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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호성
댓글 0건 조회 106회 작성일 17-02-1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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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볼 때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이었지만, 천도교 3세 교조이신 의암(義菴) 손병희 성사(聖師)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그렇게까지 거족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었던 위대한 역사적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역사왜곡에 가까운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 관계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삼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삼일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있어서 우리민족 모두는 삼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서 선열들의 충정에 감사드리고 그 정신을 올곧게 이어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발간된 책들 중에서 삼일운동에 관한 가장 많은 참고자료들에 기초해서 객관적으로 저술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의암손병희선생전기」(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발간)와 「천도교100년약사」(천도교중앙총부 발간)에 기록된 삼일운동 관련 자료들에 근거해서 그 당시 거족적으로 전개되었던 삼일운동 전개과정을 기억하기 쉽도록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해서 기술하고자 합니다.
성사께서는 58세가 되던 해인 1918년 8월에 천도교의 여러 중진들을 가회동 자택에 모이게 하시고 「지금은 사람과 물건이 개벽을 하는 때」라는 요지로 설교하시면서 시국의 추세를 언급하시고 항상 대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성사께서는 항상 국제정세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는데 1918년 12월 초에 일본 대판매일신보를 통해서 「민족자결주의원칙」이 파리평화회의에서 논의될 것을 알게 되셨고, 이때를 기해서 뭔가 새로운 행동지표를 세워야 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사께서는 실행가능하면서도 큰 효과를 거두고 희생을 적게 낼 수 있는 좋은 방안을 비밀리에 연구하도록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1918년 12월 24일 다수의 지방 교구장 및 간부들과 중앙의 두목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방에 내려가면 명년(1919년) 1월 5일부터 49일 특별 기도를 실시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때가 이르면 분발하라.」는 내용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신환성(以身換性)의 정신으로 정신을 개벽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정하고 중앙에서 각 처마다 4명씩 대표를 파견하여 특별 기도식을 지도케 하셨으며, 닥쳐올 대사에 대비하여 각 지방의 교구조직을 점검토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사께서도 상춘원에서 연성기도생활에 들어가셨습니다.
한편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은 성사께서 분부하신 내용을 실천에 옮기고자 보성고보 교장 최린과 더불어 민족운동 전개방법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최린은 교육계 인사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의 지도층인사와도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계획의 수립 및 추진에는 적임자였습니다. 세 사람은 동대문 밖에 있는 상춘원으로 성사를 찾아뵙고서 그 자리에서 논의한 결과 독립운동 추진방향에 대한 세 가지 원칙에 합의하였습니다.
1. 독립운동을 대중화 할 것.
2. 독립운동을 일원화 할 것.
3. 독립운동을 비폭력화 할 것.
1919년 1월 중순경 세 사람은 가회동 자택으로 성사를 찾아뵙고서 그 자리에서 거족적 독립운동전개에는 반드시 각계 인사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린은 저명인사의 포섭과 인선에 함께 참여할 동지를 찾던 중 중앙고보 교장이던 송진우와 중앙고보 교사인 현상윤을 자택으로 초청해서 거사계획을 알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찬성하고 함께 일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무렵 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계획을 알리려고 송계백이 일본에서 서울로 들어와 현상윤을 찾아와서 거사 일정을 2월 8일로 정했음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각모자 안감을 뜯고서 그 속에서 이광수가 초안한 독립선언문을 내놓았습니다. 현상윤은 이를 즉시 송진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최남선을 찾아가서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을 보여주었더니 최남선도 참가를 승낙하였습니다. 현상윤은 이 독립선언문을 최린에게도 보여주었고, 이 사실이 성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사께서는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에게 「어린 사람들이 저렇게 민족을 위하여 독립운동을 한다는데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시면서 독립운동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사의 지시를 받은 최린은 중앙고보 내에 있는 송진우의 집에서 송진우, 최린, 현상윤, 최남선 4인이 모여서 포섭대상 인물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포섭대상으로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윤구영 등을 정하고 교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성사께 보고하자 성사께서는 포섭대상에 이완용도 넣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성사께서 직접 포섭해 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자 이완용의 조카인 이회구를 대동하고 이완용을 찾아가서 거사계획을 이야기하고 동참을 제안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완용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천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란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독립이 되면 나를 때려죽일 사람은 아마도 우리 동네 이웃사람들일 것입니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부디 성공해서 내가 그들에게 맞아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완용은 독립운동 가담은 거절했지만 끝내 이 일을 일본 측 인사에게 누설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 저명인사의 포섭을 위해서 사람을 바꾸어 가면서 누차 교섭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전부터 논의돼 오던 기독교 측과의 연합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기독교 측과의 교량 역할은 최남선이 맞기로 했습니다. 현상윤은 같은 고향 출신인 정주 오산학교 이사장 이승훈을 추천했습니다. 이승훈은 기독교 장로로 있으면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애국지사였습니다.
