 명, 수원접 840여 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주영장 보고는 840여 명.
- 1894년 9월 18일 반외세의 봉기령에 따라 즉각 기포, 수원지역의 동학군의 활동에 대해 오지영의 『東學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安承寬·金昇(鼎)鉉 등은 5천군을 거느리고 수원부를 점령하고 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바 官兵과 日兵을 만나 여러 날 싸우다가 마침내 패하였고......
그러나 수원의 동학군을 지휘한 안승관과 김정현은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南筏院에서 효수되었고 수원성에서 체포된 金元八도 효수되었다. 그리고 남양지역의 동학군도 白樂烈과 金興烈의 지휘하에 수원의 高錫柱·김정현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천도교 수원대교구♣
1905년 이종석, 임기진이 일진회 사무소를 수원읍 신풍리에 두고 활동. 의암성사 손병희가 친일세력 제거 후 1905 천도교로 선포,
임기진은 전답을 팔아 큰 재산을 희사하여 수년간 빚을 갚고 천도교 확장을 위해 노력.
안성 출신의 金漢式, 남양지역은 백낙렬의 등의 노력으로 다시 세력을 회복.
1906년 5월에 충북 진천 대접주 출신 이종석이 수원교구장.
북문 밖 영화리에 십여 칸 초가를 사서 천도교 수원교구 간판.
1907년 구락서 교구장. 3월에 손병희 의암성사 연무대에서 교리를 연설,
1908년 12월 교리강습소를 설립하여 100여 명을 양성하였으며 당시 수원 교인 수는 1천200여 호이었다.

성미납부 성적- 1909년 8월

남양교구는 전국 1등, 수원교구는 2등.

수촌리의 백낙렬은 삼괴지역, 김성렬은 팔탄면 고주리, 李秉夔은 팔탄면 노하리의 포교책임자, 1910년에는 수촌리를 비롯하여 독정리·어은리·장안리·화산리·이화리·덕목리·고주리·매향리 등 8개의 전교실을 설치.

1910년대 들어 전국 각 지역에 교리강습소를 설립, 근대교육활동을 실시하자 수원지역에는
栗北面 佛井里에 309강습소,
貢鄕面 堤巖洞에 310강습소,
鴨丁面 沙基村에 제446강습소,
수원군내에 544강습소, 634강습소,
陰德面 北洞에 733강습소,
장안면 장안리에 734강습소 등 7개의 강습소를 설립 운영하였다.
-
1906년 충북진천 대접주 출신의 이종석이 수원교구장.
1914년 당시 경기도에는 3개 대교구가 있었다. (괄호 안은 대교구장) /
- 경성부대교구(京城府大敎區)(장기렴(張基濂))
- 수원대교구(水原大敎區)(이종석(李鐘奭)) : 안성, 진위, 용인, 광주, 남양, 시흥, 안산, 부평, 인천, 강화 등 10개 교구를 관할
- 이천대교구(利川大敎區)(전철진(全哲鎭))
서울 우이동 봉황각 3.1운동 준비 기도에 참석
수원지역에서는 이종석·鄭道永·金正淡·李圭植·李敏道·韓世敎·金興烈·金昌植 등이 참여하였다.이들은 3·1운동 당시 앞장서서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밖에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중앙대교당 건축비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할 때 남양지역에서는 백낙렬을 비롯하여 솔선해서 자금을 갹출하였다.



방화수류정(용두각, 지붕에 용모양 조각이 있다.)

수원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이 발발한곳.
"3월 1일 북문안 용두각에 수백명의 주민이 모여 갑자기「조선독립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만세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명이 되었다.(아래 주소 참고하세요)
http://badoc.egloos.com/5294337

3월 16일~
⊙ 3월 16일 수원면 서장대와 연무대의 만세시위,
⊙ 3월 21일의 동탄면 구오산리의 만세시위,
⊙3월 23일 수원면 서호의 만세시위,
⊙ 3월 25일 수원면 청년학생 및 노동자의 만세시위,
⊙ 3월 28일 만세시위와 29일 수원기생조합의 만세시위,
⊙ 3월 25일 성호면 천도교인과 보통학교 졸업자의 만세시위,
⊙ 3월 29일 성호면 오산 장날의 만세시위,
⊙ 3월 26일의 송산면 만세시위,
⊙ 3월 29일 송산면 사강리 장날의 만세시위, 동일 양감면의 횃불시위, 동일 태장면과 안용면의 만세시위,
⊙3월 31일 향남면 팔탄면의 발안 장날 만세시위,
⊙ 4월 3일 우정면 장안면의 만세시위 등 20여 차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중 천도교인이 주도하거나 참여하였던 만세운동은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 동탄면, 성호면 등지에서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서울에서 李炳憲이 북수동 수원교구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논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수원교구에 내려온 이병헌는 서울에서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교인을 모두 동원,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이날 밤 북수리 수원교구에서 이병헌과 교구장 金仁泰, 理文員 安政玉, 典制員 金正淡, 講道員 羅天綱, 巡廻敎師 李星九·安鍾麟, 傳敎師 洪鍾珏·安鍾煥 등 주요교역자들이 모여 만세시위와 독립운동비 모금을 비롯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수원교구의 교인들은 4월 5일 서울로 올라가 천도교의 교주인 의암 손병희가 독립운동의 주모자로 일경에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구출하려는 비밀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교구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측의 소방대와 일본인은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에 난입하여 교인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金正淡·金正模·安鍾煥·安鍾麟·洪鍾珏·金相根·李炳憲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수원지역 천도교인의 3·1운동은 수원의 외곽인 남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양지역에 처음으로 천도교인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은 동탄면 구오산리였다.
구오산리 만세운동은 朴斗秉·金在天)·金鎭聲 등이 만세운동을 계획, 인근 촌락의 유지, 기독교인과 연락을 취하면서 이동식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오산 장날을 이용하여 밤늦게까지 횃불을 들고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뒤 천도교전교실 앞에서 해산하였다. 이로 인해 천도교 간부와 교인들이 용인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으며 전교실은 폐쇄되었다.
두 번째의 만세운동은 성호면 오산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울과 수원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산주민들은 천도교인과 3월 14일 시위를 전개하려 했으나 일제의 경계와 준비의 미흡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때 준비했던 만세운동은 열흘 정도 늦은 3월 25일 천도교인과 보통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융조합과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였다. 이어 3월 29일 장날을 기해 유진홍, 이성구, 김정윤, 안낙순, 모영철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3월 31일 발안리 만세운동
안정옥과 김흥렬,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李正根가 중심이 된 이날 시위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이정근의 제자들, 그리고 장날에 모인 주민 등 1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를 불렀으며 일경은 이를 제지하고 해산시키려했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이에 저항하고 계속 시위하자 일경은 시위행렬을 향해 발포 2, 3명이 희생되고 해산하였다.

