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 사모님 수련 잘 마치고 가셨나요?\r\n우이동에서 봤든 사진 미련이 남았었는데 \r\n여기다 올려주셔서 보게되니 반갑네요.\r\n엄마 아빠 사랑.누나들 사랑 듬뿍받고.\r\n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렴...한울이가 크는모습 \r\n자주 보여주세요.\r\n멋있다 ~~한울아 의젓한 한울이 홧 팅
▲ 신채호(1880~1936)\r\n본관은 고령으로 충남 대덕 출신이나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였다.\r\n호는 단재, 일평단생, 필명으로 무애생등을 사용하였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r\n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항일 언론투쟁을 펼쳤고 신민회에 참여하였다.\r\n1910년 망명하여 연해주와 상해,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를 병행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r\n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창조파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을\r\n기초하였고 , 무정부 주의 단체에 참여…
▲ 신홍식(1872~1937)\r\n본관은 고령으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다. 35세때에 청주 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r\n세례를 받고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3년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r\n평양남산현교회 목사로 재임하던 1919년 2월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r\n의 계획을 전해 듣고 기독교측 미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의\r\n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모임에 참석하였고,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 한 뒤 일제에\r\n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 권병덕(1867~1944)\r\n본관은 안동으로 미원면 용곡리 출신이다. 호는 청암, 정암, 우운을 사용하였다.\r\n18세에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동학 농민운동때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일본에서\r\n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제관장등 주요 보직을 역임\r\n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손병희등과 천도교측 대표로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고, 독립\r\n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 한 뒤 3월 1일 독립선언을 하고 일제에 피체되어 2년간\r\n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천도교 교…
감사합니다\r\n\r\n역시 여성이 나서야 일이 되겠습니다\r\n\r\n선기군과 물과 바람님도 함께 하셨다지요\r\n\r\n남성분은 따라 하시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네모시고 반갑습니다\r\n먼저 사진을 이렇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n다시보니 그날의 즐거움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r\n교구장님을 비롯하여 여성회장님 그리고 원로님 과 교인 분들 고생많으셔습니다\r\n그리고 그날 먹든 떡 정말 아~~~~~~~~~~그맛\r\n우리교구도 하루빨리 합동시일을 보러 다니는 그날이오면 공항교구에서 보고 싶은데 \r\n떡먹고 싶어서요^^\r\n교구장님 그날 원로 어른 께서 오늘 한울님 감응을 보셔다고 기뻐하시든 그모습이 너무가슴에 남아있습니다\r\n청수물이 넘치지도 않고 솟아오른것을 보셔서 네 그래습…
"당신이 머리가 아픈건, 남들보다 더 열성적이기 때문이다!"\r\n어느 두통약 광고의 카피죠 ^^
역시 일남구녀의 운이 도래하나봐요 . \r\n전국에 계신 여성동덕님들 아니 동부산 교구 님들 화이팅!!!!!!
최선기 님 !\r\n외모 어떤지 소감 남겨 주세요 !
제 목 동학의 판을 다시 짠다작성자 황숙 등록일 2016-02-13 20:27:40 조회 44 " 대 도 동학의 판을 새롭게 짜는 7 개 말씀 "-, 다 사그라지고 파뿌리만 겨우 남아 있꼬... 다 썩꼬 배추뿌리만 남은 동학이 대한 민국에 부지기수다-, 동학이 시대에 짝하지 아니하고 용맹정진을 아니 하였다-, 최소한의 예의나 모습을 " 국민에게 " 제되로 보여준적이 없다-, 할려고 하고 고치려 하고 인정하는 배움이 보이지 않는다- , 동학의 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