현상윤은 오산학교 출신 김도제의 힘을 빌려 당시 선천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에게 「오산학교경영에 관하여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급히 상경해 달라.」는 최남선의 편지를 전하게 했습니다. 당시 오산학교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승훈은 이 기별을 받자마자 즉시 상경했습니다. 이날이 2월 11일이었습니다.
이 때 최남선은 은밀한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진우에게 자기 대신 이승훈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송진우는 현상윤과 함께 계동에 있던 김성수의 집에서 이승훈을 만났습니다. 송진우는 천도교 측의 운동계획과 그동안 추진상황 등을 설명하고서 기독교 측에서도 이번 거사에 적극 가담해서 범민족적인 운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이승훈은 쾌히 승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2월 12일 선천으로 다시 돌아간 이승훈은 평북지방 기독교 중진들을 찾아다니며 모두 참여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2월 17일 이승훈은 서울로 다시 상경해서 숙소를 정하고 송진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송진우의 태도가 전일과 다르게 많이 냉각되어 있었고 또 교섭의 장본인인 최남선은 보이지를 않자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희도에게 기독교 측 동향을 물어 보았더니 서울의 각 교회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는 한창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결정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2월 20일 이승훈은 박희도 집에서 다른 기독교 중진들과 회동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은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도 동참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대부분 찬성하였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들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박희도는 이미 서울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청년학생단을 조직해서 독자적인 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기독교 측은 이에 가담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 숙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동안 일경(日警)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 만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최린의 집에 함께 가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고 말했습니다. 이승훈은 최린과 함께 한 자리에서 기독교 측은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최린은 그 말을 듣고서 기독교 측의 계획을 반대했습니다. 최린은 「이번 거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전선 결성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파를 초월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승훈은 개인적으로는 그 의견에 찬성하지만 전체의 뜻을 모으기 위해서는 다시 회동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회의에서 나왔던 얘기가 거사자금이 5천원은 필요한데, 그 돈을 지금 당장 변통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천도교 측에서 이 돈을 변통해줄 수 있다면 천도교 측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 같은데, 5천원이 어렵다면 3천원만이라도 변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최린은 2월 21일 저녁 상춘원으로 성사를 찾아뵙고 그간의 진행상황과 기독교 측의 요구를 말씀드렸더니 성사께서 「5천원을 융통해 주도록 춘암에게 말해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월 22일 춘암상사의 지시를 받은 천도교 금융관장으로부터 5천원을 건네받은 최린은 이승훈의 숙소를 찾아가 김자성이란 이름으로 그의 방을 들어가서 돈을 전달했습니다. 이승훈은 「대사가 이로 인하여 성취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이 때 상해 신한청년당에 김철을 통하여 3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셨고, 만주 독립군부대에도 김상규를 통하여 6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셨습니다. 2월 23일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이 최린의 집에 와서 전날 기독교 측 사람들과 회의한 결과를 말했습니다. 즉 「독립선언서 보다는 독립청원서로 하는 것이 좋겠고, 천도교 측에서 만주로부터 무기를 사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무력봉기를 계획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기독교 측에서 천도교에서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는 정보를 듣고서 이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후에 공판과정에서 이 돈에 대해서 추궁하자 성사께서는 해외에서 좁쌀을 수입하기 위해서 보낸 돈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최린은 「이번 독립운동은 윌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국제정세와 우리의 자주정신의 전통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 하는 것이 옳지 독립청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독립청원보다는 독립선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조선내의 사회적 사정으로 볼 때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동으로 하지 않으면 전 민중을 총동원시킬 수 없고,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지 못하면 조선민족의 위대함을 발휘할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2월 23일 밤 최린과 헤어진 두 사람은 함태영의 집에서 오기선, 박희도, 안세항 등과 다시 회합하여 여러 가지로 