4월 3일,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
수원지역에서 가장 격렬하였던 4월 3일의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수촌리의 백낙렬은 李鳳九·鄭淳榮·洪秀光 등과 같이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다. 이어 화수리주재소를 포위 역시 방화하였으며, 주재소 안에에서 총격을 하던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순사를 폭행하여 참살하였다. 그밖에 음덕면과 마도면, 비봉면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朴夏遠)과 丁大成가 일시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화성의 향토사학자 이길원선생의 안내로 제암리, 수도암, 백낙렬선생의 묘소있던 곳, 수촌리를 둘러보다.
최명림 수원교구장, 황문식동덕, 이광호 동덕과 함께하였다.
이길원 선생은 1943년생, 수년전 화성시장에도 출마했었다. 지역의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많은 자료를 박환 교수에게 제공하였고 박환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수원-화성의 삼일운동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http://blog.naver.com/kfmbodo/80208533901
http://cafe.daum.net/finecitydongtan/38Ya/410?q=%C0%CC%B1%E6%BF%F8%20%C8%AD%BC%BA%BD%C3
http://cafe.daum.net/sorysayee/1R8o/2912?q=%C0%CC%B1%E6%BF%F8%20%C8%AD%BC%BA%BD%C3
http://www.ggdaily.kr/sub_read.html?uid=62479§ion=sc3

이 선생의 증언과 기존의 자료를 참고하여 수원화성지역의 삼일운동을 개관
- 내용 계속 업데이트 -







제암리 학살로 순국한 고결한 희생, 김흥렬
김흥렬 선생은 남양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다.
1894년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수촌리 백낙렬과 힘을 합해 향남․팔탄면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고주리와 제암리 교인들과 함께 상투를 자르고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로서 사랑방을 전교실로 개조하여 고주리․제암리 주위의 교인들을 시일마다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인근의 유학자이자 발안장터 만세운동에서 순국한 이정근과도 자주 만나 교유하였다.
일제강점기 수원지역의 천도교는 교세가 매우 강했는데, 수원교구 산하의 남양교구가 성미 실적 전국 제1위를 할 때에도 김흥렬은 백낙렬과 함께 성미를 당나귀에 싣고 중앙총부에 상납할 정도로 충실한 신자였다.
김흥렬은 김창식과 함께 1914년에 제7회로 105일간 연성수련을 했다.
김흥렬에겐 외동딸 김철화가 있었는데, 이 딸을 천도교 제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의 며느리로 출가시킬 정도로 천도교의 핵심세력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동생 김성열을 시켜 고주리․제암리 주위 부락 젊은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조직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한 인물이었다.
1918년 천도교에서 대교당 건축성금을 모금할 때 김흥렬은 자신의 논 3천평과 밭 3천평을 팔아 중앙총부에 헌납하였고, 인근 부락 교인들에게도 헌납을 권유하여 모금한 후 총부로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김흥렬은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백낙렬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수원지역 3․1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고주리․제암리․가재리 등의 만세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하였고, 발안장터에서도 이정근․안정옥 등과 함께 군중들을 지휘하여 항일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계획적이면서 조직적으로 일어나 일제 식민지배의 말단 행정기구였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공격하여 갖은 악행을 일삼던 일제의 주구 일본순사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일제는 가옥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보복적 행동을 감행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수색한다는 핑계로 살인과 방화, 구타 등을 벌이며 ‘제암리 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은 후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4월 3일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토벌작전은 더욱 더 거칠어졌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시위주동자인 김교철과 백낙렬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야간에 수촌리 마을에 들이닥쳐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수촌리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혔다.
또한 일제는 만세운동이 벌어진 상황이 내란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3․1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진압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지 않아 아리타는 제암리에 대대적인 진압을 시작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과 사사카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의 주동자로 인정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인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불러 모았다. 그런 다음 그들 모두를 교회에 가둬 놓고 불을 질러 3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리타는 제암리 촌락의 대부분을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향남면 제암리는 발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으로 모두 33호의 농가가 있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종교적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포교가 많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감리교가 전파되어 초가집의 교당이 제암리에 있었고, 인근 지역을 합하여 15호의 신자 집이 있었다.
제암리 여러 희생자들과 함께 김흥렬은 고주리에서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가족과 함께 학살되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3․1운동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갔던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일제 보복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1년 애국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백낙렬 선생의 묘소를 찾아서





