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나오죠 !\r\n미터기 달렸죠 ! = 현재 까지 흥정하여 승차 하였음 기본료 500 쨧\r\n한국 소나타 3 입니다 100대 \r\n혹시 미얀마 돈 ? 벌려고 하시면 - - - 연락 주세요 !\r\n글구요 수입 재향군인회 쪽입니다 미얀마 우리나라 군부 ? 옛 시절하고 동일 합니다 참조 !
빨리 알려 줘 ? 안 했습니다 \r\n휴 휴 하지만 일은 시작되면 마쳐 야 하기에 - - -\r\n바쁜 것이여 ! 참조 바람.
7개의 조형물 모두를 게시하였습니다.\r\n"청원군 문화재단지에 가니, 뭐가 어떻게 되어 있더라" 라는것을 알리고자 올린것입니다.
충북 청원출신 애국지사 7인 (의암 손병희, 단재 신채호, 첨암 한봉수, 은재 신석구, 예관 신규식, 동오 신홍식, 청암 권병덕) \r\n의 조형물을 세워 청원군이 애국충절의 고장임을 널리 알고 독립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해 성역 공간화 함으로서 자라나는 세대들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난 2003년 6월 청원애국지사 동상건립 사업계획을 수립하면서 시작 됐다. \r\n\r\n이듬해인 2004년 3월 조형물 현상공모를 통해 작품을 선정했고 사업비 3억3천600여 만원을 들여 다른 동상과는 달리 애국지사의 성품과 생활상 그리고 독립…
▲ 신규식(1880~1922) 본관은 고령으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다. 자는 공집, 호는 애관 이명으로 정, 여서를 사용하였다. 1897년 관립한어학교를 다닌 뒤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음독 자결을 기도하다가 오른쪽 눈을 잃었다. 1911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21년에는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으로서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등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
▲ 한봉수(1880~1936)\r\n본관은 청주로 내수읍 세교리 출신이다. 호는 청암이며 이명으로 봉수, 봉서,\r\n봉용등을 사용하였다. 1907년 의병으로 봉기한 이후 1910년 5월까지 충북, 경상, 강원\r\n등지에서 평민으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이끌고 여러차례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친 중부지방의\r\n대표적인 후기 의병장이다. 일제에 피체되어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른바 \r\n합방대사령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일제의 온갖탄압과 감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r\n1919년 4월 1일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다…
▲ 신채호(1880~1936)\r\n본관은 고령으로 충남 대덕 출신이나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였다.\r\n호는 단재, 일평단생, 필명으로 무애생등을 사용하였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r\n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항일 언론투쟁을 펼쳤고 신민회에 참여하였다.\r\n1910년 망명하여 연해주와 상해,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를 병행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r\n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창조파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을\r\n기초하였고 , 무정부 주의 단체에 참여…
▲ 신석구(1875~1950)\r\n본관은 평산으로 미원면 금관리 출신이다. 호는 은재를 사용하였다.\r\n1907년 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어 서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r\n1919년 2월 중순경, 서울 수표교회 목사로 재임중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기독교측\r\n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r\n최종 모임에 참석하였고,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 한 뒤 일제에 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r\n치렀다. 출옥 후에도 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하였으…
▲ 신홍식(1872~1937)\r\n본관은 고령으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다. 35세때에 청주 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r\n세례를 받고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3년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r\n평양남산현교회 목사로 재임하던 1919년 2월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r\n의 계획을 전해 듣고 기독교측 미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의\r\n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모임에 참석하였고,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 한 뒤 일제에\r\n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 권병덕(1867~1944)\r\n본관은 안동으로 미원면 용곡리 출신이다. 호는 청암, 정암, 우운을 사용하였다.\r\n18세에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동학 농민운동때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일본에서\r\n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제관장등 주요 보직을 역임\r\n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손병희등과 천도교측 대표로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고, 독립\r\n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 한 뒤 3월 1일 독립선언을 하고 일제에 피체되어 2년간\r\n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천도교 교…