숙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학생대표인 김원벽으로부터 「학생들이 단독으로 하는 것을 포기하고 교단 측과 합류하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기독교 측의 운동을 무조건 천도교 측과 합류하기로 하며, 독립청원서의 제출은 독립선언서의 선포와 병행하여 추진키로 완전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태영, 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임하고 이후 천도교 측과의 제반 교섭은 이 두 사람이 담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무렵 천도교단에서 실시한 49일 특별기도가 2월 22일에 끝났으므로 지방 교구 간부들이 기도회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성사께서는 봉황각 기도회에 참석했던 중앙간부들과 지방 간부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독립운동 추진에 관한 속마음을 말씀하시고, 각자 상응한 자리에서 주어진 임무를 다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천도교 두목들에게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일찍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내가 10년 안에 반드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겠다.」고 맹세하시고 나서 1912년에 우이동 골짜기 은밀한 곳에 봉황각을 건립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7차에 걸쳐서 총 483명의 천도교 두목들을 불러 올려서 49일간씩 특별수련을 시키셨습니다. 수련의 목적은 이신환성(以身換性)으로 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죽음도 초월할 수 있다는 각오를 확실하게 심어주셨습니다. 그러한 각오가 강력한 자력으로 작용해서 전국적으로 독립정신에 충만한 300만 동포들이 천도교로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성사께서는 이처럼 장기적인 계획 하에 독립운동을 위한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하셨습니다.
성사께서는 「만세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야하기 때문에 각처에 산재한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인이 힘을 합쳐야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적은 곳에서는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운동을 널리 전개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천도교인 임무의 중대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태극기를 그려서 거리로 뛰어나가 만세를 부르기만 하면 되니 굳이 학식 높은 지도자나 인격자를 고를 필요는 없소. 오히려 만세대장은 무식한 사람들이 좋아요. 일할 만한 청년이나 인격자는 뒤에 남아 만세운동을 이끌고, 재정을 조달하고 하는 더 큰 일을 맡게 하고, 만세에 앞장설 행동대는 좀 무식해도 용기 있고 씩씩한 사람을 내세우도록 합시다.」 라고 말씀하시며 만세운동 조직의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설명하시고 나서 「추후 선언문의 발송과 함께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갈 것이니 각 교구로 내려가서 준비에 착수토록 하시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최린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신흥사 주지 한용운과 독립운동에 함께 참여하기로 약속하고 그에게 유림 측 거물들을 포섭케 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용운은 최린에게 불교계 대표로는 해인사 주지로 있는 백용성 스님을 추대키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2월 24일 이승훈과 함태영 두 사람은 최린 집을 방문하여 기독교 측의 무조건 합류를 통보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사께서는 「양대 종교집단의 합류는 이번 민족운동이 반드시 성공할 바탕을 이룬 것이다.」 하시며 여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즈음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에 의해서 이미 초고가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최남선은 독립운동 모의 초기부터 독립선언서 작성과 관련하여 「나는 내 생애를 통하여 학자의 생활로 관철하려고 이미 결심한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문만큼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형(崔兄)이 져야합니다.」라고 최린에게 말하면서 자천하고 나섰기 때문에 최린은 최남선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습니다. 다만 「성사께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내세우시고 계시니 독립선언서에 꼭 반영토록 하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고 난 한용운은 「선언서 말미에 공약삼장을 넣자.」고 주장하므로 최린도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각 종단 대표자의 선임 문제가 남았습니다. 불교 측에서는 2명으로 확정하고, 천도교 측에서는 성사께서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15명의 교회간부를 선정해서 개별적으로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시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습니다. 기독교 측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두 개 교파가 있다고 하여 각각 8명씩 16명으로 확정하였습니다.
천도교 측 인사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양한묵,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박준승, 나인협, 임예환, 이종훈, 이종일, 김완규, 권병덕, 도합 15명이었습니다. 박인호, 정광조, 신숙 등은 후일을 책임져야 한다며 성사께서 인선에 넣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 측 인사로는 이승훈, 양전백, 오화영, 신홍식, 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유여대, 이명룡, 박동완, 정춘수, 신석구, 최성모, 이갑성, 박희도, 도합 16명이었습니다. 함태영은 기독교 측 동지들이 투옥된 후에 그 가족들의 생계와 교회운영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여 서명자 명단에서 제외하였습니다.
불교 측 인사로는 한용운, 백용성, 도합 2명이었습니다.