수촌리 가는 고개길

제암리에서 수촌리쪽으로 가다보면 고개 넘기 전에 수도암이란표시가 나온다.
수도암 / 백낙렬 선생이 은신 하던 곳
백낙렬은 1865년 남양군 장안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다. 1885년 남양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자 동학에 입도하여 포교와 수도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29세의 나이로 이 지역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의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 당시에는 솔선수범하여 상투를 자르고 이 지역의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2월 7일 백낙렬은 천도교 남양교구 금융원으로 일하면서 남양교구 제 446 강습소를 열어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이 지역의 교인들을 위해 수촌리 전교실에 강습소를 열고 교세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8년 중앙대교당 건축 성금을 모금할 때에도 남양교구 순회교사로 교인 가정을 방문하여 많은 금액을 모금하였고, 중앙총부로 올려 보내 3․1운동의 거사자금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했다.
당시 수원군 우정․장안면 3․1운동은 3․1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항쟁지 중 하나이다. 우정․장안면 3․1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가 백낙렬이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 모두가 참여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정치와 경제적 예속관계는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자 했고,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대항하여 우정․장안면의 모든 주민들은 백낙렬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백낙렬과 김흥렬의 주도 아래 천도교 전교사들을 중심으로 사전 조직되고 모의되었다. 천도교 전교실은 우정․장안면의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교도들과 주민들을 동원하기가 매우 좋았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남양교구의 순회교사로 장안면 수촌리 출신인 백낙렬과 김성열, 안종후 등은 서울에 올라가 3월 1일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고향 수촌리로 돌아와 비밀리에 활동을 하면서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벌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백낙렬은 수촌리 구장(오늘날 이장)이면서 이 지역 천도교 책임자였다. 그는 천도교 전교실을 통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하고, 각 전교실의 책임자들을 만나 3․1운동에 대해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에 거주하는 김흥렬, 팔탄면 가재리의 이정근과도 거사를 논의하였고, 백낙렬과 뜻을 같이한 김흥렬은 다시 제암리의 안종환, 안정옥, 안종후 등과 상의하였다. 백낙렬은 독립운동 자금이 모자라면 빚을 얻어서라도 3․1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심하고, 김흥렬은 향남․팔탄면을 책임지고, 백낙렬은 우정․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하고 3․1운동을 실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사전 준비 끝에 우정․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서울보다 한달 늦은 4월 1일 밤 7시에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약 2백여명이 모여 그동안 말단 식민행정을 행사했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쌍봉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군중들은 수촌리 천도교 전교실에서 만든 태극기와 깃발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식민지 백성으로 억울하게 살아왔던 것에 대한 분노와 독립에 대한 의지는 활활 불타올랐다. 쌍봉산에는 약 1여천명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오후 3시경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자신들을 괴롭혔던 서류와 집기류들을 파손하고 불에 태워 버렸다.
의기에 찬 만세 군중들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장안면장을 다시 앞세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의 선두에 세운 뒤,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후 4시경에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이때 놀라 도망치는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군중 1명이 넘어져 숨지자 이에 격분한 군중은 가와바다 순사를 추격하였으며, 가와바다 순사가 도망가며 쏘아댄 총에 3명이 더 쓰러졌다. 도망가던 가와바다 순사는 곧 수십 명의 군중에 포위되었고, 차희식, 장소진, 이봉구 등이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는 1917년 장안면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자 부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혹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위생검사 등을 시행하여 모욕을 주고, 주민들이 모여 있으면 풍속단속을 핑계로 도박죄를 뒤집어 씌워 끌고 가 모진 태형을 받게 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젊은 나이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뺨을 때리며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많이 하였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사전에 계획된 만세운동으로 백낙렬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세력과 수촌리의 기독교 세력, 유교적 토착 세력, 천주교 세력 등이 합심한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2천 5백명의 모든 지역 주민이 동참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를 처단한 대표적인 3․1운동의 항쟁지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54세였던 백낙렬은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와 장안면 구장회장직과 함께 수촌리 구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백낙렬은 우정․장안면에서의 3․1운동을 이끈 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3년간 충청도 계룡산에 피신해 있었다. 그후 10년 동안을 고주리 천덕산 수도암에 은신해 있으면서 교인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신병을 얻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백낙렬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살다가 1936년 11월 20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쓸쓸히 눈을 감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2002년 건국포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조당이 옛 수도암. 나머지는 새롭게 조성되었다.





일본군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장안면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李鳳九가 만들어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할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버리고 나왔다.
4월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선동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리하여 수촌리는 네 차례의 보복을 당하였다.


수촌리의 옛 천도교당 -벽돌 건물과 뒷 건물




백날력 선생 집 앞에서 (뒤 파란 지붕이 백낙렬 선생의 집)





수원화성의 3·1운동과 천도교인의 역할
1) 만세운동의 준비과정
수원지역 천도교인의 만세시위는 수원읍내와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 동탄면, 성호면 등 주로 수원군의 동부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만세운동의 준비과정을 수원읍내와 향남면과 팔탄면, 우정면과 장안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수원지역 천도교인의 만세시위 준비과정은 수원교구의 모의단계,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던 남양교구의 만세시위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다.
먼저 수원교구의 모의단계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제작과 만세시위에 참여한 바 있는 이병헌이 수원교구로 내려오자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이병헌은 3월 16일 수원교구 관내의 교역자, 즉 김인태·안정옥·김정담·나천강·이성구·안종린·홍종각·안종환 등을 수원교구로 모이도록 한 후 서울에서의 만세시위의 정황을 전달하는 한편 수원에서의 만세시위와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날 계획을 논의하던 중 수원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하여 교구실을 난입, 폭력으로 참석자 대부분이 중경상을 입었다. 만세시위 모의단계에서 일본측에 발각됨에 따라 수원교구의 만세시위는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

둘째, 남양교구의 만세시위 계획은 장안면의 백낙렬, 팔탄면의 김성열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와 비밀리에 독립운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당시 남양교구 순회전교사인 백낙렬59)은 남양교구 관내 각 전교실을 돌며 거목골전교실의 이종근 ·우영규·우종열, 기림골전교실의 김현조·김익배, 장안리전교실의 조교순·김인태, 덕다리전교실의 김창식, 우정면 사기말전교실의 김영보, 고온리전교실의 백낙온, 덕목리전교실의 한세교, 안곡동전교실의 박용석·박운석, 팔탄면 고주리전교실의 김흥열을 만나 만세시위를 협의하였다. 그리고 김흥열은 제암리의 안종환·안정옥과 연락을 위하고 역시 만세시위를 협의하였다.
이밖에도 백낙렬은 우정면 주곡리의 차희식, 김흥렬은 팔탄면 가재리의 이정근과도 연락을 취했다. 이와 같이 백낙렬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남양교구는 3월 16일 수원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종환과 안종린을 수원교구 만세시위 계획회의에 참여토록 하였다. 이날 회의에 참석하였던 이들은 이병헌과 함께 부상을 입고 돌아왔지만 지방교구 자체의 부담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에 따라 김흥열은 향남면과 팔탄면, 백낙렬은 우정면과 장안면을 각각 책임지고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함께 온 이병헌은 제암리 김학교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남양교구의 만세시위계획을 지휘하였다.
2) 구장회의의 주도
구장회의는 우정면과 장안면에서만 보이고 있다. 3월초부터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백낙렬·김대식 등 우정면과 장안면의 각 마을 구장은 구체적인 계획과 주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3월 27일 區長會議를 개최하였다. 특히 이 구장회의는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종교조직이나 청년·학생조직을 통해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것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3월 27일에 개최된 구장회의에는 수촌리의 백낙렬, 어은리의 이시우, 독정리의 최건환, 장안리의 김준식, 덕다리의 김대식, 사랑리의 우시현, 사곡리의 김찬규, 금의리의 이호덕, 석포리의 차병한, 노진리의 김제윤의 아들 등 10명이 참석하였고 만세시위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보를 쌓는 일’로 개최되었지만 당시 김현묵 면장은 신문조서에서 ‘차병한이 일동에 대해 수일 전에 발안리에서 소요가 있었을 때 일본인 아이가 게다(일본 나막신)로 구타하는 것을 보고 분개를 견딜 수 없었으니 만세를 부르자고 말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시위 준비를 위한 회의였거나 차병한의 발언 이후 결과적으로 만세시위를 협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만세당일 주민들의 동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구장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주민을 만세시위에 동원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찰에서 신문조서를 받은 주민들은 한결 같이 구장들이 만세시위 당일 강제적으로 주민을 동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백낙렬이 구장으로 있는 수촌리의 경우 ‘수촌리의 구장 백낙렬이 와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나오라’, 또는 사환 이원준을 통해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석포리의 경우도 구장 차병한이 주민을 동원하는가 사환을 시켜 주민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날 모임은 적어도 만세시위에 대한 1차적인 모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월 27일 1차 구장회의에 이어 만세시위가 있던 4월 3일 12시 독정리 최건환의 집에서 2차 구장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는 1차 회의보다 구체적으로 행동방침을 정하였다. 당시 만세시위의 증인으로 신문조서를 받은 韓冕會와 朴福龍가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4월 3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뒤에 협력하여 장안, 우정의 두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그 곳에 비치된 장부와 서류를 불태우고 또 화수리 경찰관주재소에 방화하고 그곳의 일본인 순사 川端豊太郞을 살해할 것.
독정리의 소사가 와서 그 구장 최건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오늘 장안 우정 각 면사무소 및 순사주재소에 다수 몰려가 때려부수기로 되었으니 … 장안리 각호를 돌면서 오늘 장안, 우정 두 면사무소 및 화수리주재소를 때려 부수고, 또 일본인 감독순사를 죽일 것이니…
수촌리와 독정리의 경우처럼 백낙렬과 최중환이 본인이 직접 또는 사환을 시켜 주민을 동원을 한 것은 구장회의가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백낙렬과 차병한이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지목되고 있음은 구장회의 역시 이들이 주도적으로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순사보 매수와 쌍봉산 모의
구장회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만세시위의 방향을 정한 후 화수리주재소의 오인영84)을 매수하고 쌍봉산에서 행동반을 조직하였다. 3월 29일 오후 5시경 수촌리의 차한걸과 이순모는 오인영이 하숙하고 있는 화수리 김영춘의 집을 찾아 그를 불러낸 다음 만세시위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다음날 30일 오후 4시 차한걸과 이순모, 오인영을 비롯하여 우정면 석천리의 김재식, 매향리의 백남표, 화산리의 기봉규, 조암리의 김문명, 장안면 장안리의 최학성, 독정리의 우영규와 홍순근, 수촌리의 백낙렬 등 11명은 만세시위 당일 전개할 일을 분장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일본인 순사 살해반과 주재소 및 면사무소 방화반 등을 조직하였다. 즉 일본인 순사살해반에는 차한걸·이순모·김재식·우영규, 주재소 및 면사무소 방화반에는 오인영·김문명·백낙렬85)·최성학·홍순근·백남표·기봉규 등을 각각 선정하였다.86)
그리고 그 실행방법으로
첫째 주민들로 하여금 한국독립만세를 부를 수 있도록 선동할 것,
둘째 주재소 및 면사무소를 포위할 것,
셋째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문을 파괴할 것,
넷째 방화반의 방화,
다섯째 일본인 순사 타살 등으로 일련의 순서를 정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의 사전조직화에 대해 오인영은 비밀에 붙이기로 하고 만세시위가 성공한 후 4월 15일 5백원을 받기로 하는 증서를 받았다. 그리고 수금에는 김인태·최영석·김현조·우영규·기봉규 등이 참여하였다. 쌍봉산 모의에 참가한 천도교인으로는 기봉규89)·우영규·백남표90)·백낙렬, 김현조, 김인태 등이 참여하고 있다.
4) 주민의 동원 및 만세시위의 주도