이 당시 삼일운동 추진을 위해서 힘썼던 인사들 중에서 송진우는 자진해서 중도에 빠졌고, 현상윤은 최린이 장래를 위하여 이번 거사에는 일선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하여 빠졌습니다. 최남선은 학자로서의 길을 고수하겠다하여 서명자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서명은 2월 26일 밤 최린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 측 대표로는 이승훈, 이필주, 함태영이 참석하고, 불교 측 대표로는 한용운이 참석하고, 그리고 최남선은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천도교 측에서 아직 서명치 않은 인사들은 도장을 최린의 집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서명자의 순서를 정하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기독교 측에서는 가나다순으로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최린은 그렇게 하면 천도교 측에서는 제자가 선생 위에 올라가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최남선이 나서서 말하기를 「인물로 보아서나 거사의 동기로 보아서나 손병희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수위에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고 기독교 측에 대하여 양보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이승훈이 말하기를 「그러면 제2위는 기독교를 대표하여 길선주 목사를 기입하도록 하자.」며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이가 말하기를 「길선주 목사는 장로교 목사이므로 기독교 전체를 대표할 수 없으니 제3위는 감리교 목사인 이필주 목사를 기입하도록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한용운이 말하기를 「불교 측에서는 시일이 시급한 관계로 다수가 참석치 못한 것은 유감이나 우리 2인 만이라도 역시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가하였으니 제4위는 백용성 스님을 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에 모두들 찬성하고 그 다음부터는 가나다순으로 쓰기로 합의했습니다.
거사 일자는 별다른 이견 없이 3월 1일 오후 2시로 정하고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표자 전원은 2월 28일 밤 가회동 의암성사 자택에서 마지막 회동을 가지기로 약속했습니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新文館) 인쇄소에서 조판한 다음에 이를 최린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2월 27일부터 보성사(普成社) 인쇄소에서 인쇄에 회부하였습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鐘一)은 직원이 모두 퇴근한 오후 6시부터 공장 감독 김홍규와 사동(使童)과 함께 셋이서 비밀리에 인쇄에 착수했습니다. 한창 인쇄가 진행 중일 때 종로경찰서 한인(韓人) 형사 신승희가 들이닥쳤습니다. 이종일은 너무 놀라서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신승희는 모든 상황을 알아차리고 평소와는 달리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선생님한테 갑시다.」 이종일은 그의 옷소매를 끌고 밖으로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당신이 갔다 오시오.」 뜻밖에도 신승희는 수그러졌습니다. 이종일은 단숨에 가회동에 계신 성사께 달려가서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성사께서는 좀 기다리라며 안방으로 들어가신 후에 잠시 있다가 종이뭉치를 가지고 나오셔서 이종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갖다 주시오.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무사히 일을 마치도록 하시오.」 곧바로 인쇄소로 달려온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종이뭉치를 건네주었습니다.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곧바로 사라졌습니다. 이종일과 김홍규는 다시 작업을 시작해서 밤 10시가 넘어서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2만 1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리어카에 차곡차곡 실었습니다. 마침 운반할 때는 정전이 되어서 안국동과 재동 파출소 앞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순찰경찰관이 그게 뭐냐고 묻자 「천도교에서 인쇄한 조선사람 족보인데 시급히 인쇄해 달라고 부탁해서 지금까지 인쇄해서 싣고 가는 길입니다.」라고 태연히 말하면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마침내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우여곡절 끝에 이종일의 숙소인 경운동 신축교당 창고에 갖다 두었습니다. 이종일은 운반을 마치고 나서 성사를 찾아뵙고 무사히 일을 마쳤다고 보고했습니다.
2월 28일 이종일은 하루 종일 집에 머물면서 오세창이 전해준 쪽지대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배포했습니다. 13세 된 그의 손녀도 비밀을 지키면서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독립선언서 배포를 도왔습니다.