수원지역 3·1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조직적인 주민동원이라 할 수 있다. 주민동원은 이미 구장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계획은 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종교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교세와 종교조직의 분포가 가장 컷던 천도교가 주민을 동원하는데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 만세운동에서 천도교인과 관련하여 교인과 주민동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안면 수촌리의 백낙렬은 이날 이른 아침 자신의 집에서 李鳳九·鄭淳榮·洪秀光 등과 같이 만세시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사환 李元俊과 함께 집집마다 돌면서 교인과 주민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봉구는 수촌리전교실에서 제작한 ‘조선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독정리에서는 전교사 李鍾根 우종열·우영규 등이, 덕다리에서는 김창식이, 장안리에서는 조교순·김인태·양순서 등이, 기림골에서는 남양교구장 김현조와 전교사 김익배 등이 교인과 주민을 동원하였다.94) 우정면의 경우 김창식과 김익배가 사곡리로 직접 나아가 김연성과 함께 주민들을 화산리 사기말로, 백낙온은 고온리 주민을 동원하면서 매향리 낭깨, 석천리 주민을 동원하였으며, 한세교와 박운석, 박용석은 이화리 뱅곡·만곡·뱅속, 석천리 유촌동 주민을, 김영보와 최일순, 최영순, 최완순 등은 화산리 배미·장포·한말 주민을 각각 사기말로 동원하였다.
그밖에 주곡리에서 동원된 주민들은 백낙렬의 지휘로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여 각종 서류와 기물을 파손하고 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川端) 순사가 시위행렬에 참살당하였으며 시위행렬 중에서는 2명의 사망과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주민의 동원은 당시 4월 15일 수원경찰서에 송치 신문조서를 받은 수촌리의 차인범, 김흥삼, 김덕삼, 이학서, 백익순, 김종학, 백남훈, 김교철 등은 구장으로 있는 백낙렬 또는 그의 사환 이원준의 권유와 강압적 동원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이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백낙렬과 천도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수원경찰서에서는 이외에도 우영규, 기봉규, 백남표, 이원준, 차인환, 김정표, 이봉구 등을 주민을 동원하여 우정면과 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 방화 및 천단 순사의 살해범으로 엄정 수사할 것을 시달하고 있다.
한편 백낙렬은 만세시위가 끝난 후 일제의 보복을 대비하여 주민을 대피시키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이제 수비대가 온다. 오면 총으로 사살한다.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남산에 웅거하자’라고 하며 사강리 남산으로 집결시키기도 했다.
5) 기독교 및 유림과의 연대
수원지역 3·1운동에서 천도교인들은 중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유림과 연대를 통해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거나 역시 주민을 동원하는데도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였다. 우선 백낙렬과 김성렬은 기독교의 안종후와 같이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와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김흥렬은 팔탄면 유학자 이정근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구한말의 한학자인 이정근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궁내부 주사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팔탄면, 향남면, 우정면, 장안면, 정남면, 봉담면, 남양면 등 7개면에 서당을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가 운영하였던 서당은 만세운동을 준비하거나 전개하는데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특히 3월 31일 발안만세운동에서 제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으며, 자신도 희생되었다. 특히 유림과의 연대는 중앙에서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와의 연대는 신문조서나 증인청취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장안면 금의리 李海鎭 이장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라고 밝히고 있듯이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의 만세운동은 종교간의 연대를 통해 전개되었다. 특히 제암리학살사건에서 보듯이 희생자가 대부분이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인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밖에도 동탄면에서는 기독교인과의 연대를, 성호면에서는 보통학교 졸업생과의 연대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과 천도교
3월 31일 발안장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군수에게 군대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일제는 가와바다 순사가 참살되는 격렬한 시위는 천도교가 주동하였다고 판단하고 천도교 전교실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수색하는 한편 방화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제암리에서 37명이, 고주리에서 6명이 각각 희생되었다.
일본군이 네 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한 곳이 장안면 수촌리이다.
이것은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 습격 때 ‘대한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 쓴 깃발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깃발은 李鳳九가 만들어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할 때 주재소로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버리고 나왔다.
4월 4일, 오전 사이다는 수비대와 함께 화수리주재소 현장을 조사하다가 이 깃발을 보고 수촌리 주민들이 선동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리하여 수촌리는 네 차례의 보복을 당하였다.
1차 보복은 4월 5일에 시도되었다. 이날 오전 3시 반경 아리다는 수비대 30여 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을 마구 쏘아댔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전교실과 집을 닥치는대로 방화하여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보복으로 가옥 24채와 5명의 주민이 부상을 당했다.
2차 보복은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에 다시 들려 불타고 남은 8채의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이때 이봉구가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를 참살할 때 피가 묻은 옷을 미처 처분하지 못하고 다락에 감추어 두었는데 발견되었다. 그리고 오전 산으로 피신하였던 주민이 집으로 내려왔다가 검거되어 발안리주재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3차 보복은 이틀 후인 4월 7일 다시 자행되었다. 이날 일본 수비대는 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굴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은 협박하여 모은 다음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들은 밧줄에 묶여 뭉둥이질을 당했으며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졌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은 130여 명에 달하였다.
4차 보복은 그 다음날인 4월 8일 전개되었다.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수비대는 1차 보복 때 방화하고 남은 8채의 가옥 중 4채를 다시 방화하였다.121) 이와 같이 네 차례의 보복으로 수촌리는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방화되었으며 천도교전교실과 강습소, 이봉구·백낙렬의 가옥 등 모두 소각되었다.
수비대는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장안면과 우정면 마을을 보복한 후 향남면 제암리에 보복의 손길이 뻗쳤다. 4월 15일 오후 2시 반경 사이다는 아리다를 앞세우고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한 후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사이다가 할 말이 있으므로 교회로 전원 다 모이라’고 시달하였다.

주민들은 당시 金學敎의 집에 숨어 있던 이병헌에게 통역을 부탁하였으나 이병헌은 자신도 검거될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거절하고 뒷산에 숨어서 동태를 파악하였다. 주민들은 교회로 모였으며 수비대는 교회 정문에서 총을 세워 놓고 사람 키를 비교한 다음 하나 둘씩 들여보낸 후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석유를 뿌린 후 방화하였다 이중 洪淳鎭은 밖으로 나오다가 총에 희생되었고, 盧慶泰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124) 이날 교회에서 참살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인으로 일반적으로 23명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하고자 한다. 당시의 학살상황을 정한경은 「한국의 사정」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요일인 4월 15일 낮 몇 명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와 강연이 있을 터이니 모든 남자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교인들을 모두 교회로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종이 창문 틈으로 군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을 때에도 일본군인들은 이미 불길에 싸인 교회 건물에 계속 불을 붙였다.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을 기도했지만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교회 밖에는 이같이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6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남편이 교회에 불려 갔는데 총소리가 나자 놀란 두 명의 부녀자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달려와 군인들의 틈을 비집고 교회로 접근하러 하자 그들을 무참하게 죽여버렸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칼에 찔려 숨지고 40세를 넘는 다른 한 여자는 총살당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군인들은 그런 다음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이어 수비대는 학살사건 이후 제암리 집집마다 돌면서 방화하여 33채 가옥 중 2채만 남기고 천도교전교실을 포함하여 31채가 불타버렸다. 제암리교회에서 주민들을 참살한 아리다는 곧바로 팔판면 고주리로 향하였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김선진 /
4월 9일 새벽 조용히 잠든 고주리 부락에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선두로 하여 수비대 1개 소대 병력이 들이 닥쳤다. 수비대들은 고주리 부락을 포위하고 가가호호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날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안경환(安景煥), 현병기(玄炳基), 김시열(金時烈), 김창렬(金昌烈), 김경렬(金慶烈), 김동진(金東縉), 김교신(金敎信), 송준용(宋俊用), 박경의(朴慶儀), 김성렬(金晟烈), 김흥복(金興福), 김주남(金周南), 김세열(金世烈) 등이 수비대들에게 잡혀 포박을 당한 채 발안주재소로 끌려갔다. 이 날 마침 김흥열과 김주업은 결혼문제로 인해 남양에 나아가 있어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들 고주리 주민들은 발안주재소에 끌려나가서 삼괴지역 주민들과 분리하여 역시 똑같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들은 내려치는 몽둥이로 인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가혹한 고문을 당해서 몇 번씩 기절하는 비인간적 학대 속에서 거의 죽은 송장처럼 되어서야 냇가에 버려졌다. 그들은 서로 도우며 기어서 집으로 돌아와 여러달 동안 치료를 받아 정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문을 당한 생존자 현병기(玄炳基, 94세 1978년), 김시열(金時烈, 87세 1978년) 옹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도 고문당할 때 생각을 하여 보면 몸서리가 쳐 집니다. 미친 놈들처럼 사정 없이 몽둥이로 내려쳐 무슨 장사인들 배겨나겠어요. 누구의 지령을 받았느냐? 주동자가 김흥렬이냐? 헌병 2명은 누가 죽였느냐? 수촌리 백낙렬(白樂烈)이 어디에 숨어 있느냐? 하면서 몽둥이로 패대는데 무슨 정신이 있겠어요. 얼마를 맞았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여러 차례 시달리다가 기절해 버렸어요. 얼마 뒤 정신을 가까스로 차리고 보니 주재소 뒤 냇가에 버려졌더군요. 우리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기어서 집에까지 돌아와 여러 달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했어요. 지금도 날이 흐려지기만 하면 그때 고문의 여독으로 전신이 쑤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하며 말을 마치고는 눈시울을 적셨다.