2월 28일 저녁 5시경 가회동 170번지 의암성사 자택에 참석한 사람은 총 23인이었습니다. 성사께서 인사말씀을 마치고 나자 내일의 거사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함께 숙의한 끝에 「내일 학생들이 파고다공원에 많이 참석한다는 정보가 있는데 만약 군중심리에서 과격하게 행동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 일본 헌병대에서 폭력으로 진압하여 폭동으로 유도할 수가 있으니 대표자 일동은 근처에 있는 태화관으로 모여서 그곳에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새벽이면 독립선언서가 이미 집집마다 뿌려질 텐데 이것이 바로 독립선언서 낭독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따로 무슨 발표낭독의 형식이 필요하겠는가.」라는 것이 대체로 일치된 견해여서 그대로 시행키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만일에 잡혀갔을 때 서로 말이 일치하지 않으면 곤란한 경우가 있었던 경험이 있는데, 우리도 대충 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최린은 「각자가 아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대답하면 말을 맞추지 않아도 될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말하자 모두들 웃으며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3월 1일 아침 성사께서 가회동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앉아계실 때 권동진, 오세창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시중의 동태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했을 뿐 별 말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 최린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자신의 집 대문에 뿌려져 있던 독립선언서 2장을 보고서 성사께 달려왔다면서 「선언서가 발표된 이상 일경이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그냥 둘 리가 없으니 집에 앉아서 연행되어 가느니 차라리 예정된 장소에 가서 동지들과 함께 함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신 성사께서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시고 오전 12시경 태화관에 도착하셨습니다. 1시 반이 넘어서자 33인 중에서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만을 제외하고 29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독립운동을 위해서 민족대표 29명이 함께 모였던 태화관은 공교롭게도 이완용의 옛집이었습니다.
잠시 후 파고다 공원에 집결한 학생 대표들이 태화관으로 몰려왔습니다.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함께 파고다공원으로 가자고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최린이 폭력행동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이들을 겨우 설득해서 돌려보냈습니다. 잠시 후 오후 2시에 요리상이 나오자 일동은 큰 소리로 만세삼창을 외치고 나서 축배를 들었습니다.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태화관 주인은 혼비백산해서 그 자리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성사께서는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태화관 주인에게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서 이 사실을 고발토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혐의를 없애주려는 배려에서 하신 조치였습니다. 그 때 이미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 함성은 서울시내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잠시 후 일본 헌병들이 태화관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당장 연행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냥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오후 4시경 최린이 밖으로 나가서 학생들의 흥분을 방지하기 위해서 호송차를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차 한 대가 도착해서 세 사람씩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남산에 있는 경무통감부로 연행했습니다. 길 좌우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도열해서 연행되어 가는 민족대표들에게 모자를 벗어서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차 안에 있는 민족대표들도 손을 흔들며 화답하고 목 메인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수십만 군중의 만세시위 행진은 그날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도 서울과 때를 같이 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저 멀리 만주와 미국 일본 등 해외에 살고 있던 동포들 사회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중국 상해에서는 1919년 4월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주권이 보장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1919년 3월1일에 일어난 삼일운동은 국민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한 최초의 날이 된 셈입니다.
독립만세운동은 한번만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은 4월 20일을 전후한 무렵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장날마다 거의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독립운동의 함성이 전 조선을 진동하고 있을 때 독립선언서와 통고문은 일본, 미국, 불란서에도 각기 전달되었습니다. 이는 사전에 미리 준비했던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은 천도교 측에서 맡아서 처리했고, 미국과 불란서는 기독교 측에서 맡아서 처리했습니다.
5월말까지 집회에 참가한 인원수는 총 2,023,098명이었으며, 집회 건수는 총 1,542회나 됐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은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 년 동안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가해진 피해는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살해 : 7,605명. 부상 : 45,562명. 체포 : 49,811명
가옥소각 : 724건. 교회소각 : 59건. 학교소각 : 3건
민족대표 29인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불렀던 태화관은 5월 23일 새벽 원인 모를 발화로 인해서 완전 소실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는 6월 28일 밤 원인 모를 발화로 인해서 인쇄공장과 출판사 전부가 소실되었습니다.
일본 고등계 형사 신승희는 성사로부터 5천원을 받고서 끝까지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는 삼일운동 이후에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5월 초순에 만주 봉천으로 출장을 갔다가 5월 14일 귀경하던 차에 서울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헌병대에 수감되자 다음날 가지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출장기간 동안 그의 직무유기와 수뢰사실이 헌병대에 탄로되어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3월 1일에 태화관에 참석치 못한 기독교 측 대표인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3인은 지방에서 늦게 상경한 까닭으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장에는 나오지 못했으나 거리의 시위 군중들로부터 민족대표 29명이 모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각각 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측 대표 김병조는 끝내 자수하지 않고 의주를 거쳐서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내란죄 혐의를 쓰고 있던 민족대표자들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취조대 앞에 나선 민족대표들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심문에 응하였습니다. 심문과정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치 않았으면서도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이 모두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함태영,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박인호, 노헌용, 김홍규, 김도태, 임규, 안세항, 이경섭, 김세환 등 모두 16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 모의로 인해서 체포되어 공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48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부릅니다.