또 이 날 수촌리 이순모(李順模)는 장안 우정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 습격사건에 참가한 후 고주리 처가집으로 몸을 피해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 날 새벽녘 수비대들의 총소리에 놀란 장인 김교신(金敎信)과 사위 이순모는 안방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이 때 순사보 조희창이 수비대 2명을 데리고 이 집을 덮친 것이다. 조희창이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김교신의 부인 김향순(金香順)이 그들 앞을 막으며 못들어가게 안간힘을 썼으나 수비대에게 얻어맞고 기절하여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결국 벽장 속을 뒤져서 김교신과 이순모를 붙잡아 포박한 다음 고주리 주민들과 함께 발안주재소로 함께 분류하여 놓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들은 이후 수원경찰서로 넘겨져 또 다시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으며 삼괴지역 수촌리 주동자로 몰려 징역 10년을 살았다.
고주리 학살
4월 15일 오후 6시경 제암리 주민들을 집단학살하고 집을 모두 불태운 수비대들은 다시 조희창을 선두로 하여 10여 명의 수비대와 함께 팔탄면 고주리 쪽으로 올라갔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5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이웃 부락이다. 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겁이 나서 거의 모두 다 산 속으로 피신들을 했다. 그러나 김흥렬(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가족만은 ‘그 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 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잡아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오기의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남아 있었다.
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곧바로 김흥렬의 집으로 달려가 포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부 수비대는 조희경이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가 방을 덮쳤다. 이어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렬을 비롯한 김성렬,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이때 김성렬, 김세열, 김주남,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한 채 끌려갔다. 발안주재소장 사사카(佐阪)는 조희창을 불러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렬 앞으로 다가가 수촌리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을 했다. 김흥렬이 모른다고 부인하자 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주동한 주모자가 백낙렬의 출처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위협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렬은 조희창을 노려보면서 “내가 그 분의 출처를 안다 하여도 네 놈에게는 그 분이 숨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 놈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말이냐? 백낙렬 앞으로 나온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 안정옥이 주동했는데 이미 이정근, 안정옥은 너희 놈들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느냐? 너희놈들 마음대로 해봐라”하며 조희창 앞으로 몸을 밀면서 다가서자 옆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사사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몸을 부르르 떨면서 군도를 뽑아 들고 사정없이 김흥렬의 목을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뽑아 휘둘러 차례차례 일가족 6명의 목을 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으로 펄펄 튀였다. 그래도 수비대놈들은 무엇이 모자랐던지 사방에서 나뒹구는 몸체에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쳐 여섯토막을 냈다. 팔, 다리가 토막이 나서 사방에서 팔팔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순간에 일어난 참변이다. 수비대들은 일가족 6명의 시체를 짚가리 옆에다 걷어 모아 쌓아 놓고 짚가리에서 짚을 날라다 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이때 김성렬의 아들 김원기(金元基)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이 처참한 모습을 보고 울면서 달려가 “나만 살면 뭘해 나도 같이 죽여
라”하며 수비대들에게 덤벼들자 수비대는 구두발로 걷어 차 김원기는 기절한 채 언덕 아래 울타리 밑으로 굴려 떨어졌다. 이 때 마침 마당에 나와서 겁에 질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김주업의 처 한씨는 깜짝 놀래며 달려가 이 집안의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치마폭에 끌어안고 허둥지둥 집안으로 들어간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나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서 그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만에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서 김흥렬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
그 후 수비대들은 매일같이 이 곳에 들려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감시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묻으라고 지시를 했다. 그래서 이 부락 김시열은 고문의 여독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체를 추려 모아서 장사를 지낼 때 어느 토막의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대충 찾아 맞출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형제들의 시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대충 추려서 분묘를 만들었으나 그 유골은 여섯사람 전부의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김흥렬, 김성렬, 김세열 형제의 시체는 얼마나 불을 많이 놓았는지 도저히 분간할 길이 없어서 그 재를 함께 모아서 팔탄면 월문리(月文里) 공동묘지에 분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손수 시체들을 거둔 김시열(87세, 1978년)옹은 그 때를 희상하면서 “토막토막 난도질을 한 후 불을 질러 시체를 구분할 수 없게끔 만든 잔혹한 왜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각만 하면 현기증이 납니다.”라고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수비대들의 만행에 치를 떨던 주민들은 매일같이 천덕산 상봉에 올라가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심고를 드리는 한편 왜경들의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였다 한다.
포덕 137년 8월 20일경 경기도 화성군의 3·1운동사 「미명의 횃불」이라는 비디오를 촬영하기 위해서 필자는 이 곳 고주리 김흥렬 일가족 6명의 참살 현장과 월문리 공동묘지를 돌아보고 가슴이 아파 통분을 하였다. 6명 선열들의 묘소가 다른 묘소들의 침범으로 그 자취가 없어져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며 서글픔이 가슴을 조여왔다. 또 먼저번 화성군청 회의실에서 삼괴지역 제암리 화성군의 3·1독립운동사 학술발표회를 가졌을 때 필자는 화성의 지도자들에게, 팔탄면 지도자들에게, 화성군수, 화성문화원, 유족들에게 이 곳에 적은 정성이라도 모아 선열들의 고귀한 항일정신을 비석에 적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의 할 일이라 호소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재차 화성군민 또는 전국의 천도교인들에게 간곡히 호소하며 그 뜻이 임오년에는 꼭 성취되기를 심고드린다.

당시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隣洞(고죽골) 天道敎인 金興烈氏 집으로 가서 金聖烈, 金世烈, 金周男, 金周業, 金興福 等 六人을 逮捕하여 結縛하여 놓고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서 石油를 뿌리고 또 生火葬을 하였다.

한편 3·1운동 이후 일제의 진압으로 어느 정도 만세운동이 진정되자 일반사회에서는 천도교에 대한 배척 내지 반감이 적지 않았다. 일제는 이러한 사실을 『매일신보』를 통해 선전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기지역은 3월 1일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창기에는 ‘조선독립은 조선민족을 위한 이익’이라고 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졌으나 만세시위가 진정됨에 따라 천도교에 대한 호감이 반감으로 바뀌었다 고 한 바 있는데 수원에서 이러한 현상이 보이고 있다. 즉 일제의 보복이 끝난 4월 26일 우정면 화산리전교실이 원인불명으로 파괴되었는데 일제측은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천도교에 반감을 가진 자의 소행으로 보았다.
*** 반감에 대한 해석은 잘못된 것*오히려 왜놈들이 방화했을 것 **
일본측은 당시의 제암리사건을 다음과 같이 왜곡 축소하고 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드려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
전동례, 김순이 할머니, 60여 년이 지난 후 증언.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숫자는 해방 후 1959년 정부에서 건립한 순국기념비에 의하면 23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희생자의 숫자는 기록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① 일본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12명 정도의 기독교인과 25명 정도의 한국종교인(천도교인 25명)을 불러 모았다.139)
② 살해당한 기독교인수는 12명인데 그들의 이름은 입수되었고, 그들에 더하여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살해당한 남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왔었다. 한 여인은 40세가 넘었고 다른 한 여인은 10세였다. 이들 시체들은 교회 밖에서 불 수 있었다.140)
③ 언더우드 :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한국인 : 약 30명141)
④ 그가 설명한 사건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 그도 역시 몇 명이 피살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30명 정도로 보았다.142)
⑤ 이 사건은 헌병과 군인이 이 마을에 들어가 명령을 내릴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여 저지를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50여명 정도가 되었다.143)
⑥ 명령대로 교회에 모인 인원은 30여명이었다고 하는데 병정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한 후 교회에 들어가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군도와 총검으로 모두 해치웠다는 것이다.144)
⑦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집안에 있던 여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결과, 살해된 기독교인은 12명이라 하며, (중략) 교회 안에서 살해된 나머지 남자들은 천도교인이며 25명이었다고 한다.145)
⑧ 약 30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섰을 때 병사들이 소총으로 그들에게 사격을 개시했다.146) ⑨ 모든 기독교 신도와 천도교 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이 교회에 가서 안에 들어 앉아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147)
⑩ 30餘名의 敎人이 敎堂에 會集하여 何事가 有한가 疑惑하는 中 (중략) 堂內에서 死한 者 二十二人이요 庭內에서 死한 者 六人이라.148)
⑪ 예수교도 및 천도교도 있음에 알고 4월 15일 부하 11명을 인솔 순사, 순사보와 함께 동지에 이르자 예수교 회당에 집합한 교도들의 반항을 받자 사격으로 대항 사자 20명, 부상자 1명을 내고149)
⑫ 군대 협력으로 진압하고 폭민의 사망 32명, 부상자 약간명150)
⑬ 사상자 20명 확실, 부상자 1명은 도주 행위불명151)
⑭ 야소교회당에 교도 30여명 집합, 불온한 상태로 해산명령에 불응하며 폭거로 나오려고 하자 발포, 死者 約 20명, 負傷者 1, 2명152)
⑮ 천도교도와 야소교도 25여명이 야소교회당에 집합, 전부 사살
제암리사건의 희생자의 수는 37명이 가장 정확. 37명의 희생자는 기독교인이 12명, 천도교인이 25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주서울 미총영사 앨런 홀쯔버그가 4월 23일과 5월 12일 미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두 가지 문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달 16일에 일본군 78연대 사병들이 제암리에 들어가 남자 기독교들을 모두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마을 교회는 감리교의 교회였습니다. 커티스 영사는 보고에서 ‘남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그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사격을 가한 후에 총검과 군도로 생존자를 죽였습니다. 질문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희생자가 약 30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바, 이 숫자는 마을주민 숫자를 감안할 때 설득력 있는 숫자라고 믿어집니다. 학살이 끝난 후 교회에 방화하였으며, 불길은 마을의 낮은 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후에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모두 37명이 교회 안에서 학살된 바 그 가운데 2명은 남자를 좇다 들어간 부인들이었다고 합니다.154)
저의 1919년 4월 23일자 보고서 제35호에서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여기 총영사관의 커티스 영사를 제암리에 출장시켜 일본군이 촌락을 불태웠고 3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들어온 소식에 따라 일본군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하여 교회 내에서 35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3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10명이며 천도교인은 25명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교회 안에 갇힌 남편을 구하려던 부인 2명이 노상에서 사살되었습니다. ....(중략).... 총독부는 공식사과의 표시로 매우 소규모의 구제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노블 박사에게 35명의 마을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살해된 감리교회 재건에 쓰라고 1,500엔(750달러)을 주었습니다.
커티스 영사가 직접 제암리를 찾아가 진상을 밝히기 전까지는 일본측이 내세운 37명의 학살과 마을을 파괴하게 된 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한 통에 램프가 엎어져서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입니다.…(하략)
이 두 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처음 4월 23일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초기에는 희생자가 30명이라고 했지만, 그후 입수된 소식에 의하면 희생자가 37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재차 보고한 5월 12일자에서도 역시 희생자는 37명으로 기독교 12명, 천도교 25명으로 확실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측인 총독부도 희생자가 37명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제암리에서 희생된 사람은 23명이 아니라 37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수원의 삼일운동 참고할 글. 아래 주소클릭. 사진 등 재미있는 자료 많음
http://blog.naver.com/yamu1023/220701254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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