일본 검사는 민족대표들을 「내란교사죄」로 뒤집어씌우려고 집요하게 유도심문을 하였으나 모두들 평소 자신의 소신대로 솔직하게 답변해서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보안법과 출판법을 위반한 것」으로 밖에는 달리 처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사께서는 1919년 11월 28일 옥중에서 뇌일혈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셨습니다. 천도교 측 민족대표인 양한묵은 1919년 5월 26일 옥중에서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양한묵을 검시한 영국인 의사는 사인에 대해서 묻자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1920년 6월 28일 성사께서는 뇌일혈이 재발해서 전신불수가 되셨습니다. 위독한 상태에 빠지셨지만 보석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20년 10월 30일 구속된 지 1년 8개월 만에 민족대표 48인에 대한 언도가 내려졌습니다.
「피고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승훈, 한용운은 각각 징역 3년에 처함.
피고 이갑성, 김창준, 오화영은 각각 징역 2년 6월에 처함.
피고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박준승, 권병덕, 양전백, 이명룡, 박희도, 최성모, 신홍식,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유여대는 각각 징역 2년에 처함.
피고 정춘수, 백상규는 각각 징역 1년 6월에 처함.
피고 길선주는 무죄를 언도함.
피고 양한묵은 공소회부 중 사망하였으므로 공소권을 상실함.
피고 김병조는 체포치 못하였으므로 기소중지를 선언함.
피고 함태영은 징역 3년에 처함.
피고 최남선은 징역 2년 6월에 처함.
피고 강기덕, 김원벽은 각각 징역 2년에 처함.
피고 이경섭은 징역 1년 6월에 처함.
피고 박인호, 노헌용, 송진우, 현상윤, 정노제, 김도태, 임규, 안세항, 김지환, 김세환은 각각 무죄를 언도함.」
유죄판결을 받은 독립운동가 일동은 상고권을 포기하고 그대로 복역키로 하였습니다.
성사께서 60세가 되던 해인 1920년 10월 28일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을 때는 병세가 전신불수의 중태이었으므로 「형집행정지결정」이 내려져서 그날 오후에 출감하셨습니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지 1년 8개월 만에 중태의 몸으로 옥고를 청산하신 것입니다. 성사께서 서대문 감옥에서 출감하던 당시 온몸은 부어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전혀 없는 중태였습니다. 감옥에서 나오시자 즉시 동대문밖 상춘원으로 옮겨서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성사께서 62세가 되던 해인 1922년 봄에 들어서면서 성사의 병환은 많은 차도를 보이며 의식도 명석해지셨습니다. 그러다가 5월 10일 주치의(主治醫) 박종환이 볼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한의(漢醫) 박찬수가 수은제의 훈증약을 약 2시간 동안 시용(試用)한 것이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성사께서는 1922년 5월 19일 새벽 3시에 환원하셨습니다. 총독부는 성사께서 복역 중에 사망하였으므로 교회장(敎會葬)을 허가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최린이 백상길 경기도경찰부장을 만나서 부탁한 결과 그의 협조로 정무총감의 지시를 통해서 그동안 교회장을 반대하던 경무국장의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은 6월 5일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장지는 우이동 봉황각 옆으로 정했습니다. 영결식장은 경운동 신축교당으로 정했습니다. 장례당일 장례행렬은 십리에 이르렀습니다. 성사의 파란만장했던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삶은 삼일운동을 마지막 사업으로 하고서 전 국민의 애도물결 속에 이렇게 끝을 맺으셨습니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성사의 바람대로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나라의 독립은 1943년 11월 27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일본이 항복할 경우 한국의 자유 독립을 문서로서 보장한 카이로선언 덕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카이로선언의 배경에는 중국의 장개석 총통께서 한국민족의 삼일운동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에 크게 감동했기 때문에 문서로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받게 해줘야 한다고 끈질기게 두 정상을 설득한 결과 얻어진 선언문이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만약에 카이로선언이 없었다면 우리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을지 잘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삼일운동은 당시에 우리민족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감동시킨 세계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대사건이었습니다.
2017. 2. 10. 화암(和菴) 김 호성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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